중앙로 확장공사의 진척을 컴퓨터 도매상 앞 육교에서 바라보니
옛 가로수인 벚나무는 베여지고 새로운 나무들이 가로수로 심겨지고 있다
거리 모습은 변해도 여기에서 보이는 윤산의 모습은 변함 없으리라
물길을 따라 걷다
나는 어린 시절 엄마가 동래시장에서 바느질 하던 때 엄마에게 가기 위해서는 미나리 등이 심겨있는 밭을 지나가야 했다 그 밭 옆으로 개울이 있었는데 비가 많이와 건너다가 개울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겨우 빠져 나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오래된 기억을 되새기며 삼성대의 옛 모습을 떠올리기 위해 중앙여자고등학교에서 대동병원 뒤의 골목길을 따라 충열대로까지 복개된 길을 걸었다 그리고 전차선로라 여겨지는 삼성대로와 명륜로를 지나 동래향교에 도착했다 나는 옛날에 걸었던 길을 걸으며 서서히 잊혀져 가는 기억들을 마음속 깊이 간직했다
중앙여고 개축 공사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중앙여고의 자리는 동래중학교 운동장 끝부분으로, 그 당시 이곳은 본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우거진 숲과 오래된 정구장이 있어 학생들의 발걸음이 드물었다.
이 명륜동 당산나무는 내가 자라온 시간 속에서 늘 곁에 있었을텐데, 미나리깡에서 설매를 타다가 물에 빠진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지만, 그 당산나무와의 기억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물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골목길 주변은 분명 미나리깡과 연근 밭이었다. 이곳은 활짝 핀 연꽃으로 가득 차 있었고, 여인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미나리를 다듬던 모습이 내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또 연밥을 따기 위해 연꽃 아래에서 진흙에 발을 디디던 기억과 미꾸라지를 잡으려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발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지금의 명륜로를 건너 동래로와 통하는 길인데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삼성대길에서 명륜로를 넘어 KT 동래지사 옆 골목길로 다녔던 것 같다. 그 길은 익숙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을 주고, 과거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이 길은 우성베스토피아(동래여고 자리)로 가는 골목길이다.
동래로와 충열로와 연결되는 지점에 있는 기와가 멋진 집으로 아직도 주변의 모습이 변해가는데도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동래시장 옆에 있는 동래부 객사터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는 복천로에 있는 우성베스토피아
무우루는 조선 후기 동래 읍성의 남문에 위치한 문루로, 역사적, 군사적 중요성을 지닌
건축물이다.
이 문루의 이름인 ‘無憂’는‘근심을 없앤다’는 뜻으로, 임진왜란과 같은 큰 전쟁의 위협 속에서도 백성들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우루는 당시 동래 읍성이 대규모로 수축될 때, 방어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이중문 형태로 설계되었다.
형태상으로 무우루는 2층으로 된 구조의 3칸 건물로 되어 있으며, 문을 지키기 위해 문장청과 문지기의 집이 배열되어 있다.
이는 동래 읍성이 왜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선 역할을 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며, 동래 읍성이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방어 시설로 자리 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19세기 말, 일본 식민지 시대에 접어들면서 무우루는 역사적 맥락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동래 온천장의 개발을 위한 목재 수요 증가로 인해 무우루를 비롯한 동래 읍성의 구조물들이 훼손되었고, 결국 무우루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동래 읍성이 가진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박탈당하고, 그 공간이 식민지 시대의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우루와 동래 읍성의 역사적 가치는 충신당 전시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그 이름이 적힌 편액들도 함께 보존되어 있어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게 한다.
무우루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염원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내주추성비에 새겨진 내용은 국가와 지역을 보호하려는 의지, 역사로부터 배우는 교훈, 주민의 연대와 협력, 그리고 희망과 재건의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송광제(宋光濟)[1692~1743]는 동래 출신의 유생으로 글씨를 잘 쓰기로 근방에서 소문이 났다. 1735년(영조 11) 황산도 찰방 김광악이 동래읍성 축조를 기념하기 위해 내주 축성비[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산131-1 금강공원]를 세울 때 송광제가 방대한 양의 글씨를 썼다.
비문의 내용은 1731년 동래읍성 축조 시 동생 송광순이 쓴 축성기를 참고하여 김광악이 짓고, 제액(題額)[비의 명칭을 새긴 부분]은 유우기(兪宇基)가 썼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270㎝, 너비 107㎝이다.
『여산 송씨 원윤공파보』에 의하면 송광제의 묘는 동래부의 동쪽 삼어(三魚) 마을[현 해운대구 반송동] 뒷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회동동 동대 마을에 있는 여산 송씨 동주공파의 문중 사당인 세덕사(世德祠)에서 배향하고 있다.
변화하는 도시의 모습 속에서도 잊지 못하는 예전의 기억에 흐르는 시간의 더께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