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연회
한복의 숨결로 피어난 어느 저녁의 문학
사람은 살아가며 몇 번쯤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순간을 만난다. 낯선 옷을 입었을 때, 오래된 상처를 내려놓았을 때, 혹은 평생 가보지 못한 길 위에 홀로 서 있을 때 말이다. 이번 크루즈 문학기행에서 나는 그런 순간을 조용히 마주하게 되었다.
코스타세레나호의 밤은 화려했다. 천장에서는 샹들리에 불빛이 별처럼 쏟아지고 있었고, 황금빛 계단은 마치 유럽의 오래된 궁전을 옮겨놓은 듯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선내를 오갔다. 웃음소리와 음악이 천천히 홀 안을 채우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오히려 고요해지고 있었다.
나는 한복풍 드레스를 입고 계단 앞에 섰다. 연한 비취빛 치마와 아이보리 빛 저고리, 그리고 은은한 꽃자수가 조명 아래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머리를 올리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문득 낯선 감정이 밀려왔다. 그것은 단순히 예쁘게 꾸민 기분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느낌에 가까웠다.
살다 보면 사람은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엄마로 살고, 아내로 살고, 누군가의 딸과 누군가의 친구로 살아가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얼굴은 뒤로 밀려난다. 젊은 날의 꿈도, 거울 앞에서 설레던 마음도 어느새 세월 속에 묻혀버린다. 그런데 그날 밤, 바다 위 찬란한 조명 아래에서 나는 잠시 잊고 있던 내 안의 여자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계단 난간에 손을 올려놓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유리벽과 푸른 조명, 금빛 장식들이 서로 어우러져 환상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화려함 속에서도 내 눈은 자꾸만 창밖의 바다를 향했다.
깊은 밤의 바다는 검푸른 침묵으로 숨 쉬고 있었다. 나는 늘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화려함 자체가 아니라 그 화려함 뒤에 숨어 있는 고독이라고. 웃음 뒤에 감춰진 외로움, 찬란한 조명 아래 서 있는 한 사람의 쓸쓸한 마음. 그래서 사람은 더 아름다워지는지도 모른다.
그날의 나도 그랬다. 사람들은 “참 잘 어울린다”, “너무 우아하다”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그 말들 사이에서 오히려 지나온 세월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장터를 걷던 기억, 아이들을 키우며 밤늦게까지 바느질하던 시간들, 그리고 문학이라는 이름 하나 붙잡고 외롭게 견뎌온 날들이 파도처럼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사람의 아름다움은 젊음에서만 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견뎌온 시간과 아픔, 그리고 끝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낸 세월이 얼굴에 깊이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드레스 자락이 계단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조명은 치맛자락 위에 작은 별빛처럼 내려앉았다. 그 순간 문득 옛 궁중 여인들의 삶이 떠올랐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도 창밖 세상을 그리워했을 여인들. 웃음 속에서도 외로움을 감추어야 했던 사람들. 인간은 시대가 달라도 결국 비슷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 모른다. 크루즈 안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춤을 추고 있었고, 누군가는 와인잔을 들고 웃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창가로 걸어갔다.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달빛 어린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흔들리는 파도를 바라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바다는 늘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인간이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살아도 결국 자연 앞에서는 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바다는 말해준다. 그렇게 작은 존재라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나는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올림머리와 한복풍 드레스, 그리고 입가에 번진 미소. 젊은 날의 나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 또한 나름대로 아름다운 시간 속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잃어가는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젊을 때는 타인의 시선을 따라 살아가지만 세월이 흐르면 비로소 자기 마음의 방향을 바라보게 된다. 무엇이 소중한지,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삶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를 천천히 깨닫게 된다.
그날 밤의 바다는 유난히 잔잔했다. 멀리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늦은 시간까지 바다를 건너는 작은 배일 것이다. 나는 그 불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인간의 삶도 저 작은 배와 비슷하다고. 거센 세상 속을 흔들리며 지나가지만 결국은 자기만의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화려했는가가 아니다. 얼마나 진심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냈는가가 더 중요하다.
나는 난간을 살며시 쥐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늘의 나는 충분히 아름답다.”
그 순간 바다는 아무 말 없이 깊고 푸른 숨결로 대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