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기도 고을이 작아 송사하는 백성이 없던 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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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0:57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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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이 작아 송사하는 백성이 없던 포천
겹겹이 여러 산이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한 줄기 강물이 남쪽으로 흐른다.
성임이 노래한 영평(永平)1)의 형승이다. 영평은 지금 포천시에 속한 하나의 면이지만 조선 후기까지 현이었다. 고구려 땅이었던 포천의 옛 이름은 마홀현(馬忽縣)이고 신라 때는 견성군(堅城郡)이라 불렸으며, 고려 초기에 포천으로 고쳤다. 1914년에 영평군과 합쳐져 포천군이 되었다.
화산서원
포천시 가산면에 이항복을 배향한 화산서원이 있다. 1659년 사액을 받았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71년 복원하였다.
성산(城山) 관아의 북쪽 1리에 있다. 수원산(水源山)에서 뻗어 나와 관아 뒤쪽의 주산(主山)을 이룬다. 다른 이름으로 반월산(半月山)이라고도 하는데, 반달처럼 생긴 모습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
『여지도서』에 실린 포천의 성산에 대한 글인데,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양사언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갈라 뉘어 온전히 고리 모양 이루고
수레바퀴 잘라놓은 듯 반원 모양 이뤘네.
하늘을 바라보니 초승달 떠오르려 하더니
호수 너머로 초승달 물결에 잠기려 하네.
구름이 초승달을 놀리듯이 스쳐 지나가고
밤안개는 미인 눈썹 같은 초승달 가리네.
삼태성(三台星) 앞에 안산(案山)이 기묘히 자리해
정승 감 길러내기에 안성맞춤인 듯하네.
양사언은 그 뜻을 풀이하기를 “예로부터 반달이 삼태성을 얻으면 앞에 있는 안산의 땅 기운이 모여서 정승이 끊임없이 배출된다고 전해온다. 포천은 아주 작은 고을이지만 지금 많은 정승을 배출했으니 그 말이 입증되었다고 하겠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청성산(靑城山)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성산 말고도 여러 산이 많은 곳이 포천이다. 광덕산, 백운산, 국망봉 등의 산이 동북쪽에 솟아 있고, 북쪽으로 명성산, 지장봉 등 제법 높은 산들이 펼쳐져 있다. 군내면 구읍리와 용정리 경계에 있는 풍류산(風流山)은 삼태성처럼 생겨서 포천 구읍의 안산이 되기 때문에 포천에서 재상이 많이 난다는 산이다. 가평과 경계에 있는 현등산(懸燈山)은 운악산으로도 불리는데, 이 산을 두고 백사 이항복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운악산은 골짜기 깊기도 한데
현등사를 처음으로 창건하였네.
노니는 사람은 성씨도 말하지 않는데
기이한 새는 스스로 이름을 부르누나.
뿜는 샘물은 하늘의 띠처럼 장대하고
푸른 산봉우리들은 지축을 기울이네.
다정하게 호계(虎溪)에서 작별을 나누니
노을빛에 해 저문 산이 밝구나.
포천은 광릉 임업시험장과 이동막걸리로도 유명하다. 세조가 자신이 묻힐 무덤의 부속림(附屬林)으로 정하고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베지 못하게 함으로써 조선이 막을 내릴 때까지 제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임업시험장에는 천연기념물 제11호인 크낙새와 장수하늘소가 산다. 포천 이동막걸리는 1970~1980년대에 중부 전선에서 군 생활을 한 사람들에겐 오아시스 같은 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동막걸리가 전국의 막걸리 시장을 제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임은 그의 시에서 “고을이 작아서 송사하는 백성이 없고 전지가 비옥하여 해마다 풍년이 든다”라고 하였고, 『동국여지승람』 ‘역원’조에는 “안기역(安奇驛)은 포천현의 속역으로서 고을 안에 있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백 리쯤이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오는 자는 양주를 지나서 반드시 여기에 머문다. 그러나 사신들의 큰 행차는 모두 고을로 들어가고, 여기에 머무는 자는 모두 사사로운 여행자이거나 잡스러운 빈객들이므로 관장하는 자는 오직 눈앞에 닥쳐온 급무에만 힘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글로 보아 이곳은 그렇게 중요한 인물들이 머물던 역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살아서는 포천 가야 양반이고, 죽어서는 장단 가야 양반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포천에는 빼어난 인물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와 영의정을 지낸 유순, 양사언, 이덕형, 대한제국 말의 유학자 최익현, 이항복이 그들이다.
이동면에서 나오는 이동막걸리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술이다. 포천(抱川)은 내를 안고 있다는 이름처럼 예부터 물이 좋기로 유명했는데, 물이 좋기에 술맛도 좋아 양조장이 많이 들어섰다. 최근에 다양한 연령층을 아우르며 막걸리가 중흥하기까지, 50년의 전통을 이어오며 일본 수출로 입지를 다진 이동막걸리의 역할이 컸다. 이동막걸리는 특히 지난 70~80년대에 중부 전선에서 군 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오아시스 같은 술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을이 작아 송사하는 백성이 없던 포천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 10. 5., 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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