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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환관과 조직, 그리고 악명 높은 환관들
중국의 환관(宦官)
환관(宦官)은 관료 가운데 거세된 남자(환자; 宦者)이며, 주로 동아시아(특히 중국과 한국)에 존재했다. 이들은 자신의 성기와 고환을 함에 담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엄밀히 말해, 초기에는 관직이 아닌 궁중노비였으나(신분상으로만 궁중 소속일 뿐 환관의 업무는 궐밖의 노비와 완벽하게 똑같았다.), 나중에 거세된 남자들이 주로 맡게 된 내시직을 환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간신과 충신
이러한 환관은 종종, 군주의 최측근으로서 총애를 받으며, 권력을 잡고 정세를 어지럽혔다. 후한 말 정권을 장악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은 10명의 환관인 십상시가 대표적인 예이다. 촉한의 환관 황호 역시 후주 유선을 현혹하여 정사를 그르쳤다. 당나라 시기에는 환관 고력사가 현종과 양귀비의 총애를 믿고 전횡을 휘둘렀다. 1449년 명나라 황제 영종은 환관 왕진의 부추김으로 몽골 원정에 나섰다가 오히려 대패하여 스스로 포로가 되었는데 이 사건을 토목의 변이라 한다. 명나라 천계제 시기의 대내총관태감 위충현 역시 뇌물을 받고 정사를 자기 마음대로 하였다.
그러나 환관 모두가 간신은 아니었다. 삼국지의 영웅 조조의 양할아버지인 조등(曹騰) 역시 후한 말의 환관이었는데, 영제 시절 크게 공을 세워 양아들을 들이는 상을 받기도 했다. (참고로 이 상은 환관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포상이었다.) 이 때 조등이 받아들인 양아들이 바로 조조의 친아비인 조숭이다. 명나라 환관 정화는 황제의 명을 받아 해외 정벌을 나섰는데, 아프리카까지 이르렀다. 이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60년 전이다.
조선시대에는 연산군 때 환관 김자원이 전횡을 일삼았다. 그러나 채륜이나 김처선처럼 의로운 환관들도 있었다.
그러나 환관에 대한 악평이 호평보다 더 많은 까닭에 대해서는 지나친 유교주의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다시 말해 양물을 잃은 환관의 업적이나 선업에 대해서는 그다지 다루지 않고, 근왕하며 저지른 비리에 대해서 더 자주 거론했기 때문이다. 후한 말 십상시가 발호하기 이전에 이미 매관매직이나 다른 비리가 성행하였고, 그러나 탐관오리는 환관보다는 유학자가 훨씬 더 많았음에도 유독 십상시만을 꼭 집어 악평을 하고 있다.
국부 제거
환관은 궁중에 소속된 군대인 금위군이나 궁궐을 출입하는 대소 문무백관과는 달리 궁궐 안에서 하루 중 24시간 내내 생활했다. 그런데 환관은 궁녀와의 연애행위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환관이 되게 하기 위해서 연애행위의 근본이 되는 신체기관을 절단하도록 규정을 만들었다. 궁녀는 오직 황제와의 연애행위만 허용되었는데 이는 궁녀가 낳은 아이들은 모두 황제의 서통 자식으로서 황실 계승권이 부여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근본을 알 수 없는 아이로 인하여 황실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러한 규정을 만들어 적용하였다.
환관이 되기 위해서는 국부를 제거해야 하는데 당시의 의술은 현재와 같이 고도로 발달한 것이 아니어서 국부를 제거할 때 그 뿌리까지 모두 제거했다. 이 때문에 환관 작업을 하는 곳에서는 환관지망생들에게 여러 차례 환관이 될 것에 대해 되물어보는데 환관지망생이 자신없게 대답할 경우 퇴짜를 놓는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부의 뿌리까지 모두 제거하는 수술(?)을 했기 때문에 이 수술을 시도한 환관지망생은 80~90% 확률로 사망했다. 그래서 환관이 된 사람은 국부제거수술 전의 체력이 보통사람에 비해 월등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절단한 국부는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항아리에 담게 된다. 이 항아리는 내시감이 직접 관리하며 항아리 뚜껑에는 해당 항아리 속에 들어가있는 국부의 주인의 이름이 써있다. 이는 '고자여서 신체가 온전하지 못한 사람으로 죽으면 구천을 떠돌게 된다.'는 미신에 의한 것으로 내시가 죽으면 국부를 다시 바늘로 꿰맨 뒤에 장사를 지내준다.
이 때문에 내시가 갖는 부작용으로서는 요도가 절단되었기 때문에 극심한 요실금을 갖게 되고 또한 몸의 균형을 잃어 종종걸음을 걷게 되었다.
궁형
환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춘추전국시대에는 참수형보다 더 혹독한 형벌로 궁형(宮刑)을 일컬었다. 궁형은 환관을 만드는 작업과 다름없이 국부를 제거했는데 같은 죄를 짓고도 깨끗하게 죽음을 택한 사람은 영웅이 되었지만 궁형을 택해서라도 살아남기를 원했던 사람은 궁형을 받음과 동시에 그 사람은 운신의 폭이 좁아지다 못해 아예 없어졌다. 이 형벌은 환관이 되는 과정과 매후 흡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궁형이라 불렀다.
해프닝
중국 춘추전국시대 은나라 주왕의 치세 기간 중 어떤 젊은 남자가 수염을 말끔하게 밀고 내시로 변장하여 궁궐 안으로 잠입하여 궁녀들과 정을 통했다. 이 사실이 주왕에게 발각되자 주왕은 이 사내를 3일간 포박시켜서 수염을 기르게 한 후 조리돌림을 했다. 주왕은 이 가짜환관을 조리돌림이 끝나자마자 바로 참수했다.
중국의 환관(宦官)조직
춘추전국시대의 문헌인 『예기』에 환관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엄윤閹尹이라는 직책이 나오며, 사기에는 진나라의 환관 관직으로 궁중의 어차와 가마를 관리하는 중거부령中車府令, 옥새를 관리하고 황제의 칙서를 담당하는 부새령符璽令, 대궐의 중문을 책임지는 낭중령郞中令 등이 나온다. 중문은 일반 신하들은 드나들 수 없는 황제의 생활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 문의 책임자가 곧 환관의 우두머리였다. 조고는 진시황제 치하에서 중거부령과 부새령을 겸하다가 2세 황제 호해 치하에서 낭중령이 되었다.
이러한 직책명으로 미루어보아 진나라 때 이미 상세한 환관 조직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지만, 그에 대한 세세하고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중국의 환관 조직에 대한 가장 확실한 기록은 명나라 때 환관 유약우가 궁궐 내부의 실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작중지(酌中志)』이다. 이 책에서 명나라의 환관 조직을 매우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이하는 작중지에 근거한 대략적인 조직.
2. 조직구조
2.1 24아문衙門
12감, 4사, 8국을 합쳐서 24아문이라 부른다. 궁궐의 일을 맡는 정규조직. 주요한 엄무는 12감이 맡고, 나머지 사소한 일들은 4사와 8국이 맡았다. 당연히 4사와 8국은 인기가 없었다.
2.1.1 12감監
우두머리를 태감太監이라고 부른다.
1.사례감 : 환관들이 조정을 지배하던 기관. 환관 정치의 중심.
2.내관감 : 궁궐과 왕실의 토목이나 건축 공사를 담당하며, 궁궐에서 사용하는 구리, 놋쇠, 철, 나무 등의 재료로 만든 기구를 공급하고 관리한다.
3.어용감 : 황제가 쓰는 가구나 오락 기구를 맡는다.
4.사설감 : 황제가 순행할 때 필요한 천막이나 우산 등의 용품을 맡는다.
5.어마감 : 황제가 기르는 말이나 코끼리를 관리한다.
6.신궁감 : 신궁神宮, 즉 역대 황제의 신위를 모신 태묘를 관리한다.
7.상선감 : 황제의 수라와 연회, 제사 등에 쓰이는 음식을 맡는다.
8.상보감 : 황제가 사용하는 도장을 담당한다. 1년에 쓰이는 도장이 약 3만개이니 이곳의 일도 적지 않다.
9.인수감 : 사령장이나 공문서를 보관한다.
10.직전감 : 편전의 청소를 담당한다.
11.상의감 : 황제의 의복을 맡는다.
12.도지감 : 황제가 바깥에 행차할 때, 그곳의 도로를 정비하고 경계한다.
2.1.2 4사司
1.석신사 : 궁정에서 사용하는 땔나무를 취급하고, 도랑이나 하수구를 관리하다.
2.종고사 : 황제의 외정 행차 시에 음악을 연주하고 길을 안내한다.
3.보초사 : 환관의 화장실에 쓰이는 휴지를 만든다.
4.혼당사 : 환관들의 전용 목욕탕.
2.1.3 8국局
1.병장국 : 무기를 제조한다.
2.완의궁 : 궁궐에서 일하는 자들이 말년을 보낸다.
3.은작국 : 은으로 된 하사품을 만든다.
4.건모국 : 환관의 모자를 만든다.
5.침공국 : 환관의 관복을 만든다.
6.내직염국 : 비단을 염색한다.
7.주작면국 : 환관과 여관들의 술과 밀가루를 만든다.
8.사원국 : 채소를 재배한다.
2.2 경사방敬事房
황제의 규방 문제를 전담한다. 황제가 선택한 후궁을 황제의 침실로 보내는 일을 했는데, 나체[1]의 후궁을 새털로 만든 털옷 하나로 싸서 업고 침실까지 데려다 주었다.
2.3 동창東廠
환관의 2인자인 병필태감이 지휘한다. 금의위나 북진무사 등의 비밀경찰 조직을 지휘하는 역할. 관리와 신하들의 비리를 캐내고 역모 혐의를 잡아내는 일을 하며, 대신이라고 해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본래 창廠이란 칙명에 의해 잡아온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라는 의미였지만, 명나라 때는 단순한 황궁 감옥이 아니라 신하들을 내사하고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비밀경찰 조직이 되었다.
2.4 서창西廠
명나라 헌종 성화제 때 환관 왕직汪直이 동창을 본떠서 만든 기관. 본래 동창이 너무 비대해져서 효율성이 떨어지게 되자, 헌종이 왕직을 시켜서 동창을 견제하고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왕직은 서창을 사유화하여 자신의 개인 정보기관으로 전락시켰고 권력을 남용했으며, 마침내 분노한 황제와 동창의 반격에 서창은 폐쇄되고 왕직은 변방으로 쫓겨났다.
2.5 내창內廠
명나라 무종 정덕제 때 환관 유근劉瑾이 동창을 본떠서 만든 기관. 무종이 정사를 멀리하고 놀기만 하자 권력을 잡은 유근은 내창을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키웠다. 하지만 그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6 내서당內書堂
명나라 때 있었던 환관을 가르치는 학교.
본래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환관이 글을 배우는 것조차도 금지했으나, 환관이 글조차 모르면 일을 시키기 불편했기 때문에 이 명령은 유명무실해졌고 급기야 명나라 5대 선종 선덕제 시대에는 내서당이 생겨났다.
내서당은 10세를 전후해서 입학했으며, 정원은 300명 이하였다. 학생들이 배우는 과목은 우선 환관들의 규정에 해당하는 내령, 그리고 천자문, 효경, 논어, 대학, 중용, 맹자를 배웠다. 대표적인 시나 중국 백성들의 성씨에 대해서도 배웠다. 성적이 나쁜 학생들은 벌을 받고,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환관 임용시에 좋은 자리에 배치되었다.
명나라 때는 환관의 수가 10만에 육박했기 때문에 도저히 내서당에서 모든 환관을 가르칠 수 없었고, 내서당 출신 환관들은 정도 正途라고 불리면서 특별 대우를 받았다. 조정 관료로 치면 과거에 합격한 정도의 대우를 받았고, 일반 환관들은 비록 연장자라 해도 내서당 출신 환관을 보면 고개를 숙여야 했다.
중국의 악명높은 환관(宦官)들
중국 환관(내시)의 역사는 지금부터 수 천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환관은 춘추시대에 이미 존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보다 더 이른 은, 주 시대에도 환관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환관은 중국 왕조의 탄생과 더불어 존재해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환관은 제왕을 보필하기 위해 거세되어 입궁한 남성들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군주의 수족이자 노예에 불과했으나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그들은 황제의 총애와 신임도 함께 얻을 수 있어 이를 이용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사례가 많다. 역사 속의 악명 높은 환관들은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졌고, 심지어는 왕조를 멸망에 이르게 하기도 하였다.
진한대의 환관
진시황의 환관 조고는 일개 환관의 신분으로 진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조고는 시황제가 여행 중 병사하자, 승상 이사와 짜고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와 장군 몽염을 자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황제의 총애를 받던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해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든다. 이어서 2세 황제에게 참소하여 이사를 처형시킨 뒤, 반란이 일어난 와중에 승상이 되어 더욱 큰 권력을 얻었다.
이후 진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자, BC 209년 2세 황제마저 모살하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다시 군주로 세우나 곧 자영에게 목숨을 잃는다. 자영도 겨우 재위 46일 만에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는 3대 15년 만에 멸망한다.
당대의 환관
당은 환관이 황실과 조정을 좌지우지했던 왕조이다. 당 목종, 문종, 무종 등 당 중후기의 대다수의 황제는 환관에 의해 옹립되었다. 이 시기는 황제의 옹립과 폐위에서부터 조정의 대소사와 황실 인물들의 생사까지 모두 환관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관들은 금군을 장악해 자신들을 호위하는 군권으로 삼고 권력을 행사했다. 한편 황제의 권력은 환관에게 초월당해 당 숙종, 헌종, 경종은 차례로 환관 이보국, 진홍지, 유극명 등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이러한 와중에 당 문종은 부국강병책을 실시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기울어가는 당의 국운을 일으키고자 하고, 그 일환으로 권세를 잡은 환관을 숙청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송신석을 재상으로 임명해 환관을 견제하고, 감로지변을 일으켜 환관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계획은 실패하고, 환관들에 의해 수 천명이 목숨을 잃는다.
명대의 환관
명대의 황제들은 환관을 중용하여 영락연간에 설립된 황실특별기구인 동창이 환관들에게 맡겨졌다. 성화 13년(1477년)엔 더 큰 규모로 서창이 추가되고, 환관 왕직이 이를 직접 관장했다. 여기서부터 명 왕조의 3대 해악으로 일컬어진 창, 금의위, 그리고 환관이 문제시되게 된다. 무종 정덕 원년, 환관 유근이 동서창을 통해 문무대신들을 통제하고 조정을 장악해 자금성이 공포에 휩싸였다. 몇 년 후, 동서광이 위충현의 손에 들어가자 환관의 횡포는 더욱 심각해졌다.
위충현은 원래 궁중의 요리사였는데 희종에게 음식으로 환심을 샀다. 후일 희종의 유모 객씨와 한통속이 되어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얻고 스스로 ‘구천세’를 자처한다.(황제에게는 만세라고 외침)
그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예가 있다. 위충현은 황제의 조서를 사칭해 장유비, 풍귀인 등 황제의 비빈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장황후에게도 악랄한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원대에 지어진 향산의 벽운사를 자신의 무덤으로 쓰겠다며 대규모 공사를 감행했는데 그 호화로움이 황실의 무덤에 버금갔다.
그러나 위충헌은 결국 이 호화로운 무덤에 들어가지 못했다. 후대 황제 집권 후, 위충헌은 곧바로 조정에서 축출되고, 유랑 중 목을 매 자진하기에 이른다. 그는 살아 생전 스스로를 위해 영화로운 무덤을 만들어두었지만, 실제로는 거리에 목이 효수되어 시체조차 온전히 보전하지 못했다.
만청 서태후 집권기의 환관
청대에는 명 왕조를 거울삼아 환관의 권력에 대해 제약을 가했다. 환관이 병력을 장악하거나 정치에 간섭하는 일도 불가능해졌다. 가경제 이전까지 환관의 수는 다소 늘다가 이후로 점차 감소해 2000명 선을 유지하였다. 만청에 이르면 궁궐 밖에 사는 환관까지 모두 합쳐도 1500명에 그치게 된다. 환관 수의 감소로 인력이 부족해지자, 궁 내의 잡역을 맡기기 위해 만 명에 가까운 외부인력을 입궁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서태후가 집권하면서 환관이 다시 발호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에 악명높았던 대표적 환관이 바로 안덕해와 이연영이다.
안덕해는 서태후의 총애를 업고 조정대신들 위에서 군림한 환관이다. 서태후의 신망을 받아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하나 마찬가지로 불운하게 일생을 마감했다. 안덕해는 자신의 권력을 믿고 공친왕에게 무례를 범했다가, 순행 중 허가 없이 출궁했다는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당했다.
이연영은 본래 가죽신을 만드는 인물이었고, 머리 빗는 기술이 뛰어나 서태후에게 발탁된 환관이다. 이연영 역시 서태후의 권위를 배경삼아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그는 서태후를 대신하여 이홍장의 북양 해군 열병식에 참가했을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과시했다. 서태후 휘하에서 서태후에게 물건을 바치는 이들에게서 상당한 양의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도 전해온다. 그는 변법자강운동에 대항하여 서태후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과정에서도 일조한 바 있었으며, 특히 원세개와 손을 잡고 국정 전반에 걸쳐 그 세력을 장악하였다.
이연영은 안덕해의 죽음을 본보기로 삼아 서태후와 광서제 사이에서 비위를 맞추며 대총관의 자리까지 오른다. 원칙적으로 환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지위는 4품 궁전감독영시인데 그는 2품인 대총관까지 오른 것이다. 나이가 든 후, 이연영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스스로 지위에서 물러나 화를 면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서태후는 오히려 그에게 중남해의 화방을 별장으로 하사했다.
이후 신해혁명 발발 전날, 그는 집에서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재앙을 요리조리 피해간 이연영은 중국 역사상 가장 간사한 환관이라 평가된다.
그러나 1924년 마지막 황제 부의가 자금성에서 쫓겨나고 청조가 종말을 고하면서 환관들도 평민과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 이후로 환관과 그들이 휘둘렀던 권력도 중국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