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기원전 8세기경 주나라의 정치 체제가 약화되면서 여러 제후들이 번갈아 패권을 차지하는 혼란기가 도래했다.
기원전 202년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두 번째 중국 통일을 완수하여 한나라를 세웠다.
서기 589년 후한의 멸망 후 남북조 시대에 난립하던 제후국들을 수나라가 통일했다.
고대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는 기원전 770년 주(周)나라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주 왕실의 힘이 약해지자 수많은 제후들이 천하의 패권을 놓고 다툰 550여 년의 기간을 말한다. 이 시대에는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묵자, 한비자 등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사상과 학문을 화려하게 꽃피우기도 했지만, 천 개가 넘는 나라들이 서로 물고 물리는 지루한 전란을 벌였다.
중국 대륙의 오랜 혼란을 종식시키고 역사상 최초로 드넓은 대륙을 하나로 통일한 이가 바로 진시황제(秦始皇帝)다. 시황제는 기원전 259년 진(秦)나라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났고, 본명은 영정이다. 어린 시절부터 영민하고 야심이 남달랐던 그는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승상(오늘날의 국무총리) 여불위와 모후가 섭정을 하였으나, 22세 때 여불위를 숙청하고 친정을 시작했다.
당시 진나라는 떠오르는 강대국이었다. ‘전국 7웅’이라고 불리는 춘추전국 시대의 일곱 나라 가운데 진나라만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고, 다른 여섯 나라는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영정은 천하 통일 사업에 착수한 지 불과 10여 년 만에 한(韓), 조(趙), 위(魏), 초(楚), 연(燕), 제(齊) 여섯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전국 7웅의 할거에 종지부를 찍었다. 기원전 221년의 일이다.
춘추전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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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 제국을 이룩한 그는 이전까지 일반적으로 군주를 칭하던 ‘왕’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더 강력하고 위대하다는 의미에서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중국 고대 신화의 위대한 임금들을 이르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온 이 호칭은 ‘덕은 삼황보다 낫고 공적은 오제보다 높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시황제’는 초대 황제라는 의미다. 그는 황제의 자리가 대대손손 이어져 왕조를 만세까지 이어가리라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통일 국가는 고작 2대 15년으로 끝나고 만다.
시황제는 광활한 대륙을 통치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했다. 군주가 제후나 영주 등 토착 세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인 봉건제를 폐지하고, 황제의 명령이 시골의 말단에까지 직접 이르는 군현제를 실시했다. 각 군현의 관리는 중앙 정부에서 임명하고, 이들은 황제의 권한을 위임받아 임기 동안만 행정을 맡을 뿐 세습이 허용되지 않았다. 춘추전국 시대와 같은 제후들의 할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진나라는 시황제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고 이후 2,000년에 걸쳐 수많은 왕조들이 명멸해 갔지만 시황제가 도입한 중앙집권 체제는 통치의 기본 원칙으로 남았다.
시황제는 또한 여러 나라로 쪼개져 서로 제각각이었던 문자와 도량형, 화폐 및 생활 제도를 하나로 통일했다. 모든 공문서와 법령은 필획이 간단한 공통의 문자로 기록하게 했고, 길이는 촌, 척, 장으로, 무게는 양, 근, 석으로 정해 똑같이 쓰도록 했다. 수도 함양을 중심으로 방사 형태의 도로를 놓아 사방으로 교통이 편리할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적지 않은 치적에도 사관(史官)들은 진시황의 이름 앞에 ‘폭군의 대명사’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실제로 시황제의 공포 정치는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분서갱유(焚書坑儒)다. 그는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지식인들과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 역사상 전무후무한 탄압책을 추진했다. 세상의 모든 책을 없애 버리기로 한 것이다. 진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끄는 데 기여한 법가 사상 서적과 의약, 농사와 관련된 실용 서적 등 일부를 제외한 모든 서적의 발간과 소지가 금지되었다. 금서들은 수거해 불에 태웠다. 가치를 따지기 어려운 인류의 소중한 지혜들이 한 줌의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끔찍한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유생들이 분서 정책에 항의하며 시황제를 비판하자, 유생 460명을 붙잡아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한 것이다. 시황제는 제국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조차 통일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책을 불태우고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자유로운 사상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여기에다 시황제는 무리한 토목공사에 백성들을 동원해 원성을 샀다. 흉노 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하기 시작한 만리장성은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가혹한 부역이었다. 역사는 이 공사에 무려 50만 명의 백성들이 동원되었고, 열악한 환경과 혹한에도 공사를 강행하는 바람에 사망한 이들의 수가 4년간 30만 명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춘추전국 시대의 전차(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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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자신이 묻힐 능묘를 짓기 위해 36년 동안이나 대공사를 벌였다. 이것이 여산릉이다. 높이 116미터, 둘레 2.5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무덤에 사람 크기의 병마상 7,000여 개가 부장되었다. 죽은 시황제를 지키는 호위병들이었다. 무덤 안에는 호화로운 궁전과 누각을 짓고 금은보화를 채워 넣었다. 묘실 안에는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화살이 자동으로 발사되는 장치까지 마련해 놓았다고 한다. 무덤의 비밀이 밝혀질 경우에 대비해 설계자와 기술공들을 무덤 속에 생매장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어마어마한 무덤의 공사에도 75만 명의 죄수와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황제의 위엄에 어울리는 궁전을 지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또 하나의 토목 사업은 아방궁 공사였다. 동서로 700미터에 달하고, 한꺼번에 1만 명이 앉을 수 있도록 설계된 이 사치스런 궁전을 짓는 데는 70만 명이 동원되었다.
시황제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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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엄청난 사업들을 한꺼번에 벌이는 돈이 하늘에서 떨어질 리 없었다. 무모한 토목공사로 바닥을 드러낸 재정을 메우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짤 수밖에 없었고, 과중한 조세 부담으로 민중들의 원성은 갈수록 높아갔다. 무시무시한 법 제도와 가혹한 형벌로 백성들을 옥죄기만 하는 시황제의 통치 방식은 백성들의 불만에 부채질을 했다. 오랜 전란 끝에 찾아온 것은 평화가 아니라 지옥이었다.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천하를 두려움에 떨게 한 시황제였지만, 사람인 이상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그런 약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황제의 큰아들 부소는 어질고 현명했지만, 분서갱유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아버지의 미움을 사 변방으로 쫓겨 가 있었다. 죽음에 임박한 시황제는 뒤늦게 이를 후회하고 부소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주변에 두었던 간신들이 농간을 부렸다. 환관 조고가 가짜 유언장을 작성하여 어리석은 둘째 아들 호해가 새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부소는 조고의 강요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황제가 죽자마자 진나라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농민들의 봉기가 잇따르기 시작했고, 2대 황제 호해는 아무것도 모르고 사치와 방탕을 일삼다 조고의 손에 죽었다. 조고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했으나 실패하고, 부소의 아들 자영에게 살해되었다.
진나라가 망하자 초나라 왕족 출신인 항우와 농민 출신인 유방이 천하를 두고 다투게 된다. 이 두 영웅의 싸움은 소설 《초한지(楚漢志)》의 무대이기도 하다. 결국 유방이 항우를 꺾고 천하를 통일하여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