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전생애 발달과 자아정체성 연구로 유명한 에릭 에릭슨은 유태인 엄마와 노르만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태중에 있을 때 이미 생부는 어머니를 떠난 상태였다. 에릭슨이 태어나고 3년 후 어머니는 유태인과 재혼하여 37년간 의부가 생부인줄 알고 살았다. 어려서 유태인학교를 다니며 친구들에게 노르만인이라고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미혼모의 자식으로 태어날 때부터 에릭슨은 엄마의 우울한 눈빛과 불안한 숨결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불신과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몸으로 체득했을 것 같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초기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형성한다는 주장을 토대로 봤을 때 에릭슨의 어린 시절은 트라우마로 얼룩진 삶이다. 그러나 에릭슨은 이러한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평생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부적절감과 열등감과 싸워 자아정체성이라는 이론을 정립하였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주제는 자아정체감 형성과 관련되며 주로 사춘기 때 자신의 독특성을 구축하고 타인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과업과 대면하면서 나타난다. 자아정체감은 단순히 자신에 대한 수용과 정립의 문제로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부모를 비롯하여 과거 트라우마와의 화해와 용서 그리고 치유를 통해 형성된다. 부모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기 안에서 이상화 되었던 부모와 이별하고 현실적 부모와 만나야 하는 인지적 갈등이 실망감과 분노로 나타날 것이다.
또한 청소년들은 자신의 절대적 존재와도 이별해야 한다. 학교생활, 대인관계, 부모와의 독립을 통해 무엇이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어린 시절 판타지와 이별하고 현실적으로 부족한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어린 시절 판타지 속의 피터팬을 여전히 부여잡지만 현실의 후크를 보는 순간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이란 회피를 허용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워도 직면하고 극복해야 한다. 성장의 길목에 선 청소년들의 발달과업인 자아정체감 형성은 부족한 자신을 수용하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재구성하는 인지적 통합과정이며 성숙과 확장의 경험이다
‘나의 트라우마가 나를 잡아요.’, ‘엄마가 준 상처 때문에 나는 더 나아갈 수가 없어요.’라는 말은 과거가 나를 잡는 방식이며 내가 도망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울증, 불안증, 강박증, 대인기피증 등 내가 도망갈 수 있는 동굴은 너무도 많다. 모두 나를 피해자로 둔갑시킬 수 있으니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부모의 죄책감은 아이가 나약해지고 싶을 때 가장 잘 보이는 공간이다. 버릇없는 아이에게 했던 잔소리, 큰소리, 회초리 등등 엄마가 했던 많은 부족한 점들이 죄책감이 되어 엄마의 가슴에 맺혀져 있다. ‘내가 그때 너무 큰소리 쳐서 아이가 이렇게 자신감이 없는가?’, ‘내가 그때 너무 엄하게 해서 아이가 이렇게 무기력할까?’ 이러한 자책은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에게 구실을 줄 뿐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완벽한 세상은 없다. 부족한 엄마도 아이가 만나야 하는 환경 중 하나이다.
이별의 아픔, 거절의 고통, 소외의 공포 등 크고 작은 상처를 통해 삶은 자주 고단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때 고통은 의미가 된다. 시간이 필요함을 안다. 그러나 트라우마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아를 조정하는데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너는 과거 트라우마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거야!” 라는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은 나를 어두운 동굴에 계속해서 남겨둘 뿐이다. 두려움은 도전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상처받지 않고 사는 세상은 없다. 조개의 상처가 진주가 되듯 인간에게 주어진 상처도 보석으로 만든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아이일 때 상처 받는 것은 우리 의지로 어쩔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된 지금 상처를 받지 않는 것과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해볼 만한 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