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향 시 모음 6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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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김지향
강물이 눈썹까지 차오른
몸의 창문이 사방으로 밀리며
한 잎 한 잎 열렸다
물에 잠긴 몸의 부속품들이
송어새끼 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풀나풀 기어나온다
엊그제 잠입한 매연 찌꺼기도
살살 녹아 나온다
마구잡이로 먹어치운 공해물질이
소화도 안된 채 밀려나와 풀썩풀썩
강바닥으로 주저앉는다
사람의 눈이 해독할 거리쯤에선
손을 흔들며 나가는 물거품
눈썹까지 차오른 욕망을 말끔히 씻어내면
하얗게 피어서 떠오르는 빈 몸
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꽃잎이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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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그리고 은빛의 잎
김지향
공터 옆구리 어린이 놀이터 옆구리
익은 땡감들이 수은등처럼 켜져 있다
가을 내 초록 잎 지는 소리 아래로
고개 내민 말라깽이 단풍나무가
그림엽서를 만들고 있다
모두 떠난 언덕 밑 경사로에는
줄지어 미끄러지던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 멈춘
커브길이 까뭇까뭇 딱지를 덮고 누워있다
추적추적 짚신소리 끌고 따라오던 장맛비도
멈추어 섰다
물 젖은 바람이 볼가 낸 언덕 너머 서쪽 하늘이
무거운 낮잠을 벗는다
널따란 발코니 창가에서 나는 서쪽 하늘에
펼쳐지는 우주의 단막극을 구경한다
우주에서 풀잎이 한 켤레씩 톡. 톡. 떨어질 때마다
내 머리엔 한 땀씩 은빛 잎이 심어진다
은빛 잎은 머리에서 초롱꽃이 되어
앉았다 누웠다 깊은 머리 속
호수로 내려간다
내가 타고 갈 은빛의 우주선 한 채
아직 마감공사 덜된 채
깊은 호수 버티칼을 열고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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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눈물에 젖는
김지향
튕겨나간 하늘이
군데군데 얼룩이 졌다
파삭한 가을 얼굴이
골목골목 포개 앉아 있다
나뭇잎이 떨어뜨린 눈물에
가을이 젖는다
하늘에 잎을 달아주며
하늘과 도킹하던 나무들
이젠 드러낸 알몸이 부끄러운지
어깻죽지를 움츠리고 있다
사람들은 아직 살이 덜 찬 열매를 따서
길가 좌판 위에 널어놓고 있다
짐수레마다 얼굴 붉히고 있는 열매들이
빤질빤질 눈물에 씻긴다
다 내어주고 몸 비운 가을이
뜨거웠던 시간들을 접어놓으며
영혼의 집으로 떠날 신발 끈을
조여 매는 중이다
나뭇잎을 신고 떠난 ‘시간’은
가서 돌아오지 않지만
눈물에 씻겨 살아난 가을은
내일 다시 살아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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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잎
김지향
가을에게 붙들리지 않으려고
밤중에도 눈을 뜨고
가을잎은
온 몸으로 뒹굴기 내기를 한다
온 몸으로
나의 눈 속에 풍덩 빠져
박하분 냄새로 살아난다
박하분 냄새가
내 몸 속까지 흘러들어
나의 영혼 전체가
박하 내로 떠오른다
밤의 기슭의 헛간
어둔 헛간의 어둔 가슴
그 좁은 고랑을 가만 가만 비켜서
조금씩 뜨거워져 터지고 있는
가을 옆으로
옆으로 흘러간다
가을은 뜨거운 가슴뿐
손이 없으므로
가을잎을 붙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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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화약 냄새
김지향
시간은 부르지 않아도 달려온다
달려와서 낡은 잡기장 한 페이지 부욱, 찢어낸다
흘린 부스러기들은 열린 서랍 속에 밀어 넣는다
여름 시체를 담은 서랍들이
화장터에 쌓인다
푸르렀던 시절을 가슴에 넣은
가을은 시체들을 화장한다
세상 납골당엔 빨간 불꽃들이 앉아 있다
화약 냄새를 안고
시간은 또 어디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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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2
김지향
바람이 풍선을 타고 하늘을 건너간다
풍선은 달의 품에 안겨 느긋하게 날아간다
풍선이 달의 닮은꼴이냐고 바람에게 물어본다
그때 달은 구름 속에 숨어버린다
바람이 풍선을 놓친 줄 모르고
달을 끌고 까불까불 산을 넘어간다
이윽고 달이 산 속에 몸을 숨기며 바람을 내버린다
하늘에서 쫓겨난 바람이 사과송이를 풍선인줄 알고
사과의 뺨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논다
사과송이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다
가을바람은 눈이 멀어 분별력이 없다
자꾸자꾸 몸이 싸늘하게 식어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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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가 그 집
김지향
신발을 벗어들고 걸으면
발바닥이 간지러운 자갈밭
호롱불 가물거리는 외딴집 까지는
몇 마장이 더 남아 있었다
한쪽 발을 들고 걸어도 양쪽발이 아픈
개울가 공사장 한쪽 끝에 가물가물
꺼져가는 호롱불의 그 집은
아직도 있었다
지붕 서까래 밑에서
잘새알을 꺼내어
친구 시중드는 일이 재미 있었던
그 아이는 오늘
부뚜막에 턱을 괴어 꿈으로 가고
새들은 서까래 밑으로 들락거리며
지붕 꼭대기에 북더기집을 만들었다
호롱불이 혼자 붙다가 만
방안 고요 위엔
무서움이 한꺼풀 더 덮여
함께 자고 있었다
밤내 울다 성대를 다친 부엉이의
안개처럼 퍼지는 울음 사이로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 집
잠을 깨우는 성.누가 성당의
새벽 미사 올리는 소리만
먼저 간 주인의 혼을 부르며
개울가를 맴돌고 있을뿐
성대 잃은 부엉이 소리 혼자 버려두고
꿈속으로 먼저 간 그 남자(아이)는
어디를 가고 있는지?
개울 속엔 옛 주인의 옷자락 젖는 소리
추적추적 흘러간다
아직도 발가락이 시린 개울가 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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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풍경
김지향
흙이 하늘로 날아간 뒤
하늘에서 나무가 땅으로 가지를 뻗은 뒤
나무가 땅으로 가지를 낸 뒤
꽃잎이 땅으로 몸을 헐어낸 뒤
꽃잎이 땅으로 날아온 뒤
골목길에 떨어진 하늘 새 한 마리
하늘 새를 타고 그가 하늘로 떠난 뒤
집속 방속 벽 속 거울 속에 그가 살아있다
거울 속엔 발도 없이 걸어 들어간
어제의 사건들이 모두 살아있다
병정놀이가 땅뺏기놀이가 사냥놀이가
거울 속에 살아있다
살아있는 거울을 따먹고 하늘궁전으로 간
나는 하늘풍경을 마저 따먹는다
아, 거울 속은 내가 따먹은 내 눈 속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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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서 잠자는 버릇
김지향
나는 걸으면서 잠을 잔다
걸어도 오는 잠은 내쫓지 못한다
눈으론 실탄을 어깨에 멘 총잡이를 보면서
권총의 자동방아쇠가 미사일이 되어
햇빛이 끝나는 우주 기슭을
뚫고 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불길이 노을처럼 곱게 타오르는 현장을
입을 딱 벌리고 감상한 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걸었다
등 뒤에서 호르라기 소리가
등솔기를 때렸다
축 쳐진 금줄을 번쩍이는 검은 옷의
늙은 사나이의 어깨가
내 옆구리를 떠밀었다
사나이의 터진 목소리가 공기를 찢어댐을
촉감으로 만지면서 나는 또 다시
아까 그 권총 사나이를 따라갔다
그는 불길 속에서 불쑥 튀어오른
한 여자를 끌어안았다
그 여자는 머리칼이 떨리고 있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말탄 병정들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쯧.쯧.쯧!
강한 느낌표를 발하며 급히
말머리를 막았다 그때였다
찌~익!하고 금속성 폭발음이
귓속에 깊게 깔렸다
또 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내 뒤통수를 찢었다
순경 나으리가 달려왔다
나는 그 때부터
걸으면서 잠 자는 버릇을 내버렸다
아름다운 의식의 뒤죽박죽 장난도
끝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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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이 눈에 묻히다
김지향
나는 밤내 눈에 젖는 겨울 한 컷 일기장에 그려 넣는다
이제 연거푸 토해낸다 포식한 하늘이 벨트를 풀고
너무 오랜 시간 받아먹은 사람의 아우성, 넋두리, 비명을
비비고 버무려 하얗게 바랜 속 깊은 응어리를 게워낸다
멍울멍울 맺힌 빛바랜 녹말 알갱이를 버티칼 밖으로 부어낸다
사람들의 가슴에서 오래오래 쏘아올린 토혈이 이제 되쏟아져 내려도
스스로의 가슴에서 쌓인 가슴앓이가 뜯겨져나간 세포 조각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입을 열고 창가에 앉아
의미 없는 함박웃음을 밤내 눈 속에 묻는다
하늘에 가르마를 탄다 디지털로 가는 바람 갈기 한 줄
손에 든 면도칼로 웅크린 떠돌이별 수염을 깎으려지만
미리 모두 깎여 하얗게 빛 꺼진 별은 뜬 눈 채 잠이 들었다
뼈만 남은 플라타너스가 하늘의 속앓이를 아는지 팔을 치켜든 채
하늘 심장에 바싹 귀를 대고 숨 죽여 얼어 있다
하늘과 땅, 땅과 땅 경계를 넘나들며 조금씩
살을 헐어내고 있는 공기의 폐장도 숨을 몰아쉬고 있다
하늘 위의 하늘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퀘이사만이
끝나 가는 길고 긴 아날로그의 지상 삶을 알고 있다
언젠가는 팽개치고 돌아설 시간의 속셈도 알고 있다
퀘이사가 알고 있는 시간이 한밤 우주를 붙들고 이제 잠을 씌우는지
이 간이역의 하얀 낙하산 속은 무거운 침묵만 깔려 있다
나는 밤내 일기장에서 나체로 있는 침묵 한 컷 집어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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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초록 옷을 입을 때
김지향
초록 옷 입은 계절이
초록바람을 먹고
펄럭펄럭 옷깃을 펄럭일 때
우리는 참 싱그러운 초록이 된다
숲들이 옷깃을 펄럭일 때마다
사람은 온통 초록 물감 통에 빠져
초록 숲이 된다
초록 숲이 된 우리의 가슴에
휘파람새가 숨어들어
몸 전체를 연주한다
휘파람새가 우리 몸을 연주할 동안은
사람의 눈흘김도 게걸음도 거치른
거치른 말솜씨도 일시에 화해로운 노래가 된다
초록 노래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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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아파트
김지향
담쟁이도 미끄러지고만 고층 아파트
터질 듯 볼록볼록한 품을 안고 기다란 키로 버티고 서서
아침이면 술술 풀리는 연줄처럼 구겨 넣은 내장 다 풀어내고
밤이면 빠짐없이 되감아 넣는 아파트
그 품속엔 어떤 생이 출렁이고 있는지 밖에선 깜박이는 창유리만 보일뿐
때때로 요란한 소리로 몸을 띄운 비행기가 머리 위를 짓뭉개지만
(내다보는 사람의 귓바퀴만 찢기고 말지만)
아파트 눈썹 하나 긁지 못한 비행기 하늘 저 쪽으로 튕겨 올라가면서
아파트의 불 눈에 넌지시 읽힌다
팽팽한 하늘이 여전히 황금엽서를 펼쳐놓고
화살 없는 활시위로 빛을 쏘아대고 있지만
하늘빛의 쇼올을 두르고 날마다 우주 속에 머리를 넣어
세계 별들의 집회에서 보내오는 초음속의 송신음을 듣고 있는
아파트가 깊은 잠에 빠질 땐 요술지팡이의 어린왕자가
머리를 톡톡 치며 깨운다 어린왕자의 요술지팡이를
어서 빨리 읽어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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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밖 공간
김지향
휙 휙 시간이 달아난다 어디로 가는 거지
궁금한 나는 시간의 손을 끌어 잡는다
잽싸게 뿌리치고 달아나는 비밀 같은 시간
나는 온 힘을 모아 시간의 꽁지를 끌어당긴다
시간은 공간 밖 공간의 레일 위로 훌쩍 몸을 빼 돌린다
나도 잽싸게 마우스를 잡고 공간 밖 공간의 나라로
함께 동댕이쳐 진다
이미 이사 온 사람들로 배불뚝이 된 공간 밖 세상
초만원의 공간마다 금이 찍 찌익 나 있다
누가 만들어 공간 밖 공간의 개찰구로
사람들을 밀어 넣었는지
한꺼번에 밧줄 같은 길들이 살아나 얽히고
한꺼번에 박음질이 잘 된 방들이 환하게 불을 켜
어린 복제인간들의 눈을 밝혀주고
한꺼번에 닮은꼴의 아이들이 지상엔 없는 속력을 만들어
까불까불 콩새 꼬리 같은 서버를 타고 둥둥 떠다니고
한꺼번에 구문이 안 맞는 낯선 말들을 만들어
사방천지 아무데나 낭자하게 팡 팡 쏟아놓는다
남은 지상 사람들아,
공간 밖 공간을 쳐다봐라
새로 돋은 새 풀처럼 톡 톡 머리들이 튀어나와 있지!
겉옷을 벗어둔 지상은 이미 눈동자 빠진 허공일 뿐
내일이면 없어질 구멍 뚫린 항아리일 뿐
그래도 남은 사람들은 수명 다한 낡은 잡기장 같은
지상을 사랑한다 죽도록 사랑하며 떠나간 사람들을 기다린다
또 다시 생기발랄한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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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밖 공간에도 봄이 살아난다
김지향
어제는 사이트와 사이트 사이를 마구잡이로 들락거린 세상소리를 마셨다
오늘은 모두가 한꺼번에 세상소리로 뒤엉켜 고속 메일이 되어 온 세상에
흩어진다 삶을 짜서 널어놓은 빨랫줄 밑에서 뚝 뚝 떨어지는 삶의 옹아리를
받아먹은 씨앗들을 마우스에 담아 나는 수평선 저 쪽 가물거리는 안개나라에
보낸다 안개는 없어지고 파란 풀밭이 태어난다 풀밭 속에서 살살 풀리는
햇살을 등에 업고 새파란 바람을 받아먹는 병아리 떼, 놋쇠 자물통 아이디를
훔쳐 열고 쫓아 나온 성급한 노란 병아리 몇 개비 꽃 대궁에 끼워져 서로
팔짱을 걸고 노란 꽃으로 피어난다
사이트와 사이트 사이 줄다리기하는 고속 안테나 위에서
누가 먼저 정보를 빼앗나 싸움판을 벌이는 마우스의 숨 가쁜 속력을 타고
금빛 날개를 파닥거리는 본적도 없는 낯선 메일들이 내게도 와락 달려든다
가장 먼저 받은 이름 없는 메일을 연다 날개를 편 봄이 내려 선
공간 밖 공간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 뜰 잔디밭에 쫑 쫑 쫑 뛰어가는
방금 마악 배꼽 떨어진 봄을 한 입 가득 따 넣은 메일, 나는 숨차게
따라가며 봄 꼭지를 톡 따고 빠뜨린 꼭지도 톡 딴다.
세상은 온통 샛노란 물감 통에 빠져 진저리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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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창고에서
김지향
공중창고에 갇히면 나가지 못함
활주로가 녹이슬어?
아니 시체로 귀환할까 봐?
삼십년 전에도 그랬었지
공중을 도려내 보이는 분화구마다
지상의 배기가스가 터져나오고
군데군데 열려있는 공기통은
뚱뚱 부어 손톱자국도 남지 않았지
우리는 소리쳤지
밟을 때 마다 딱딱 발이 맞힌다고
공중에 갇혀서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복막염 앓는 공기를 살려내라고
전능자에게 비명을 쏘아올렸지
우주공간을 빙빙 돌며
전능자가 있을 끝과 끝을
두 주먹으로 땅,땅, 두들겼지
그로부터 대심판날인줄 알고 사는 우리
오늘도 심판날인줄 아는 우리
복막염 공기는 때때로 배에서 산성비를 뽑아내고
비닐 주머니도 없는 우리는
거짓말장이, 사기꾼! 하고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치지만
공기가 살아난다고
전능자가 손을 내밀리라고
믿었던 우리는 오늘도 우리 자신의
희망에게 배반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살아있다
시체로 귀환하지 않고
활주로가 떨어져나간
공중창고에서
아직도 시체가 되지 않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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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렁쇠와 아이
김지향
안녕!
바람도 한 옆으로 밀쳐 세워놓고
쨍쨍한 햇빛 속을 날마다 보는
아이 하나 손을 파랗게 흔들며 간다
처음엔
숨죽인 운동장 머리에
삐뚤삐뚤 서투른 팽이치기처럼
바퀴가 푸득거렸다
아이의 새파란 손가락에 걸린 새파란 시간이
밀쳐놓은 바람을 흔들어 운동장 전체를 띄웠다
와~와~와~ 운동장으로 뛰어든
사람의, 빌딩의, 공장의, 창문의, 손뼉소리가
귀먹은 시간의 귀속까지 요동쳤다
중간엔
팔딱이는 운동장 심장부를 뛰는
아이보다 큰 덩치의 굴렁쇠에 성미 급한
젊은 시간이 고무줄처럼 튕겨 올라붙었다
올라붙은 시간이 심술을 부렸다
검은 보자기를 공중에 펼쳐 햇빛을 걷어냈다
공중은 문득 뚜껑열린 물병이 되었다
뚝뚝 떨어지던 물방울이 소나기로 몸 바꾸는 순간
굴렁쇠에 무너지는 보드불럭 담장이 걸리고
굴렁쇠에 쓰러지는 공장 굴뚝이 걸리고
굴렁쇠에 달려가는 사물의 아우성이 걸리고
굴렁쇠에 흙탕물을 몰아오는 바람 갈퀴가 걸리고…
나중엔
손을 흔드는 아이의 손등이
주름 깊은 어둠덩이를 밀고
노을 감긴 운동장 하복부를 마악 돌아
얽힌 실타래를 온몸으로 풀어내듯
은빛의 시간을 나부끼며 느긋하게 간다
내가나를 밀고 나간다 운동장 밖으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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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이탈중
김지향
그는 이제 문을 나선다
몸의 마디마디 문을 열어놓고
바람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몸 전체를
지퍼 속에 집어넣는다
그의 팔다리는 풍선처럼 살아나 퍼득인다
걸어보지 않았던 길들이 모두 목을 쳐들고
인사도 없이 그에게 달려든다
인터넷 속에서 한두 번 만났던 사물들이
저들끼리 모였다 흩어졌다 그림을 만들며
눈썹 밑으로 지나가고
발자국 소리도 없는 사람들이
낯선 소리를 내며 그림 속으로 스르륵
빨려들어간다
그림들은 커졌다 작아졌다
푸르렀다 하얗게 바래지며
지상의 저물녘 들판으로 돌아간다
호주머니처럼 열린 입으로 연방
감탄사를 게우며 그는
멈추지 않은 지상의 삶을 벗어두고
저물녘의 기차 꼬리 짬에서
지나온 길들을 지퍼 속에 구겨 넣으며
터널같은 세상 한 비퀴 돌아
지금 마악 궤도 밖으로 사라져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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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 숲 속에서
김지향
이른 아침 산을 오른다
아직 바람은 나무를 베고 잔다
동쪽 하늘에 붉은 망사 천을 깔던 해가 숲을 깨운다
숲은 밤새 바람에게 내준 무릎을 슬그머니 빼낸다
베개 빠진 바람머리 나뭇가지에 머리채 들려나온다
잠 깬 산새 몇 마리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그네를 뛰는 사이 숲들이 바람뭉치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북채가 된 가지로 산새의 노래를 바람 배에 쏟아 부으며
탬버린이 된 바람 배를 치느라 부산떤다
입 다물 줄 모르는 가지가 종일 바람바퀴를 굴린다
숲 속은 온종일 탬버린 소리로 탱탱 살이 찐다
세상을 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아래서 위로 숲을 안고 돌며 바람바퀴를 굴리는
숲의 재주를 배우느라 여름 한 철을 숲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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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향기
김지향
상수리 나뭇잎에
우레소리를 몰고 와 바람이 앉는다
상수리나무는 깊은 잠을 버리고
엷은 안개를 게우며 일어난다
그림자도 같이 어둠도 같이
바람 속으로 숨는
상수리 밭은 소용돌이치는 소리의 강이 된다
세력 있는 강의 소용돌이 틈에서
더욱 싱그럽게 더욱 뜨겁게
그대 향기 그대 노래
오늘은 분수로 솟아올라라
솟아올라 어둠을 지워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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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다만 가을 한 장
김지향
까슬까슬 빛이 바스러지는 가을엔 바람도 빌딩 꼭지에 꽁지를 내려놓고
쉰다
몸이 싸늘한 바람을 기다리는 나무마다 지름길로 온 따끈거리는
햇볕의 불 주사에 따끔따끔 이마가 빨갛게
익는다
고루 박힌 이빨을 죄다 내놓고 노랗게 웃는
옥수수 머리칼도 붉게 볶여
곱슬거린다
도토리 키 재기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꿈치를 쳐들고 있는 고추밭,
진다홍 손가락을 대롱거리는 탱탱한 고추송이에 탁, 탁, 날개를 치며
고추잠자리 떼 앉을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다
건너편 사과밭 사과나무엔 공들여 키운 아기의 발그레한 뺨을
쓰다듬는 거치른 손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
이제 곧 가을 공간을 청소할 싸늘한 바람이 몸을 일으켜
그리다만 삽화 한 장 걷어내 화덕으로, 곳간으로 보낼
키를 들고 총총히 달려올 차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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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뒷모습
김지향
그 때
알 수 없는 한 그림자와
마주 서서
줄다리기를 하면서
나는 그에게 자꾸 끌려가고 있었다
그림자는 밤에만 다녔다
그림자가 자고 있을 때
아침이 오지만 그림자는 자지 않으므로
아침은 창 밖에 서 있었다
밤은 가고 또 와도
그림자는 죽지 않았다
무성하게 머리털까지 자라나
내 키를 덮었다
나는 그림자의 갈퀴에 쓸려 내려갔다
앗질앗질 땅 아래로 떨어져 내려
마침내 밑바닥에 닿았다
그때였다
어디서 날카로운 한 줄의 빛이
새들어와
그림자를 쏘았다
머리털 갈퀴도 수염도 쏘았다
아, 나는 죽음을 이끌고 나가는
그림자의 뒷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이겨 버렸다
비로소
나의 창안엔 아침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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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온다
김지향
그해 겨울 나는 정동진 새벽 바닷가 모래 위에 서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시간과 시간 사이 서너 꼭지의 남자와 여자가 안개를 신고 희미하게 서성거렸다
동쪽 산꼭대기에 박힌 한 여자의 눈이 비명을 질렀다 ‘모래시계가 얼어붙었다’
여자의 어깨 위로 한 뼘쯤 더 긴 남자의 고개가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
동쪽 산마루 밑에서 볼그레한 저고리만 벗어 올릴 뿐 해는 아직 머리칼 한 올
보여주지 않았다 성미 급한 남자가 둑 위에 얼어붙은 돌멩이를 차 던지다 그
자리에서 깨금발로 뛰었다 엄숙하고 신비한 우주의 송신음을 기다리듯 나는
오그라든 목으로 우주의 옆구리에 얼어붙었다 바로 그때 둑 위의 남자가 와~와~와~
소리 질렀다 멀리 발치께의 수평선이 빨갛게 끓어올랐다 점점 몸 부피를 넓혀갔다
문득 바다 배꼽에서 새빨간 모닥불이 물너울에 스르륵 말리고 있었다 나도 겁결에
돌멩이를 던졌다 모닥불은 얼룩도 지지 않고 활짝 웃고 있는 장미다발로 커다랗게
피어올랐다 바로 내 이마 위로 뜨끔거리는 빛이 흐르고 온몸이 얼음에서 풀려났다
얼음이 빠져나간 여자들은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모두 주저앉았다 해는 점점
작아지면서 사람의 정신을 빼앗아 달고 부지런히 공간 밖으로 가고 있었다
나도 해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아침공기를 부수고 햇살을 쪼개며
희뿌연 공간 한가운데로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잠자는 둑 목에
찢어지는 기침소리를 질러 넣으며 정신 나간 사람들
정신의 복판을 가로질러 기차가 와락 달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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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김지향
내가 탄 급행열차는 가지 않는다
가지 않는 열차에서 눈이
사물 1.2.3을 먹는다
햇빛은 덩그렇게 나를 켜고 따라온다
가로수가 눈 속으로 들어왔다 나간다
열차는 가만히 서서 가로수를 파먹는다
개망초꽃이 밟히지 않으려고
뒷절음질쳐 궁둥이로 들어와 이마로 나간다
열차는 서서 창문으로 스르륵 뭉개버린다
무리 소나무가 누렇게 뜬 어깨쭉지를 디밀어본다
열차는 서서 발통으로 깔아뭉갠다
밭이랑이 줄을 그으며 달려들었다 짓뭉개진다
논바닥이 찰랑찰랑 물장구를 치며 들어왔다
열차 눈에 물먹이고 지워진다
지우개를 달고 서있는 열차를 타고 내 눈은
사물 1.2.3을 먹고도 눈물 한 방울 내놓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에 벗어두고 눈만 기차를 타고
다 뭉개진 금수강산을 보러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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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길을 버리다
김지향
현관을 나선다
길이 길의 몸속에 내 발을 꽂아준다
“빨리 내 몸을 밟고 건너가 봐, 시간이 없어‘
길이 선심을 쓰듯 내 발을 밀어 던진다
나는 길에 튕겨진다
발이 큰 나는 길에 담겨지지 않는다
되튕겨져 나와 나는 길을 구경한다
시간을 앞질러 달려가는 길머리가 없어진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반복한다
반복에 반복을 해도 길 머리는 살아 나오지 않는다
‘이런 , 길이 길을 버리다니!’
나도 길을 버린다
길이 나를 버리기 전에
길이 만들어놓은 난삽한 길을 먼저 버린 나는
튕겨져 나와 길 밖에서 길 밖을 꿰뚫어 본다
갈래 갈래로 땅이 쪼개지고 있다
땅은 쪼개지는 대로 길이 된다
길 밖의 길로 내가 가고 있다
오만개의 내가 오만개의 길로 가고 있다
잔뜩 몸을 부풀린 짐차는 짐차의 길로 정면돌파 하고
잔뜩 몸을 움cm린 승용차는 승용차의 길로 정면돌진 하고
나는 내가 만든 나의 길로 정면통과 한다
만일 내가 나의 길을 만들지 않았다면
오욕칠정의 나의 분신들은 지금 어디로
빙글빙글 우회할지
아찔, 현기증이 나를 관통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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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된 꽃잎
김지향
꽃샘바람이 얼굴을 가리고 도둑처럼 쳐들어온다
꽃은 제 몸을 나뭇가지에 철사줄로 꽁꽁 묶었지만
찢어진 비망록처럼 부욱, 찢겨진다
나무는 제 몸에서 걸어나간 꽃을 보며
뚝,뚝 눈물을 떨군다
무거운 고요가 눈물 위에 떨어진다
옷깃 속에 목을 접어넣은 사람들은
나무의 눈물로 돋아난 새 풀을 못 본 채
마구 짓밟고 간다
신명이 난 바람이 입에 면도칼을 달고
뾰족뾰족 밖으로 내민 꽃의 희망을
줄을 긋듯 주루룩 삭발시킨다
봄들어 속력을 내는 시간을 따라
나무는 꽃잎을 연거푸 토해내고
바람은 연거푸 면도칼로 꽃머리를 부러뜨린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후레지아
부러져 길이 된 꽃의 희망을
한 아름 품어 안고 나는 한바탕
시샘하는 꽃샘바람과 열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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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김지향
별이 꽃밭에 떨어졌다 나는
꽃밭을 한 삽 떠서 마당 가운데
던져 넣었다 마당 전체를 빛이 들고 있다
나는 빛을 손바닥에 퍼 담았다 새나가지 않도록
주먹을 꼭 쥐고 어둠을 넘어와 내 책상 꽃병에 꽂았다
빛은 꽂히지 않았다 꽃밭에도 빛은 한 개도 뜨지 않았다
시간은 시간을 잡아먹으며 어둠 속으로 힘껏 떠나간다
사람도 떠나가고 아파트도 떠나가고 길도 가로수도
모두 어둠 속으로 떠나간다 꿈을 담는 그릇은
꿈들을 털어내고 낡아가는 헌것 채 한 개비씩
어둠에게 끌려간다 시간은 죽어가는 헌것들을
어둠에게 넘기느라 죽을 시간도 없다고
투덜댄다 투덜대며 죽어간다
(새로 피어날 내일의 스펙터클 꿈을 새로 만들며)
방문을 닫은 깊은 밤이 내 가슴속 우주에도 가득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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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의 귀
김지향
꽃밭이 있는 고층 아파트 발코니로 이사 온
매 발톱 꽃나무 몇 날은 기가 빠진 듯 졸다
오늘 문득 높은 공기를 맛본 듯
고개를 쳐들고 팔팔 일어나고 있다
쫑긋쫑긋 귀를 세우고 사람 쪽으로
목을 내밀어 흐드러진 세상 소리를 연거푸 퍼먹는다
너무 많은 세상 소리를 뼈째로 허겁지겁 집어삼킨다
말이 내뱉는 가시를 소금물로 알고 들이킨 꽃의 귓불엔
오늘 아침 유리조각들이 매 발톱처럼 뾰족뾰족 매달려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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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혹은 풀밭
김지향
해꼬리를 잡고
삼백 몇 날을 걸어도
보이지 않네
어딘가에 펼쳐져 있을
꿈에만 나타난 풀밭
빛살이 반질거리는 풀밭
장다리꽃이 안개밭으로 뜬
머리위 풍경처럼 걸려서
가늘가늘 숨 죽이고
날개만 떨던 바람이
내 목으로 알싸한 꽃물을
내려보내던 풀밭
숯 많은 풀잎의 귀밑머리 자르며
하늘하늘 살 비비며 마구 짓이기며
바람이 능멸을 해도
아픈 표정 하나 없이
포근한 가슴 열어주던 풀밭
꿈 깨고 나면
보이지 않네
육체를 벗은 꿈에만
가벼운 발이
담장위로 치뻗은 풀의 머리를
으깨고 가는 꿈에만
어머니처럼 껴안아 주던 풀밭,
나는 먼 훗날에도 피어날
삶의 꽃씨 한 톨 심어놓고
발병나게 찾아갔지만 어느 날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잠깨고 나니 갈 수 없네
꿈마저 잃어버린 나는
오늘 대문을 박차고 나가서
지상의 길을 종일토록 헤맨다
휘청휘청 내 키가 꼬부라져 접히도록
달려가는 시간의 뒤통수도 보이지 않도록
삼백몇날을 헤매고 다녀도
꿈에 본 풀밭은 나오지 않네
때때로 잡동사니 화물차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발에 먼지만 진흙처럼 쌓여가는
금지구역이 많은 널따란 철조망 속
내 발이 닿는 곳마다
철조망이 옭아매는 그런 땅만 있네
아, 지상의 삶은 철조망과 진흙
바로 그것이네
길 모퉁이 저 혼자
웃다 울다 하는
외톨이 꽃 한송이의 외로움도
나만 같은
이 삶 속에선
풀밭은 안 보이고
진흙밭에 깊이 박혀
빠지지 않는 내 발자국의 아픔만이
지나간 시간의 증인이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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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에 매맞는 바람
김지향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든다고 어젯밤까지
바람을 따라가던 나는 말했다
바람은 곁에서 힘없이 부러져 있지만
나뭇가지가 바람을 멀리 내쫓고 있지만
나뭇가지엔 불끈불끈 불뚝힘이 출렁이고 있지만
바람이 나뭇가지를 낚아채어
홀랑,몸 벗겨 부끄럽게 한다고 어젯밤까지
나는 분명히 말했다
봄이 되면
바람이 달려와서 나뭇가지에
꽃으로 매달린다고
바람꽃이 봄을 피운다고
바람이 아무리 속삭여 주어도
나와도 같이
믿어주지 않는 나뭇가지가
오늘 보니
바람을 마구 때려 패대기치고 있네
패대기 한번에
봄꽃 한 주먹씩 피어나고 있네
바람은 오늘 종일 나뭇가지에 매맞고 있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
나는 오늘부터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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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이 시를 쓴다
김지향
고장 난 시간이 가을 속에 멈춰 섰다
세상의 휴게소는 만원을 이루고
들어설 자리가 없는 나는 갓길로 내쫓겼다
길은 바퀴 없이도 잘 굴러 간다
내 앞에 스르륵 미끄러져 온 길이
가득 담은 나뭇잎의 붓끝으로 빨간 시를 쓴다
한 자국도 옮기지 못하는 창백한 내 발등에
마음 아린 나뭇잎이 쯧. 쯧. 쯧. 혀를 차며
나뭇잎 사이사이 초롱꽃처럼 달랑거리는
수은등을 끌어와 불빛 같은 시를 붓는다
(가을이 되면 나무들은
온 우주에 시를 쓴다
하늘에다 땅에다 사람의 몸에다
빨간 시를 쓴다)
블랙홀에서 불어온 먼지바람에도
돌담 위에도 터널 속에도 주렁주렁
시가 익어간다
사람들은 숨차게 뛰어온 삶의 굴레를 벗어
가을의 가지에 걸어놓고
가을 내 시를 읽다가 스스로 시가 되어버린다
(높이 올라간 인간들의 투정을 미리 알아챈
눈치 빠른 하늘도 마침내 가슴을 열고
비명 같은 삿대질의 시위로 찢기고 찢겨
뚝,뚝 핏방울의 시를 떨어뜨리며)
시간은 멀지 않아 바퀴를 돌린다고 송신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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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디지털 하늘
김지향
디지털 버턴을 쥐고 나는 손이 붙어 있는지
더듬어 본다
너무 가벼워 날아간 줄만 알고 나는
나에게 육체가 있느냐고
물어 본다
육체가 가벼울 때
나무의 날개 사이로 보인다
하늘이 살이 붓지도 않고 양 옆으로
열림이 환히 보인다
그때 하늘이 먹은
새들이 꽃씨를 물고 팔랑팔랑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나뭇잎이 열매를 매달고 동글동글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바람이 물결무늬 주름진 치마폭을 펄럭이며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햇살이 치마끈을 풀어 땅에 수정기둥을 세우며 나온다
날아 나온 몸 바뀐 존재들은 가벼운 육체로
땅의 안 바뀐 존재들과 하나의 허리띠에 묶여
하나가 된다
나의 디지털 하늘은 이제 배가 푹 꺼져
땅에 내려와 누웠다
우주가 일직선으로 길게 깔려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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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달을 보며
김지향
길을 가다 문득
하늘만 쳐다본 날
가물가물 점 같은 새가
까맣게 떠서
말간 낮달을 끌고 가더니
하얀 몸의 낮달이
진종일 불에 타는 고통으로
이지러지며 혈관이 터지더니
밤이면 진홍빛의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몸이 타는 고통의 낮달을 보며
그때서야 나는 후닥딱,
너에게 준 아픔을 깨달았다
나도 혈관이 터져 진흙이 될 때까지
지켜볼 하나님의 불눈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오늘 내 피곤을 털어낼
원두막 그 뽕나무 집을 찾아
길을 가다 문득
하늘 기슭으로 끌려간 반쪽뿐인
낮달을 보며 뜨끔거리는
바늘 꽂는 아픔
예삿일이 아니다
(영혼은 육체가 없이도 아픔을 알데
하나님의 분신임도 뚜렷이 알데)
길도 중간부위를 넘어선 때에야
빼마른 낮달이 태양의 덤불을
빠져나지 못하듯
나의 우주도 하나님의 손바닥임이
유리알처럼 보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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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수리 중
김지향
오늘도 나는 리모컨으로 세상을 연다
가장 먼저 기지개를 켜는 먼지
사이로 키를 일으킨 빌딩들이
마음 놓고 꺼낸 내장을 말리고 있다
내장 속에 숨어 있던 정적들이
한 소쿠리씩 쏟아진다
정적 밑에 가만히 엎드렸다 툭, 툭,
불거지는 것들이 투명유리 속처럼 보인다
부서진 욕정 부스러기, 배배꼬인 야망 찌꺼기
햇빛의 주사바늘 밑에서 와글와글 끓고 있다
나는 얼른 리모컨으로 빌딩을 꺼버린다
그림자까지 모두 삭제하고
재빨리 장면이 바뀐다
좁다란 블록담 옆으로 측백나무가
길을 끌고 파랗게 간다
돌아보지 않고 가는 길 옆으로
자잘한 곷 나무들을 안고 손을 흔드는
해바라기 긴 허리도 리모컨 눈의 조리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나는 다시 또 리모컨의 다른 단추를 누른다
빌딩 지붕 위로 길이 떠서 올라간다
피가 하얗게 씻긴 길을 끌고 간다
어디로 가는 걸까
아득히 좁아진 길 끝 거기는 어느 세상일까
아, 쪽문이 보인다
사람은 아무도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멈추어 있구나
지금 마악 도착한 진공포장지에 싼
한 사람의 손발에선
아직도 야생마 같은 피가
포장지 밖으로 지고 있구나
나는 다시 리모컨의 다른 단추를 누른다
장면이 바뀌지 않는다
리모컨도 들어가 보지 않은 길 끝 세상,
“내부 수리 중”이란 쪽지가
커다랗게 나부끼고 있을 뿐
사람들은 길 끝에서 하얗게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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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에게 주는 안부
김지향
어디 사는지
아직도 남아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내일이란 이름에게
나는 안부를 보낸다
해마다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 않는
내일에게
내일이면 늦어 오늘 나는
일년치의 안부를 한꺼번에 날려보낸다
이번엔 머리꼭지라도 좀
드러내 보라고
내일 뒤 어디에 숨어있을 내일에게까지
두 손으로 안부를 불어 보내면서
안부가 가서 닿는 소재지를 알아내기 위해
망원렌즈 먼지를 닦아내고
뒤꿈치의 돌베개를 곧추 돋우고
어딘가에 살아 있을 내일에게
뜨거운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나의 노력을 알려주기 위해
하늘에다 들끝에다 바람귀에다
입을 대고
내일의 이름을 불러댄다
목청껏 목청껏 불러댄다
그러나 내일은 어딘가에 들앉아
내 목소리를 묘사하며 웃고만 있겠지
내가 잠잘 때 그도 잠을
내가 죄로 배 부를 때 그도 죄를
내가 거짓말로 속삭일 때 그도 거짓말을
흉내 내겠지
그런 내일을 사랑하는 나의 사랑이
진실임이 알려질 때까지
내가 내일의 사랑을
무식하게 신앙하는 환자임이 밝혀질 때까지
나는 주소불명의 내일에게
오늘 일년치의 안녕 안녕을
한 무더기 띄워 보낸다
그래, 그렇고 말고
내일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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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김지향
작은 제 몸 속에
몇 갑절의 큰 몸을 넣고 있다니!
작은 몸속에 앉아있는
우주의 볼에 돋은 사마귀 같은
내가 그려 넣은 종이비행기
지금 마악 산 너머 하늘 길을 넘고 있음을
말문 막힌 나는 보고만 있다
큰 몸이 보지 못하는 작은 몸
그게 바로 내 눈동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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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의 여자
김지향
표정도 없이 하늘이 웃는다
좌 악 열린 하늘 입에서
소금 알갱이가 내린다
한 여자가 하늘 웃음 속으로 삭제된다
삭제되었다 나온 그 여자가 눈을 깜박일 때 마다
눈썹에서 해묵은 때가 지워진다
소금 가루가 덮어버린 그 여자의 머리가
낮게 내려온 하늘 살이 된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손잡은 하얀 우주를
그 여자의 실티 같은 머리칼이 금을 긋는다
하얀 소금 알갱이에 묻힌 여자의
하얗게 씻긴 가슴 속 우주엔
하늘 살을 보내준 이의 눈동자도 담긴다
그 여자는 몸도 마음도 백지의 우주로 재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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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는 잎사귀
김지향
모서리가 살아난 장독대 옆구리
황금날개 바람이 앉아있다
날개는 이내 열리고 바람은 날고 있다
귀를 세워 설치던 진눈깨비는
귀가 잘려 고개를 떨구고
하늘을 깁고 있던 먹구름도
팔짱을 끼고 제집으로 돌아서고
채소 빛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
비어있는 마당 열 두 군데를
새로 와서 채우는 열 두 빛 햇살
지구 밖의 봄 돋는 소리도 몰고 와
초록빛 비늘을 뿌린다
황금 실을 뿜어낸다
동면 속에 접어든 오동나무는
꿈을 털고 일어서고
장독대 질항아리도
이마를 쳐들고 깨어난다
엎드렸던 내 의식은 눈썹을 내밀어
저 창 밖의 파도치는 초록물감 속을
눈뜨는 잎사귀가 되어
하늘하늘 날아간다
☆★☆★☆★☆★☆★☆☆★☆★☆★☆★☆★
눈물처럼 떨어지는
김지향
하늘엔 시린 눈이 사라졌다
팔팔 살아서 끓는 정기 쏟아 붓던
그 눈,
이젠 어디로 가고 없다
하늘은 돌에 맞아 상처투성이 가슴 뿐
멍청히 떠서 휘모는 폭우에도 귀우뚱거린다
하늘 가슴에 대고
마구잡이로 쏘아 올린 사람들의 돌팔매
녹도 슬지 않고 이제껏 쩌렁쩌렁 박혀 있으니
이제껏 분수처럼 치솟는 돌팔매
피투성이 가슴으로 맞고 있으니
어쩌나
하늘에 대고 삿대질하는
사람들에게
침묵의 깊은 물음 던지는 듯
돌팔매 박힐 때마다
빗물처럼 주루룩, 떨어지는 눈물을
사람들은 그게 사랑인줄
하늘의 가없는 사랑인줄 모른다
☆★☆★☆★☆★☆★☆☆★☆★☆★☆★☆★
눈사람
김지향
다리 긴 바람이 눈을 뜨고 뛰어간다
바람의 손이 머리를 빗기는 안마당이
귓불을 비비며 일어앉는다
땅 밑으로 쫓겨난 나무 뿌리도
뛰어가는 바람의 행방을 잡고 있다
쨍그렁, 깨지는 창밖의 샐로판지 위로
강아지 두엇이 꼬리를 떨면서 튕겨간다
바람만 나와 설치는 빈 뜰에
중절모를 눌러 쓰고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는
눈썹 흰 사람이 내려와
술렁술렁 아이들을 불러내고 있다
우리집 아이들은 마술 가위를 들고 나와
그 흰 사람의 흰 머리칼을 베어
내 머리를 덮고 있는 먹구름을 지우고
그 흰 사람의 흰 손가락을 뽑아
내 이마에 순결의 무지개로 오려 붙이고
술렁이는 뜰 안에서 깊이 잠든
내 의식을 두드리며 마술 가위의 아이들은
오만 개의 눈 뜬 오만 개의
바람소리를 만들고 있다
☆★☆★☆★☆★☆★☆☆★☆★☆★☆★☆★
다리뿐인 햇빛
김지향
나는 발코니 쪽문에서
총알을 날렸다 갈퀴를 세우고 뛰어가던
강이 퐁, 퐁, 퐁, 장파열을 일으켰다
가닥가닥 실타래처럼 잘려나가는
물의 살결들
둑 너머 둑으로 물의 실타래는 마음 놓고
퍼져나갔다
둑을 마구 넘어갔다
바둑돌들이 빠진 둑
이마가 뜯겨나갔다
(둑 밖으로 쫓겨나온 물고기들이 눈을 뜨고 잔다
주사바늘을 손톱처럼 세운 햇빛이 물고기에게
불주사를 놨다 까맣게 타버린 물고기들에게
햇빛은 연속사격을 가했다)
나는 햇빛의 뷸꽃 사격이 나를 겨냥한 줄도 모르고
또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퍼엉! 햇빛을 관통했다 1초 동안
내 눈에 튀어든 빛 가루가 까맣게 눈을 태웠다
까만 눈을 끌고 간 블랙홀, 1초의 어지러움 너머
빛 부신 은빛나라가 반짝였다 1초 동안
강물을 뚫고 햇빛을 뚫어야 보이는 하얀 나라!
햇빛은 수평도 수직도 아닌
땅도 나라도 없는 빼 마르고 기다란
다리만 촘촘하다
다리에 구멍을 내도 금방 아물어버리는 그
물렁살이 은빛의 하얀 나라를 감추고 있다니!
☆★☆★☆★☆★☆★☆☆★☆★☆★☆★☆★
다시 또 절망에게
김지향
오늘도 길은 낯선 곳으로 뚫고 간다
시간은 날마다
내 발에 노끈을 묶어 낯선 길로 끌고 가지만
(낯선 시간에 희망을 걸고)나는 따라 가지만
그 곳도 똑 같은 세상이구나
절망아,그 곳에도 황사바람 몰아부치고
산성비 쏟아지는 진펄이구나
우회선도 없는 일차선로 중앙부에 접어든
내 발은 위험과 손 잡고
점점 거세게 몰아부치는 황사바람에
키가 다 구겨져서
점점 거칠게 퍼부어대는 산성비에
살갗이 닳아 떨어져서
쓰러졌다 일어남을 반복하며
오늘도 길에게 코가 꿰인 내 발이
따라가며 이제 그만 불시착이라도 하고 싶다
시간의 노끈이 내 발을 놓아주기를,
삶과 죽음이 폭파되어 한 세계로
어우러지기를 꿈 꾸며
누군가에게 들키면 지상에선
영영 소각되어 버릴 위태로운 꿈을 몰래 꾸며
세상을 깨뜨렸다 일으키는 의식운동을 되풀이한다
절망아, 내가 너무 두려움없이
낯선 길을, 낯선 시간을 사랑했나 봐
깨끗한 그 곳인줄 알았던
내 믿음이 배반 당한 삶(내가 지독하게 사랑하는)
절망아,네게 길들여진 삶
나는 그 삶의 주인일까
삶이 나의 주인일까
아직도 석연치 않은 물음을 안고
오늘도 나와 삶은 낯선 시간 속으로 가고 있다.
☆★☆★☆★☆★☆★☆☆★☆★☆★☆★☆★
다시 열린 봄날에
김지향
활짝 열린 봄 속으로 들어선다
겨우내 외롭던 꽃밭이 식구들로 가득하다
빵긋거리는 노랑 빨강 하양 뺨들을 다독이며
*창준의 손을 잡은 나는
꽃으로 피던 시절을 생각하며 걷는다
아이의 손에는 빨간 꽃이 내 손에는 하얀 꽃이 복사된다
지난 겨울 떨군 꽃의 눈물이
다시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설명하면서
어린 세대와 낡은 세대가 서로 다른 생각 속에
꽃들을 복사한다
시간은 그 시간이 아닌데 꽃들은 왜
그 꽃이지? 하고 아이가 물어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아이의 말은 왜? 왜? 로부터 시작하고
길어지는 나의 대답엔 귀를 닫아버린다
대답에 궁색한 나는 아이가 스스로 알아갈
길만 안내해준다
아이는 얼마 안가 혼자서 봄 속을 달려갈 것이다
☆★☆★☆★☆★☆★☆☆★☆★☆★☆★☆★
따먹은 잡동사니
김지향
오늘도 안 가본 길을 걷는다
(낯설게 달려오는 세상
따먹고 싶은 나는 방에 갇히지 못한다)
나는 날마다 휴대폰으로
세상을 따 먹는다
온갖 잡동사니를 물어오는
휴대폰 머리꼭지의 머리카락
그에겐 하늘 내장도 저장되어 있다
길을 가다 문득 하늘을 따먹고 싶어
산꼭대기 상상봉으로 발을 끌어 올렸다
가만히 누워서 하늘의 혈관을 찾고 있을
그 때 그 하늘을
내가 백발백중의 투창질로 구멍을 냈다
휴대폰이 하늘 풍선 한 자락을 움켜쥐고
풍선 배꼽을 탕 ,탕, 탕, 우그러뜨렸다
한쪽 귀퉁이가 먼저 스르르 자취를 감춘다
휴대폰 머리칼이 먹어치운 하늘이
휴대폰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
너무 많은 하늘의 영양소들이 엉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공기를 패대기치고 있다
별은 별끼리의 도킹으로 부화가 되는지
휴대폰 입으로 별싸라기가 새나와
온몸에 아이섀도우를 칠해 놓고
삐리리~~ 삐리리~~ 부딪는 마찰음으로
내 청각신경을 괴롭힌다
한 요리사가 허드레 잡동사니 날것들을
냄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리며 볶아대는 소리
냄비를 굴릴 때마다 휴대폰 온몸이
난잡하게 뒤틀린다 뒤틀리는 휴대폰
아, 알고 보니 내 속이네 내 속을 뒤집어 놓고 있네
나는 사람일까 물체일까
무엇이든 꿀꺽 삼키기만 하면 소화가 되어버리니!
따먹은 하늘의 잡동사니
내일은 또 무엇이 되어 태어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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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나도 증발되고 싶다
김지향
열손가락을 부채살처럼 펴고
컴퓨터 키보드를 한꺼번에 눌렀다
잠시 엷은 주름 사이
그림자뿐인 유리집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녀는 들어갈까 말까 망설임도 없이
습관적으로 머리꼭지를 드밀어넣었다
유리집에 잠입한 그녀는
간첩처럼 귀를 세우고 몰래 벽에 걸려 엿본다
정물 하나 없는 움직임들이 무리무리 지나간다
나뭇잎 널브러진 키 낮은 산들이 지나가고
이마 훤한 지붕들이 지나가고
강아지떼가 고양이떼가 돼지떼가 지나가고
먼지가 지나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해묵은 미해결 건수가 지나가고
지나가는 건수들은 모두 줄을 서듯 입에
앞의 꼬리를 물고 물고 물고
초고속으로 지나간다
형상을 가진 사물들은
모두 발도 없이 유리집 사이버 속으로 들어간다
인터넷 A가 인터넷 B와 인터넷 B가 인터넷 C와
불똥을 퉁기며 번개처럼 접속된다
온 우주가 인터넷 속에서 한 개
점이 되어 그녀 두뇌 속으로 도랑물처럼
기어들어간다
나는 삐걱거리는 두뇌로
가끔은 형이상 속으로 증발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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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과 가을
김지향
여름이 시들시들 시들 때
나는 내가 키우는 로봇을 풀어놓았다
파닥파닥 팔을 부딪치며 보듬고 있던 모닥불을
옆의 옆 앞의 앞 나무 겨드랑이에 쏟아 부었다
부글부글 끓는 나무 가슴팍에서 불길이 척추 위로 치뻗었다
로봇에게 지고 만 여름이 꼬리를 스르륵 감추었다
나무 겨드랑이엔 불똥 같은 뾰루지가 입을 뽀르통, 내밀었다
찻길 너머 산속, 키 낮은 풀밭에서도
로봇이 화약통을 엎질렀다
온 산이 빨갛게 성이 났다
찔레꽃 덤불도 엉겅퀴도 단풍나무도
낯익은 얼굴들이 새빨갛게 불이 났다
당분간 시간은 가을에게 발목 잡혀 산속 깊이 주저앉았지만
불길 속을 혼자 달려가는 불덩이 로봇, 멈출 줄 모르는
나의 로봇,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온몸에 화약통을 달아준 나는
나의 서투른 고집 같은 시행착오를 후회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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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컨과 풍경
김지향
휴일
심심한 저녁 때
나는 창가에서 잠자는 리모콘을 깨운다
리모컨의 뇌세포는 나보다 훨씬 개수가 많은지
나보다 먼저 내 생각을 알고 있다
리모컨이 창 밖의 창을 열어제낀다
깊숙이 집어넣은 내 눈에 들어온 사람들
가라앉은 몸속에 다 저문 삶을 꼬깃꼬깃
접어 넣고 앉아 있다
사람을 지나 창밖으로 몸을 누인
강변북로로 간다
멀리 다림질이 잘된 빌딩 머리에
홍시 같은 햇덩이가 오늘도 어김없이
몸이 뭉개지고 있다
빌딩 목으로 넘어가는 다리 짧은 시간이
원추형으로 으깨진 핏덩이 몸을 끌어간다
꼴깍, 나의 리모컨 조리개가
전기 고압선에 얽혀 뇌세포 한 둘쯤 죽어버렸는지
강변 한쪽 풍경이 지워졌다 한쪽 구석은 접혀졌다
접혀진 풍경 옆구리 버티고 선 다리 사이
또 한개 다리가 강을 건너뛰고 있다
눈에 안약을 넣은 수은등이 파란 눈을 반짝이며
강변북로의 삶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접혀진 풍경을 펴본다
뒤로 밀쳐진 사람들이 나온다 어둠이 되고 있는
사람의 의미 있는 아픔들이 내다본다
방금 빌딩 목울대로 넘어간 햇덩이의 각혈처럼
(바깥 풍경만 보는 이들은 아무도 접혀진 삶의 아픔을 모르지만)
눈치 빠른 나의 리모컨은 아직 자지도 않지만
남은 다른 쪽의 풍경을 다음 휴일로 넘겨버린다
깊은 밑바닥이 드러날 땐 얼른 조리개를 꺼버리는
리모컨, 나보다 지능지수가 얼마나 높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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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렌즈와 시라세니아 잎
김지향
길과 강 사이가 붙어 있다
붙어 있는 틈새를 뒤로 빼내며
키를 쑤욱 뽑아 올린
하얀 머리의 아파트 발코니가
주춤 뒷짐 지고 서 있다
아파트 머리를 뒤로 밀며 강으로 눈을 내민 망원렌즈는
강물을 복사뼈에 걸치고 바삐 가는 시간을 붙잡느라 부산떤다
낮에는 하늘에 이마 내걸고 오지랖에 하늘 말을 받아 담는
밤에는 강변에 귀를 던져 허드레 폐지 같은 사람의 말들을
귀로 주워 먹는 아직 나이 어린 S아파트
몇 덩이 정적 같은 그의 내부가 궁금한 나의 망원렌즈는
아름다운 정적 내부로 몸 전체를 밀어 넣었다
종일 팔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던 시라세니아 잎사귀
그가 렌즈의 몸 전체를 움켜쥐었다 앗찔,
혼신의 눈을 모으고 뚫어보는 렌즈 사면이 꽉 막혔다
궁금증의 내부, 아래 위 사방에서 사기그릇 깨지는 소리
소리와 소리가 뛰어가며 부딪는 운동장이 되었다
몇 포기 남지 않은 머리칼이 소름처럼 윗마을로 치켜서고
심장박동소리가 심지 닳은 호롱불로 가물거리지만
아직 맑은 영혼으로 암호 같은 출구를 찾으며
나의 망원렌즈는 강변 S아파트 내부의
정적을 깨뜨리는 그 시라세니아 잎 속에서
아직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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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앓는 하늘
김지향
간밤 내
깔깔, 봉오리 웃는 소리만 났다
아침에
하늘이 한 뼘도 남지 않았다
봄 내
하늘은 가득 찬 꽃잎으로 몸살을 앓는다
해는 어디에 있는지
진종일 빨간 명주실만 내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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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바다
김지향
어젯밤 새도록 바람의 회초리에 매 맞은 바다
아침에 보니 눈꺼풀이 잔뜩 부어올랐다
바람은 바다에게 품고있는 잡동사니를 내놓으라며
아침에도 소리 높여 호통을 친다
바다는 무엇이든 잘도 삼켜버린다
배속에 넣고 있는
우럭 미역 명태 조개 물지렁이 고래 수달 바다쥐빠귀 불가사리
그들의 어린 것 까지 바다가 삼킨 잡동사니들은 헤일수도 없다
잡동사니도 바다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보물이 되어버린다
바람은 때때로 바다에게 보물을 토해내라며
크게 소리치며 바다 몸통을 돌려가며 패대기친다
살이 뜯긴 바다 가슴이 오늘 보니 움집처럼 패였다
바다 뼈가 다 들어나도 품고 있는 보물들은 나올 기미가
서푼어치도 안 보인다
(잡동사니들은 바다 깊은 가슴 안에서
찰삭찰삭 물장구를 치며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다)
문득 바람 배를 가르며 전조등을 켠 유람선 한 채
발을 멈추고 바다 가슴이 보내주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다 바람도 함께 서서 잠잠히 듣다가
신명이 났는지 어깨춤을 추며 크게크게 박수를 보낸다
바람은 바다 보물에 쏟은 끈질긴 욕심을 툭, 끊고
유람선을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고 없다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 바다는 지금 오케스트라 연주로
한창 뜨겁게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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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타고
김지향
그는 이제 문을 나선다
몸의 마디 마다 지퍼를 열어 놓고
바람의 멱살을 휘어잡고 바람 몸 전체를
지퍼 속에 집어넣는다
그의 팔다리는 풍선처럼 살아나 퍼득인다
걸어보지 않았던 길들이 모두 목을 쳐들고
인사도 없이 그에게 달려든다
인터넷 속에서 한 두 번 만났던 사물들이
저들 끼리 모였다 흩어졌다 그림을 만들며
눈썹 밑으로 지나가고
발자국 소리도 없는 사람들이
낯선 소리를 내며 그림 속으로 스르륵
빨려들어 간다
그림들은 커졌다 작아졌다
푸르다 하얗게 바래지며
지상의 저물녘 들판으로 돌아간다
호주머니처럼 열린 입으로 연방
감탄사를 게우며 그는
멈추지 않은 지상의 생을 벗어두고
저물녘의 기차 꼬리짬에서
지나온 길들을 지퍼 속에 집어넣으며
터널 같은 세상 한 바퀴 돌아
지금 마악 궤도 밖으로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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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반란
김지향
바람이 일어선다
나뭇잎이 나부끼는 가지에서 뚝 끊어져
서쪽 하늘 뺨에 걸려 이빨을 갈고
햇살은 동쪽 산 이마에서 발을 옮기지 못한다
바람이 일어선다
해가 빛을 잃고 구름 뒤에서 물구나무로 벌을 서고
아까부터 바람이 하늘 밖에 세워둔
비가 슬슬 바람의 눈치를 보며 뛰쳐나와
수직으로 빗금을 그으며
땅에 부딪힌다 몸이 으깨진다
바람이 일어선다
땅이 키우는 풀머리가 부러지고
풀머리 밑으로 처박혀 죽은 비로
땅이 지워져 버린다 조금씩 비의 시체에
파먹혀 지워지는 땅을 보는 바람
아직 심장이 멎지 않은 땅에 크게 숨을 불어넣는다
(땅이 없이는 바람의 스펙타클도 허사임을 깨우치고 땅
전체에 엎질러 놓은 반란을 한 장 한 장 걷어내기
로 했음)
바람이 일어선다
풀잎과 땅을 움켜쥔 주먹을 풀고
땅의 가슴에 박힌 대못의 상처를 치료 하기로
바람이 마음을 바꿔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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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돌아온다
김지향
달빛이 허연 뼈를 뽑아들고
길 모퉁이에 비켜 서 있다
흰옷 입은 나무들의 그림자가
밤을 썰어내는 톱질 소리를 내며
구멍 뚫린 공간을 빠져 나간다
시간을 쏠아먹는 좀 벌레가
발소리를 이고 땅 밖을 기어간다
귀가 게우는 개구리 소리를
둑 모가지에 걸어두고
품팔이 갔던 바람이 돌아온다
조용하다
달이 툭, 땅 가득 떨어질 뿐
흰옷 입은 나무들의 눈이 깨져
사방에 흰빛을 뿌릴 뿐
바람이 문빗장을 풀고 들어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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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끝으로 간다
김지향
사람은 가고 없는 강변 의자에는 눈송이가 몇 앉아
옛날이야기 속으로 가고 있다 눈송이 몇이서 걸어가는
시간의 자국마다 소복소복 모여앉아 여럿이 되고 무리가 되어
입 열린 호주머니에서 옛날이야기를 풀풀 꺼내놓고 앉아있다
한참 후엔
의자 혼자 남겨두고 서로 손을 잡은 눈송이가 무리무리
사람의 머리를 올라타고 부지런히 가고 있다 눈이 오는 날은
잠자는 세상이 깰까 봐 시간도 까치발로 뛰어 간다
눈을 머리에 얹은 두 세 사람은
팔짱을 끼고 지나간 날의 가슴에서 자고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어
무겁게 껴입은 이 시대 사건들 위에 겹쳐놓고 구시렁거리며
발끝으로 가다가 무릎으로 가고 있다
(사건의 중간 부위에 빠지면 무릎까지 파묻힌 몸을
빼낼 줄도 모르고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가는 사람들,
그것이 무덤인줄은 빠진 뒤에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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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달린 사랑
김지향
사랑은 가슴에서 산다
가슴에서 사는 사랑이
베어지지 않는다는 논리는
알맹이가 없음
하고 나는 손을 쳐든다
혼자서 이렇게,
나의 실험대에 올라온 사랑을
현미경으로 뚫어보았다
사랑, 그 자유분방주의자는
거침없이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떨어져 서로 반목하며
제 갈 길로 갈
궁리에 빠져있었다
서로 다른 머리 발 손이
한 덩치로 얽혔을 뿐
틈틈이 발은 손, 손은 발을 배어낸다
그렇지, 그날도
한 쪽 발이 베어져 나갔었지
베어낸 자리엔 재빨리 구멍이 들어앉았지
구멍은 자기의 부피를 키우려고
나머지 사랑지체도 내쫓으려 했었지
아암, 그렇고말고
사랑발이 잘려나간 빈 칸을
나는 구멍이 차지하지 말게 하려고
떨며떨며 한 쪽이 기우뚱한 가슴으로
사랑 발을 붙잡아오려고 찾아 나섰지
세상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사건 사이
어둠 사이 시기 질투 분쟁 사이
어디에 내 사랑의 발은 걷고 있나
일곱 번씩 일흔 번도 용서해주며
사랑발이 제 맘대로 잘려나간
무례를 용서해 주며
아, 일곱 번 째 용서함
바로 그 때였다
나의 사랑 발은
세상 구석 어느 개골창에 빠져
어둠 그것이 되어 있었다
발톱 한 귀퉁이에도 제 모습이
남아있지 않게,
나는 이 사실을
사랑은 베어지지 않는다는
이 엄청난 오류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랑 발을 집어 들고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소리 질렀다
돌아다 본 사람들은
그게 이전부터
어둠이라고 우겨댔다
내 가슴에서 배어져나간
사랑의 발임을 믿지 않는 동안
실은 그게 나도 모르게
어둠이 되어버린 나의 발임을
사람들이 어둠을 보지 않고
나를 보며 웃는 이유를
나는 비로소 알아채고 소스라쳤다
얇은 바람 이빨에도
삭둑삭둑 잘려지는 보드라운 잎사귀
사랑아,
집을 나가면 지나온 길을 잊어버리는
그러므로 되돌아 올 줄도 모르는
눈썰미 없는 사랑아~
하고 나는 골목어귀에서
지는 해를 붙잡고
찾아낸 사랑의 발을
그 어둠을 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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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의 삶
김지향
잘 익은 봄 거리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깨끗이 세탁된 볕이 만리로 뻗은 오늘
사람은 모두 볕이 차단된 방에서
컴퓨터 몸을 만지며 쏟아져 나오는 깨알 글자의
바둑알 부딪는 소리에 빠져들어 있다
컴퓨터 바둑알 소리로 팽팽한 방에서
헤엄치는 사람의 눈과 손은
바깥 세상의 산과 들이 게우는 생선
비늘 같은
생기와 햇볕을 모두 만진다 그리고 지워버린다
바깥 기억들이 점점 지워지는
컴퓨터가 사람 몸 속에 들앉은
방안의 삶
지난 세대에겐 낯익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잘 맞춰 입어야 할 컴퓨터 삶의
한가운데 와 있으니
이젠 컴퓨터 생리에 길들여져야 할밖에
시간과 손잡은 컴퓨터의 속력이 불편하다고
컴퓨터 생리가 너무 빡빡해
시간 밖 세계로 궤도 이탈하고 싶다고
그녀는 투덜대지만
자꾸 뒤로 밀리는 그녀 두뇌가
궤도 이탈을 연기해 낼지?
궤도 이탈을 위해 눈을 접고
활짝 날개를 펴 볼지?
창 밖 잘 익은 봄 거리가 그녀를 맞으려고
깨끗이 세탁된 볕을 깔아놓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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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공간
김지향
어제까지 거뭇하게 그을린 길이
새하얀 살에 금을 내고 간다
창밖엔 꽁꽁 얼어붙은 허드레 세상이
속살을 내놓고 앉아있다
빳빳한 허공을 붙들고
척추를 연거푸 눕히는 눈발을 베며
한 줄로 줄서기 하는 갈가마귀 떼
허공에 대롱대롱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다
쉬지 않고 오는 눈발에 매 맞는
가로수 하얀 바지가랑이 사이
자꾸 뒤로 미끄럼 타는 차량들이
와글와글 끓고 있는 구세기 세상
누더기 소리들을 깔아뭉개는 중이다
별똥별도 숨어버린 밤
백지로 채워진 공간에 남은
한물간 세상도 죽어 있다
내일 새 세기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햇빛은 날을 펴 놓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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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허물기
김지향
바람도 빗겨간 가슴 넓은 산줄기를 안고
안개가 명주실 치마폭을 말아 올리는 중이다
햇살이 아득히 먼 발아래서 자꾸 바스라진다
새파란 가슴을 드러낸 산줄기들 바람에 쓸린
기러기 한 두름 안아드리고 있다
방금 마악 허공 위의 하늘을 찢으며
치솟은 우주선 한 채,
우주선을 타고도 세상을 내다보는 사람들 손엔
손가락만한 디카 폰 하나씩 들려있다
디카폰은 잽싸게 구름 살을 헤집고
옆으로 지나가는 세상 풍경에 드르륵
밑줄을 그으며 풍경눈알에다 새겨 넣은 의미를
몽땅 베껴 낸다
우주선이 우주정거장에 발을 내릴 땐
우주에서 발사하는
발통 없이도 시간을 잘 굴리는 비행접시 몇 채
세상 창공으로 떠난다
바람소리만 걸려있는 지상정거장에는
수많은 어린왕자들이 버들가지처럼
가느다란 키를 휘청이며 별을 찾고 있다.
(세상에서 하늘 위의 하늘로 오가는 사람들 일찌감치
육체에서 육체 위의 육체로도 들락거리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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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내 눈에서 뜬다
김지향
내가 만지는 사물마다 머리 조아리며 굴리는
쟁·쟁한 은방울의 합창
별은 내 눈에서 뜬다는 발신음 한 소절을
또렷하게 열린 내 귀가 또박또박 주워먹는다
지난날 하늘의 셀로판지에 반점으로 돋던 별
그가 이제 보니 내 가슴에 새파란 피멍으로
푸욱, 박혀 알을 낳는지 삽시간에
나의 우주가 청보석 복사기가 되었네
(내가 눈을 뜨지 않으면
가슴의 블랙홀 벽에 낳은 알을 주욱―
널어놓는지?)
오늘은 내가 별에게 신발을 신겨준다
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에게서
새로 그린 삽화 한 장 튕겨나가듯
단숨에 블랙홀 요새를 철거해버리고
고속 디지털 안테나를 타고 뛰쳐 나가네
(하늘도 하늘의 하늘도 아닌
내가 눈을 얹는 거기에 작은 우주같은
내 별은 수도 없이 내 눈에서 뜨지만)
별아, 이제는 해산의 아픔도 없는
별아, 이름도 얼굴도 성별도 자주 몸 바꾸는
별아, 내가 목청껏 불러도 빙글빙글 바뀌는
성대로 나를 어지럽게만 하는
별아, 이제는 그만 내 눈에서
뜨지 말았으면 좋겠다.
☆★☆★☆★☆★☆★☆☆★☆★☆★☆★☆★
봄 명주실 웃음
김지향
오늘 문득 실바람이 세상을 열어젖힌다
실바람 손에 든 초록 칩을 나뭇가지 겨드랑이마다
꼭꼭 묻는다 나무 겨드랑이엔 초록 손톱이 돋아나고
손톱 밑에선 뽀르통 내민 새 입술을 열어
진달래 개나리 초롱꽃 뻐꾹채 노루귀 제비꽃
줄줄이 명주실 웃음을 좌악 널어놓는다
실바람 요술지팡이에 올라탄 나비 몇 마리
몇 됫박씩 꽃가루를 흩뿌리며 세상의 몸에 봄을 입힌다
깔 깔 깔 세상은 종일 명주실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세상 웃음을 따라 날아온 제비도 명주실 웃음을 날개에 태워
우주 밖으로 날아가느라 부산떤다
나는 종일 봄 웃음을 퍼먹으며
한 발 더 진화한 세상 속에 서 있다
☆★☆★☆★☆★☆★☆☆★☆★☆★☆★☆★
첫댓글 처음 대하는 김지향시인님의 시향속으로
시모음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 가득한 날되세요 김용호님^^
김지향님의 시어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늘~
수고하심에 감사한 마음 고개 숙여 전합니다.
환절기 건강에 유의 하시고좋은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