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부터 봄이 그저 오는 법이 없다는 의미로 날씨가 한바탕 날궂이
구정 추위를 선사한다. 허기사 하기 좋은 말로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는
말도 있다. 그래야 농사에 피해를 주는 해충들도 죽기 때문이다.
구정도 벌써 지나고 입춘도 지났는데도 추위가 가실 줄을 모른다.
이럴 때 흔히 떠올리는 문귀가 '춘래불사춘'으로 왕소군(王昭君)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왕소군은 중국 전한(前漢)의 황제인 원제(元帝, 재위: 기원전 48~33년)의
궁녀였다. 그녀가 흉노의 선우(單于)에게 시집가게 된 배경에는 당시의 화친 정책과 궁중
관행이 얽혀 있다.
1. 왕소군이 궁녀가 된 배경
왕소군은 중국 서한(西漢) 시대의 미인으로, 후궁으로 뽑혀 입궁하였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당시 한나라의 후궁들은 '궁중 화가(畫師)인 모연수(毛延壽)'가 그린 초상화를 황제에게
올려야만 선택받을 수 있었다. 워낙 많은 후궁들이라 일일이 보면서 선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많은 궁녀들은 화가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을 아름답게 그려 달라고 부탁했지만, 왕소군은 이를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모연수는 왕소군의 초상화를 일부러 못생기게 그렸고, 황제는 그녀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2. 흉노와의 화친 정책과 왕소군의 희생
당시 한나라는 북방 유목 민족인 흉노(匈奴)와 자주 전쟁을 벌였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친책
(和親策, 결혼 동맹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기원전 33년, 흉노의 선우(單于)였던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한나라 조정을 방문하여 한나라 황실의 여인을 부인으로 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는 여러 후궁 중에서 누구를 보낼지 고민하다가, 황제의 눈에 띄지 않던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3. 황제의 후회와 왕소군의 운명
왕소군이 흉노로 떠나기 전, 황제는 처음으로 그녀를 직접 보게 되었고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보고 크게
후회했으나 엎지러진 물이었다. 그제야 황제는 모연수가 초상화를 일부러 엉터리로 그렸다는 사실
을 알게 되었고, 분노하여 모연수를 처형했다.그러나 이미 정치적인 이유로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기로 한
이상,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왕소군은 어쩔 수 없이 흉노로 떠나 호한야 선우의 부인이 되었으며, 후에 그와의 사이에서 자녀도 낳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한나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흉노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흉노에서 읊었다고 전해지는 시가 바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즉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라는 구절이다.
이 말은 겉보기에는 좋은 상황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마치 지금 한국의 상황을 잘 대변해 주는 것 같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중국 한나라 시대의 미인 **왕소군(王昭君)**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유래한 표현
이지만, 왕소군이 직접 읊은 시로 전해지는 정확한 원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문구는 일반적으로 그녀가 한무제의 궁녀로 있다가 흉노의 선우(單于)에게 시집가면서 한 말이나, 후대 문인
들이 그녀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창작한 시 속에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와 관련된 시로 가장 유명한 것은 **명나라 시인 마치원(馬箎園)**이 쓴 시로 원문은 다음과 같다.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草木知春不久歸(초목지춘부구귀)
百般紅紫鬥芳菲(백반홍자투방비)
只有昭君淚垂盡(지유소군루수진)
春來不似舊時春(춘래불사구시춘)
해석: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구나.
초목들은 봄이 오래 머물지 않음을 알고
온갖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는데
오직 왕소군만이 눈물을 흘릴 뿐이니
봄이 와도 옛날의 봄 같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