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사람들이 영산 3,1절 줄당기기 구경을 간다고 야단 법석이다.
영산 갈 차비도 없었거니와 버스가 만원이라 엄두도 못내고 걸어서 영산까지 간다.
버스 정류소 좁은 길은 빠져 나오면 한개 다리까지 둑방길이 쭈~욱 뻗어 있다.
왼쪽으론 동포수리 들이 끝간데 없이 펼쳐있고 오른쪽에는 낙동강이 유장하게 흐르고 있다.
정 대수 방앗간 옆에 우리 논이 한 구역 있었다.
그때는 참새가 무척 많았다.
쌀 한톨이라도 더 건지기 위해서 할머니와 나는 새를 쫒으려 논에 나간다.
끝자락에 댓닢이 두,세 뭉큼 달린 길다란 대나무를 아래 위로 흔들며 후야~ 후~~ 를 연신 외치며 새를 쫒는다.
어린 나의 작은 목소리에 논에 나락을 쪼아 먹던 참새들이 푸드덕 하늘로 날아 다른곳으로 날아가고
다른 논에서 우리 논으로 날아오던 참새들도 나의 새 쫒는 소리에 놀라 다른 곳으로 날아 간다.
할머니는 이런 나의 노력에 아이구 내 새끼 새도 잘도 쫒는군 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장죽대에서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 내며 한 시름 놓는다.
그 칭찬에 힘든 줄 모르고 참새를 쫒던 우리 논을 바라보며 걸어 간다.
얼마 안가면 본동으로 이어진 작은 둑길 아래 생이집(상여)이 하나 있었다.
소문에 생이집에는 귀신이 살고 있다 하여 대낮에도 그 옆을 지나가기가 으시시 하여
그 옆을 지나칠때는 얼굴을 돌리고 줄달음을 쳤다.
한개 다리쯤 지날 때 버스 한대가 하얀 먼지를 일으키며 손쌀같이 지나간다.
버스 안은 콩나물 시루같이 많은 사람을 태우고 나를 아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은 손을 흔들며 먼지만 남긴채
둑넘어 사라진다.
송진 입구에도 우리 논이 한구역 있어 어머니와 모심기 한후로 땅에 제데로 심어 지지 않고 떠 있는 모를 다시
심기위해 어머니를 따라 다녔던 일로 인해 송진 동네는 나설지 않아 버스가 다니는 길이 아닌
송진 산모뚱이 뒷길을 해서 질러 갔다.
그늘진 산 모퉁이 길에는 한적하였다.
산바람과 들 바람에 발은 시리고 손은 곱아 가지만 구경 하고픈 마음을 꺽지는 못했다.
산모퉁이를 벗어나 찻길에 올라서니 영산의 높은 산에 한 눈에 들어 온다.
그 곳에서 영산까지는 내 걸음으로 족히 두어 시간을 걸렸을 것인데 어떻게 갔는지 영산에 도착하였다.
사람들이 남지 장날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네 뎃 시간 걷고 나니 시장끼가 돌아 구경은 천천히 하기로 하고 배부터 먼저 채울 심상으로 우리집 밑에
떡 장사하는 구야 엄마를 찾아 나섰다.
사람들에게 시장 떡 파는 골목을 물어서 가보니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구야 엄마가 떡 판대기를 앞에 놓고
떡을 팔고 있었다.
배가 고파선지 그때는 우리 어머니 만나것 보다 더 반가웠다.
버스로 먼지를 둘러 쓰고 영락없는 거지 행색을 하고 구야 엄마에게 아지매 떡 좀 주~우소 하니
아니고 니! 유수 아이가? 니 혼자 왔나? 버스 타고 왔냐? 아이미더 걸어서 왔습니더 하였더니,
배고프제! 배 고플끼다, 하면서 쟁반에 떡을 담아 주면서 천천히 먹어라 급히 먹어면 채 한다.
아지매가 먹고 싶은 만큼 떡을 줄때니 걱정할지 말거라 하면서 다른 손님에게 떡을 팔면서 연신 나를 쳐다 보면서
손으로 어여 먹으란 신호를 보낸다.
허겁지겁 몇개나 먹었는지 더 이상 떡이 목에 넘어 가질 않는다.
아지매에게 먹을 만큼 먹었다 하였드니 떡 종이에 떡을 싸서 나중에 구경하다 배고프면 먹어라며 여분의 떡을 건넨다.
떡을 반을 갈라 학생복 주머니에 넣고 함박산 약수를 마시려 함박산에 올라 갔다.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사람들 틈을 비집고 겨우 약수 함모금을 마시고 장터로 내려 왔다.
장터에는 굵고 기다란 암줄과 숫줄이 큰 나무로 걸고리를 하여 일대 회전을 기다리고 결전의 순간만 기다리고 있고
대장을 앞세운 서군과 동군의 풍물패는 연신 분위기를 어르고 대장을 목검을 좌우로 흔들며
각자 진영에 사기를 북돋우고 각 동네 사람들은 대장 뒤를 다르면서 풍물패의 장단에 빠져 들고 있었다.
장소의 착오가 있는지 모르지만 한쪽의 대장이 분장은 하였지만 분명 천종욱 어머니 였다.
어찌나 반갑던지 나도 모르게 말 옆에 따라 다니며 흥에 빠져 들었다..
한참 동안 줄을 어르고 교합의 순간이 다가오자 분위기는 절정에 도달하였다.
심판관의 총소리가 탕탕 두번 울리자 이영차, 이영차, 영산 고을 이 터져 갈 것 같은 함성이 울리고
나도 종욱이 어머니 편에서 줄을 힘껏 당겼다.
이런 교합이 얼마간 진행 되드니 다시 탕탕하는 두발의 총성이 울리자 모두 줄을 놓고 승패가 갈렸다.
어느 동네가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하여 아마 그 동네가 이겼는지 승자와 패자가 한무리로 엉켜
모두가 축제의 장을 만들어 간다.
이긴 쪽 줄은 어른들이 칼이나 낫으로 잘라 지붕위에 얹져 두면 액운을 막을수 있다고 하여 잘라서 가져 간다.
지금도 영산 삼일절 줄 당기기는 지방 무형 문화재로써 계승 발전 시키고 있지만
그 어린 나이(초등 3,4학년) 영산이란 먼 길을 외롭고 무서움도 견뎌 내면서 고생한 보람으로
좋은 추억 한편을 가지고 산다는게 소중한 자산이라 생각한다.
우리 인생도 하나의 길이다.
지금 가고 있는 길, 앞으로 가야할 길, 하지만 되돌아 보면 후회 없는 길이 되도록 모두 주어진 길을 열심히 걸어 갑시다.
첫댓글 나이 들어서는 추억을 먹고 사는 게 우리네 인생이거늘....
지나간 기억이 아름다운것은 슬프게도 우리들이 늙어 간다는것, 도천에 있는 복숭아밭에 갈때 상여집이랑 질러가는 송진길이 내눈에도 선 합니다.
광수짱님 어릴때 추억을 읽어니 코끝이 찡하기도하고 재미 있기도 하네요...나는 가보지는 않했지만 우리 동네에서도 함박산에 약수물 먹어로 많이 가든데 ...요즘도 약수물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짱님은 그시절 용기가 좋은건지 별난건지 알수 없지만 그곳까지 갔군요. 난 용기가 없어 마음 속에만 품고 알았거던요.
지금은 얼마 안되는 지척인데, 그래도 그시절이 그립군요.
추억만 먹고 살아도 배부르겠네 ㅎㅎ
이 이야기를 들어니 내가 장날에 엄마 따라 언젠가 장에 갔을때 찐빵이 그렇게 먹고 싶어도 배불리 못먹었는데
중학교 시험 치고 오면서 울동네 친구들과 남지지서앞에서 파는 찐빵을 실컷 사먹은 생각이 나네요
세상에 이런일이란 주제로 요즘 대본을 쓴다면,감동연출 100%충만한 작품인것 틀림 없겠다.
잘 읽고가는데 글값은 언제 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