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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일 없는 분만 읽으소~~^^*
*옛길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 우리나라 옛길을 잘 나타내 주고있다.
영남대로는 부산 동래에서 그 출발점으로 한다. 양산을 거쳐 밀양 삼랑진을 지나 청도 팔조령을 넘어 달성 가창에 이른다. 그리고 대구, 칠곡 다부동, 구미 장천 해평, 낙동나루에 이르러 상주 사벌, 함창, 문경 유곡동, 관갑천잔도를 넘고 문경새재를 넘어 충청대로의 시작점인 충주, 용인을 지나 서울로 향하는 천리 길이다.
이 길은 가문의 영광과 출세의 꿈을 안고 걸어 올랐던 선비들의 과거 길이었으며, 금의환향 그림자에 숨어 낙방의 고배를 마신 사람들이 쓸쓸히 내려걷던 길이며, 보부상들이 등짐과 봇짐을 지고 지나다녔던 길이다. 또한 관리들이 영남지방에 부임되어 나아갔던 길이며, 일본으로 가기위해 조선통신사들이 지났던 길이다. 아프게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서울을 향해 질풍노도처럼 밀고 올라왔던 길이니 오욕의 역사와 함께 상처와 영광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개 하나, 나루 하나에도 온갖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수많은 사연들이 쌓여있을 것이며, 우리 민족 고유의 애환이 담겨져 있는 곳이다. 바로 슬픔까지 아름다운 서정으로 정화시켜나가는 시점이 되는 곳이다.
길이 산을 만나면 고개가 되고, 물을 만나면 나루가 된다. 문경 [옛길박물관] 자료집에 나온 말이지만 산은 하나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고, 물은 여러 갈래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그래서 물은 물이 되고, 산은 산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러 갈래의 생각이 모여 하나의 생각으로 합쳐지고, 하나의 생각에서 여러 갈래의 생각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 세상이야 더 빨리 더 빠르게 초스피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디지털을 넘어 아날로그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것에는 빠름의 편리함, 그것에 뿌리칠 수 없는 강력한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느림의 미학’, 어느 시인의 말씀처럼 등짐을 지고 길을 나섰을 때, 나는 항상 그 말을 되뇌인다. 한 폭 여유의 참맛을 즐기기 위함이지만 생각도 풀어놓고, 일상도 접어놓는 물 흐르듯 길을 간다.
* 토끼벼리 옛지도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밀란 쿤테라가 한 말이지만 기억도 망각도 내 자신에게서 출발점이라면 구태여 거부하지 않겠다. 특히나 존경하는 선생님과 함께하는 답사라면 어디든 가지 못할 곳이 없으며 나를 들뜨게도 한다. 그러나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나서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영남대로, 즉 관갑천잔도를 함께 가자는 연락을 받았다. 하루 전 밀양에서 시작한 영남대로길에 다음 날 대구에서 합류하여 다부동을 거쳐 해평, 상주, 문경새재까지 일정을 일어주셨다. 나름대로 답사를 다녔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지금껏 문화재에 매료되어 영남대로를 답사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 터라 내게는 사전 지식이 필요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약간의 정보를 담아 두었지만 당시의 감성이나 시대인이 될 마음자세는 충분하지 못했다. 때문에 대구에서 선생님을 만나 서울로 가는 편리함을 내세워 문경서 거꾸로 내려오자는 무지한 제안을 하게 되었지만 역시 거부당했다. 하루 종일 부끄러워지는 마음을 수다로 대신하는 무례까지 저질렀지만, 늘 좋은 웃음으로 화답해 주시는 선생님 덕에 잊을 수 있었다.
전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선생님이 걱정이었다. 예상은 맞았다. 아마도 밀양에서 추위에 홀로 고전하신 모양이었다. 뚱뚱한 체형은 더위에 약하고, 마른 체형은 추위에 약하다는 통설을 확인시키는 한 말씀. “여유 있으면 파카 한 벌...”
다부원.
오늘 첫 일정은 옛날 다부원이 있던 다부동이다. 벗과 함께 셋이서 대구를 지나 칠곡 가산,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닿았다. 영남대로라는 먼 역사적 사실보다 가장 근래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전선, 우리 민족 잊을 수 없는 동족상잔 비극의 현장이다. 당시 낙동강 방어선은 동해안 영덕에서부터 대구 가산, 경남 창녕 남지까지 방어선이 구축 되었다. 전쟁이란 이기든 지든 약하고 힘없는 백성들의 참혹한 희생을 등에 업고 치르는 것이다. 다시는 이 땅에 일어나지 말아야 할 비극인 것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이름 모를 유해들이 곳곳에 묻혀 있다. 기념관을 둘러보며 빛바랜 사진들을 본다.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무덤덤한 마음이지만 실로 근래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해평.
다부원을 지나 가산 천평을 거쳐 간다. 옛날 걸어서 다녔던 그 길을 문명의 편리함에 묻어 쉬이 지나치고 대구와 상주를 잇는 영남대로상의 요충지인 구미 장천 산동면(①)을 지나 구미 해평에 이르렀다. 때마침 벼 수곡하는 날인 듯 벼 가마니를 실은 트럭들이 몇 백 미터를 길게 늘어서 있다. 간간히 트럭 대신 경운기에 높이 쌓아올린 가마니를 보면서 옛날 트럭대신 우마나 지게를 내려놓고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당시에도 수곡하는 날이 따로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풍경이다. 일 년 벼농사의 수확을 확인하는 기쁜 날이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니, 쌀이 남아돈다는 풍요의 시절이 얼마 전부터의 일이다. 식량자급자족과 성장주의가 휘두른 권력에 평등을 외치며 피눈물을 쏟은 선구자들 뒤켠에 헤게모니에 잠식된 민초들의 환호도 역사적 사실이다. 끼니를 감자나 옥수수로 대신한 기억의 어린 시절, 호롱불 켜 놓고 둘러앉아 먹던 기억이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참고자료① /「한국지명총람」신정일.『영남대로』휴머니스트 /상림역: 장천면 상장리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중요한 역으로써 중마2필, 하마2필, 역리 227명, 노비 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해평장터를 걸었다. 낡은 방앗간의 모습과 미장원 다방 세탁소 갖가지 점방의 간판들이 현대식 건물과 함께 옛날의 과거 잔재들이 조금 남아있는 시장터였지만 지금은 퇴락되고 말았다. 내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시끌벅적 했던 옛날을 상상해 보는 맛은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거나 상상의 폭이 자유로운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 좁은 골목길을 보면서 햇살에 쪼그리고 앉아 이젤 펴놓고 수채화에 담던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여전히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다. 이제사 떨어버릴 때도 되었건만.
지난 답사에 찾았던 선산 도리사 입구를 지나 낙산동을 지난다. 이곳 논밭 한 가운데 서 있는 신라석탑이 생각났다. 내 정서에 제일로 꼽는 석탑을 바람처럼 지나치니 애정에 못다한 사연이 하나 쌓이는 느낌이다. 바로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이다. 미련은 미래를 약속하게도 한다. 봄날에 꼭 한 번 찾아올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랜다.
낙동나루.
선산 도개를 거쳐 낙동나루에 이르니 낙동나루 위의 관수루를 눈앞에 두고 찾지 못하다가 작은 사륜오토바이를 탄 할머니의 도움으로 찾을 수 있었다. 조기 아래가 소금을 쌓아두었던 염창이란 마을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신 할머니는 차들이 씽씽 달리는 길옆으로 살살살 지나간다. 할머니가 타고 있는 전동차와 고운 할머니 모습과 그것이 내는 속도와 어쩜 저리 어울릴까 싶었다.
관수루에 올라서니 찬바람이 볼을 지나친다. 탁 트인 낙동강을 굽어보고 멀리 가을 햇살에 물빛이 아름답다. 해방 전까지 부산에서 온 소금배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안동과 예안으로 올라가던 길목이었으며, 1970년대까지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이곳이 낙동나루이다.(참고자료①과 같음) 누각에 걸려있는 현판에 글씨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점필제 김종직, 그의 제자 탁영 김일손의 글을 사진에 담고 더듬더듬 읽고 있자니 선생님께서 답답하셨던지 점필제 김종직의 글을 읽고 그 뜻을 알려주시니 그저 부끄럽고 감사할 따름이다. 어린 시절을 또 하나 우려먹자면 내 동무들은 따뜻한 사랑방에서 아버지께 한문을 익히고, 나는 신 새벽 절간에서 치는 종소리에 맞춰 일어나 신문배달을 나가곤 하였다. 아마 그때부터 한문 깨우치기를 삐딱한 사고로 보았으니 어린 소년의 좁은 소견을 탓한다. 궁하면 통한다고 하니 한자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黃池之源纔濫觴 황지의 근원 물은 겨우 잔에 넘치는데
奔流到此何湯湯 달리고 흘러내려 이곳으로 와서 넓기도 한지고.
二水中分六十州 두 강물이 나뉜 곳 예순 고을이 나뉘고
津渡幾處聯帆檣 나루터 몇 곳에는 돛단배가 너울너울.
海門直下四百里 사백리를 내리 뻗어 바다에 다다르고
便風分送往來商 풍편을 이용해 오가는 상인들의 배가 분주하네.
朝發月波亭 아침에 월파정을 출발하여
暮宿觀水樓 저녁에는 관수루에 숙박하네.
樓下綱舡千萬緡 누각 아래 그물배엔 천만금을 실었으나
南民何以堪誅求 남쪽의 백성들은 가렴주구 못 견디어
ꝛ甖已罄橡栗空 병과 독엔 도토리도 밤도 벌써 다 비었는데.
江干歌吹椎肥牛 강가에는 노래 부르며 살진 소를 잡는구나
皇華使者如流星 나라의 사신들은 유성같이 뽐내며 지나가고
道傍髑髏誰問名 강가의 해골들 그 이름이나 묻겠는가?
少女春風王孫草 소녀들 봄바람에 흥겨워 왕손초라 이르네.
遊絲淡淡弄芳渚 노니는 가락 담담하게 방저를 희롱하고
望眼悠悠入飛鳥 시야에는 유유히 비조가 들어온다.
(이하 줄임)
- 佔畢齋 金宗直 -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은 조선 성종에 의해 훈구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의 영수로 천거되었던 인물이다. 비록 한말에 들어서 양반문화, 좁게는 사림들의 피폐가 대두되고 양반사회 그자체가 국가권력을 쇠퇴시켰으며,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외면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지만 당시 훈구세력들의 가렴주구를 바라보는 사림들의 정신적 사상들을 느낄 수 있는 김종직의 글이며, 당시대의 생활상들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옛날 그렇게 복작였을 낙동나루 그곳에는 몇몇의 식당들의 굳게 닫힌 문이 을씨년스럽다.
유곡역.
낙단교를 건너 점촌 유곡으로 향한다. 유곡幽谷, 이름 하여 그윽한 골이란 이곳은 200여리에 걸쳐 187개의 역을 관찰했던 찰방역이 있던 곳으로 고려시대부터 상주도의 으뜸 역이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내려와 부산과 통영으로 갈라지는 곳이었으며, 임진왜란이후 변방으로 가는 공문서를 신속하게 전달하기위해 파발참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참고자료①과 같음) 지금에야 쭉쭉 뻗어있는 도로에 이럼처럼 그윽한 골의 이름이 무색하게 되었지만 찾아가는 길이 쉽지가 않다. 공덕비들이 나열되어 있는 지금에는 비석거리에 있던 것을 점촌북초등학교 앞으로 모두 옮겨놓았다. 그곳에는 유곡역의 찰방들과 어사 박문수 등이 주민들을 보살폈다는 내용이 있다. 공덕비야 원래가 주민들이 전직 관리의 공을 기려 만들어 놓는 것이지만, 간혹 자신의 임기동안에 만든 것들도 있으며, 요즘 법관들에게 유행하는 전직 예우차원에서 만들어 놓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 인류학자 알랭 페일피트는, 벼슬을 지낸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내제되어있게 마련인 이 같은 예우 망상증을 눈병의 하나인 시야 암점증視野暗點症에 비유했다. 이 눈병에 걸린 사람은 두루마리를 통해 사물을 보듯 시점視點만 보이고 시야는 보이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이 눈병을 의식세계에 도입하여 과거에 사로잡힌 아집과 망상의 병명으로 삼았다.(참고자료② /이규태.『떡값의 한국학』.기린원)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세태를 보며 생각난 것이다. 벼슬이란 입고 벗는 옷과 같은 것일 뿐, 한 번 입은 옷에서 얻은 영화가 영원한 것으로 믿는 어리석은 자들의 아집과 망상의 병에 걸린 행위들이 아니었는지 공덕비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화두다.
햇살은 맑으나 바람은 여전히 차다. 유곡역 터를 찾는 길이 쉽지 않다. 답답해하시는 선생님을 본다. 그러나 근방 어디엔가는 알겠지만 동네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모른다는 말 뿐이다. 기차도 다니지 않는데 무슨 역이냐고 되려 무안만 당했다. 철저하지 못했던 준비가 부른 실수였다. 포기하고 돌아서는 선생님께 무진장 미안했다.
토끼비리 관갑천잔도.
문경은 삼국시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세력이 각축을 벌인 충돌지역이었다. 문경聞慶의 이름처럼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고 하여 과거길에 나선 선비들이 꼭 지나는 곳이었다. 하여 죽령은 죽 미끄러진다고 하여 피했으며,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하여 피해갔다고 하니, 시험 날 아침 미역국을 먹지 않는 지금의 세태와 무관하지 않은 우리 민족의 소망이 이름에도 묻어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관갑천잔도를 찾아가는 길에 잡풀우거진 작은(영강)내를 만났다. 안내판에 의하면 300m가면 토기비리(벼루), 토천兎遷 관갑천串岬遷에 이르는 돌다리를 만날 수 있다고 되어있으나 길을 찾을 수 없어 그냥 쉬이 편한 자동차로 돌아서 고모산성 입구에 올랐다.
오는 봄날을 잡아 유곡역터를 찾아 지난 미련을 다독이고, 이곳에서 잡풀을 헤쳐 돌다리를 건너 관갑천잔도, 고모산성을 거쳐 문경새재까지 걸어보리라 계획을 해 놓고 있다. 장똘뱅이 특성상 몇날 며칠을 걸어 다부원에서 문경새재까지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곳만은 기필코 실행에 옮겨보고 싶은 욕심이다.
원래가 안내판이 있던 곳에서 물을 건너고 험준한 토끼비리를 넘어 고모산성에 이르지만 뒷길을 차로 올라 고갯길에 있는 성황당과 주막을 먼저 만나 잠시 사진만 담고 고모산성을 지나 토끼비리를 역으로 걷는다. 고모산성에서 왼편으로 난 산성을 따라가다 보니 잔도가 나타난다.
고려태조 왕건이 신라를 돕고자 군사를 일으켜 남하하다 이곳에 이르러 길이 막혔다.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길래 쫓아가다보니 길을 낼만한 곳을 발견하여 벼랑을 잘라 길을 냈다고 한다. 토끼비리, 즉 토천이란 이름이「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진다. 관갑천잔도, 즉 잔도殘徒는 나무사다리 길을 말하며, 천도遷道는 하천의 절벽을 파내고 만든 벼랑길을 말한다. 절벽과도 같은 산허리를 따라 6~7리나 이어진다.(참고자료③ 문경새재 [옛길박물관] 해설 자료집) 바로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준한 길이다.
훤칠한 키에 성큼성큼 앞서 걷는 선생님을 따라 열심히 걸어본다. 바라보는 시야도 관찰하며, 담아내는 사진자료도 궁금하다. 어떤 곳을 중요하게 바라보는 가를 배우는 제자의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일까? 20여 이상의 낭떠러지 옆으로 난 길을 걷는다는 것은 긴장을 하게 마련이지만 앞서 걷는 뒤를 따라 걷는 게 훨씬 편리하다는 것을 느낀다.
낙엽 쌓인 길을 걷다보니 뺀질뺀질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던 토끼벼랑이 나타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을까? 희망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흔적 속에 그렇게 닳아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경북팔경 중 가장 으뜸이라는 진남교 주변이란 뜻의 진남교반이다. 진남교아래 진남마을이 보이고, 낙동강 지류인 가은천과 조령천이 영강에 합류하다가 돌아 나오는 지점이다. 이곳을 지났던 선조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까? 다리에 한껏 힘을 주고 조심조심 걸었을 그곳을 무심히 걷는다. 이 길 하나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엮어있을 법하지만 처음 풀어놓았던 글에처럼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수없이 많은 사연들이 쌓여있을 것이며, 우리 민족 고유의 애환이 담겨져 있는 곳이다. 만약 지체 높은 관리와 비루한 민초가 중간에서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로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버렸을까? 참으로 암담한 역사일 수밖에 없는 지랄 같은 길이다.
최영준 교수(고려대)는 “조선시대 교통체제의 후진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도안전無道安全’, 즉 도로가 없는 것이 안전하다. 는 당시의 지배층 중에는 도로는 왜적의 침입을 끌어들이기 쉽기 때문에 도로는 마땅히 험준한 상태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참고자료①과 같음) 그렇지만 우리 역사는 여전히 침략 당하는 역사의 가운데 있었으니 소통과 발전이라는 대전제가 배제된 체 민초들의 힘든 역사가 지속된 것이 아닐까. 또한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은 험준한 문경새재를 두고 충주벌에서 왜군과 일전을 벌여 참패를 하고 말았으니 그 말이 무색할 뿐이다.(북방에서 위용을 떨친 신립장군은 기마용병술로 임하였으나 당시 하늘도 외면했던지 충주벌은 전날 내린 비로 땅이 물러져 말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사진에 담고 무심히 아래를 내려 보고 얼마를 걸었을까. 갑자기 가던 길을 중단한다. 더 걷는다는 것이 큰 의미를 두지 않았거나 아니면 시간 배분상 그렇게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토끼벼랑이 끝나는 지점의 풍경이 몹시 궁금했지만, 아마 충분히 관갑천잔도의 길을 경험했으며, 더 이상은 시간상 계산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만의 방식대로 미련을 남기는 것은 다음을 약속하는 즐거움도 있으니 쉬이 길을 접는다. 그렇게 걸었던 길을 처음의 느낌으로 되돌아 걷는다.
고모산성
안내판에 따르면 고모산성(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일대)은 신라가 이 지역을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한 1,500여 년 전 축조된 그 이후로 후삼국시대, 조선시대, 대한제국시대에 이르기 가지 증개축을 한 것으로 보인다.『징비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지키는 군사가 없어 왜군들은 춤을 추며 넘었다고 하는데 선생님은 이곳이 아니라 춤을 추며 넘었던 곳은 문경새재라고 의아해 하신다.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왜군이 몇 번씩 척병을 보내 확인 후 지키는 군사가 없음을 확인 하고 춤추며 넘은 곳이 문경새재란 것을 알았다. 당시 충주목사가 새재방어를 역설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에야 많이 정리가 되었지만 답사를 하다보면 전국 안내판에 지금도 오류가 간간히 눈에 띈다.
그렇게 찾은 고모산성에 복원이 한창이다. 굳이 옥의 티를 찾자면 복원이라 함은 옛날 것을 그대로 만들어 놓는 것인데 대리석에 깨끗하게 다림질한 듯 백색의 돌들이 눈에 띄며 또한 관문인 진남문 입구는 아치형의 홍예형태가 일반적이지만 긴 장대석을 가로로 걸쳐놓았으니 한 눈에 봐도 거슬린다. 자꾸 이마가 조심스럽다. 무엇이 그리 급하여 저렇게 급조를 해 놓았을까? 다른 곳에도 손질이 한창이지만 엄청난 공사비를 들여 구태여 이렇게 하는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고모산성에 올랐다.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며 지형에 따라 높이를 맞추어 축조해 놓았다. 위용을 자랑하는 본성과 익성을 포함하여 1.6Km가 넘으니 지금에 보아도 천연의 지형을 이용한 굳건한 요새이다. 이곳에서 구한말 가은출신 운강 이강년이 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상대로 민족 성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그는 결국 강원도 충청도 등지에서 많은 활약을 펼치다가 1908년 체포되어 순국하였다.(참고자료④/네이버백과사전 검색)
산성을 지나면 주막거리가 고갯마루에 있다. 온전한 예전의 모습처럼 아늑함이 묻어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을 주기에 충분하다. 옛날 지역에서 올라온 선비들이 모여 일전을 겨루었을 것이며, 보부상들의 걸쭉한 농거리에 웃음이 피었을 것이다. 또한 낭떠러지 길 천잔도를 힘겹게 걸어온 사람들이 막 고갯마루에 올라 땀을 식히며 잠시 한숨을 돌리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곳의 이름이 돌고개, 또 다른 이름은 꿀떡고개라 한다. 돌이 많아서 돌고개라 하였던지, 꿀떡을 파는 집이 있어 꿀떡고개라 하였던지 우리나라 고갯마루 어디에나 정겨운 이름들이 곳곳에 있다.
그 뒤로 당상목과 함께 성황당이 다소곳하게 놓여있다. 금봉 처녀와 과거를 보러 가던 영남도령 박달의 애달픈 사연이 있는 충북제천의 박달재 전설에서 보듯, 고갯마루 어느 곳인들 비슷한 전설이 있기 마련이다. 이곳 역시 비슷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옛날 과거길에 오른 어느 선비가 아버지와 딸만이 살고 있는 초가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선비의 범상치 않은 인물됨을 보고 자기 딸을 맡아달라고 간청을 하여 승낙을 받았다. 선비는 며칠을 머물다가 과거길을 재촉하고 급제한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급제한 선비는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수년이 흘렀다. 아버지마저 죽고 선비는 돌아오지 않자 처녀는 선비를 원망하며 자결을 하고 말았다. 원혼이 구렁이로 변해 이곳을 지나는 행인에게 피해를 입히자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그때야 알게 된 선비는 그 원혼을 위로코자 제사를 지내주고 달랬다는 줄거리 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처녀의 혼을 위로하고자 성황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문경새재.
새재, 새도 살아서 넘기 힘들만큼 험한 재란 말이다. 문경새재를 넘으면 충주땅이 나온다. 그곳에서부터 충청도 땅이니 영남대로 중 충청대로의 시작점이 되는 곳이다. 문경새재 초입에 [옛길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이름도 예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길을 주제로 한 전문박물관이다. 옛길과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잘 정리된 박물관을 돌았다. 땅 위에서 갈라지고 합쳐지는 산과 물의 속성을 따라 만들어진 크고 작은 길 위에서 소통이 주는 옛길에 대한 자료들과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있다.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길을 떠날 때 필요했던 물건들과 역사와 전설, 종교와 지역의 문화유산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온다.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한 지역박물관과 달리 뚜렸한 특성이 잘 나타나 있어 귀한 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그곳 학예연구사 안태현님과 미리 연락을 해 놓았던 터라 늦가을 추위에 차 한 잔으로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었으며 귀한 자료집도 한 권 얻을 수 있었다.
박물관을 뒤로하고 문경새재로 향하는 길이 넓은 신작로 같다. 지금에야 시원한 대로가 탁 트여있지만 욕심 같아서는 좁은 옛길을 희망한다. 그러나 지체 높으신 분들이 간혹 찾게 되면 달구지로 모셔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일 수도 있겠다. 길가 어사박문수를 비롯하여 공덕비들이 나열되어있다. 선생님 해석대로 임기 중에 만든 공덕비도 섞여 있으니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관리들의 공덕비들이 함께 초라해 질까 시비를 접는다. 드라마 촬영장을 지나자 하늘은 날씨 탓인지, 시간이 그만큼 지난 탓인지 사물에 회색이 묻어있다.
문경새재 3개의 관문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는 주흘관主屹關의 팔작지붕이 날개를 펼치고 위용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수문장의 검문검색도 받지 않고 쉬이 통과를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새도 함부로 넘지 못한다는 제 2관 조곡관鳥谷關을 향한다. 그러나 점점 어두워지는 날씨에 어제부터 여정에 힘들었을 선생님이 걱정되었다. 함께한 벗이나 선생님이나 걷는 품세로 보아 내친김에 문경새재 정상 3관문인 조령관鳥嶺關 까지 갈 기세이다. 물론 이곳까지 왔으니 응당 그래야 할 것이나 나는 늘 뒷걱정이 앞서는 장똘뱅이이다. 이곳 문경에서 서울까지 3시간이 넘는다. 하긴 옛날 몇 날 며칠을 걸어 다녔던 그곳을 3시간 만에 주파한다는 것에 무엇이 그리 걱정인가 만은 현실은 현실이었다. 점심 요기는 하였지만 벌써 저녁때이다. 나의배가 허전하니 선생님 또한 그럴 것이고, 짧지만은 않은 서울 길에 빈속으로 보내드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깜깜한 밤중에 말이다. 하여 마냥 욕심만 부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늘 아쉬운 게 답사 길이고보면 완벽이란 있을 수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더듬어 왔으니 이만에서 접어도 될 것이라 자위하면서 조심스럽게 돌아가자 운을 띠웠다.
되돌아오는 길, 친구가 운영하는 새재근처 식당에 들려 저녁을 먹고 선생님은 서울행버스에 올랐다. 밤 버스에 몸을 싣고 영남대로를 달리는 선생님의 느낌은 어떠할까? 피곤한 여정에 곤히 잠들지나 않았을까. 미련한 내게 귀한답사의 기회를 주신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이번에 다녀온 답사길을 되새기며 꽃피는 봄날에 다시 한 번 다녀올 것을 다짐하며 늘상 그래왔듯 여정의 뒤풀이를 위해 우리도 대구로 향했다. 그리고 영원히 내 지식으로 만들 후기를 위해 조근조근 기억을 되새김질 한다.
부족한 미련에 문경[옛길박물관]에 걸려있던 詩 두 편을 옮겨 적는다.
「조성일월」
-박득녕(1808~1886)
해마다 올라오는 한양이었으나
금년처럼 우울하고 쓸쓸한 여행은 없었다.
길동무도 없이 가는 발길이 너무 무거웠다.
낙방의 고배를 마신 뒤 쓸쓸히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새재」
-신경림
한양이라 오백리 길,
찾아가는 황소떼
두루마기자락 허리에 찌른
터벅대는 소몰이꾼
저것이 문경새재
서러운 서른 굽이
박달나무 젓은 이슬
키장수 체장수 눈물일까
봄바람 타고 올라왔다
찬바람에 묻어 돌아가는
안동 영해 청상과부
한 맺힌 눈물일까
저 고개 넘으면
새 세상 있다는데
우리끼리 모여 사는
새 세상 있다는데
이 詩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새재 길을 넘던 민중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익은 과일 따기”란 말이 있다. 강준만 교수가 지은『한국 근대사 산책. 권1』머리말에 나오는 글이다. 1차 자료가 아닌 2 ․ 3차 자료에 의존해 쓴다는 것을 강조해 하는 말이다. 물론 어디서 가져왔다는 윤리적 목적에 충실할 뿐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전문적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들의 학문성과 학구열에 경의를 표하면서 1차 자료까지 챙겨 읽는 다는 것은 저자에겐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답사를 떠나기 전에 얻는 지식이나 현장에서 얻는 감흥과 다녀와서 몰랐던 지식을 훔치는 일에서 솔직히 나 또한 더했으면 더했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전문가가 아니라 순수한 아마추어 시각에서 한 치의 벗어남도 없는 나이기에 하는 말이다. 순전히 내 것으로 소화시키려는 욕심이 과한 탓이라서 그렇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한다.
길어서 나누어 올리려 하다가 그냥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첫댓글 기회되면 길동무들과 함께 걷고 싶은 그곳인데...
이처럼 멋지게 소개해 주셨군요.
가까운 근처에 오며가며 잠시 등 기댈곳 만들어 놓은터에
답답한 마음에 겨울바람 마주하며 얼마 전 문경새재 일대를 다녀 왔습니다만
초시님은 옛길박물관 초입 홀로 서있는 선비상처럼
이 시대의 영원한 선비이십니다..
탁주를 끊으셨다하니 부산 답사때 밤바다 바라보며 담배 한 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시러버잡놈인 장똘뱅이인뎁쇼^^*.. 우드님캉 둘이서 한 번 돌아댕기고 시푸요~~!! 내일 뵙지요!!
엥? .....그리 좋아하는 걸 워떻게 끊었을까유?.....오랜만이구요.....멋진 글, 자주 감상케 해주셔요
오랜만입니당^^*.. 요즈음 바쁜일도 읍는데 글을 잘 몬써서.... 좋은일 있다믄서요? 미리 축하드립니데이~~!!
반갑습니다. 지금쯤 부산에서는 들썩들썩하시겠지요? 바쁜일 지나고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부산서 뵐 수 있을줄 알았는데 섭섭했습니다! 근처로 지나는 길 있으면 연락 드릴께요^^*.. 막걸리 딱 한 사발만 사주소~~
초시님 어제 만나반가웠구요 시간됨 찬찬히 발자취 따라 ~~~~~우선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에 뵙게 되어 정말 반가웠습니다^^*.. 여전하신 모습....
아름다운 글, 사진 잘 보았습니다. 부산답사 때 만나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언제 대구서 술자리의 낭만을, 초시님의 구수한 정담을 맛보고 싶습니다. 범초.
예, 참 뵙고 싶었는데 반가웠습니다^^*.. 언제고 환영입니다~~!!
할일도 많은데 한번 열어 읽으니 기냥 다 읽어부렀네 언제 한번 날 잡아 보자
니하고 함께라믄 금상에 첨화렸다~~!!
못 가본 곳이 하도 많아 문경세재쪽도 가보질 못했네요. 찬찬히 읽는 다는 것이 이제사 읽었습니다. 언젠가 그 길을 꼭 가보고 싶습니다. 초시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