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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스포츠 게시판 이탈리아 교과서에 나온다는 지도자의 자질 다섯가지
Lou Gehrig 추천 0 조회 1,413 09.08.17 21:13 댓글 4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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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8.17 21:16

    첫댓글 명박이는 4번 5번이 안습이구나.....-_-;;;;;

  • 09.08.17 21:17

    음... 강희제가 이래 낮다니,,,,, 좀 아깝네요.. 강희제 말년이..

  • 작성자 09.08.17 21:37

    제국경영에 있어서는 중국역대 황제중에 top이나, 문화적인 창의성이나 새로운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부문에는 취약했습니다. 또 정서적으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복고여론에 대한 간접적인 탄압이 있었고, 고증학이 발전하는데 토대를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설득력에서 평점이 낮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전제군주의 입장에서 통치한 사람입니다.

  • 09.08.17 21:40

    재밌게 봤습니다.

  • 09.08.17 21:58

    제 평가가 좋네요 ㅋㅋㅋ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09.08.17 22:33

    허약한 체질에 말년까지 통치의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72살까지 살았습니다. 그 시대 의료수준으로 생각하면 대단한거죠.

  • 09.08.17 22:57

    이 정도면 허약체질이라고 할 수도 없을 듯 -_-;

  • 09.08.18 00:28

    후계자들이 대기타다 먼저 갔죠

  • 09.08.18 01:52

    첫번째 점찍은 후계자가 조카였는데 요절했고 두번째는 절친 아그리파였지만 먼저 죽었고(카이사르와 같은 타입이죠. 잔병하나 없는...)... 그 다음에는 결국에 티베리우스로 갔죠.

  • 09.08.18 03:28

    이거 실제로 있는 건가요? 밑에 한국 대통령 빼고?

  • 09.08.18 09:14

    글쓴분 기준이네요 -_-ㅋ 루게릭님 기준으로 채첨한듯...

  • 09.08.18 09:18

    역시 다들 지도자들이라 1번은 거의 높네요.

  • 09.08.18 10:00

    마지막에서 심히 공감되는군요. ㅎ

  • 09.08.18 10:37

    카이사르와 상당히 유사한 캐릭터라고도 볼수 있는 후한말의 조조가 없는게 아쉽네요ㅎ

  • 09.08.18 10:41

    카이사르 같은 경우 제정으로의 길은 이미 마리우스의 병제개혁과 술라의 사병을 이용한 반란에서 이미 길을 열어놨다고 봐야죠. 물론 그 자신이 영민한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나 로마 제정의 시작이라고 보기에는 여러가지로 문제가 있습니다. 통치능력이라는 것도 결국 반대파의 반격에 죽임을 당한 인물이며, 실제로 카이사르가 어떤 한 지방을 오랜 기간 통치한 적은 한번도 없죠. (갈리아인의 1/3을 학살한 갈리아 통치는 통치가 아니라 압살과 전쟁이었죠.) 그러다가 정작 정적을 제거한 뒤 로마 전체를 통치하려다가 반대파에 암살 크리 맞은 인간이죠. 정책의 수준을 떠나 이런 경우 정치력에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고 봅니다.

  • 09.08.18 10:44

    분명 알렉산더-한니발을 잇는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대단했지만 천재 군인일뿐 재능과 무관하게 정치에서 보여준건 집정관으로서 잠깐 있던 몇년, 이베리아에 있던 몇년 정도인데 그 정도 레벨로는 위에 언급된 아우구스투스나 강희제의 레벨과는 안드로메다급 차이라고 봅니다. 그네들은 거대 제국을 수십년간 단독으로 통치한 레벨이니까요.

  • 09.08.18 10:47

    로마 역사에서 마리우스의 병제개혁으로 로마의 군대가 사병화 되면서 야심에 찬 장군에 의한 군사독재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었습니다. 그걸 몸소 보여준게 술라구요. 카이사르는 술라의 후계자지만 결정적으로 실제로 제정을 시작한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버지라는게 엄청난 의미로 작용하면서 마치 로마의 최초 황제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죠. 그러한 최초 황제라는 이미지가 훗날 유럽의 지배세력에게 크게 어필하여 카이사르에 대한 숭배가 어느정도 이루어지면서 과대평가 받은 면이 크다고 봅니다. 실제로 단테의 신곡에서 사탄이 입에 물고 있는 3명의 최고 악인은 카시우스, 브루투스, 유다 인데,

  • 09.08.18 10:48

    유다는 다 아실거고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두명 다 카이사르 암살의 주동자들이죠. 카이사르가 예수보다도 우위에 있죠;;;;;; 유럽의 지배층들이 결국 지배층에 대한 반역을 예수 자체보다 중요시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며 그러한 절대적인 왕권의 최초 상징으로서의 카이사르가 좀더 신격화되고 숭배화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 작성자 09.08.18 20:48

    제정의 의미와 독재를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이네요. 카이사르가 창안한 제정은 힘을 기반으로 한 독재가 아니라 합법적인 방식으로의 체제이전을 뜻하고, 다수의 의결로 매번 대사를 결정하는 시스템과 현 기득권층의 부조리가 얽힌 국가의 체질적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선택한 답안입니다. 문제는 카이사르가 각 파벌간 환국때마다 벌어지는 피의 숙청을 매우 꺼려해 원로원파 인사들을 다 끌어안고 간 것이었습니다. 정치적 이견이 분명하고 새 체제에 대한 이해도도 없는 인물들을 데리고 제정을 수립하다보니 결국은 레지스탕스를 겪은 것이죠. 그렇지만 술라처럼 살생부로 그들을 모조리 죽였더라면 카이사르는 제정을 수립한 첫 단계부터

  • 작성자 09.08.18 21:25

    대중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 언급하신 독재로 시작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이는 정치적으로 용단이었고 현명한 판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로원파의 인재들이 얼마나 수준이 떨어졌는지는 브루투스나 카시우스를 봐도 알 수 있고요. 이들은 공화정체제의 구조적 문제점등 깊이있는 분석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구호를 앞세워 기득권을 수호하려 했던 전형적인 수구세력입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당대에서 유일하게 로마가 그 어마어마하게 큰 땅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세계제국이 되야한다는 인식을 가진 인물입니다. 교양이나 지식에서는 키케로, 현실판단에서는 술라가 뛰어났지만 결정적으로 혜안이 없던 점에서 카이사르와 차이를 보입니다

  • 작성자 09.08.18 21:03

    다른 것에 대해서도 하나씩 반박을 합니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은 무산자계급의 실업대책에서 비롯했고, 그 자신이 이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개혁의 소산은 로마군의 기능강화와 민중파라고 불리는 정당의 창설입니다. 사병화가 제정으로 가는 초석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사병화의 혜택은 민중파와 원로원파 모두 같이 입었습니다. 술라는 말할 것도 없고, 폼페이우스도 군사적 공로를 바탕으로 정치입지를 강화했으니까요. 갈리아 전쟁에서도 학살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로마와 갈리아 사이의 전쟁은 카이사르의 영토정벌이었고, 친로마적인 부족은 모두 자치를 인정했습니다.

  • 작성자 09.08.18 21:26

    조조의 일처럼 불문곡직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떼거리로 죽인다면 모르겠지만, 카이사르는 민족말살정책을 편 적도 없거니와 그에 반하지 않으면 모든 부족들을 다 존속시켰고, 심지어는 베르긴게토릭스의 부족도 자치를 허용받습니다. 8년의 전쟁동안 갈리아인이 협약을 깬것만 4차례였습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이런 일을 하면서 동시에 본토에서 정쟁을 하며 원로원파의 세확장을 막고, 담당하던 3개의 속주통치도 해냈죠. 그는 세납의 투명성도 확보했고, 국경지역의 안전도 확보하며 오히려 땅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그는 그제껏 아무도 하지 않은 속도전을 펼쳤습니다. 롤플레이식으로 전쟁을 하던 기존방식과 달랐죠.

  • 작성자 09.08.18 21:32

    궁극적으로 이런 일련의 일들을 추진한 카이사르가 이 모든 정략을 그 자신이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걸 실천하고 마무리할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지요. 흠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카이사르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봅니다. 집정관에서 물러나면 정적들에게 고발당해 실각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외지로 나간 것이겠지만, 그는 이런 불가결한 일들을 필요한 일들로 채워 넣으면서 로마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또 그 자신의 목표인 새체제 확립을 위해서 사용했죠. 결국 그의 창안에 의해서 로마제국의 수명은 더 연장됩니다.

  • 09.08.19 01:25

    루게릭님의 논리가 다 맞다손 쳐도 마찬가지입니다. 카이사르가 로마의 절대 권력을 잡은 기간은 그 짧았던 술라의 기간보다도 짧습니다. 소위 말하는 제정의 창안자는 카이사르가 아니라 오랜 기간을 통치하고 그 권력을 기존의 권력층인 원로원파 지주들과 합의함으로서 안정적인 권력구조를 이루고 그 권력을 후대 티베리우스에게 물려준 아우구수투스입니다. 짧디 짧았던 카이사르의 절대통치는 대부분이 그나마 파르티아 원정 준비에 쓰였을뿐이죠. 즉 카이사르는 정적을 군사적 힘으로 파괴하고

  • 09.08.19 01:05

    절대권력을 잠시 누렸지만 그 일시적 권력을 전혀 유지하지도, 후대에 물려주지도 못한 술라와 마찬가지 케이스이죠. 물론 그러한 마리우스-술라-카이사르로 이어지는 절대권력자 라인이 마지막 원로원 강경파였던 카시우스-브루투스의 멸망과 더불어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게 됨으로서 후대 아우구수투스가 그러한 기득권 세력과의 합의를 통해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권력구조 창출을 도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러한 심리적 효과를 카이사르의 의도였다고 보는건 지나친 비약이라고 봅니다.

  • 09.08.19 01:10

    님이 줄줄히 언급하신 갈리아 전쟁의 활약상 역시 결론적으로 군사적인 정복일 뿐입니다. 물론 당연히 고위 부족장급의 회유는 전쟁의 기본이죠. 다른 국가의 기득권층까지 다 파괴하는건 제대로된 제국주의 게임이 아니죠. 일제 역시 대한제국을 침탈할때 대부분의 기득권층은 흡수했습니다. 그리고 한 국가가 타국가를 정복하면서 인구의 1/3을 말살시켰는데 그게 마치 합리적인 통치인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엄청나게 위험한 사고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갈리아 인들은 협약을 깰수 있었죠. 그 협약이라는건 당연히 정복자 로마에 극단적으로 유리한 을사조약같은 것이죠. 베르긴게토릭스 같은 새로운 갈리아영웅이 등장할 토대가 다분한 상황

  • 09.08.19 01:15

    이었던거죠.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카이사르의 군사적 천재성을 입증하기에는 좋은 자료일지 모르나 그가 마치 선하고 합리적인 통치를 했다는 식의 논리는 철저히 로마인들 기준일 뿐입니다. 초점을 다시 카이사르에 맞춘다면. 일단 애초 로마군의 핵심인 중산층을 중심으로한 시민군제도가 잇따른 전쟁으로 인해 로마의 중산층이 붕괴해버리면서 불가능해지죠. 그러면서 무산계급을 특정 장군이 사비로 훈련시키고 무기를 지급하는 마리우스의 사병제도가 시작됩니다. 민중파와,원로원파가 둘다 이익을 봤다는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건 과거 전쟁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간단히 좌천시킨 로마 시스템의 파워의 중핵이었던

  • 09.08.19 01:18

    원로원이 폼페이우스라는 1명의 장군에게 의지할수 밖에 없는, 즉 소수의 핵심 군벌들이 권력을 놓고 싸우는 정치양상으로 만든 것이 바로 로마군의 사병화라는 거죠. 로마는 유사시 독재관 2명을 뽑기는 했습니다만 원로원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그 시스템 자체로 운영되는 국가였지 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 폼페이우스같은 몇몇 소수의 군벌들이 영토를 나눠먹고 그네들끼리 절대권력을 위해 돌진했던 국가가 아닙니다. 이러한 모습은 공화정 내내 한번도 없다가 로마군의 사병화 이후 공화정 말년에만 나타나게 되죠. 만약 파르살로스에서 카이사르가 아닌 폼페이우스가 승리하였다고 해서 로마공화정이 유지되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 09.08.19 01:22

    카이사르가 제정의 효율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냐 아니냐는 사실 역사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결국 로마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기존 시스템은 그 핵심 권력인 군사력이 사병화 되면서 몇몇 군벌들에게 집중되는 상황 앞에서 아무런 힘을 쓸수가 없었고, 그 승리자가 누구냐와 무관하게 제정은 이미 필연이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에서 절대권력을 쥐고 기존의 원로원세력과의 합의를 통해 권력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가진 시스템을 만들어낸 아우구스투스는 높게 평가할 만 하지만, 그러한 군벌싸움에서 군사적 재능으로 승리하여 절대권력을 차지하는 과정까지만 밟은 카이사르의 정치력이라는 걸

  • 09.08.19 01:24

    그다지 높게 평가할수 없다는 것이죠. 카이사르의 정치력이라는건 중세유럽을 거쳐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를 통해 말도 안되게 과대평가된 경향이 크다고 봅니다.

  • 작성자 09.08.19 01:33

    카이사르의 통치기간이 짧았다는 것에 대해서 견해차가 보이네요. 저는 카이사르가 집정관이 되었을 당시부터 짚은 것이고, 제정을 수립한 이후부터 짚은 것은 아닙니다. // 갈리아 전쟁을 제국주의적 사관에서 본다? 두 민족은 그 이전부터 꾸준히 충돌해왔습니다. 카이사르의 정벌에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사관이 대입되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두 민족, 혹은 국가는 쟁패를 하는 과정이었고, 게르마니아에 의해서도 세가 줄어들고 있던 갈리아를 선제공격함으로서 패권을 쥐게 된 것은 로마였을 뿐입니다.

  • 09.08.19 01:36

    제국주의 사관이든 뭔 사관으로 보든 간에 님 말씀대로 딴 나라 침공해서 잡아먹고 그나라 사람들 작살낸 전쟁을 '통치사례' 로 보는건 아니라는 거죠. 전 카이사르의 군사적 재능에 대해 논하는게 아닙니다. 그건 인정하는거죠. 중요한건 그가 뭐 그시대에 얼마나 달변이었든, 얼마나 재능이 있었든 간에 정치력이라고 볼 만한 능력을 입증한 것은 지극히 미미하다는 겁니다. 집정관으로서 몇몇의 안건을 통과시킨 것을 정치력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언급하는 레벨인 조조, 강희제, 한고조같은 레벨에 못미치는 것은 여전하죠. 절대권력을 차지하고 전 국가에 영향을 끼치는 상태에서 그 국가를 얼마나 발전시키고 시스템을 안정시켰는가를

  • 09.08.19 01:39

    주요하게 봐야 하는데 결국 그것이 가능했던 시기의 카이사르는 바로 암살당했고 파르티아 원정 준비를 제외하고는 결국 로마라는 국가 자체의 지향점을 조정할 만한 정치적인 능력은 보여주지 못했죠. 그가 얼마나 재능이 있었든 간에 결국 역사에서 중요한건 그것을 보여주었느냐 여부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역사에 남을 군사적 능력은 분명하나 정치적인 능력은 과대평가가 아닌가 라는 의견이었던 것입니다.

  • 작성자 09.08.19 01:48

    그런 문맥이라면 진의 시황이나, 청의 강희, 당의 태종등도 정치력이 결여된 인물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시황이 7국의 사람들을 보존하면서 통일을 한 것은 아니고, 강희제도 여러차례의 환란을 겪으면서 가르단을 위시한 반청 막북인들을 사정없이 숙청했습니다. 대만에 대한 처우도 혹독했죠. 태종 이세민은 권력을 갖추는 시기부터 이미 피를 뿌렸고, 창업과정에서는 지주세력에 우호적인 반면에 농민봉기집단에 대해서는 가혹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어쩌다보니 카이사르를 신과 같은 인물로 떠받들어 버리는 듯 한데, 갈리아전쟁을 통치사례로 꼽는 것이라기 보다 그가 전쟁을 치룬 의도와 그 격무에서도 정치투쟁과 속주통치를

  • 작성자 09.08.19 02:39

    모두 이끌었던 것을 우수하게 평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정이라는 새 시스템을 만든 것은 카이사르의 순수능력이고, 조조라... 조조는 체제개혁을 한 적은 없으니까 카이사르에 비교할 인물은 아닙니다.

  • 작성자 09.08.19 02:13

    로마군의 사병화도 제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의견은 연결고리가 부족하다고 봅니다. 원로원이 군사권을 잃었다고 하셨지만, 술라는 민중파 소탕을 위해 군대를 사용했고, 웃기는 건 최고권력자가 된 시점에서는 이 권력기반을 포기하고 일개 개인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이 의결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멋대로 군사를 움직인 일도 없습니다. 모병제로 바뀌긴 했으나 또 그래서 개인의 이익대변집단으로 변모했지만 이들을 소집하고 파견하는 건 어디까지나 원로원입니다. 마리우스와 킨나에 의해서 원로원이 이 권력을 빼앗기기는 하지만, 술라에 의해 복권된 셈인거죠.

  • 작성자 09.08.19 01:56

    사병화시대의 정점에 서있는,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중에 제정이행과 관련된 연결고리는 카이사르에게서 밖에 찾을 수 없습니다. 제도적인 문제로 인해 카이사르가 아니었다고 해도 제정으로 이행했을거라는 것은 박력이 부족한 주장이라고 봅니다. 그리보면 공화정체제의 난맥을 가장 먼저 고발해서 개혁을 요구한 그라쿠스 형제가 제정이행의 시발점입니다. 그럼 내전 자체가 필연적으로 제정으로 가야한 로마의 과도기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죠. 공화정이 붕괴할 거라는 것에는 동의하나, 카이사르의 제정이나 아우구스투스의 수정된 제정체제로의 이행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작성자 09.08.19 02:02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창안에는 회의적입니다. 카이사르는 기존 제도를 개선해 종신독재관이라는 관직을 만들어서 권력의 적법성을 얻었지만,(물론 그래서 복고주의자에 의해서 암살당합니다만.) 아우구스투스는 기존제도의 직위들을 하나도 건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그 직위의 권력만 종합해서 제정을 창설해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자리가 애매해져버렸죠. 실정에 맞게 제정으로 이행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합니다만, 황제 암살을 이용한 견제가 일반화되면서 이에 대해 계속 황제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결국은 종신독재관보다 더 심각한 전제군주정으로 변해버리니까요. 세습제를 사용한 것

  • 작성자 09.08.19 02:03

    은 정통성 부여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나, 친권세습을 고집했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 여러모로 사건사고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현군들을 보면 대개 양자결연을 통한 세습으로 제위에 오른 인물들이 다수이고요.

  • 작성자 09.08.19 02:12

    여하간 본론으로 돌아와, 카이사르의 통치력을 최우수로 꼽는 것은 1. 동시간대에 여러가지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 2. 자파가 아닌 인물까지 끌어안고 가면서도 제정을 창설하는데 성공한 것. 3. 사회부조리와 부패에 대한 개혁에 성공한 것을 이유로 합니다. // 이 사람에 대해 계속 논의를 더하려면 새로운 페이지가 필요할 것 같네요.

  • 09.08.19 13:34

    결국 핵심적인 논제는 1. 로마의 제정으로의 전환이 카이사르 개인의 비전때문이냐 아니면 로마군의 사병화로 인한 피할수 없는 필연이었느냐 이것과. 2. 제정의 창립자를 카이사르로 봐야 하느냐 아우구스투스로 봐야 하느냐 라는 것이군요. 더불어서 저는 마지막 루게릭님이 첨언하신 과연 카이사르의 통치력이라고 할수 있는 3가지 안건에 대한 비판이 포함될거 같습니다^^

  • 09.08.19 01:45

    근데 좀 제가 습관적으로 말투를 막 던지듯이 말하는거 같이 말해서 루게릭님이 언짢으셨을까봐 걱정이네요. 그냥 루게릭님과는 좀 다른것 같은 제 생각을 리플로 단 것 뿐인데요 에고;;; 어차피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은 그 방면 최고의 역사학자조차 감히 장담할 수 없는 성격이죠. 그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시면 될거 같습니다^^ 아 그리고 위에 제가 쓴글 반박하셔도 됩니다ㅎ 마치 반박하는 리플을 막으려고 이런 리플 달았구나 하고 생각하실까봐ㅎㅎㅎ

  • 작성자 09.08.19 01:48

    허이 괜찮습니다. 자기주장을 하면서 서로 상충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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