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어차피 누군가의 인용을 인용하는 것 뿐이지만, 그 누군가가 이 다섯가지 항목을 가지고 고대 정치가들의 평점을 매긴 적이 있어서 저도 함 해볼라칩니다. 각 단어는 로마인 이야기의 번역판을 인용했고 정의에 관해서는 작가 자신도 지멋대로기 때문에 저도 제가 정의하겠습니다.
1. 불굴의 의지 : 목표를 도달하는데 있어 장애에 굴하지 않고 꾸준했는가.
2. 자제력 : 자기주장을 굽힐 줄 아는가. 적절한 시기가 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가.
3. 지구력 : 체력, 수명.
4. 지성 : 창조성, 교양, 선견지명
5. 설득력 : 이해관계가 얽힌 인물들을 자파로 끌어들이거나, 속여 넘길 수 있는가. 적대세력에게 이해를 구하여 신축성 있는 관계구축을 할 수 있는가.
일단 모든 부분에 대해서 100점이라고 내린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부터.
카이사르
1. 100점. 2. 95점. 3. 90점. 4. 100점. 5. 95점
감기 한번 안걸린 인물로 대단한 체력을 자랑했다. 엄청난 독서량으로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었다. 동시에 로마제국의 엔진에 문제가 있다고 가장 먼저 제기함으로써 제정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했고, 실제로 종신독재관을 수장으로 하는 제정이 수립되었다. 정계에서는 민중파의 수장격이었으나 정적관계의 폼페이우스를 회유해 3두정치를 이끌어 농지법 혁파를 비롯한 수없이 많은 정책으로 국가혁신에 들어갔으며 동시에 대규모 원정으로 제국의 서부 방위선을 확정한다. 통치능력은 세계사를 통털어 최상위. 그러나 최종적으로 원로원파에 대한 반란의 빌미를 주었고, 결국 암살당한다.
아우구스투스
1. 100점. 2. 100점. 3. 95점. 4. 85점. 5. 100점.
사실상 로마제국의 개조. 천성적으로 허약한 체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5년이 넘는 세월동안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던 안토니우스를 배제하는데 성공했으며, 이집트를 제국령으로 만들었다. 군제개혁, 세제개혁, 화폐개혁등 모든 부분을 총망라한 대개혁으로 100년간의 내전으로 휘청거리던 로마에 질서와 안정을 가져다 주었으나, 군사에 기대지 않고 여론을 탄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론을 조성하는 현대의 매스미디어 정치를 그 시대에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게르마니아에 대한 전쟁을 너무 오랜시간 이끌며 다수의 피해를 입었고, 결과적으로 속주화하는데도 실패한다. 후계자 선택도 애매모호해 후계자 대상을 모두 잃은 뒤에야 티베리우스에게 권력을 이양했으며 측근 위주의 정치로 제국의 인재를 발탁하는데도 인색했다.
한나라 고조
1. 80점. 2. 100점. 3. 100점. 4. 90점. 5. 90점
한왕조의 창업자. 40세가 넘도록 백수처럼 지내며 살아왔으나, 진나라가 망국의 길을 가던 때에 시류에 호응해 각지를 전전 일약 황제가 되었다. 고조는 반란을 일으킨지 4년 만에 진나라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이때 함양에서 약법삼장을 공표하여 그때까지 법망이 치밀하여 인민들을 옥죄었던 진의 체제를 붕괴시킬 것을 약속한다. 이 정치적 행위로 인해 고조는 민심을 얻는다. 성품이 오만하고 무례했으며 선비를 보면 욕지꺼리를 하는 등 예의범절을 무시한 인물이었으나 유능한 인재를 알아보고 존대할 줄 알았으며 이익으로 사람을 달래고 헌신하도록 하는데 능했다. 당대의 인재들은 거의 대부분 고조의 군중에 있었으므로 결국 항우는 패사한다. 그는 중국의 제도, 사회적 통합에 동의한 당대 유일의 제후로 진의 시황제의 실질적인 계승자이다. 그러나 법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기피했고, 적합한 수준의 통치력과 인재활용이 통치의 초석인 것을 인식했다. 고조의 인사책은 매우 뛰어나서 소하는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고, 숙손통에 의해 제도문물에 관한 법식이 마련되었다. 또한 선견지명이 뛰어나 오초7국의 난을 예견했으며, 이성의 제후를 배제하여 군국제의 봉건화를 방지하고 훗날 효경제에 의해 국가가 단합되는 기초를 마련했다.
유비
1. 90점. 2. 70점. 3. 90점. 4. 30점. 5. 65점
일개 서인에서 최고지위인 황제에 까지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 주변의 강대한 제후들에게 눌림당하지만, 오랜 인고끝에 형주에서 자립. 이후 10여년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를 발휘하며 일대 왕국을 건설한다. 그러나 관우의 죽음을 계기로 몰락.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오나라를 쳐 국력을 소모하며 한조복권의 꿈을 깬다. 당시의 제후들 가운데 조조와 유비만이 한조의 복권에 관심이 있었지만, 조조는 후에 변심하고 유비는 개인사에 치우쳐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
청나라 강희제
1. 100점. 2. 95점. 3.100점. 4. 90점. 5. 70점
청의 창업군주. 8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어 친정을 시작한 13세부터 오배의 난, 삼번의 난, 몽골의 침공, 러시아의 침공, 명나라 잔존세력등 무수히 많은 정치적 위협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를 세계 최강국으로 만든 인물.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기도 하였으며 선교사들로부터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여 폭넓은 사고를 영유했다. 그러나 제후와 관료들의 권력신장을 방지하고 황제권의 기반을 공고히 함으로써 절대군주로서 군림했다. 강희제는 1억의 인구에 대해서도 군주정이 유효함을 증명한 사례이기도 하다. 황하의 치수사업은 이후 청나라 국고의 근간이 되었으며, 아들 옹정과 손자 건륭에 이르는 120년 황금기의 초석을 만들었다. 그러나 후계문제를 두고 붕당이 벌어지는 것을 막지못해 폐태자를 만들었으며, 말년에 이르러서는 가정사로 인해 많은 고달픔을 겪는다.
고려 광종
1. 90점. 2. 30점. 3. 80점. 4. 75점. 5. 40점.
고려는 본디 호족연합체로 태조 왕건이 정치적 숙청을 전혀 감행하지 않는 유화정책으로 인해 조정에는 수없이 많은 파당이 존재했다. 이들 가운데서 수도 개경이 자리한 패서일대의 호족들이 가장 발언권이 높았는데, 광종은 이 호족들로 인해 혜종, 정종시대에 왕권이 유린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광종은 초기에는 호족주도의 정치에 편승하나 통치 중기에 이르러서 친위세력을 형성하며 호족들을 하나씩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호족권력의 근간인 사병을 축소하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했으며, 국내인들의 정서적 반감을 염려하여 오히려 중국인들을 중용했다. 이 두가지 정책으로 말미암아 중도파와 보수파가 모두 등을 돌렸지만, 군권을 장악해버린 광종은 폭주했고 결과적으로 고려는 초기에 수많은 피를 뿌렸다. 이 점에서는 명나라 주원장과 대비된다. 말년에 이르러서 대광 서필이 죽는 것을 계기로 해외파 인사들이 모조리 쓸려나갔으며 광종의 정치적 열기로 식어버린다. 결과적으로 광종때의 정책은 경종, 성종대에 거의 다 복권되나 이때 광종이 일으킨 피의 혁명으로 고려는 호족사회에서 탈피할 계기를 마련한다.
이순신
1. 100점. 2. 85점. 3. 70점. 4. 100점, 5. 65점
조선, 일본간 7년 전쟁의 주역. 조선의 방위력 신장을 전쟁이 일어나기 3년전부터 상소했으나 모두 묵인. 전쟁이 발발하자 전토가 유린된 가운데서도 전라도 해역을 사수하는데 성공, 일본의 전세확장을 막아 의주로 도망간 선조와 조정의 안전을 도모했으며, 황해와 동지나해 일대까지 일본군의 영향이 미치는 것을 예방하여 명군이 이 전쟁에 참전하는데 기여한다. 또한 긴박한 전쟁중에서도 정적들로부터 제거될 위협을 여러차례 맞았으나 벗인 유성룡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본디 강직한 성품으로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백의종군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를 기회로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등에 의해 조선수군이 전멸한다. 조선에서의 전쟁 장기화와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은 회군하지만 총제적 난국상태엿던 조선에게 기사회생의 기회를 준 것은 이순신이었고, 그는 결국 12척의 함대로 퇴각하는 일본함대를 대파하여 수만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렇게 계속 누적된 일본군의 피해는 결과적으로 일본 국내에서 히데요시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지방 영주들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신장시켜 결국 도요토미가는 2대째에 폐문하고 에도 막부가 들어섰다. 16세기 세계사에 주목할 인물 중에 하나.
사카모토 료마
1. 100점. 2 70점. 3. 20점. 4. 90점. 5. 95점.
근대 일본이 만들어지는 시발점에 서있는 인물. 외국의 문물제도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서면에서 국수적이었고, 그래서 일본 형편에 맞는 제도개혁을 추진하려고 했다. 삿쵸동맹은 에도막부가 붕괴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를 주도한 것은 료마였다. 그러나 분열된 국론과 과격한 행동이 잦았던 무사집단들 사이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힘겨웠으며 젊은 나이에 암살당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1. 80점. 2. 75점. 3. 90점. 4. 50점. 5. 90점.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 오다 노부나가 사후 분열된 일본을 통합하는데 성공하나, 기본적으로 지방 영주들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체제자체는 변하지 않았고, 군사적으로 패권을 가진 상태에서 자치를 인정했다. 16세기에 이르렀으나 일본은 계속 초기 중국의 봉건제방식으로 통치됐다. 젊은 시절에는 소탈하고 싹싹해서 정적들로부터도 인정받는 등 대인관계가 좋았으나 권력에 대한 야심을 품은 뒤부터 행동이 과격해졌다. 신축성있는 외교로 국내를 정리했고, 말년에 가서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후사를 부탁했으나 고양이에게 생선을 준 격이 되었다.
공자
1. 95점. 2. 85점. 3. 100점. 4. 85점. 5. 30점.
유교의 시조. 그러나 당시에도 유자라는 개념이 있었다. 다만 전쟁터에서 칼부림하지 않고 서문에 기대어 통치를 권고하는 유세객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공자와는 근간이 다르다. 공자는 과거의 제도에서 통치의 기본방침을 추출해 요약했으며 "예치주의"로 종합되었다. 그러나 패권전쟁이 한참이던 춘추시대 말기에는 각 제후국들마다도 하극상이 극심해 주나라의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공자는 일생동안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근본적으로 그는 임용될 곳의 환경과 여건을 고려했다. 또한 각국의 재상들이나 권신은 공자의 수많은 제자들이 워낙 기량이 출중해 정치집단화하는 것을 꺼려해 국내입국도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이에 대해 공자도 따로 타협한 바는 없다. 정치적으로 공자는 실패한 인물이나, 그의 정치관과 철학이 제자들에 의해서 널리 퍼졌으며 순자에 의해서 유가의 경전들이 정리되고 증자, 맹자에 의해서 행동철학이 세워지면서 차츰 발전하여 최종적으로 예치주의의 유가와 법치주의 법가로 분리된다.
흥선대원군
1. 100점. 2. 75점. 3. 100점. 4. 65점. 5. 30점.
일생동안 며느리 민씨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때마다 꺽이기도 하지만 다시 정계에 복귀하는 등 숱한 풍파속에서도 끝끝내 야심을 버리지 않았다. 안동 김씨세력을 일소하고 부패의 온상이었던 사원을 철폐하는 등 당시 상황에서는 반이데올로기적, 반기득권적 정책으로 일관하는 등 정적을 양산한다. 그러나 왕인 고종을 방패막이로 하여 10여년동안 철권의 통치를 구가했다. 외적의 침입에 대해서는 그 근본적인 원인에 답하지 않고, 표면적인 행동에 집중하여 쇄국으로 일관해 결과적으로 조선의 후진을 야기했고, 이웃한 일본이 점차 강대해지면서 주권을 빼앗기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자신만의 행동으로 이렇게 비화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해야 한다.
김옥균
1. 90점. 2. 40점. 3. 30점. 4. 65점. 5. 10점.
조선 말기 주목할만한 정계신입생으로 입헌군주제 도입을 주장했다. 이는 군주정과 민주정의 병치적 시스템으로 당시 조선의 실정에 맞는 방식이었으나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생소한 체제에 대한 이견과 의문등으로 여론을 얻지는 못한다. 그래서 결국 외세를 끌어와 조정을 장악하나, 청나라의 힘을 얻은 고종에 의해서 숙청되었다.
ps. 한국 대통령들에 대한 평점도 적어봤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1. 95점. 2. 30점. 3. 80점. 4. 80점. 5. 60점.
수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일개 농부의 아들에서 최고위직인 대통령이 된 인물이지요. 자제력에 대한 평점이 매우 낮은 것은 시기적으로 대권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없던 것이 일단 전제되었으나, 잦은 구설수와 대립의 각을 세우는 정치적 실언등으로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에 방아쇠를 당겼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심지어는 정권교체로까지 갔고 민주화의 퇴보와 그 지지세력의 후퇴를 야기했으며, 그 자신도 현 정권의 모략에 휘둘림을 당하는 등 고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통상적인 행정면에서는 다수의 정책으로 개혁을 이뤄냈지만,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1. 100점. 2. 20점. 3. 90점. 4. 30점. 5. 40점.
군부독재시대를 연 인물로, 엄청난 추진력으로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초석을 만들었다고 평가되나, 편중된 부문에 집중적으로 투자함으로써 지역 불균형을 초래했고, 정치적으로는 지역주의를 이끌어와 현대 한국의 국론분열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또한 권력을 탐해 지속적인 대권유지를 위해 부정투표는 물론이고 헌법개헌을 하는 등 군사력을 기반으로 해 절대권력을 만드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경제번영의 지속에 필수적인 자유시장개념이 결여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강권을 휘두르는 것과 같이 대외적으로도 강경하게 나가 강대국들과의 외교에서도 손실을 입지 않으려고 했던 점에서는 보스기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요. 다만 일본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빌미로 손해배상 청구권을 넘겨준 것은 반민족적 행위로 두고두고 지탄받고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1. 95점. 2. 60점. 3. 100점. 4. 90점. 5. 70점.
워낙 쓸게 많은 인물이지만, 낮은 점수만 설명하면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여러차례 민주화세력의 초기집권을 뒤로 늦추게 된 점을 이유로 평점을 대폭 깍았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지만, 그 많은 시간 지역주의 팽배에 기여한 것도 요인입니다. 몇차례나 정권의 위협을 받으면서 투옥당하면서도 고희를 넘긴 나이는 충분히 최고점을 매길 수 있고, 현대 한국지도자들중에서 교양면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것은 이론이 없습니다. 또한 대북정책에 변화를 꾀해 남북정상이 직접 만나는 일대사건을 일으키며 분단된 국가의 통합을 추진했으며 이는 이데올로기적 구폐에서 벗어나는 한국을 보였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이 평화무드에 패권국인 미국을 설득했다는 것도 높게 평가합니다.
이명박 현임 대통령
1. 100점. 2. 20점. 3. 100점. 4. 0점. 5. 0점.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능력은 그게 어디인지 제가 몰라서 그렇지 최고점을 줄만한 수준. 일단 국민들이 대동단결하면 물러난다는 점에서 자제력은 0점은 아님. 손님이 와도 자신만 돌솥에 밥을 담아 계란까지 깨드려먹는 건강관리는 최고점을 줄만함. 그덕분에 전시행정하러 여기저기 잘 뛰어다님. 그러나 그 일에 대한 결과예측은 늘 오산. 교양도 결여, 대운하라고 하는데 다른 나라 베껴먹기를 통한 무리수 경제개혁을 외침. 부동적인 지지층을 제외한 대다수가 이런 것이 신물이 남. 적대정당에 대해서는 "밞아!", 규탄시위에 대해서도 "밞아!", 북한과의 외교창구도 "밟아!" 일단 밞고 보는 태도.
첫댓글 명박이는 4번 5번이 안습이구나.....-_-;;;;;
음... 강희제가 이래 낮다니,,,,, 좀 아깝네요.. 강희제 말년이..
제국경영에 있어서는 중국역대 황제중에 top이나, 문화적인 창의성이나 새로운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부문에는 취약했습니다. 또 정서적으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복고여론에 대한 간접적인 탄압이 있었고, 고증학이 발전하는데 토대를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설득력에서 평점이 낮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전제군주의 입장에서 통치한 사람입니다.
재밌게 봤습니다.
제 평가가 좋네요 ㅋㅋ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허약한 체질에 말년까지 통치의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72살까지 살았습니다. 그 시대 의료수준으로 생각하면 대단한거죠.
이 정도면 허약체질이라고 할 수도 없을 듯 -_-;
후계자들이 대기타다 먼저 갔죠
첫번째 점찍은 후계자가 조카였는데 요절했고 두번째는 절친 아그리파였지만 먼저 죽었고(카이사르와 같은 타입이죠. 잔병하나 없는...)... 그 다음에는 결국에 티베리우스로 갔죠.
이거 실제로 있는 건가요? 밑에 한국 대통령 빼고?
글쓴분 기준이네요 -_-ㅋ 루게릭님 기준으로 채첨한듯...
역시 다들 지도자들이라 1번은 거의 높네요.
마지막에서 심히 공감되는군요. ㅎ
카이사르와 상당히 유사한 캐릭터라고도 볼수 있는 후한말의 조조가 없는게 아쉽네요ㅎ
카이사르 같은 경우 제정으로의 길은 이미 마리우스의 병제개혁과 술라의 사병을 이용한 반란에서 이미 길을 열어놨다고 봐야죠. 물론 그 자신이 영민한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나 로마 제정의 시작이라고 보기에는 여러가지로 문제가 있습니다. 통치능력이라는 것도 결국 반대파의 반격에 죽임을 당한 인물이며, 실제로 카이사르가 어떤 한 지방을 오랜 기간 통치한 적은 한번도 없죠. (갈리아인의 1/3을 학살한 갈리아 통치는 통치가 아니라 압살과 전쟁이었죠.) 그러다가 정작 정적을 제거한 뒤 로마 전체를 통치하려다가 반대파에 암살 크리 맞은 인간이죠. 정책의 수준을 떠나 이런 경우 정치력에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고 봅니다.
분명 알렉산더-한니발을 잇는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대단했지만 천재 군인일뿐 재능과 무관하게 정치에서 보여준건 집정관으로서 잠깐 있던 몇년, 이베리아에 있던 몇년 정도인데 그 정도 레벨로는 위에 언급된 아우구스투스나 강희제의 레벨과는 안드로메다급 차이라고 봅니다. 그네들은 거대 제국을 수십년간 단독으로 통치한 레벨이니까요.
로마 역사에서 마리우스의 병제개혁으로 로마의 군대가 사병화 되면서 야심에 찬 장군에 의한 군사독재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었습니다. 그걸 몸소 보여준게 술라구요. 카이사르는 술라의 후계자지만 결정적으로 실제로 제정을 시작한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버지라는게 엄청난 의미로 작용하면서 마치 로마의 최초 황제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죠. 그러한 최초 황제라는 이미지가 훗날 유럽의 지배세력에게 크게 어필하여 카이사르에 대한 숭배가 어느정도 이루어지면서 과대평가 받은 면이 크다고 봅니다. 실제로 단테의 신곡에서 사탄이 입에 물고 있는 3명의 최고 악인은 카시우스, 브루투스, 유다 인데,
유다는 다 아실거고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두명 다 카이사르 암살의 주동자들이죠. 카이사르가 예수보다도 우위에 있죠;;;;;; 유럽의 지배층들이 결국 지배층에 대한 반역을 예수 자체보다 중요시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며 그러한 절대적인 왕권의 최초 상징으로서의 카이사르가 좀더 신격화되고 숭배화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제정의 의미와 독재를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이네요. 카이사르가 창안한 제정은 힘을 기반으로 한 독재가 아니라 합법적인 방식으로의 체제이전을 뜻하고, 다수의 의결로 매번 대사를 결정하는 시스템과 현 기득권층의 부조리가 얽힌 국가의 체질적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선택한 답안입니다. 문제는 카이사르가 각 파벌간 환국때마다 벌어지는 피의 숙청을 매우 꺼려해 원로원파 인사들을 다 끌어안고 간 것이었습니다. 정치적 이견이 분명하고 새 체제에 대한 이해도도 없는 인물들을 데리고 제정을 수립하다보니 결국은 레지스탕스를 겪은 것이죠. 그렇지만 술라처럼 살생부로 그들을 모조리 죽였더라면 카이사르는 제정을 수립한 첫 단계부터
대중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 언급하신 독재로 시작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이는 정치적으로 용단이었고 현명한 판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로원파의 인재들이 얼마나 수준이 떨어졌는지는 브루투스나 카시우스를 봐도 알 수 있고요. 이들은 공화정체제의 구조적 문제점등 깊이있는 분석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구호를 앞세워 기득권을 수호하려 했던 전형적인 수구세력입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당대에서 유일하게 로마가 그 어마어마하게 큰 땅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세계제국이 되야한다는 인식을 가진 인물입니다. 교양이나 지식에서는 키케로, 현실판단에서는 술라가 뛰어났지만 결정적으로 혜안이 없던 점에서 카이사르와 차이를 보입니다
다른 것에 대해서도 하나씩 반박을 합니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은 무산자계급의 실업대책에서 비롯했고, 그 자신이 이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개혁의 소산은 로마군의 기능강화와 민중파라고 불리는 정당의 창설입니다. 사병화가 제정으로 가는 초석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사병화의 혜택은 민중파와 원로원파 모두 같이 입었습니다. 술라는 말할 것도 없고, 폼페이우스도 군사적 공로를 바탕으로 정치입지를 강화했으니까요. 갈리아 전쟁에서도 학살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로마와 갈리아 사이의 전쟁은 카이사르의 영토정벌이었고, 친로마적인 부족은 모두 자치를 인정했습니다.
조조의 일처럼 불문곡직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떼거리로 죽인다면 모르겠지만, 카이사르는 민족말살정책을 편 적도 없거니와 그에 반하지 않으면 모든 부족들을 다 존속시켰고, 심지어는 베르긴게토릭스의 부족도 자치를 허용받습니다. 8년의 전쟁동안 갈리아인이 협약을 깬것만 4차례였습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이런 일을 하면서 동시에 본토에서 정쟁을 하며 원로원파의 세확장을 막고, 담당하던 3개의 속주통치도 해냈죠. 그는 세납의 투명성도 확보했고, 국경지역의 안전도 확보하며 오히려 땅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그는 그제껏 아무도 하지 않은 속도전을 펼쳤습니다. 롤플레이식으로 전쟁을 하던 기존방식과 달랐죠.
궁극적으로 이런 일련의 일들을 추진한 카이사르가 이 모든 정략을 그 자신이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걸 실천하고 마무리할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지요. 흠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카이사르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봅니다. 집정관에서 물러나면 정적들에게 고발당해 실각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외지로 나간 것이겠지만, 그는 이런 불가결한 일들을 필요한 일들로 채워 넣으면서 로마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또 그 자신의 목표인 새체제 확립을 위해서 사용했죠. 결국 그의 창안에 의해서 로마제국의 수명은 더 연장됩니다.
루게릭님의 논리가 다 맞다손 쳐도 마찬가지입니다. 카이사르가 로마의 절대 권력을 잡은 기간은 그 짧았던 술라의 기간보다도 짧습니다. 소위 말하는 제정의 창안자는 카이사르가 아니라 오랜 기간을 통치하고 그 권력을 기존의 권력층인 원로원파 지주들과 합의함으로서 안정적인 권력구조를 이루고 그 권력을 후대 티베리우스에게 물려준 아우구수투스입니다. 짧디 짧았던 카이사르의 절대통치는 대부분이 그나마 파르티아 원정 준비에 쓰였을뿐이죠. 즉 카이사르는 정적을 군사적 힘으로 파괴하고
절대권력을 잠시 누렸지만 그 일시적 권력을 전혀 유지하지도, 후대에 물려주지도 못한 술라와 마찬가지 케이스이죠. 물론 그러한 마리우스-술라-카이사르로 이어지는 절대권력자 라인이 마지막 원로원 강경파였던 카시우스-브루투스의 멸망과 더불어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게 됨으로서 후대 아우구수투스가 그러한 기득권 세력과의 합의를 통해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권력구조 창출을 도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러한 심리적 효과를 카이사르의 의도였다고 보는건 지나친 비약이라고 봅니다.
님이 줄줄히 언급하신 갈리아 전쟁의 활약상 역시 결론적으로 군사적인 정복일 뿐입니다. 물론 당연히 고위 부족장급의 회유는 전쟁의 기본이죠. 다른 국가의 기득권층까지 다 파괴하는건 제대로된 제국주의 게임이 아니죠. 일제 역시 대한제국을 침탈할때 대부분의 기득권층은 흡수했습니다. 그리고 한 국가가 타국가를 정복하면서 인구의 1/3을 말살시켰는데 그게 마치 합리적인 통치인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엄청나게 위험한 사고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갈리아 인들은 협약을 깰수 있었죠. 그 협약이라는건 당연히 정복자 로마에 극단적으로 유리한 을사조약같은 것이죠. 베르긴게토릭스 같은 새로운 갈리아영웅이 등장할 토대가 다분한 상황
이었던거죠.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카이사르의 군사적 천재성을 입증하기에는 좋은 자료일지 모르나 그가 마치 선하고 합리적인 통치를 했다는 식의 논리는 철저히 로마인들 기준일 뿐입니다. 초점을 다시 카이사르에 맞춘다면. 일단 애초 로마군의 핵심인 중산층을 중심으로한 시민군제도가 잇따른 전쟁으로 인해 로마의 중산층이 붕괴해버리면서 불가능해지죠. 그러면서 무산계급을 특정 장군이 사비로 훈련시키고 무기를 지급하는 마리우스의 사병제도가 시작됩니다. 민중파와,원로원파가 둘다 이익을 봤다는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건 과거 전쟁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간단히 좌천시킨 로마 시스템의 파워의 중핵이었던
원로원이 폼페이우스라는 1명의 장군에게 의지할수 밖에 없는, 즉 소수의 핵심 군벌들이 권력을 놓고 싸우는 정치양상으로 만든 것이 바로 로마군의 사병화라는 거죠. 로마는 유사시 독재관 2명을 뽑기는 했습니다만 원로원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그 시스템 자체로 운영되는 국가였지 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 폼페이우스같은 몇몇 소수의 군벌들이 영토를 나눠먹고 그네들끼리 절대권력을 위해 돌진했던 국가가 아닙니다. 이러한 모습은 공화정 내내 한번도 없다가 로마군의 사병화 이후 공화정 말년에만 나타나게 되죠. 만약 파르살로스에서 카이사르가 아닌 폼페이우스가 승리하였다고 해서 로마공화정이 유지되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카이사르가 제정의 효율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냐 아니냐는 사실 역사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결국 로마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기존 시스템은 그 핵심 권력인 군사력이 사병화 되면서 몇몇 군벌들에게 집중되는 상황 앞에서 아무런 힘을 쓸수가 없었고, 그 승리자가 누구냐와 무관하게 제정은 이미 필연이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에서 절대권력을 쥐고 기존의 원로원세력과의 합의를 통해 권력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가진 시스템을 만들어낸 아우구스투스는 높게 평가할 만 하지만, 그러한 군벌싸움에서 군사적 재능으로 승리하여 절대권력을 차지하는 과정까지만 밟은 카이사르의 정치력이라는 걸
그다지 높게 평가할수 없다는 것이죠. 카이사르의 정치력이라는건 중세유럽을 거쳐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를 통해 말도 안되게 과대평가된 경향이 크다고 봅니다.
카이사르의 통치기간이 짧았다는 것에 대해서 견해차가 보이네요. 저는 카이사르가 집정관이 되었을 당시부터 짚은 것이고, 제정을 수립한 이후부터 짚은 것은 아닙니다. // 갈리아 전쟁을 제국주의적 사관에서 본다? 두 민족은 그 이전부터 꾸준히 충돌해왔습니다. 카이사르의 정벌에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사관이 대입되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두 민족, 혹은 국가는 쟁패를 하는 과정이었고, 게르마니아에 의해서도 세가 줄어들고 있던 갈리아를 선제공격함으로서 패권을 쥐게 된 것은 로마였을 뿐입니다.
제국주의 사관이든 뭔 사관으로 보든 간에 님 말씀대로 딴 나라 침공해서 잡아먹고 그나라 사람들 작살낸 전쟁을 '통치사례' 로 보는건 아니라는 거죠. 전 카이사르의 군사적 재능에 대해 논하는게 아닙니다. 그건 인정하는거죠. 중요한건 그가 뭐 그시대에 얼마나 달변이었든, 얼마나 재능이 있었든 간에 정치력이라고 볼 만한 능력을 입증한 것은 지극히 미미하다는 겁니다. 집정관으로서 몇몇의 안건을 통과시킨 것을 정치력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언급하는 레벨인 조조, 강희제, 한고조같은 레벨에 못미치는 것은 여전하죠. 절대권력을 차지하고 전 국가에 영향을 끼치는 상태에서 그 국가를 얼마나 발전시키고 시스템을 안정시켰는가를
주요하게 봐야 하는데 결국 그것이 가능했던 시기의 카이사르는 바로 암살당했고 파르티아 원정 준비를 제외하고는 결국 로마라는 국가 자체의 지향점을 조정할 만한 정치적인 능력은 보여주지 못했죠. 그가 얼마나 재능이 있었든 간에 결국 역사에서 중요한건 그것을 보여주었느냐 여부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역사에 남을 군사적 능력은 분명하나 정치적인 능력은 과대평가가 아닌가 라는 의견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문맥이라면 진의 시황이나, 청의 강희, 당의 태종등도 정치력이 결여된 인물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시황이 7국의 사람들을 보존하면서 통일을 한 것은 아니고, 강희제도 여러차례의 환란을 겪으면서 가르단을 위시한 반청 막북인들을 사정없이 숙청했습니다. 대만에 대한 처우도 혹독했죠. 태종 이세민은 권력을 갖추는 시기부터 이미 피를 뿌렸고, 창업과정에서는 지주세력에 우호적인 반면에 농민봉기집단에 대해서는 가혹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어쩌다보니 카이사르를 신과 같은 인물로 떠받들어 버리는 듯 한데, 갈리아전쟁을 통치사례로 꼽는 것이라기 보다 그가 전쟁을 치룬 의도와 그 격무에서도 정치투쟁과 속주통치를
모두 이끌었던 것을 우수하게 평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정이라는 새 시스템을 만든 것은 카이사르의 순수능력이고, 조조라... 조조는 체제개혁을 한 적은 없으니까 카이사르에 비교할 인물은 아닙니다.
로마군의 사병화도 제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의견은 연결고리가 부족하다고 봅니다. 원로원이 군사권을 잃었다고 하셨지만, 술라는 민중파 소탕을 위해 군대를 사용했고, 웃기는 건 최고권력자가 된 시점에서는 이 권력기반을 포기하고 일개 개인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이 의결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멋대로 군사를 움직인 일도 없습니다. 모병제로 바뀌긴 했으나 또 그래서 개인의 이익대변집단으로 변모했지만 이들을 소집하고 파견하는 건 어디까지나 원로원입니다. 마리우스와 킨나에 의해서 원로원이 이 권력을 빼앗기기는 하지만, 술라에 의해 복권된 셈인거죠.
사병화시대의 정점에 서있는,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중에 제정이행과 관련된 연결고리는 카이사르에게서 밖에 찾을 수 없습니다. 제도적인 문제로 인해 카이사르가 아니었다고 해도 제정으로 이행했을거라는 것은 박력이 부족한 주장이라고 봅니다. 그리보면 공화정체제의 난맥을 가장 먼저 고발해서 개혁을 요구한 그라쿠스 형제가 제정이행의 시발점입니다. 그럼 내전 자체가 필연적으로 제정으로 가야한 로마의 과도기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죠. 공화정이 붕괴할 거라는 것에는 동의하나, 카이사르의 제정이나 아우구스투스의 수정된 제정체제로의 이행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창안에는 회의적입니다. 카이사르는 기존 제도를 개선해 종신독재관이라는 관직을 만들어서 권력의 적법성을 얻었지만,(물론 그래서 복고주의자에 의해서 암살당합니다만.) 아우구스투스는 기존제도의 직위들을 하나도 건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그 직위의 권력만 종합해서 제정을 창설해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자리가 애매해져버렸죠. 실정에 맞게 제정으로 이행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합니다만, 황제 암살을 이용한 견제가 일반화되면서 이에 대해 계속 황제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결국은 종신독재관보다 더 심각한 전제군주정으로 변해버리니까요. 세습제를 사용한 것
은 정통성 부여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나, 친권세습을 고집했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 여러모로 사건사고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현군들을 보면 대개 양자결연을 통한 세습으로 제위에 오른 인물들이 다수이고요.
여하간 본론으로 돌아와, 카이사르의 통치력을 최우수로 꼽는 것은 1. 동시간대에 여러가지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 2. 자파가 아닌 인물까지 끌어안고 가면서도 제정을 창설하는데 성공한 것. 3. 사회부조리와 부패에 대한 개혁에 성공한 것을 이유로 합니다. // 이 사람에 대해 계속 논의를 더하려면 새로운 페이지가 필요할 것 같네요.
결국 핵심적인 논제는 1. 로마의 제정으로의 전환이 카이사르 개인의 비전때문이냐 아니면 로마군의 사병화로 인한 피할수 없는 필연이었느냐 이것과. 2. 제정의 창립자를 카이사르로 봐야 하느냐 아우구스투스로 봐야 하느냐 라는 것이군요. 더불어서 저는 마지막 루게릭님이 첨언하신 과연 카이사르의 통치력이라고 할수 있는 3가지 안건에 대한 비판이 포함될거 같습니다^^
근데 좀 제가 습관적으로 말투를 막 던지듯이 말하는거 같이 말해서 루게릭님이 언짢으셨을까봐 걱정이네요. 그냥 루게릭님과는 좀 다른것 같은 제 생각을 리플로 단 것 뿐인데요 에고;;; 어차피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은 그 방면 최고의 역사학자조차 감히 장담할 수 없는 성격이죠. 그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시면 될거 같습니다^^ 아 그리고 위에 제가 쓴글 반박하셔도 됩니다ㅎ 마치 반박하는 리플을 막으려고 이런 리플 달았구나 하고 생각하실까봐ㅎㅎㅎ
허이 괜찮습니다. 자기주장을 하면서 서로 상충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