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천교회는 1901년 현재의 김천시(金泉市) 아포읍(牙浦邑) 송천리(松川里) 하송(下松) 마을에 설립되었다.
오늘날의 김천시는 1995년의 시,군 통합 조치에 의해 금릉군(金陵郡)과 합쳐 생겨난 통합 행정구역으로,
동쪽으로는 구미시(龜尾市)[선산군(善山郡)과 구미시의 통합시],
북쪽으로는 상주시(尙州市), 서쪽으로는 충북 영동군(永同郡)과 전북 무주군(茂州郡),
남쪽으로는 경남 거창군(居昌郡),경북 성주군(星州郡)과 접하여 경북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김천(金泉)’이라는 지명은 1718년 간행된 <금릉지(金陵誌)>에 의하면
옛날 김천지방에 ‘황금의 샘’이라는 뜻의 ‘금지천(金之泉)’이 있었다고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때 조선에 원군으로 파견된
중국 명(明)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 ? ~1598)이 이곳의 물맛을 보고
중국 금릉(金陵)의 과하천(過夏泉)의 물맛과 같다고 하여, 이때부터 과하천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
이 물로 빚은 술을 과하주(過夏酒) 라고 하였다.
1949년 김천읍이 시(市)로 승격하게 되면서
그 외의 지역은 금릉군(金陵郡)으로 편제되었다.
‘금릉(金陵)’이란 명칭은 4세기경 중국의 동진(東晉)이 건업(建業)에 도읍하여 수도를 금릉이라 불렀는데,
이곳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도읍했기 때문에 유적이 많고 경관이 아름다워 역대 시인들의 시제(詩題)가 되었는데, 지금의 난징[南京]이 그곳이다.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대표적인 시가
이태백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登金陵鳳凰臺]’인데,
이는 최경(崔頸)의 ‘등황학루(登黃鶴樓)’라는 시에 감복되어 지은 것이다.
위의 이태백의 시에 등장하는 ‘금릉’,‘삼산이수(三山二水)’,‘봉황대(鳳凰臺)’,‘황학산(黃鶴山)’ 등의
구절들은 현재 김천시의 여러 지명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흔히 김천을 일컬어 자연경관이 무척 아름다워 ‘삼산이수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삼산(三山)은 김천 인근의 유명한 황학산(黃鶴山),고성산(高城山),금오산(金烏山) 등을 말하며,
이수(二水)는 김천을 관통하여 흐르는 직지천(直指川)과 감천(甘川)을 일컫는다.
특히 감천은 김천과 선산(善山)을 거쳐 낙동강(洛東江)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중,하류 지역에 금릉,개령,선산평야 등의 충적평야를 형성하여 이 지역을 경북의 곡창지대로 만들고 있다.
김천시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李重煥)에서 “김산(金山) 서쪽은 추풍령(秋風嶺)이고 영서는 황간(黃澗)이라 했다
. 황악(黃岳),덕유산(德裕山) 이동(以東)의 물이 합쳐져 감천(甘川)을 이루면서 동쪽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유역에 도읍으로서는 지례(知禮),김산(金山),개령(開寧)이 있다.
선산과 함께 관개의 이(利)를 누려 논이 기름지고 주민은 토지에 안주하여 죄짓기를 두려워하며
나쁜 일을 멀리하는 까닭에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농업의 발달로 인해 경제적인 풍요를 누린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감천과 직지천이 이루어 놓은 금릉평야와 개령평야를 중심으로 포도,자두,양파 등을 생산하여 농업 소득이 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며,
이는 토지이용 상황에서 임야(林野, 70%) 다음으로 전답(田畓)의 비중(20%)이 큰 것을 볼 때 더욱 확실해진다.
또한 김천은 조선 중기에서 말기까지
대구,평양,전주,강경 등과 함께 전국 5대 장시(場市)를 이루며,
상업의 중심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김천장에는 인근의 상주,문경 뿐만 아니라 충북 영동, 전북 무주, 경남 거창 등
삼도(三道)의 상인들과 물화(物貨)가 모여들어 ‘삼도장(三道場)’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소를 거래하는 쇠전은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했고,
이러한 명성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장시의 발달은 김천이 당시 인근 지역을 연계하는 교통이 발달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특성은 오늘날의 김천이 1905년 개통된 경부선 철도,
1970년 건설된 경부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으며,
인근의 성주,구미,영동,상주,거창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잘 갖추어져 교통의 중심지로 손꼽히는데서 잘 알 수 있다.
김천과 인근 지역과의 관계를 깊이 살펴보기 위해 김천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천은 삼한 (三韓)시대 개령면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던 감문국(甘文國)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 감문국은 231년 신라의 우로(于老)에 정복당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어
557년(진흥왕 18) 감문주(甘文州)가 되었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 지역 이었으며 군사적 요충지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이후 661년(문무왕 1) 감문군(甘文郡)이 되어,
그 아래금물현(今勿縣),김산현(金山縣),지품천현(知品川縣),무산현(茂山縣)등을거느렸다.
757년(경덕왕 16) 군현 명칭의 개정으로 감문군이 개령군(開寧郡),
금물현은 어모현(禦侮縣), 지품천현은 지례현(知禮縣), 무산현은 무풍현(茂豊縣)으로 바뀌었다.
고려시대 후삼국 통일 이후 영속(領屬) 관계의 변동으로 무풍현이 전라도 진례현(進禮縣)의 속읍이 되었고,
김산,지례의 두 현은 경산부(京山府 : 지금의 星州)에 속하였고,
또한 교통 중심지로 중시되어 김산현에 김천역(金泉驛)이 두어졌는데,
김천(金泉)이라는 지명은 이때부터 생긴 것이다.
1018년(현종 9)에 다시 개령군과 어모현이 상주목(尙州牧)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건국 이후 김산현 관내에 정종(定宗)의 태(胎)가 묻혔다 하여 어모현을 폐합하여
김산군으로 승격하였다.
당시 김천지역은 토지가 비옥하여 농업의 발달과 함께 농업 생산력이 급증하였고,
많은 제언(堤堰)의 축조가 이루어져 생산기반이 더욱 갖추어져 갔다.
이러한 속에서 김산,개령,지례 등지에 향교(鄕校)가 세워졌고,
사림파의 등장 때 김종직(金宗直)의 처향(妻鄕)으로 문인세력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고,
그 영향으로 많은 서원(書院)이 설립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개령,김산 등지의 양반 사대부들이 정경세(鄭經世),권경호(權景虎) 등의 의병에 호응하여
왜적을 무찌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601년(선조 34)에는 아포 출신의 길운절(吉云節)이 반역을 꾀했던 것이 원인이 되어
한때 개령군이 김산군에 폐합되었다가 9년만에 복원되었다.
그후 세도정치로 인해 삼정문란(三政紊亂)이 극심해지자 1862년(철종 13)
개령에서는 김규진(金奎鎭) 등의 주도로 개령민란이 일어나 전국적인 반봉건 투쟁의 한 계기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전국적인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김산군,개령현,지례현은 모두 3등군으로 대구부에 속하게 되었고,
이듬해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경상북도에 속하였다.
1914년에는 개령,김산,지례군이 통폐합되어 김천군(金泉郡)이 되었고,
군청 소재지인 김천면(金泉面)이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자 1931년 읍(邑)으로 승격되었다.
광복 후인 1949년 김천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김천군 외의 나머지 지역이 금릉군(金陵郡)으로 개칭되어 15개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1995년에는 통합 김천시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미1대학 입구에서 바라본 송천교회 원경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김천은 옛부터 옛 김천시와 개령,지례면의 세 지역이 중심을 이루어 왔다.
오늘날의 김천시는 아포읍(牙浦邑)과 농소면(農所面) 등 1읍 14개면과 8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1995년 읍(邑)으로 승격한 아포읍은 15개 읍,면 중 인구와 자연부락 수가 가장 많다.
아포(牙浦)라는 지명은 신라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유래는 이곳이 조선시대 말 낙동강 하구에서 감천을 따라 올라온 소금배들을 이용해
많은 물자가 교역되어 번성했던 포구였던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시대에 개령현에 속해 있던 아포는 1914년 김천군에 속하여 오늘날과 같은 인(仁),의(義),예(禮) ,지(智),
국사(國士),대성(大成),송천,봉산,대신,제석동등 10개 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아포 지역은 김천시 제일의 농업지대로 그 중앙부로는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
김천구미간 지방도로(904번) 등이 지역을 동서로 가르며 통과하고 있고,
그 밖에 아포선산간, 아포감문간 도로가 지나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곳이다.
김천시의 동북부에 위치한 아포읍은 동쪽으로 구미시 부곡동(釜谷洞),
동북쪽으로는 구미시 고아면(高牙面)과 경계를 이루며,
서북쪽으로는 감천(甘川)을 경계로 감문면(甘文面)과 개령면(開寧面)이 접하며,
서남쪽으로는 남면(南面)과 접경하고 있다.
아포읍의 동쪽 끝에 위치한 송천리(松川里)는 구미시 부곡동,고아면과 시군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인근의 대성리,제석리,인리와 접하고 있다.
남쪽은 금천 뒤의 천선대(天仙臺)와 국사봉(國士峰)으로 이어져 가로막히고,
서쪽은 금계 마을을 접한 평야와 구릉지가 연속되었고, 북쪽은 상,하송 마을과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은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김천구미간 지방도(904번)가 관통하고 있다.
지형적으로 보아 송천동은 좌우가 산으로 에워싸이고 중앙이 분지형태로 트여있는 형세를 하고 있다.
송천리의 리명(里名)은 1914년 상송리(上松里)와 금천리(金川里)를 통합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송내’로 불리기도 했다. 금천(金川)은 ‘쇠내’로 불리던 것을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송천리는 숭산(崇山),금천(金川),하송(下松),상송(上松),금계(金溪)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제 행정구역 상으로는 김천시에 속해 있으나, 생활권은 구미시에 더욱 가깝다.
송천리는 옛부터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포도와 사과,자두를 비롯한 과수 재배를 주로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구미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공단에 취업하는 이들이 많이 늘어났으며,
또한 구미와 인접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한 이점 때문에 주거지를 찾아 송천리로 유입되는 인구도 많아졌다.
그리고 1992년 송천리에 가까운 구미시 부곡동 407번지 일대에 구미전문대학(현 구미1대학)이 개교하고,
교문이 송천리 방향으로 개설되면서 송천리에는 다양한 상가와 숙박,편의 시설들이 많이 들어섰다.
이로 인해 송천리 일대는 개발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으며 현재는 매우 활기있는 마을로 변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