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은 인천 제물포 배다리마을에서
사업가 김진연과 크리스토(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박도라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연은 본래 평안북도 철산군 출신으로 대농토를 가진 중농(中農)이었다가
구한 말 개항된 제물포로 옮겨 창고업자가 됐다.
그가 태어난 1899년이 기해년이어서 김기득(金己得)이란 이름을 지어 줬다.
그가 일곱 살 때 인천의 내리교회에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으면서 기득은 헬렌이란 세례명을 갖게 됐고,
아버지가 세례명에 한자를 달아 활란이라고 작명해 줬다.
그래서 기득•헬렌•활란 등 3개의 이름을 갖게 됐다.
이화학당에서 우리나라 최초 여성 대학졸업생이 됐다.
한 때 이화학당의 교사로 재직했으며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보스톤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아 귀국해 1925년 이화전문학교 교수에 취임했다.
1930년에 다시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 이듬해에 한국여성으로는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9년에 이화여자전문대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45년 문리과대학을 한림원으로,
음악•미술대학을 예림원으로,
의예과•간호과•약학과를 종합한 예과대학을 행림원으로 편성했고,
1946년 8월 15일 종합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61년 이후에는 명예총장과 이사장직을 맡아
이화여대에 대한 자체조사연구로부터 시작해 이화 10년 발전계획을 추진했다.
그가 관련을 맺었던 단체는 50여 개에 달했다.
1922년에 창설된 기독교청년회연맹(YMCA),
1959년에 조직된 여성단체협회에서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1963년 교육 부문 대한민국상,
필리핀에서 주는 막사이사이상(공익 부문), 미국 감리교회에서 주는 다락방상을 수상했다.
1965년 9월 대한민국 순회대사로 임명돼 죽을 때까지 활동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1970년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