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12월.... 청 태종은 약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조정이 침공의 사실을
알았을때는 청군이 황해도를 주파하고 있을때 였다. 조선조정은 우왕좌왕하면서 효과적인 대응책
을 찾지 못했고 청군이 서울외각에 당도할 무렵에야 부랴부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조선조정이 남한산성에 웅거한 이후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점령지에서
노략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그동안 전국 각지에서 의왕군과 의병이 조직되어 남한산성을 향해
진격하게 되고 그 중 전라 병사 김준룡 장군이 이끄는 군대도 있었다.

김준룡 장군의 군대는 13일만에 남한산성 근처인 수원의 광교산까지 진격하였다. 김준룡 장군은 군진
을 사각대형으로 형성하게 하고 식량과 화약을 사각진형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정찰병을
보내 청군이 광교산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광교산 곳곳에 복병을 두었다. 1선에
포수,2선에 사수,3선에 살수를 배치시켰다. 때는 1637년 1월 5일 이었다.
당시 김준룡 장군 휘하의 군세는 불과 3700명.... 그들 중 상당수는 정규군이 아닌 의병 이었다.
반면 광교산 전투에 투입될 청군은 김준룡이 지휘하는 전라도 근왕병 수의 열갑절이나 되었다.
수만명의 청나라군이 경기도 수원 광교산으로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새벽, 청군은 광교산에 쇄도 했다. 그들은 김준룡의 군진을 기습공격하려고 했다. 청군의
기습전술은 여태까지 조선 의왕군을 격퇴하는데 유용하게 적용된 전술 이었다. 청군은 단숨에
광교산 정상으로 몰려들었다. 그 순간.....


조선군의 화살과 총탄 세례가 퍼부어지고 매복했던 살수들이 몰려나와 청군을 닥치는대로 찌르고 베기
시작했다. 골짜기는 좁았고 청군은 수가 많고 밀집되어 있었다. 청군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는
포수와 사수들은 우왕좌왕하는 청군을 닥치는대로 쏴죽였다.

결국 청군은 큰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하지만 전투는 그날만으로 끝난것이 아니었다.

다음날, 청군은 재정비하고 광교산을 다시 공격했다. 광교산 전투의 승패는 이날의 전투에서
조선군이 광교산을 사수하는데 달려 있었다.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청군은 동남부의 조선군 진형을 돌파하고 조선군의 중앙으로
밀려들었다.그들은 호준포를 쏴대며 조선군을 압박했다. 오후 2시경에 광양현감 최택의 군대가
무너졌다. 김준룡 장군은 '이때야 말로 충신이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때'라고 말하며 부하들을
진두지휘 했다.

새벽에 시작된 전투는 저녁이 되서까지 지속되었다. 청군의 가공할만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진은 무너지지 않았다. 결국 청군은 광교산에서 철수했다. 조선군의 대승리 였다.

이날 금가면을 쓰고 청군을 지휘했던 청 태종의 사위 백양고라가 조선군 포수의 저격에 죽고
2명의 청나라 장수와 수천의 청나라 군사들이 전사했다.
1794년 영의정 체제공이 광교산에 비문을 세우니
비명이 '충양공 김준용 전승지 병자청란공제호남병 근왕지차 살청삼대장
(忠襄公 金俊龍 戰勝地 丙子淸亂公提湖南兵 謹王至此 殺淸三大將)' 이었다.

그리고 청군을 격파한 광교산 골짜기는 호항곡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정말 좋은 게시물이네요. 다음번 게시물도 기대하겠습니다 ^^
밑의 쌍령전투에서 느꼈던 허탈함을 단숨에 날려버린 조선군의 압승!! 역시 지휘관이 누구이며 사병들의 정신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전투는 얼마든지 달라질수도 있음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좋은 게시물 감사합니다 ''충양공 김준용 전승지 병자청란 공제 호남병 근왕지차 살청삼대장' 비문이 긴만큼 공적도 하늘을 덮는군요
오오..
삼수병 전법이 제대로 실행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전투지요.
대단하네요,,,후 근데 삼수병 전법이 뭐죠?
보충하면 조선전기의 5위병체제를 대체해서 개발된 후기의 체계입니다. 총을 다루는 포수와 백병전을 담당하는 살수 활을 다루는 사수로 이루어졌는데 사수는 후기에 가면 비중이 줄어듭니다,
와우..
광교산이라면 현 수원시 시내에 있는 산이 맞습니다.ㅡㅡ; 시민들이 자주 가는 휴식처이지요.
명장님꺼 재밌다 ㅋㅋ
호준포?
재밋는 자료였습니다^^. 광교산 전투는 소수의 조선군이 청나라 대군을 이긴 전투죠. 여기서, 적과 근접전을 맡을 보병(살수)만 있으면 조선병사들의 원거리 투사무기(활과 조총)가 얼마나 위력적인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조선 중기부터 진작에 근접전을 다룰 병과를 육성해야 했는데, 오로지 활에만 매달렸으니... 무과시험에도 검술시험은 없고 궁술 시합만 있고.....) 역시 아무리 활솜씨가 좋아도 적과 맞써 싸울 검병과 창병이 필요한 법인데.....
어쨋든 광교산 전투는 제대로 된 지휘관, 사기가 높은 병사, 제대로 균형잡힌 병과를 보유한 조선군이라면 얼마든지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음을 보여준 전투같습니다. 아주 통쾌한 승리구요.^^
게임의 신동/호준포에 대하여 궁금해 하시는 모양이군요^^ 호준포는 임란이후 명군을 통해 도입된 소형화포입니다. 이름부터 虎逡砲 즉 호랑이가 뒷발을 모으고 앉아있는 모양의 포라는 뜻이지요. 요게 생겨 먹은게 말임돠. 음. 요즘의 박격포랑 비스무리하게 생겨먹었습니다.
제작목적 자체가 요즘 분대지원 화기들처럼 기동성 좋은 지원화기였기 때문에 구경도 상당히 소형이고 경량화 되어있습니다. 게다 구조도 포신과 각도조절이 가능한 포다리로 이루어진 간단한 구조지요. 소형 철환 한발이나 연자(산탄) 50발 가량 장전해서 쏠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거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면 알겠지만 상당히 귀엽게 생겼습니다. 까치호랑이가 연상되는 아담함이란^^;;;
갈리아 포레스터도 초즌소드맨이 필요하다...는 것이군요 -_-;;;
유능한 지휘관이 군대조직을 제대로 편성할 수만 있다면 조선군은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곧잘 보였습니다. 이순신의 무적함대가 대표적인 케이스지요. 만일 조선이 고려처럼 좀 더 많은 시간만 있었더라면...더 잘 싸울 수 있었을 듯 싶습니다...
쌍검이 멋있습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