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는 세계 변혁을 꿈꾸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녀간의 사랑이며, 약간의 문제점이 없지는 않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세계는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는 믿음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따라서 영화를 보고난 후 부조리 한 세상에 대해 비분강개할 필요도 없고 탐욕과 배신으로 가득찬 이기적인 인간들 때문에 불안해 할 필요도 없다. 현실에 안주하고 체제질서에 기여하는 장르적 특성 때문에 로맨틱 코미디는 태평성대에 성행한다. 로맨틱 코미디가 범람하는 시대적 특성 속에는 현실변혁을 거부하고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대중들의 욕망이 깔려 있다.
1938년 출간된 위니프레드 왓슨 원작 소설을 인도 출신의 영국 감독 바렛 낼러리 감독이 영화화 한 [미스 패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는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이다. 상투적이면서도 상투적이지 않고, 신데렐라 이야기의 변형이 분명한데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화려한 연예계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스타를 꿈꾸는 미모의 여배우, 돈많은 뮤지컬 극단주의 아들인 철부지 바람둥이, 카리스마짱인 틀럽 주인 등의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주체적 시각이, 하층민 출신의 나이든 여비서이기 때문에 계급적 관점에서의 거부감이 없다.
일생동안 단 여섯 편의 장편소설만 쓴 원작자 위니프레드 왓슨은 또 하나의 제인 오스틴이라 불리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영국 여류작가로서 [미스 페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는 그녀가 쓴 세번째 작품이다. 1938년 출간 당시 큰 인기를 끌며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의해 뮤지컬 영화로 제작되려고 했으나 2차대전 때문에 중단되었고 이 작품의 존재는 잊혀져갔다. 2000년 영국의 출판사에 의해 재출간되자마자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1001권]에 선정되면서 독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이 책을 바랫 낼러리 감독은 깔끔하게 영화로 옮겨 놓았다.
[패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는 제목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거리의 부랑자이며 홈리스 생활을 하던 가난한 여인 페티그루(프란시스 맥도맨드 분)가 런던 사교계의 떠오르는 샛별 라포스(에이미 아담스 분)의 개인 비서가 되면서 벌어지는 하루동안의 좌충우돌 이야기이다. 왕자와 거지 식의 계급적 이분법이 원작 속에는 존재한다. 화려한 연예계 스타와 거리의 부랑아, 돈과 권력을 가진 남자들과 가난하지만 사랑밖에 없는 남자, 이런 극단적인 대비는 이 작품이 상투적 구도 아래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금발의 미녀 델리시아 라포스는 몇몇 영화의 단역에 출연했지만 아직은 무명인 배우 지망생이다. 스타를 꿈꾸는 그녀에게는 돈많은 스폰서가 필요하다. 클럽 사장 닉(마크 스트롱 분)의 팬트하우스에서 호화생활을 하며 지내는 라포스는 신분상승을 위해 다른 남자들을 침대 속으로 끌어들인다. 돈많은 극단주의 아들이며 뮤지컬 제작자인 19살 풋내기 필(톰 페인 분)은 라포스의 포충망에 걸린 먹이감이다. 그녀는 필이 제작하는 뮤지컬의 여주인공을 따내기 위해 육탄공세로 그의 애간장을 녹여놓는다. 하지만 라포스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피아니스트 마이클(리 페이스 분). 세 남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라포스는 어쩔 줄을 모른다.
혼란에 빠진 라포스 앞에 해결사가 나타났으니 그녀는 라포스의 새로운 개인비서 패티그루(영화 자막에는 비서를 매니저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연예계 상류층의 이면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마케팅의 장난이다.) 하지만 패티그루는 굶주린 홈리스에 불과했다. 우연히 라포스의 집으로 들어온 그녀는 곤경에 처한 라포스를 현명한 기지와 재치있는 말솜씨로 구원해준다. 그리고 라포스와 동행하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신분상승의 욕망에 가득찬 라포스의 행동 자체는 매우 탐욕스럽고 기회주의적이지만, 이야기는 산뜻하고 경쾌하게 그려져 있다. 그것은 원작의 힘이기도 하고 열연한 두 배우들의 힘이기도 하다. 라포스 역의 에이미 아담스와 페티그루 역의 프란시스 맥도만드는 환상적인 호흡으로 드림팀을 만들어냈다. 라포스 주변의 세 남자가 하찮게 보일만큼 그들의 연기는 빛난다. 화려한 금발과 천진스러울 정도로 환한 에이미 아담스의 웃음은 그녀를 도저히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그녀는 니콜 키드만의 지성미와 화려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니콜보다 훨씬 더 후덕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파고]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란시스 맥도만드는 천방지축 날뛰는 에이미 아담스의 가벼움을 중화시켜주는 무게 있는 연기로 작품의 중심에 위치한다.
동화같은 결말에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비난해도, [미스 패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가 대중들에게 주는 만족감에 상처가 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지 않는가? [미스 패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는 대중들이 꿈꾸는 그 로맨틱한 사랑을 스크린 속에서 보여주며 우리들의 마른 가슴을 축축히 적셔준다. 그것을 상투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