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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金正浩, ?∼?), 正體不明의 地理學 선구자(先驅者)? [제1편]
조선인(朝鮮人)? 왜구(倭寇)?, 일제(日帝)가 만든 사생아(私生兒)?
2024년 03월 10일
○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이분’은 대한제국(大韓帝國)【“1,897년 10월 12일∼1,910년 8월 29일”까지 존속(存續)하였던 근대국가(近代國家)】의 “대한인(大韓人)”이 아닌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백성(百姓)”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분”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알려진 것이 없고, 극비(極祕) 속에 가려져 있고, 심지어는 생몰년대(生沒年代)조차 알려지지 않는다.」 이해(理解)가 안 되는 일이다.
『19세기(世紀) 지리학(地理學)의 선구자(先驅者)요,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지도제작(地圖製作)에 일평생(一平生)을 바친 분』이라는 찬사(讚辭)와 칭송(稱頌)을 하려 한 대도 “그분”에 대해 알려진 것이 하나도 없으니, 무엇으로 그분을 칭송(稱頌)하고 찬사(讚辭)를 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 “그분”이 정말 존재(存在)해 있었던 것인지, 가공인물(架空人物)인지, 아니면 솔직(率直)하게 말해 “왜인(倭人)”이었는지 조차 누구도 모른다? 이건 “그런 분은 없었다”라는 말과 상통(相通)하는 얘기다.
「자는 백원(伯元)ㆍ백온(伯溫)ㆍ백지(伯之). 호는 고산자(古山子)」라고 하는 『김정호(金正浩)』는, 21세기(世紀) 해설(解說)에서 : 지리학(地理學)의 선구자(先驅者)라고 하면서 :
「삼십여년(三十餘年) ‘조선(朝鮮) 팔도(八道)’를 직접(直接) 발로 걷고, 뛰고 달리며 실측(實測)하여 조선(朝鮮) 지도(地圖) ‘청구선표도(靑邱線表圖)’를 제작(製作)하고, 후(後)에 이를 보완(補完)하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들고, 이어 ‘대동지지(大東地志)’라는 지리지(地理志)를 편찬하였다」라고 “입에 거품을 물며 해설(解說)하고 있다.”
➡➡➡ 그러면서도 “김정호(金正浩)”에 대한 모든 것들은 추정(推定), 추측(推測), 한두 사람의 증언(證言)이 전부(全部)다. 특히 그의 가족(家族)도 있었다 또는 없었다는 이야기도… … 「그렇다면 ‘그분’의 부모(父母)도, 형제자매(兄弟姉妹)도, 부인(婦人)도, 후손(後孫)도 없다」라는 이야기다.
또 출신(出身)도… …모든 것이 “극비(極祕) 등급처리(等級處理)”가 되어 지하(地下) 깊숙한 ‘캐비닛(cabinet)’ 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예 존재(存在)한 적이 없는 유령(幽靈) 인물(人物)이란 말일까?
일부(一部)들이 주장(主張)하는 것처럼 「“金正浩[1804~1866 推定]”의 일생(一生)이라고 한다면 “겨우 환갑【60세】”을 살았다는 것인데, 유아(乳兒), 소년기(少年期)를 빼고 나면 ‘삼십여년(三十餘年)’을 발로 걷고, 뛰며, 달리며 팔도강산(八道江山)을 실측(實測)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는 다른 직업(職業)을 가질 시간(時間)조차 없었던 말 그대로 ‘일생(一生)=평생(平生)’을 바쳤다」라는 뜻과 같은데,
➠ 여기서 가장 중요(重要)한 문제(問題)는, 「“예나 지금(只今)이나 먹고 사는 것이다” 먹지 않으면 살아 움직일 수 없고, 죽은 사람(死者)이 발로 걷고, 뛰며, 달리며, 팔도강산(八道江山)을 답사(踏査), 실측(實測)할 수 없기 때문이고, 경비(經費) 문제(問題)도 포함(包含)이 된다. 국가적(國家的)으로, 사회적(社會的)으로 누군가의 엄청난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不可能)한 구조(構造)다.」
그렇다면 「그를 도와 평생(平生)을 먹고살 수 있도록, 경비(經費)를 쓰며 지도(地圖)를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이 누군가?」 떠도는 소설(小說) 같은 이야기는 빼고, 그 흔적(痕迹), 증거(證據), 기록(記錄)과 함께 논거(論據)나 고증(考證) 사료(史料)가 있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일이다. “그러나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라는 것이다.
‘해설(解說)과 주장(主張)’에 따르면 : 그는 천(賤)한 신분(身分)일 것으로 추정(推定)한다고 하면서 : 평생(平生)을 발로 걷고, 달리며, 뛰며… …하는 동안 ‘그분’은 어떻게 먹고 살며, 걷고, 달리며, 뛰며 팔도강산(八道江山)을 답사(踏査)하는 비용(費用)은 어떻게 충당(充當)했다는 것일까? 수천(數千), 수만(數萬) 리(里)를 다니며 그 비용(費用)을 무슨 재주로 충당(充當)했다는 것인지, 정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대 사건(事件)이랄 수 있는 것이다.
설령(設令)하니 ‘24시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팔도강산(八道江山)을 답사(踏査)했다는 것은 아닐 터이다.
➡ 그러면 “그분”은 직업(職業)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재산(財産)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일까? 토호(土豪), 지주(地主)였을까? 대상(大商)이었을까? 수백(數百), 수천(數千)의 노비(奴婢)를 거느린 사대부(士大夫)였을까? 도대체 무엇으로, 무슨 재주로 수십(數十) 년을 발로 걷고, 뛰며, 달리며 조선(朝鮮) 팔도(八道) 구석구석을 다녔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인간(人間)이 아닌 “신인(神人)”이었다는 말과 같다. 불쌍한 조선(朝鮮)의 백성(百姓)들을 위해 일생(一生)을 헌신(獻身)한 “신인(神人)”이었나? 지도(地圖)와 ‘그분’의 일생(一生)만을 놓고 보면 : 두 가지 예(例)로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다.
➊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만들어낸’ 지리학(地理學)의 선구자(先驅者) 대가(大家)!
➋ 일제(日帝)가 ‘만들어낸’ 몬스터(monster) 유령(幽靈)!
과연(果然), “김정호(金正浩)” 그는 누구였으며, 왜 그는 지도제작(地圖制作)에 모든 것을 바치고도, 자신(自身)의 모든 것을 철저(徹底)하게 숨긴 것일까? 당시(當時)의 실정(實情)이나 시대상(時代相)으로 볼 때 가능(可能)했던 일일까? 겨우 150여 년(餘年) 전(前)의 일인데도, ‘극비(極祕)’에 싸여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도(地圖)를 제작(製作)할 수 있다”라는 것은, 평판(平板) 및 고저측량(高低測量)과 함께 고도(高度)의 과학(科學) 지식(知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는 누구의 문하(門下)였으며… …아니면 독학(獨學)으로 그토록 많은 과학기술(科學技術)을 습득(習得)했다는 것인가?
“그분”은 정말 애국애족(愛國愛族) 사상(思想)을 가진 훌륭한 업적(業績)을 쌓았고, 칭찬(稱讚)받아 마땅한 인물(人物)이었음에도… …실존(實存)한 인물(人物)이라면 왜? 그는 신비인(神祕人)을 자처(自處)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일제(日帝)가 만들어낸 “몬스터(monster, 怪物)”란 말일까?
도대체 “김정호(金正浩)”란 인물(人物)에 대한 수수께끼와도 같은 이유(理由)는 뭐냐? 하는 것이다. 우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자.
○ 아래의 ➠ 『“지도(地圖) ➊”과 “지도(地圖) ➋와 ”지도(地圖) ➌”』을 보면 : “일란성(一卵性) 세쌍둥이”다. 그만큼 정교(精巧)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지도(地圖) ➊”은, 사람이 발(足)로 걷고, 달리고 뛰어다니며 만들었다는 지도(地圖)요,
“지도(地圖) ➋”는, 21세기(世紀) 최신(最新) 지도(地圖)이며,
“지도(地圖) ➌”은, 인공위성(人工衛星 : 宇宙)에서 촬영(撮影)된 영상지도(映像地圖)다.
➡ 세 지도(地圖)를 살펴보면 : “일란성(一卵性) 세쌍둥이”다. 그만큼 정교(精巧)하게 다듬어진 지도(地圖)라는 것인데, 특히 “지도(地圖) ➊”을 보면 : 이게 발로 걷고, 뛰고, 달리며 만든 지도(地圖)라는 것을 이해(理解)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해안선(海岸線)의 굴곡(屈曲)진 모습은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이해불가(理解不可)하다는 뜻이다.
➠ “세 가지 지도(地圖) ➊+➋+➌”을 놓고 보면 : 「그는 인간(人間)이 아닌 “신인(神人)”임이 분명하다. 어떻게 전국(全國) 각지(各地), 해안선(海岸線), 섬(島), 산(山), 산맥(山脈), 하천(河川), 평야(平野), 고을 등지(等地)를 발로 걷고, 달리고, 뛰며 다녔다면 : 아마도 수십만(數十萬) 리(里), 더 많은 거리(距離)를 발품을 팔고 다녔을 것으로 추측(推測)할 수 있으니, 신인(神人)이 아니면 불가능(不可能)한 일일 것이다.」라는 것이다.
➠ 여기서 또 한 가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은, ‘대동지지(大東地志)’라는 지리지(地理志)인데, “김정호(金正浩)”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들고 이에 맞춰서 대동지지(大東地志)를 편찬(編纂)했다고 알려진 것인데,
➠➠➠ 만약(萬若),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대동지지(大東地志)’를 “김정호(金正浩)”가 만들고, 편찬(編纂)했다면 : 〈그분은 조선족(朝鮮族)을 철저(徹底)하게 우롱(愚弄)하고, 능멸(陵蔑)한 셈이 된다〉 즉(卽),
➨➨➨ ‘황당무계(荒唐無稽)’하게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를 그려 놓고, 지리지(地理志)인 “대동지지(大東地志)” 내용(內容)은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와 전혀 디른 ‘이국(異國)땅’의 토산물(土産物) 이야기를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라는 사실(事實)이다.
이것을 혹평(酷評)한다면 : 누군가가 짜깁기를 했다는 것이고, 누군가가 어떤 목적(目的)을 위해, 반도인(半島人)인 것처럼 위장(僞裝), 왜곡(歪曲), 조작(造作)했다는 것이다.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는, 「지형지세(地形地勢)나 특이지형(特異地形), 산하(山河), 기후대(氣候帶), 토산물(土産物)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는 반도(半島) 땅과 똑같은 자연환경(自然環境)을 가진 곳은, 오직 “반도(半島) 땅일 뿐이다”.」
이는 곧, 〈반도(半島)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과 전혀 다른… …기후대(氣候帶)가 전혀 다른… …토산물(土産物)이 전혀 다른 땅은, “반도(半島) 땅일 수 없다”〉라는 것이다.
지도는 ‘반도(半島)=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의 것이고, 지리지(地理志)는 전혀 다른 땅을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 「말 그대로 황당무계(荒唐無稽)함 그 자체(自體)다」.
➠ 「지도(地圖) ➊」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출처 : 카페 다음넷 / 사회통합 한국어]
➠ 「지도(地圖) ➋」한반도(韓半島)의 최신지도(最新地圖)
➠「지도(地圖) ➌」우주(宇宙)에서 본 한반도(韓半島) [출처 : 아시아경제, 사진 NASA]
○ 김정호(金正浩, ?~?)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발로 걷고, 뛰고, 달려 팔도강산(八道江山)을 측량(測量)하여 만든 지도(地圖)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뒤떨어진 초기의 항공사진(航空寫眞)보다도 더 정밀(精密)하게 만들어져 있어 감탄사(感歎詞)가 절로 나오는 명품(名品?)일 수밖에 없다.
➠ 이러한 일련(一連)의 역사(歷史) 전개과정(展開過程)을 보면 : 한반도(韓半島)는, ‘괴물(怪物) 학자(學者)’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괴물(怪物)과 같은 사회(社會)”라고 해도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아닐 정도(程度)로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집단(集團)이 되어가고 있다. 일제(日帝)의 잔재(殘在) 속에서 하루하루 연명(延命)해가는 “영(影)의 사회(社會)”인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가 주장(主張)하는 말처럼 : 희한(稀罕)한 말 그대로 “공산전제주의”를 외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말은 사전(事典)에도 없는 말이니, 주장(主張)하는 사람 혼자서 만든 통용(通用)되지 않는 단어(單語)다.
또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자본주의(資本主義) 국가(國家)’에서 독재정권(獨裁政權)도 아닌 시대(時代)를 사는 사람이 시간(時間)만 나면 “자유(自由)”를 외쳐대는 신기(神奇)한 모습을 연출(演出)하는 것을 보면 : 「대한민국(大韓民國) 이 사회(社會)가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나라는 “자유(自由)”라면, 홍수(洪水)가 날 지경이고, 강(江)이 범람(氾濫)할 지경으로 누리고 있는데, ►►► 진짜 통제(統制)되고 있는 것은 국민(國民)들 개개(箇箇)인의 자유(自由)가 아니라 「정부(政府)와 정권(政權)에 의해 자행(恣行)되는 언론(言論)과 방송(放送)의 통제(統制)다.」
이로 인해 국민(國民)들은, “무엇이 진실(眞實)이며 무엇이 거짓인지”를 판단(判斷)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간다. 국민(國民)들의 눈과 귀를 가리는 만행(蠻行)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더 필요(必要)하지 않은, 그 대상(對象)이 누군지도 모르는,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는 자유(自由)”를 외치는 ‘헛빨짓’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必要)한 것은, 정권(政權)과 정부(政府)에 의해 통제(統制)되고 있는 언론(言論)과 방송(放送)의 자유(自由)를 찾아주는 것이다. 국민(國民)들의 눈과 귀를 막는 만행(蠻行)을 중단(中斷)해야 한다.〉
뭔 놈의 자유(自由)를 그렇게 미친 듯이 외치고 있는 건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예전의 “박정희와 전두환”이 환생(還生), 이 나라를 통치(統治)하고 있다는 건가? 그럼 지금의 “윤석열” 정권(政權)은 뭐냐? 왜 모든 것을 감추고, 숨기려 하는 것인가?
이래서 우리 사회(社會)가 과거(過去)로 퇴보(退步)하며, 귀신(鬼神)들이 꽹과리를 치는 시대(時代)로 회귀(回歸)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라(國家)도, 인간(人間)도, 퇴보(退步)는 곧 죽음을 의미(意味)한다. 그래서 인류(人類) 는 끊임없이 진화(進化)에 진화(進化)를 거듭하고 있으며, 집단(集團)은 끊임없는 개혁(改革)이 필요(必要)한 것이다. ‘개혁(改革) 없는 사회(社會)’는, 고인 물이 부패(腐敗)하는 과정(過程)을 거쳐 독기(毒氣)도 만들어지고, 결국(結局) 증발(蒸發), 흔적(痕迹)도 없이 사라지는 과정(過程)을 거치는 것은, 천지간(天地間)의 이치(理致)다. 천지간(天地間)의 이치(理致)를 거역(拒逆)하는 행위(行爲)는, 곧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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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金正浩)는, 「靑邱圖, 東輿圖, 大東輿地圖, 東輿圖志, 輿圖備志, 大東地志」 등을 만들고 편찬(編纂)한 인물(人物)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實際) ‘김정호(金正浩)’라는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해괴(駭怪)한 경우(境遇)다.
생몰년(生沒年)도, 그의 정확(正確)한 가계(家系)도, 일상(日常) 행적(行蹟)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것이 없다. 지도(地圖)를 놓고 보면 : 정밀(精密)하게 다듬어진 것이 「“김정호(金正浩)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일제(日帝) 당국(當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의심(疑心)케 하고, 가공(架空)의 인물(人物)을 내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 「“김정호(金正浩)”의 지도제작(地圖製作)에는 당시(當時) 왕조(王朝)의 고위관료(高位官僚)들이 적극적(積極的)으로 지원(支援)했다… …발로 걷고, 뛰며 달리며 팔도(八道)를 걸어 다닌 것이 아니라, 적극적(積極的)으로 지원(支援)해 주는 관료(官僚)들이 여기저기에 산재(散在)되어 있던 동국지도(東國地圖) 파편(破片)들을 모아 건네주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제작(製作)할 수 있도록 해줬다」라는 것이나,
‘최(崔)’ 아무개라는 분들의 적극적(積極的)인 지원(支援)에 힘입어 평생(平生)을 지도제작(地圖製作)에 전념(專念)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등… …지도(地圖)를 제작(製作)하는데, 적극적(積極的)으로 지원(支援)하고, 협력(協力)하였다면 : 이렇게 훌륭한 인물(人物)에 대한 가장 중요(重要)한 “일생(一生)”의 모든 것들을 지워버렸는가? 하는 것이고, 이러한 지원(支援)과 후원(後援)은 개인(個人)과 가문(家門)의 영광(榮光)으로 돌려질 것임도… …아니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었다”라는 것이 정확(正確)한 표현(表現)일 것 같다.
➠ 또 “대원군(大院君)에 의해 참수(斬首)되었다”라는 등의 헛소리가 시중(市中)에 유포(流布)된 것은, 사이비(似而非) 학자(學者)들의 잘못이라는 등 도무지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해설(解說)들이 대부분(大部分)이다.
19세기(世紀) 중반(中盤)의 사건(事件)들조차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大部分)이라면 : 「이 땅에 “왕조(王朝)”가 존재(存在)했었다는 것, 자체(自體)를 의심(疑心)받을 수밖에 없다.」
➠➠➠ “김정호(金正浩)”는, 과연(果然) 위와 같은 정밀(精密)한 지도(地圖)를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 가장 의문(疑問)일 수밖에 없다. 아래의 것을 보자.
(1) [출처 : 고전번역원 DB] :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저자(著者)는 “金正浩(1804~1866 추정)”이다. 본서는 저자가 이전에 편찬한 「東輿圖志」와 「輿圖備志」를 수정·보완하여 편찬한 지리지로서, 각권 卷首題 아래에 ‘古山子 編’이라 기재되어 있다. 김정호는「靑邱圖, 東輿圖, 大東輿地圖」 등의 지도와 東輿圖志, 輿圖備志 등의 지리지를 편찬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 “생몰년(生沒年) 및 행적(行蹟)을 확실히 알 수 없다”》
➨ 이러한 설명(說明)에 따르면 : 「지도(地圖)나 지리지(地理志) 등에 “고산자(古山子)”편이라고 기재(記載)되어 있기 때문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製作)하고 편찬(編纂)했다는 것으로 결론(結論)지어진 것이다〉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모조품(模造品)에도 “고산자(古山子)”라는 ‘싸인’만 있으면 “김정호(金正浩)”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것이 바로 함정(陷穽)이다. 곧 김정호(金正浩)가 만들지 않았어도 “고산자(古山子)”라는 세글자만 삽입(揷入), 추가(追加)하면 “김정호(金正浩)”가 만들고, 편찬(編纂)한 것으로 둔갑(遁甲)시킬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건 한민족(韓民族)을 능멸(凌蔑)하며, 비웃는 행위(行爲)다.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정호는 조선 후기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란 3대 지도를 제작한 학자이다. “1804년(순조 4)에 태어나 1866년(고종 3)”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계와 생애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어 평민 출신으로 생각된다.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축척을 동일하게 적용한 과학적인 전국지도를 제작하고자 했다. 또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1861년(철종 12)에 전국지도인 『대동여지도』 22첩을 목판본으로 찍어내었다. 다양한 지도 제작과 함께 국토정보를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지리지의 편찬에도 매진했다.》
➠ 그의 일생(一生)은 61년 곧 ‘환갑(還甲)=회갑(回甲)’을 살았다는 것인바, 유아(乳兒)기와 소년기(少年期)와 청년기(靑年期)를 빼고 나면 겨우 35년 정도를 성인(成人)으로 살았다는 것인데, 또 결혼(結婚)하여 아이 낳고, 본인(本人)과 부모(父母), 아내(妻)와 자식(子息)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업(職業) 전선에서 뛰었을 것이란 것은 추측(推測)해도 확실(確實)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분은 언제 지도(地圖)와 관계(關係)되는 지식(知識)을 쌓고, 지도(地圖)를 만들기 위해 팔도강산(八道江山)을 걷고, 달리며, 뛰어다녔을까? 설명(說明)마다 평생(平生)이니, 일생(一生)을 바쳤다고 하였다. 그런 설명(說明)을 하기 전(前), 설명(說明)해야 할 것들이 많은데 모조리 빠져 있어 의혹(疑惑)을 증폭(增幅)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무나, 누구나 조선팔도(朝鮮八道)를 걷고, 달리며, 뛰어다니면 지도(地圖)가 만들어지나? 이런 이야기는 스스로 “내가 제작(製作)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3) [나무위키] : 《서유럽에서 발로 걸어 측량지도를 확립한 지도학자의 대명사가 장 도미니크 카시니로 알려져 있듯이, 한국에서는 지도의 대명사로 손꼽힌다. 다만 시기상으로는 카시니가 150년 정도 앞선다. 한편 김정호는 직접 지도를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 편찬된 국내외의 자료를 집약하여 새로운 지도와 도법을 고안하기도 한 학자였다. 한국의 지도 외에 세계지도 역시 제작한 바가 있다.》
➠ “나무위키”에서 밀히는, “장 도미니크 카시니”는 천문학자(天文學者)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에서 말하기를 :
장 도미니크 카시니 백작(Jean-Dominique, comte de Cassini, 1748년 6월 30일 ~ 1845년 10월 18일)은 프랑스의 천문학자, 지도제작자였으며 세자르 프랑수아 카시니 드 튀리의 아들이다. "카시니 백작" 또는 "카시니 4세"라고도 한다. 카시니 백작은 파리 천문대에서 태어났다. 178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문대장이 되었으나 천문대를 복원하고 장비를 재정비하려던 계획은 1793년 국회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자리가 위태로워지자 그는 9월 6일 사임하였는데 1794년 투옥되었다가 7개월 만에 풀려났다. 그 후 튀리에서 살다가 1845년에 죽었다.[1] 피에르 르 로아(Pierre Le Roy)의 해상시계를 바다에서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1768년에 수행된 미국행 항해에 프랑스 과학 학술원 대표로 참가한 이야기를 1770년에 출판했다.[1] 1783년 그는 영국 왕립학회에 짧은 논문을 보내 파리와 그리니치의 천문대의 위도와 경도를 정확하게 결정하기 위해 두 곳을 연결한 삼각 측량을 제안하였다.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영불 합동조사(1784–1790)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는 1791년에 발표되었다. 이 조사를 위하여 피에르 메셍과 아드리앵 마리 르장드르와 함께 영국을 방문하였고, 세 사람은 슬라우에서 윌리엄 허셜을 만났다. 그의 아버지가 시작한 프랑스 지도제작 사업을 1789년 완성하여 182장의 지도를 만들었고 과학 학술원은 이것을 1793년에 출판하였다. 이것은 프랑스를 항목별로 보여주는 국가 지도(1791년)의 기초가 되었다. 그렇지만 1793년 9월 전쟁사무국은 지도원판과 발행된 지도를 압수하였다. 그는 1795년에 설립된 경도국 이사회의 창립 회원이었다. 1788년 미국 예술 과학 학술원의 외국인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인용/끝]
“장 도미니크 카시니”는, 천문학자(天文學者)는, “김정호(金正浩)”와는 비교(比較) 자체(自體)될 수 없는 행로(行路)를 보여준 인물(人物)이다.
(4) [위키백과] : 《김정호[한국 한자: 金正浩, 1804년 ~ 1866년)]는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며 지도제작자이다. 자는 백원(伯元)·백원(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이며, 호는 고산자(古山子)[1]이다. ➨황해도 토산군(兎山) 출생으로 본관은 청도(淸道)이다.[2] 김정호는 청도 김씨 봉산파로 황해도 토산에서 1804년[3] 무렵에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빈한했고 지도 제작 등에 필요한 지식 등에 비추어 볼 때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으로 추정된다.[4]》
➠ 이곳에서는 생몰년(生沒年)도 정확(正確)하게 설명(說明)하고, 출생지(出生地), 본관(本貫) 등도 정확(正確)하게 기술(記述)하고 있는데, “지도 제작 등에 필요한 지식 등에 비추어 볼 때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으로 추정된다”라는 말은 무엇일까?
즉 그렇게 기술(記述)하고 있는 증거(證據) 또는 확신(確信)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게 중요(重要)한 것이다. “맆서비스”는 가장 혐오(嫌惡)스러운 것이다. 가정형편(家政形便)이 어려운데, 또는 잔반(殘班) 곧 몰락(沒落)한 양반(兩班)이라면 : 「무슨 재주로 평생(平生)을 먹고 살며 경비(經費)를 쓰며 지도제작(地圖制作)에 매달릴 수 있었을까? 에 답변(答辯)을 할 수 없다면 : 이건 역시 “맆서비스”에 불과(不過) 한 것이다.」
반대(反對)로 “김정호(金正浩)”는 「대단한 양반가(兩班家) 또는 토호(土豪), 대상인(大商人)이거나 수십(數十), 수백(數百) 명의 노비(奴婢)들을 거느린 부농(富農) 출신(出身)이어야 평생(平生)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팔도강산(八道江山)을 걷고, 달리며 뛰며 지도(地圖) 제작(製作)에 심혈(心血)을 쏟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정답(定答)이어야 정상적(正常的)인 일이다.
(5) [네이버 한자사전] : 《김정호 :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지리학자(地理學者)(?~?). 자(字)는 백원(伯元)ㆍ백온(伯溫)ㆍ백지(伯之). 호(號)는 고산자(古山子). 30여 년 동안 전국(全國) 각지(各地)를 돌아다니며 실측(實測) 답사(踏査)하여 조선(朝鮮)의 지도(地圖) 청구선표도(靑邱線表圖)를 완성(完成)하였고, 그 뒤 이를 보완(補完)하여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제작(製作)하고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집필(執筆)하였다.》
(6) [국어사전] :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자는 백원(伯元)ㆍ백온(伯溫)ㆍ백지(伯之). 호는 고산자(古山子). ➨ 30여 년 동안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실측(實測) 답사를 하여 조선의 지도 <청구선표도>를 완성하였고, 그 뒤 이를 보완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고 ≪대동지지≫를 집필하였다.》
(7) 金正浩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 〈金正浩(韓語:김정호,約 1804年—1866年),字伯元、百源、伯溫,號古山子,李氏朝鮮的地理學家、地圖學家。出生於黃海道兎山,本貫清道金氏。自幼聰穎好學,對地理學、地圖學有著濃厚興趣,並對此方面有研究。主攻方向是朝鮮半島的地圖。在條件落後的情況下,金正浩採用舊式的測量工具,主要以實測的方法,用十餘年的時間走遍各地,於1834年繪製了《青邱圖(或稱青邱線表圖)》,但尚不夠精確。他又花了近30年時間,於1861年12月完成了22個圖冊構成的《大東輿地圖》,在當時的地圖測繪領域屬先進水平。關於金氏繪製大東輿地圖的故事在2016年被導演康佑碩拍作電影《古山子:大東輿地圖》。
金正浩出身於黃海道兎山的平民家庭,雖然家境貧窮,但是從他所掌握的製圖學知識來看,韓國學界推測他為殘班(沒落的兩班)或中人背景。金正浩在日後遷入漢陽,並被認為居住在南大門萬里峙一帶。根據實學家崔漢綺為金正浩之《青邱圖》所撰題文的記載,金正浩是在冠禮之後開始對製作地圖產生熱切的興趣。金正浩在1861年為《大東地誌》補遺時因肺部疾病而死在南大門孔德里的私邸裡。不過有一种说法提到金正浩因為被兴宣大院君認定為洩露國土機密而被处死。[1]
著作 / 東輿圖志(又稱「大東輿地通考」)、青邱圖,1834年 / 輿圖備志,1856年 / 東輿圖,1856年 / 大東輿地圖,1861年 / 大東地誌和地球前後圖在金正浩死後出版.〉
➨ 어떻게 된 일인지 “중국어 위키백과” 편의 “김정호(金正浩)”에 대한 설명(說明)은, 우리나라의 그 어떤 곳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실감(實感)나게, 실존(實存)하는 인물(人物)처럼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는 것이 특징(特徵)이니, 참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8) [다음백과 :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김정호 : 백원, 金正浩 : 지도제작에 평생을 바친 외로운 지리학자 : 중략(中略). ➨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물론, 가계나 태어난 해, 자손들에 대해서조차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지도나 지리에 관한 책 외에는 입으로 떠도는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본관은 청도로 호는 고산자인데, ➨ 본래 황해도에서 태어나 서울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황해도 출신이라는 것도 명확하지 않으며, 서울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사람들의 입으로만 전해질 뿐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고난의 역정과 죽음의 의문 : 김정호는 서울 동대문 밖 용두동 또는 마포 공덕리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 예전의 용두동은 백정 같은 천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요, 예전의 공덕리는 장사치나 하층민들이 살았던 곳이다. 그러니 생업을 버리고 살았던 그가 가난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딸이 이 지도 작업을 힘껏 도왔다는 말도 전해진다. 중략(中略). 한편 그의 지도를 제대로 써먹은 것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군대였다. ➨➨➨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적에 일본군대는 〈대동여지도〉를 입수해 군수물자의 수송, 군사작전 등에 활용했다. [Daum백과 : 김정호 –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 주니어김영사]
➠➠➠ 전체적(全體的)으로 보면 : 가공(架空)된 허상(虛像)의 인물(人物)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疑心)은 매우 합리적(合理的)일 정도로 “김정호(金正浩)” 대한 것들은, 대부분 추정(推定)과 추측(推測)과 짐작(斟酌)일 뿐이다. 확실(確實)한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어디에서 살았던 것이 중요(重要)한 것이 아니다. “그”가 만들었다던 “지도(地圖)와 지리지(地理志)”는, 누가 봐도 당시(當時)로써 획기적(劃期的)인 일이었음에도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웃기는 일이며, 이해불가(理解不可)하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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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 「한반도(韓半島) 땅에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있었다는 것을 발로 걷고, 뛰며, 달리며 그것을 확인(確認)했다.」라는 것이고,
「당시(當時) 한반도(韓半島)에 살고 있었던 무지몽매(無知蒙昧)했던 백성(百姓)들에게 바로 이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자, 그들의 후손(後孫)들에게 “반도(半島) 조선(朝鮮)”의 흔적(痕迹)을 남겨주려 한 것이다.」
➨➨➨ 여기서 “반도인(半島人)들이 무지몽매(無知蒙昧)했다”라는 것은, 당시(當時)의 ‘일천(一千) 오백(五百) 만(萬)’인(人) 정도(程度)로 추산(推算)되던 백성(百姓)들을 비난(非難), 무시(無視), 비하(卑下)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世紀) 초(初)의 ‘통계자료(統計資料)’에 의하면 : ‘93 – 95%’의 백성(百姓)들이 중인(中人) 이하(以下)로 구성(構成)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며, 아무리 높게 잡아도 7 – 8%만이 중조(中朝)로부터 파견(派遣)된 관리(官吏)와 토호(土豪), 양반(兩班), 이들과 중인(中人) 등으로 구성(構成)되었다는 것으로 추측(推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當時)에 “조선인(朝鮮人) 김정호(金正浩)”를 내세웠지만, 「당시(當時), 한반도(韓半島)에 살고 있었던 무지몽매(無知蒙昧)했던 백성(百姓)들에게 바로 이 메시지【반도(半島) 땅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터전이었다】를 보내는 것이자, 그들의 후손(後孫)들에게 “반도(半島) 조선(朝鮮)”의 흔적(痕迹)을 남겨주려 한 것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이 목적(目的) 외(外)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김정호(金正浩)”라는 사람이 정말 당시(當時) 한반도(韓半島) 백성(百姓)으로 실존(實存)했었는지조차 불분명(不分明)하기 때문이다.
➠ 또 “군사용(軍事用) 목적(目的)이 있었다”라는 것을 미뤄 짐작(斟酌)할 수 있는데, 일제(日帝)는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적에 일본군대는 〈대동여지도〉를 입수해 군수물자의 수송, 군사작전 등에 활용했다.』라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연구자”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연구(硏究)한 분께서는 좋은 말로 입수(入手)”라고 하였지만, 여러 정황(情況)과 지리지(地理志) 등을 상세(詳細)하게 검토(檢討)해보면 : “일제(日帝) 당국(當局)에 의해 만들어진 지도(地圖)다”라고 확신(確信)할 수 있는 것이다.
“김정호(金正浩)”라는 사람이 이렇게 평생(平生)을 발로 걷고, 뛰고, 달리며 팔도강산(八道江山)을 휘젓고 다녔다면 : 「방방곡곡(坊坊曲曲) 구석구석에는 “김정호(金正浩)”를 아는 사람이 널려 있었을 것이고, 구석구석에 김정호(金正浩)와 관련(關聯)된 야사(野史)가 넘쳐날 것은 상식적(常識的)인 이야기다.」
그렇지 않다면 “김정호(金正浩)”는 야행성(夜行性) 인간(人間)으로 주로 밤(夜)에 활동(活動)하는 바람에 누구도 본 사람이 없는, 몰래 걷고, 몰래 뛰며, 몰래 달리며 팔도강산(八道江山) 구석구석을 누볐기 때문에 지인(知人)도 없고, 야사(野史)도 있을 수 없다고 할 텐가?
그분이 만들었다는 “대동지지(大東地志)”를 보면 : 철저(徹底)하게 한반도(韓半島)를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영토(領土)로 만들어 놓았다. 아주 치밀(緻密)하고 철저(徹底)하게 말이다.
그렇다면 「“고려(高麗) 땅” 단 한치도 변함없이 그대로 물려받은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는, 수만리(數萬里) 땅을 누구에게 팔아먹은 것일까? 아니면 수만리(數萬里) 영토(領土)를 내팽개치고, 겨우 ‘동서(東西) 수백(數百) 리, 남북(南北) 3 천리(千里)’라는 좁디좁은 땅으로 밤새워 쫓겨온 것인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의 서두(序頭)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수만리(數萬里): 강역(疆域)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러한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은, 연구자(硏究者)로 보면 : 아주 정상적(正常的)인 사고(思考)에 속하는 문제(問題)다.
‘대동지지(大東地志)’를 해부(解剖)해 보면 : 그 실체(實體)가 정확(正確)하게, 분명(分明)하게 밝혀질 것으로 확신(確信)한다.
➨ “제2편”에서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서문(序文)」, “제3편”에서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말하는 토산물(土産物)」 편을 철저(徹底)하게 해부(解剖)하여『이 땅의 것이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의 것이라는 것을 밝히겠다.』[제2편으로 계속(繼續)]
2024년 03월 10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세종대왕 칠정산내외편,
현재와 그때 365일의 계산이
칠정산 내외편이 1초 차이가 난다고 함.
세종대왕 당시에는 그 시간대가 현재 우리보다 1초가 빠를수도 있다고 함.
이런 우주 시간을 측정했던
세종대왕의 칠정산내외편 편찬이
1444년이라함.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1864년 이라고 하는데?얼척 없음.
1444-1864=420년이 지난 시기.
북극인가?남극인가?의 지도도 상세히
전해지고,누가 그 지도를 그렸는지
자세히 알수없는 현실이지만,
제 어릴때만해도 국민핵교,중핵교에서 배운
조선은 지도를 만들지 않았다 였음.
어찌해서?
왜나 북쪽 오랑캐가 지도를 가지게 되면,
한반도를 유린한다고 말하셨음.
당시에는 그럴수 있겟다였음.
어찌해서 그럴수있겟다?칠정산내외편도 만들고 지구의 시간을 계산할만큼.
이런 수학,천문학을 가진 이성계조선린줄 몰랐지요.
당시 이성계조선의 외세 침략900여회,
고질적인 위정자의 부정부패,
백골징포,쌀에 모래썩는 등의
부정부패...
이당시 이런 교육을 받은 나도,
미국과일본과 중국과 유럽을 동경했었음.
아마도 고2때에
친구가 보라고 했던,
임승국선생을 환단고기를 읽지않았다면,
현재에도 미국,일본,중국,유럽을
동경했을거임.
현재 증산계쪽 사이비에서 나온 한단고기는 보지 마셈.
교주 붓대 가는대로 해석한거임.
그냥 신도확장을 위한 교주가족 밥그릇 늘리기 책.
당시 임승국선생의 환단고기 책을
펼쳤는데 읽기전임.
책에서 빛이 광명 퍼져나와 내 2평도 안되는 방을 눈이 부시게 밝히는 체험을 했음.-미쳤다고 해도 상관없음 당시 고2때
현재 56.
이젠 살날보다 죽을 날이 가까운데,
어떤자들처럼 사기와 입으로 거짓말만
하는 것들 처럼 산적이 없어서,
사이비개벽도들 처럼 온통 거짓으로
똘똘뭉친것이 일본왕가인가 싶네요.
얘들이 백제 왕가 어쩌고 흘려도 그건 아닌듯,일제왕가는 어찌하여?
한국의 역사마져 온통조작을 하는데,
꺼리낌이 없었던 걸까요.
현재까지도.
안녕하세요!
"노다가세"님!
위에서 말씀하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같은 이야기는, 일제식민지통치시대로부터 이어져 군정기간내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나서 곧바로 이어져 오늘에 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100년을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 '장수프로'입니다.
우리는 초등학교시절에 미국아이들이 원조해준 '강냉이 죽'을 얻어먹으며 컷고, 분유가루을 얻어먹기 위해 줄을 서야 하는 등 미국은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축복과 은헤의 나라"였습니다.
이승만은 우리에게 국부(國父)로 추앙받으며 대통령직을 수행했고, 부정부패, 정적제거, 친일파 등용, 부정선거, 양민학살등도 정당한 것처럼 호도하며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 모두는 "한반도"의 백성들의 무지몽매함에서 이용당한 것이죠.
이 모두의 것은 "미국과 일본"의 야합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전제는 당시의 군주와 신하들의 무능력과 무책임에서 시발된것이겠죠.
이제는 국민들도 분노할 줄 알아야 하고, 분노하면 행동해야 한다는 것도 스스로 자각해야 합니다.
다음 [2편]에서는,
대동여지도 서문(序文)에 기록된 내용을 한 번 따져 보고자 합니다.
물론 일반적인 행정구역이나 팔도등으로 구분된 것은, "확실하게 한반도 땅에 맞도록 세밀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다음 [3편]에서는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와 함게 편찬했다는 "대동지지"속의 토산물편의 내용을 따져보기로 하겠습니다.
*** 중요한 것은,
대동여지도는 분명 '한반도'를 그려 놓았는데,
일부 지방의 토산물은 중원대륙과 서남아세아 아열대와 열대우림에서 나는 토산물을 기록해 놓고 있다는것입니다.
*** 한마디로 표현하면 : '황당무계'하다는 것입니다.
"김정호"라는 인물이 실존했다면 : 이 분은 일제제국주의자들로부터 철저하게 이용당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강희대제가 근대식 지도를 도입한 이래로 서양애들이 이 지도를 가지고 장난질 친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있지도 않는 복건성을 만든다든지 절강성, 안휘성 등등을 허위로 만들어 놓고, 이 지명의 근거는 제왕운기(일본, 동경개판, 즉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 등등)를 조작해서 여기에 지명을 조작 이입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년도 지도명 작성자국명 작성자 제작국 비고
1709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 프랑스 레지(Jean-Baptiste Regis) 중국 강희
1735 중국전지(中國全誌) 프랑스 뒤 알드
1737 당빌 프랑스 신중국지도첩 봉황성 책문 국경선
1771 CARTEDELA LA TARTARIE CHINOISE 프랑스 본느(Rigobert Bonne) 프랑스 수학자
1745 A Map of Quantong or Leatong Province and Kingdom fo Kau-Li or Corea 영국 키친(T. Kitchin) 영국 경희대 혜정박물관 소장
1783 현재의 아시아(Present Aisa) 영국 닐(Samuel Neele) 영국 실제 지도에 조작 구상한 흔적
1830 Chinese and Indepenent Tartary 영국 존 캐리(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