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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8일 [사순 제1주일]
마르코 1,12-15
회개란 지옥의 원인이 나 자신임을 확실히 아는 것
오늘 복음은 왜 복음을 믿기 위해 회개가 필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받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유혹은 한 순간 받는 무엇이 아니라 매 순간 이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유혹은 매 순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것이 유혹이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유혹을 이기셨더니 세상을 구원하는 자가 되시고 결국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길을 따르라고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은 나 자신을 그것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회개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희생의 결단이 아니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사랑에게 지옥은 나 자신입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쓴 『닫힌 문』(No Exit)이란 연극에서 왜 타인이 지옥이 되는지 설명합니다.
설정은 신비한 방으로, 주인공들이 죽음 이후 일종의 사후 지옥의 역할을 합니다.
이 방은 거울, 창문 또는 탈출 수단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캐릭터가 소개됩니다.
그들은 죄가 있어서 죽어서 이 방으로 들어왔지만, 서로 자기를 합리화하고 인정받으려 하고 사랑을 갈망하기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공간이 됩니다.
하지만 혼자 외롭게 되는 게 더 큰 고통이라 여기기에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며 삽니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세상이 지옥이라 본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지옥이 타인의 탓일까요? 타인에게 집착하는 자기 마음 탓이 아닐까요?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에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사랑은 하느님이고 나는 그 사랑에 내 목숨을 투자합니다.
그러면 부활이 있습니다.
이 복음은 죽음의 보상을 줄 신의 존재를 거부할 때 의미를 잃습니다.
인도 영화 ‘삼사라’에서 사람은 누구나 물 한 방울이 주어져 있고 그것을 마르지 않게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도를 닦는 것임을 말합니다.
결론은 물 한 방울이 마르지 않으려면 바다에 던져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바다란 ‘사랑’입니다.
사랑은 나 자신을 사랑에 투자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마치 사막의 펌프처럼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그 한 방울의 물을 지키려는 마음이 지옥입니다.
그것을 지키면 펌프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막 한 가운데 폐허가 된 주유소가 있고 그곳엔 물 펌프 하나가 유일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목이 말라 실신할 지경에 이른 나그네가 주유소의 물 펌프를 발견하고 달려갔습니다.
거기엔 바가지의 물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팻말이 있었습니다.
“이 펌프 밑에는 엄청나게 시원한 지하수가 있어요. 누구든지 이 펌프 물로 갈증을 해소하세요.
명심하세요. 펌프 앞에 놓인 바가지의 물은 절대로 마시면 안 돼요.
이것은 ‘마중물’. 잊지 마세요.
다음 분을 위해서 ‘마중물’을 꼭 채워놓고 가세요!”
이 한 방울의 물을 바치는 게 에덴동산의 선악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뱀입니다. 지옥은 이 뱀, 곧 나 자신에게서 시작됩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에게서 탈출시키려 합니다.
모세가 오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파라오 때문에 지옥을 사는지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가 곧 지옥이었음을 깨닫게 되지 모세를 믿게 됩니다.
가나안 땅, 곧 하느님 나라는 자기 안의 파라오를 배신함으로써 얻는 에너지를 갈아 넣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사랑은 나의 생명을 내어주는 일이고 생명은 곧 피입니다.
돈도 피이고 음식도 피이며 명예도 피입니다.
이 피를 갈아 넣지 않으면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회개는 지혜의 빛이 요구되고 그 지혜의 빛으로 사랑의 삶을 살겠다는 착한 뜻을 만들고 착한 뜻은 그것과 반대되는 나의 뜻을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나의 뜻에서 휙 돌아서서 하느님의 뜻을 향하게 될 때 복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나를 가만히 두면 지옥에 머물게 되어 나를 사랑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마르지 않는 사랑으로 충만해진다는 복음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나 자신이 지옥의 땅이고 복음은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8일 [사순 제1주일]
마르코 1,12-15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깊은 광야로 들어갑시다!
언젠가 성지 순례 때 잠시나마 광야 이곳저곳을 걸어 다닌 적이 있습니다.
즉시 다가온 느낌은 황량함이요 삭막함이었습니다.
광야 한 가운데 서서 아무리 둘러봐도 제대로 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머무를 곳도 쉬어갈 곳도 없는 불모지, 뱀과 전갈만이 위협하는 고통과 죽음의 땅이 광야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시시각각으로 기후가 변하는 곳, 때로 뜨거운 태양의 열기나 무지막지한 광풍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곳, 우리의 미성숙, 거짓신앙, 값싼 신앙, 유아기적 신앙이 낱낱이 드러나는 곳,
한 마디로 고통스러운 장소가 광야입니다.
모든 것이 결핍된 장소, 우리 각자의 맨얼굴과 인간적 한계를 명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장소,
생각과 마음이 단순화되는 장소, 하느님께 더욱 절박하게 매달리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때로는 고통의 장소, 때로는 은총의 장소인 광야를 40년 동안 걸어가면서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그릇된 요소들을 정화시켜나갔습니다.
우상숭배에서 유일신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형식적인 신앙, 위선적인 신앙에서 진실하고 견고한 신앙으로 변모시켜나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약속의 땅에 입국하기에 합당한 신앙공동체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가끔씩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더 자주 광야로 몰아넣으십니다.
우리가 원치도 않는 쓰디쓴 광야를 체험케 하시는데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순시기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중에 하나가 ‘광야’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 체험을 통해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하십니다.
또한 광야 체험을 통해 나 자신의 어둡고 부끄러운 내면을 직시하게 하십니다.
더불어 광야 체험을 통해 우리의 뾰쪽뾰쪽 모난 부분은 다듬도록 인도하십니다.
깊은 고독과 단절 속에 걸어온 광야 체험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동시에 거듭 날 수 있었던 은혜로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우리는 본격적인 공생활의 시작 전 예수님의 40일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그분께서는 유다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장 40일 동안이나 유다 광야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단둘이 머물면서
그분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간절히 찾으셨습니다.
그냥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그분께서는 정답을 찾으셨고, 기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깊은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우리 안에 내적 광야, 텅빈 공간, 마음의 여유를 마련해야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나 단둘만 들어올 수 있지,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감실, 내 안의 성전 하나를 건설해야겠습니다.
이번 사순시기, 우리 손에서 놓으면 죽을 것 같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히 헤아려보면 좋겠습니다.
사실 손에서 놓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놓아보니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우리 시대 또 다른 하느님이 되신 스마트폰, SNS, 신용카드, 술, 담배, 깊이 빠져버린 취미활동...
과감히 우리 손에서 한번 내려놓고, 하느님 아버지와 나 단둘만 머물수 있는 내 안의 성전으로
자주 들어가보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1주일 강론>
(2024. 2. 18.)(마르 1,12-15)
<유혹>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2-15)”
1) 사탄은 인간을 유혹하려고 접근할 때 천사로 위장합니다.
다가오는 존재가 사탄이라는 것을 알면 누구든지 경계부터 하지만, 천사라고 생각하면 신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2코린 11,14ㄴ-15ㄱ).”
실제 상황에서 ‘사탄의 유혹’은 가장 친한 사람, 또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내가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리려고 했던 일이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이 이야기는 사탄이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한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가 사탄이었던 것도 아니고,
마귀 들렸던 것도 아니고, 그저 자기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사탄은 베드로 사도의 생각 속에 숨어들어서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한 것입니다.>
2) 유혹이 다가올 때, 그것이 유혹인 줄 모르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에 유혹은 ‘진심으로 하는 충고나 조언’의 모습으로, 또는 ‘지극한 사랑으로 하는 호소’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그 충고나 조언이나 눈물어린 호소에 마음이 흔들려서 넘어가는 줄도 모르는 채로 넘어가게 됩니다.
박해 때에 사랑하는 식구들이 눈물로 호소하는 모습에 흔들려서 배교를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그것입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싸우러 나가는데, “꼭 네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할 것이다.” 라고 말리는 것도 그런 유혹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열정적으로 하려고 하는데,
주변에서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또는 “당장 급한 일이 아니니 나중에 해도 된다.” 라는 말도 유혹입니다.
3) 우리는 유혹을 받는 입장에서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실제 상황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유혹하는’ 존재가 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린 일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심각한 유혹이 된다는 것을 전혀 몰랐을 것이고, 아마도 처음에는 왜 그렇게 심하게 혼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는 순수한 의도로 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게 유혹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남을 유혹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단히 엄하게
경고하셨던 ‘남을 죄짓게 하는 죄’에 해당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태 18,6).”
4) 나의 잘못된 신념과 잘못된 확신이 나 자신에게
큰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옳은 일이라고 믿고 있는 그 일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 우리는 늘 반성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곧바로 고쳐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5) 예수님은 주님이시니까 간단하게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지만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유혹을 물리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항상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수호천사는
우리를 보호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과 천사의 보호 사이에서 선택과 결정은 ‘내가’ 합니다.
유혹은 사탄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도 오고, 나 자신의 내적 욕망에서도 옵니다.
우리 교회는 옛날부터 세속, 육신, 마귀를 세 가지 원수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디에서 오든지, 어떤 모습으로 오든지 간에
우리는 늘 유혹을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그런 상황을 나타냅니다(마태 10,16).
이리 떼는 언제나 항상 양들을 유혹하거나
압박하거나 위협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리 떼를 제압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