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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鳳齡(당시 66歲)과 그 손자 李章慶(당시 19歲)은 1755年 英祖31年 乙亥年 章陵 화재 사건과 무관하다. 장릉 참봉 李鳳齡(당시 80에 가깝고, 손자 이금성은 13歲였다.)과 사간원 정언을 역임한 담양군파 李鳳齡은 同名異人이다.
司諫院 司諫 李公 諱 鳳齡 墓碣銘.
聽言觀貌。可以知其人。然猶不若親朋察其內行之爲詳。吾友尹幼章每道故司諫李公文五之賢。幼章取友必端。其言殆可信。瀷念昔李公訪余于逆旅。中藏不忘。今其子齊任以幼章所撰狀錄。來乞阡銘。謹按公諱鳳齡。文五其字也。我世宗大王別子潭陽君璖之後。四傳至順川君琯曁其兄錦川君瑊。以經術質行。聞于世。時李仲虎先生倡學敎授。先生世號履素齋者也。遊其門者百數。錦川公少先生三歲。順天公亦不過六歲。始與執友。及見道之益高曰吾曷若尊師而受益尤切哉。遂屈就諸弟子之列。是五挾不存。一意求道。河汾以來。無此氣像。卒成醇儒。故宰相採風則有宅里之旌。族師書行則有鑄洞之誌。所以督成門法。垂裕不替也。子時中官漢城庶尹。錦川早歾。有三子誠中敬中養中。皆爲名臣。其季承旨。卽退門字呼公浩者是也。庶尹之子縣令幼洙。是生進士命龜。進士有系後子進士震一。乃公之先考也。妣昌平李氏僉正墰之女。以肅廟十六年庚午夏四月二十八日生公。乙未登文科。自槐院正字陞博士。辛丑丁外艱。憂服欒欒。中濕病痺。幾不能支。中年以後病脚不能拜跪。絶意仕進。專於養疾。凡有朝命。皆懇辭不起。自騎曹郞入兩司官。諫院爲正言獻納司諫。憲府爲掌令執義。出爲嶺南都事。入爲成均司成司僕寺正。或多重入。凡二十二除皆辭。外職則三莅郡邑。其始釋褐也。監察試院。時天官家宰主試。一見奇之。首除湖西之定山縣監。四歲而辭歸。又西邊松禾縣。弊積難其任。有極擇之命。會觀察湖西熟公治績者在銓曰。莫有如李某。乃奏擬焉。時縣多賊盜。民被其患。公鉤捕有術。懲治嚴明。剽竊屛熄。而鄰邑亦賴之。松禾有去思碑。乙卯爲忠淸都事。例兼海運米綱。奏黜列郡恃勢不竣者。丁巳又應結城。擇任之選。結城小縣也。歲歉疵極。民方徯望。公不帶眷屬。匹馬亟走。倂月廩官需而歸之賑恤。民於是背穽出岸。而繡衣之褒啓至矣。公嘗曰治理最忌擾民。優以寬之。助其不給。使自爲生。足矣。未幾辭歸。辛酉在憲府。言官有妄觸刑辟。上親臨帳殿。公不敢言病。舁到闕外。陳疏曰彼以諫爲名。務從輕典。聖世之美事也。近臣以營救罪人激上怒。有西邊之竄。俄因大臣救解而得釋。公生於法度之門。長於訓迪之中。眉骨瑩秀。語言簡重。嘗以順川君遺訓書壁自程曰。圓則流方則礙。所欲方內而圓外也。仲子齊顯仕爲下大夫入近侍。公戒之曰吾爲臣不忠。每承嚴敎。病不能駿奔在廷故也。汝宜鞠躳盡節。勉副余志。至丙子夏五月十五日考終。享年六十有七。初娶綾城具氏縣令文遊之女。無嗣。再娶宜寧南氏夏龜之女。俱贈淑人。三娶淑人安東權氏萬鼎之女。南淑人有一子齊彥。先公沒。有二子章慶,全慶。權淑人有二子二女。男長齊顯官持平。次齊任。持平有二子。長完慶次幼。女長適沈昌錫。次適吳珩。具淑人墓在坡山甲坐之原。及公沒七日而權淑人又歿。三竁同塋。南淑人墓別塋宅兆焉。銘曰。
源泉不渴。必觀其逝。有若夫公。順川之世。遺訓炳烺。炤壁不昧。心心祖軌。不敢荒怠。病阻登廷。躑躅若厲。施之下邑。去思攸計。是足以傳。維民普惠。在家垂範。子承孫繼。天潢玉派。曷不濟濟。
3, 사간원 사간 이공 휘 봉령 묘갈명.
말을 들어보고 모습을 관찰하면 가히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나 그 사람이 집안에서 하는 행실을 자세하게 살핀 친한 친구보다 더 같게 견주지 못하리라. 나의 벗 윤유장(尹幼章, 尹東奎, 1695~1773)는 늘 故 사간(司諫) 이공 문오(李公 文五)가 어질다고 말하였는데 幼章은 반드시 단정한 사람만 벗으로 삼으니 그 말은 거의 믿을 만하다.
익(瀷)이 옛날을 생각하면 여관으로 나를 찾아왔던 李公이 가슴속에 간직되어 잊히지 않는데 지금은 그 아들 제임(齊任)이 尹幼章이 지은 바 있는 장록(狀錄)을 가지고 묘비 글을 청하러 왔다.
삼가 살펴보니 公의 諱는 봉령(鳳齡)이고 그 字는 문오(文五)로 우리 世宗의 후궁 소생 담양군(潭陽君 璖, 1439~1450)의 후손이다. 4世 지나 순천군 관(順川君 琯, 1518-1577)과 그의 형 금천군 감(錦川君 瑊, 1515-1559)은 유교 경전대로 착실하게 실천하였다고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이중호(李仲虎, 1512~1554) 先生이 학교를 세워 학생을 가르쳤고 세상에서 선생을 이소재(履素齋)라고 불렀고 그 문하에서 노닌 자가 수백이었다. 금천공은 선생보다 3歲가 적고 순천공도 불과 6歲 차이로 처음에는 마을 동아리 친구로 사귀다 마침내 더욱 높게 이룬 도를 보고 말하기를 “나와 어찌 견주겠는가? 스승으로 존중하여 더 배우고 더욱 닦으리라.” 하고 제자의 자리에서 무릎 꿇고 따랐으니 이는 마음에 오협(五挾)이 존재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도를 구하겠다는 의지로 하분(河分) 이래 이러한 기상이 없었다. 순수한 유학자로 죽을 때까지 이룬 까닭에 재상이 그 풍도를 채택하여 살던 마을과 집에 정문을 세웠고 가족과 취락의 스승으로서 기록된 행실이 주자동지에 있는바 바로잡아 거느리고 가문의 법도를 이룬 까닭에 그 공적을 후세에 전하고 쇠퇴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아들 시중(時中)은 한성부 서윤이고 일찍 죽은 錦川君에게 3형제가 있었는데 성중, 경중, 양중(誠中 敬中 養中)으로 모두 명신이 되었고 그 막내가 승지(承旨)로 즉 퇴계 선생의 제자로 字가 공호(公浩)이다. 서윤의 아들 유수(幼洙)는 縣令이고, 이분이 명귀(命龜)를 낳았는데 進士이고, 진사는 進士 진일(震一)을 후계자로 들였으니 바로 公의 부친이다. 모친 평창 이씨(平昌 李氏)는 첨정 담의 여식으로 1690年 肅宗16年 庚午年 여름 4月28日, 公을 낳았다.
1715年 肅宗41 乙未年, 문과급제하고 承文院正字로 시작하여 承文院博士까지 승진하였다. 辛丑年 1721年 景宗1, 부친상을 당하여 상례를 따르느라 파리하게 여위고 습기로 저린 병에 걸려 거의 팔다리를 쓰지 못하였다. 중년 이후 각기병에 걸려 무릎 꿇고 절을 하지 못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오로지 요양하며 대개 조정의 명이 있어도 다 간곡하게 사의를 표하고 나가지 않았다. 병조좌랑(兵曹佐郎)부터 관직에 나가기 시작하여 兩司의 관리가 되었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정언(正言)과 헌납(獻納)과 사간(司諫)을 역임하고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장령(掌令)과 집의(執義)를 지내고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로 나갔다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과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어떤 경우 많이 중복하여 들어가 무려 22차례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임하였다. 외직으로는 세 군읍을 다스렸다. 그 처음 벼슬길에 올라 과거 시험 감독관을 하였을 때 당시 시험을 주관한 이조판서가 한 번에 기이하게 보고 선두로 충청도 정산현감(定山縣監)에 제수하였다. 4年 지나 사표를 내고 돌아오고 또 서쪽 변두리 황해도 송화현감(松禾縣監)이 되었다. 그 고을은 좋지 못한 나쁜 풍속이 쌓여 그 임무를 맡기 어려워 발령을 낼 때 매우 정밀하게 사람을 선발하였는데 때마침 호서관찰사가 곰곰이 생각하여 公이 치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저울질하며 말하기를 “ 李某 같은 사람이 없다.” 하고 이에 헤아려 上奏 한 것이다. 당시 그 현에는 도적이 많아서 주민들이 피해를 보니 그것이 근심이었는데 公이 찾아내고 사로잡는 수단과 꾀가 있었다. 허물은 징계하여 고치게 하고 엄하게 밝혀내 훔치고 노략질을 하지 못하도록 물리쳐 그치게 되었고 근처 고을도 이득을 보게 되었고 송화에는 거사비가 세워져 있다. 乙卯年 1735年 英祖11,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가 되어 쌀을 묶어 배로 운반하는 본보기를 보이고 다수의 군에서 세력을 믿고 의지하던 자들이 소임을 다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上奏하여 관직을 강등시키거나 내쫓았다. 丁巳年 1737年 英祖13, 또 충청도 결성현(結城縣)을 맡게 되었다. 적임자를 고려하여 뽑을 때 선발되었다. 결성현은 작은 고을이고 그해 큰 가뭄이 들어 원망하는 소리가 극에 달하고 백성들은 나란히 아우를 대책을 바라고 있었다. 公은 딸린 가족 없이 홀로 말 타고 빨리 부임하고 월름(月廩)을 내어 경비로 함께 쓰고 관에 지급되는 물품을 돌려보내서 흉년에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혜택이 가도록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낭떠러지에 몰린 백성들이 함정을 등질 수 있었고 암행어사가 상으로 수의 한 벌을 내려 줄 것을 啓告 하게 되었다. 公이 일찍이 말하길 “백성을 걱정하게 다스리는 것을 제일 기피 하고 넉넉하고 관대하게 거느리며 넉넉하지 않지만 도움을 주어 자립할 수 있게 하면 족하다. “ 하였다. 임기가 차기 전에 사표를 내고 돌아왔다. 司憲府에 있던 辛酉年(1741年 英祖17), 죄인을 처벌한 것이 망령되고 법에 저촉되었다는 言官이 있었고 上이 그 자리에 친히 참석한 帳殿이라 公은 감히 병통을 말하지 못하고 거꾸로 궐 밖에서 마주 거들어 진술하여 상소하기를 “저 사람은 간하기로 이름났습니다. 정사에 법은 비교적 가볍게 하고 남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이 성대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였더니 근시하는 신하가 죄인을 구하기 위해 꾀한다고 上이 격노하여 서쪽 변방으로 쫓겨 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大臣이 힘을 기울이고 연달아 용서를 구하여 석방되었다. 公은 집에서도 법도에 맞게 살면서 집안 어른으로서 중심을 잡고 훈육하며 인도하였다. 용모는 뛰어나게 맑고 아름다우며 말은 느리나 간결하고 무게가 있었다. 순천군(順川君, 1518-1577)이 남긴 교훈을 벽에 계명으로 써 붙여 놓고 스스로 법도 삼아 직접 체험하며 말씀하기를 “둥글면 흐르고 반듯하면 걸리니 안으로 반듯하고 겉으로 둥글고 싶다.” 하였다. 둘째 아들 제현(齊顯, 1723-1756)이 文科及第하여 삼사의 당하관으로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게 되자 公이 경계하여 말씀하기를 “ 나는 불충한 신하가 되고 말았다. 매번 엄한 하교를 받들면서 병으로 빨리 달려 다니지 못하고 벼슬자리가 지연되었던 고로 너는 마땅히 몸을 굽히고 절의를 다하여 부지런히 임금을 보좌하는 것이 나의 뜻이다. " 하였다. 丙子年 1756年 英祖32年 여름 5月15日에 이르러 돌아가시니 향년이 육십하고 칠년이었다.
첫 배위 능성 구씨(綾城 具氏)는 현령 문유(文遊)의 여식으로 아들을 낳지 못하고 再娶는 하구(夏龜)의 여식 의령 남씨(宜寧 南氏)이다. 모두 淑人에 봉되었다. 三娶 淑人 안동 권씨(安東 權氏)는 만정(萬鼎)의 여식이다.
남숙인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제언(齊彦)으로 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들 둘이 있으니 장경(章慶), 전경(全慶)이다.
권숙인의 장남은 제현(齊顯, 1723-1756)으로 대과급제 후 司憲府 持平으로 있고 다음은 제임(齊任, 1736-1779, 실학자)이다.
지평은 아들 둘인데 장남은 완경(完慶, 1742-1784)이고 다음은 어리다.
公의 장녀는 심창석(沈昌錫)의 본처이고 차녀는 오연(吳衍)의 본처이다.
具淑人의 묘는 坡山 언덕에 甲坐하여 있고 公이 돌아가시고 7月에 權淑人이 또 돌아가셔서 세 분을 합장하였고 南淑人의 묘는 선영의 다른 곳에 있다.
묘지 글을 새기고 고합니다.
원천은 마르지 않으나
반드시 흘러가는 것을 살피고
夫子公 같이 한 이가 있었던
순천군 세대
밝게 빛나는 선조의 유훈
헤매지 않으려고 벽에 비춰 놓고
마음 다해 묵묵히 앞서 도리 행하고
감히 게으름 피울 수 없어도
병마에 조정에 오르는 길 막히고
깊은 것 같아 머뭇거리며 발을 구르며
지방 고을에서 베풀었으니
가신 뒤에 송덕비 세울 생각하네
옳게 오로지함으로서 족하고
주민 생각 혜택 두루 미치고
집안에서 솔선수범하고
자손이 받들고 이어가는
임금의 후손이니
어찌 훌륭하지 않으랴!
[주D-001] 李鳳齡: 1690年 肅宗16年 庚午生-1756年 英祖32年 丙子卒. 享年67. 字 文吾.
英祖 祖 文臣. 世宗王子 潭陽君의 8世孫. 順川君 李琯의 5世孫. 1715年 肅宗41年 5月, 乙未式年試 文科 丙科1等 及第. 及第者 35人 甲科3 乙科7 丙科25, 總 11位. 사헌부 집의 역임.
[주D-002] 吾友尹幼章: 실학자 邵南 尹東奎의 字가 幼章이다. 17歲에 星湖 李瀷의 첫 제자가 되었다. 부인이 李齊寅의 여식으로 파곡 李誠中의 6세손이며 이봉령의 친척이다.
[주D-003] 瀷念昔李公訪余于逆旅: 이봉령이 아들 셋을 데리고 안산 성호 이익의 서실을 찾아와 배움을 청한 일을 말한다.
[주D-004] 今其子齊任以幼章所撰狀錄: 지금 그 아들 이제임이 유장이 지은 바 있는 장록을
가지고.... 이봉령의 막내 아들 이제임은 순암 안정복과 소남 윤동규의 제자이기도 하다. 윤동규(字 幼章)가 이봉령의 장자 李齊彦의 행장 만사 등을 지었다. 이제언은 일찍 죽었다.
[주D-005] 四傳至順川君..以經術質行...: 이봉령의 5대조 順川君 李琯군은 중종 명종 선조 시대 초기 예법에 정통하였던 왕족으로 평소 유교경전대로 실천하였다. 해동명신록, 주자동지,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동유사우록 등에 행적이 실려 전한다. 光海君이 순천군이 살던 주자동 입구와 주자동 집에 旌門을 세웠다. 삼강행실도의 그림 아래에 “이보다 삼강행실을 실천한 사람이 없었다.” 라고 써져 있다. 高宗이 내린 諡號가 孝文이다. 순천군이 형 금천군의 아들 李誠中, 敬中, 養中을 보살펴 모두 문과 급제하여 宣祖시대 명신이 되었다.
[주D-006] 履素齋 李仲虎: 이소선생 이중호는 태종왕자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중종 명종 시대 남산 아래 회현동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이봉령의 5대조 순천군 형제와 그 조카들이 그에게 배웠다. 이중호는 순천군 형제와 같이 공부하는 동아리 친구였으나 날로 학문이 높아지고 배움을 청하는 자가 많아지자 드디어 학교를 열었고 순천군 형제는 제일 먼저 달려 나가 제자의 자리에서 배우게 되었을 때 당시 사나이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주D-007] 是五挾不存: 오협은 挾貴, 挾賢, 挾長, 挾勳勞, 挾故 다섯 가지로 맹자에 나오는 고사. 오협은 귀한 신분, 재지와 덕망, 많은 나이, 세운 공로, 오래전부터 친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거나 믿거나 뽐내는 것을 말한다.
[주D-008] 河汾以來: 중국 수나라 왕통(王通. 字 仲淹)이 文帝의 부름을 거절하고 河水와 汾水 강가에서 학생을 가르쳤던 고사를 말한다.
[주D-009] 辛酉在憲府 言官有妄觸刑辟: 신유년 사헌부에 있을 때 임금이 죄인을 처벌한 것이 망령되고 형법에 저촉되었다는 언관이 있어...1741年 英祖17年, 肅宗妃 仁敬王后의 조카 金福澤의 지난 일을 논하던 지평 이광의(李匡誼)를 두둔하다 英祖의 노여움을 사 평안도 삼화부에 유배되었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힘써 석방된 일을 말한다.
[주D-010] 圓則流方則礙 所欲方內而圓外也: 둥글면 흐르게(방종하게) 마련이고 반듯하면 걸리게 마련이니 안으로 반듯하고 겉으로 원만하고 싶어라. 이봉령의 5대조 순천군 이관이 말년에 동서당파 싸움이 심하게 번지는 세태를 보고 한탄하며 지어 읊은 歌詞 중 일부이다.
[주D-011]李齊顯: 1723年 景宗3年 癸卯年 2月12日生-1756年 英祖32年 丙子年 12月26日卒. 享年34. 字 叔遠. 本貫 全州. 英祖 祖 文臣. 세종왕자 담양군의 9世孫, 順川君 李琯의 6世孫, 司諫 李鳳齡의 차남. 星湖 李瀷, 邵南 尹東奎 門人. 1747年 英祖23年 3月 丁卯式年試 文科 丙科2位 及第. 24歲.(及第者 34人, 甲科3 乙科7 丙科24, 總12位.) 藝文館 檢閱, 司憲府 持平, 兵曹 正郞 역임. 1756년 영조32년 병자년 5월 부모가 졸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제현은 그 해 12月 28日 부친 상중에 함경도 종성부로 유배 도중 경기도 포천에 이르러 34歲로 졸하였다. 성호 이익이 쓴 이봉령 비문에 이제현의 일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제현이 죽기 전에 이미 비를 세운 것으로 추측 된다. 족보에는 사망일이 26日로 표기되어 있다.
[주D-012] 李基慶: 1756年 英祖32 丙子年 閏9月10日生- 1819年 純祖19 己卯年 7月14日卒. 享年64. 字 休吉. 號 瘠菴. 正祖 純祖 祖 文臣. 세종왕자 담양군의 10世孫, 順川君 李琯의 7世孫, 司諫 李鳳齡의 손자, 持平 李齊顯의 次男. 兄 進士 李完慶. 천주교를 배척하는 노래 闢衛歌로 불리는 尋眞曲, 浪遊詞 등을 지어 道敎나 佛敎의 허망함과 허무함, 천주교의 背德함을 배척하고 儒敎만이 참다운 삶이라고 강조하였다. 7세조 순천군 이관의 전통을 이은 예법에 특별한 가문 출신으로 성균관에 다닐 때 천주교를 살핀 적이 있으나 조선의 정서와 배치된다하여 줄곧 배격하였다. 1777年 正祖1年 丁酉式年試 進士2等 21位 合格. 22歲. 進士 合格者 100名 中 26位. 正祖13年 1789年 己酉式年試 文科及第 乙科 1等 及第. 34歲.
及第者 60人. 甲科3 乙科7 丙科50, 總 4位. 司憲府 掌令, 執義역임.
태어나던 해 조부모가 죽고 부친상을 치르던 부친도 유배 도중 포천에서 죽었다.
[주D-013] 星湖 李瀷: 1681年 肅宗7年-1763年 英祖39年. 享年83.
본관 麗州, 자 自新, 호 星湖, 조선 후기 남인의 대실학자. 성호전집, 성호사설 등 저서를 남겼다. 성호 선생 가문과 담양군파 가문은 通家한 사이로 이 당시 성호 선생에게 배운 사람이 많고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면 상아홀을 쥐고 유가하는 담양군파 전통을 성호사설에 남겼다. 또 이봉령의 8代祖母 大元 金氏 일화, 6대조 順川君 형제의 행실 등이 자세히 실려 있다. 이봉령의 고조 梧洲 李幼洙에게 성호 선생 부친 이하진이 배웠고 이봉령의 아들 셋은 성호 선생에게 배웠다.
✽1755年 英祖31年 乙亥年 김포 章陵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과 사간 이봉령은 무관하다.
당시 장릉 참봉 李鳳齡과 同名異人이다. 사간 이봉령은 당시 66歲, 손자 李章慶은 19歲였고
참봉 이봉령은 당시80에 가까운 나이였고 손자 이금성은 13歲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