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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戶典)편 제1조 전정(田政논밭에 관한 행정)을 읽어봅니다.
호전(戶典) 6조는 1. 전정(田政논밭에 관한 행정) 2. 세법(稅法조세의 부과 및 징수) 3. 곡부(穀簿곡물장부) 4. 호적(戶籍호적의 중요성) 5. 평부(平賦부역을 공평하게) 6. 권농(勸農농사의 권장)입니다. 토지관리 및 조세규정 등을 논한 것입니다.
호전(戶典) 제1조 전정(田政논밭에 관한 행정)에는 12개의 꼭지가 있습니다.
목민심서 호전(戶典) 제1조 전정(田政)
1. 수령의 직분 54조 중에 전정(田政)이 가장 어렵다. 그것은 우리나라 전법(田法)이 본래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2. 현행 전산법(田算法)에는 방전(方田정사각형)ㆍ직전(直田직사각형)ㆍ구전(句田굽은 것)ㆍ제전(梯田역사다리꼴)ㆍ규전(圭田삼각형)ㆍ사전(梭田북형)ㆍ요고전(腰鼓田장구형) 등의 명칭이 있는데, 그 추산(推算)하고 타량(打量)하는 법식이 곧 사법(死法)이기 때문에 다른 모양의 전지에는 통용할 수 없다.
3. 개량(改量)이란, 전정(田政)의 큰일이다. 진전(陳田경작되지 않은 전지)이나 은결(隱結사사로이 경작하는 전지)을 조사해내어 별 일 없기만을 도모할 것이다. 만일 부득이할 경우에는 마지못해 개량하되 큰 폐해가 없는 것은 모두 예전대로 따르고 아주 심한 것은 개량하여 원액(原額)을 채울 것이다.
4. 개량의 조례(條例)는 매양 조정에서 반포하는 것이 있으니 그중의 중요한 것은 반드시 거듭 밝혀서 지키기를 약속해야 한다.
5. 양전하는 법은 아래로는 백성을 해치지 않고 위로는 국가에 손해를 끼치지 않으며 오직 공평하게만 할 뿐이다. 그러나 먼저 적임자를 얻은 뒤에야 이 일을 논의할 수가 있다.
6. 경기의 전지는 비록 척박하지만 그 세가 본래 가볍게 되어 있고, 남쪽 지방의 전지는 비록 비옥하지만 그 세가 본래 무겁게 되어 있으니, 그 결부의 수는 모두 옛날의 것에 따라야 한다.
7. 오직 진전(陳田)이 끝내 묵게 되는 것은 분명 그 세액이 과중하기 때문이니 불가불 그 등급을 낮춰야 한다.
8. 진전(陳田)이 등급이 낮추어져 자호(字號)가 바뀌면 장차 백성들의 송사가 많아질 것이니, 자호가 바뀐 것은 모두 전패(田牌관청에서 발급하는 토지소유권 증명서) 한 장을 지급해 줄 것이다.
9. 총체적으로 논하면 양전법은 어린도(魚鱗圖지적대장地籍臺帳)로써 방전(方田)을 만드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나 조정의 명령이 있어야 시행할 수 있다.
10. 진전(陳田) 조사는 전정(田政)의 큰 조목이다. 진전의 징세에는 억울함이 많으니 진전을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11. 진전의 개간은, 백성들을 믿을 수 없으니 수령은 마땅히 지성껏 경작을 권유하고 또 그 힘을 도와주어야 한다.
12. 은결(隱結)과 여결(餘結대장에 실리지 않은 나머지 토지)은 해마다 불어나고 궁결(宮結)과 둔결(屯結)은 해마다 늘어나서 국가에 납부되는 원전(原田)의 세액이 해마다 줄어드니,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목민심서 호전(戶典) 제1조 전정(田政)
고적의(考績議)에서는 교민(敎民)으로 호전(戶典)의 제1조를 삼았으나, 지금은 그것을 시행하지 않기 때문에 전정(田政)으로써 제1조를 삼는다.
1. 수령의 직분 54조 중에 전정(田政)이 가장 어렵다. 그것은 우리나라 전법(田法)이 본래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경묘(頃畝)를 가지고 전지(田地)를 헤아리고 우리나라에서는 결부(結負)를 가지고 전지를 헤아린다. 길고 짧고 넓고 좁은 토지의 형태는 나타나나, 비옥하고 척박하고 기름지고 메마른 토지의 질은 나타나지 않는다. 나타나는 형태는 고금을 통하여 변하지 않으나, 나타나지 않는 질은 세월에 따라 달라지니, - 토질이 비옥해지고 척박해지는 것은 사람의 공력에 달려 있다. - 결부로 전지를 헤아리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살펴보건대, 전결(田結)이라는 명칭은 《관자(管子)》 - 금장편(禁藏篇)이다. - 에서 비롯하였고, 우리나라는 신라 때부터 이미 결부의 제도가 있었다. 그러므로 최치원(崔致遠)의 산사비명(山寺碑銘)에 ‘전지 10결(結)을 하사하였다.’라는 말이 있고, 《고려사(高麗史)》 식화지(食貨志)에 ‘산전(山田) 1결’이니 ‘평전(平田) 2결’이니 하는 말들이 있다.
그러나 그 이른바 1결이니 1부(負)니 하는 것은 바로 1경(頃)이니 1묘(畝)니 하는 것이요, 지금의 법처럼 토질의 비옥하고 척박함을 가지고 전지의 넓이를 체가(遞加)하는 것은 아니었다. - 전제고(田制考)에 자세히 보인다. -
고려 말에 비로소 3등척(三等尺)을 제정하여 전지를 측량하였고, 국초(國初 조선조 초기)에 5등척(五等尺)을 제정하니 그 차등이 더욱 많았으나 비옥하고 척박함의 5등급을 전안(田案)에 기재했을 뿐, 5등급의 전지가 그 실제 넓이는 다 같았던 것이다.
세종 만년에 6등척(六等尺)으로 고쳐 제정하고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전법(田法)을 크게 고쳤다. 그러나 넓이를 계산하는 방법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 전제고에 자세히 보인다. -
그리고 효종 때에 와서 각 도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고 나서 비로소 준수책(遵守册)을 반포하였다. 이래서 1등 1백 부(負), 2등 85부, 3등 70부, 4등 55부, 5등 40부, 6등 25부의 차이가 결국 철칙이 되었으니, 이러한 법은 옛날에도 찾아볼 수 없다.
황제(黃帝)가 들을 구획(區劃)하고 우왕(禹王)과 후직(后稷)이 도랑을 파서 밭이랑을 만들던 일에서부터 비옥한 평지를 정연하게 구획하던 제도와 상앙(商鞅)이 주장한 천맥(阡陌)의 법과 이회(李悝)가 창안한 수리전(水里田)의 제도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실제 면적으로 계산하였으니, 그 비옥하고 척박한 차별은 저절로 등급이 구분되었을 뿐이다.
오늘날의 체가(遞加)하는 법은 비록 예수(隷首)가 계산을 맡고 이주(離朱)가 자를 살핀다 하더라도 진실로 그 도수(度數)를 밝히지 못할 것인데, 오늘날의 수령이 어떻게 그 농간을 적발할 수 있겠는가?
[주-C001] 전정(田政) : 논밭에 관한 모든 행정이다.
[주-C002] 고적의(考績議)에서는 …… 삼았으나 : 《경세유표(經世遺表)》 권4 〈천관수제(天官修制) 고적지법(考績之法)〉에서는 호전 6조를 1. 교민(敎民), 2. 전정(田政), 3. 부역(賦役), 4. 시조(市糶), 5. 농정(農政), 6. 진휼(賑恤) 순으로 다루었다.
[주-D001] 54조 : 9강×6조=54조. 본서 목차 참조.
[주-D002] 전법(田法) : 여기서는 양전법(量田法) 등을 가리킨다.
[주-D003] 경묘(頃畝) : 토지의 면적, 또는 토지의 면적을 계산하는 단위. 옛날에는 사방 6척(尺)이 1보(步), 100보가 1묘(畝), 100묘가 1경(頃)이었으나, 진대(秦代) 이후에는 240보를 1묘로 하였고, 청조(淸朝)에서는 영조척(營造尺)으로 사방 5척을 1보, 240보를 1묘로 하였다. 《說文, 唐律 戶婚 畝 釋文, 淸會典事例 戶部 田賦》 또는 송(宋)나라 섭시(葉時)의 설에 따르면, 토지를 측량하는 법은 너비 1보에 길이 240보를 1묘로 하고 100 묘를 1경으로 하기도 하였다.
[주-D004] 결부(結負) : 논밭의 면적을 계산하는 단위. 《대전회통(大典會通)》 권2 호전(戶典) 양전(量田)조에 의하면, 면적 1척이 1파(把)가 되고, 10파가 1속(束), 10속이 1부(負), 100 부가 1결(結)이 된다 하였다. 결부에 대한 것은 《경세유표》 권9 〈지관수제(地官修制) 전제별고(田制別考)〉 결부고변(結負考辨) 조에 자세하다.
[주-D005] 전결(田結) : 《관자(管子)》 금장편(禁藏篇)에 “호적과 전결은 빈부의 크기를 알기 위한 것이다.〔戶籍田結者 所以知貧富之不訾〕”라고 한 데 보인다.
[주-D006] 관자(管子) : 중국 춘추 시대 제(齊)나라 관중(管仲)이 찬한 책으로 총 24권인데, 주로 목민(牧民)에 관한 것들이 많이 다루어졌다.
[주-D007] 전결(田結)이라는 …… 비롯하였고 : 이 말은 《경세유표》 권6 〈지관수제(地官修制) 전제고(田制考) 6〉 방전의(邦田議) 조와 권9 〈지관수제 전제별고(田制別考)1〉 결부고변(結負考辨) 조에도 인용되었는데, 다산은 특히 방전의 조에서는 “전결이란 명칭은 《관자》에서 나왔으니,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서도(西道)는 중국 제(齊)나라와 서로 가까웠으니, 아마 관중이 제나라를 다스리던 법이 서도에 흘러들어와서, 결국 삼한(三韓)에 펼쳐졌을 것이다. 관자가 시행하던 법이 바로 주(周)나라 법이었으니, 그 전결이란 일컬음은 아마 전지 장부의 별명이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주-D008] 최치원(崔致遠) : 857~? 자는 고운(孤雲)ㆍ해운(海雲), 시호는 문창후(文昌侯)이다. 12세 때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17세 때 과거에 합격,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ㆍ승무랑 시어사 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을 지냈으며, 28세 때 귀국하여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을 지냈다. 뒤에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감을 비관하고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저서에는 《고운집(孤雲集)》ㆍ《계원필경(桂苑筆耕)》ㆍ《석순응전(釋順應傳)》 등이 있다.
[주-D009] 신라 …… 있고 : 이 말이 《경세유표》 권9 〈지관수제 전제별고1〉 결부고변 조에도 인용되었는데, 거기에는 사산비명(四山碑銘)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사산비명에는 ‘賜田十結’이란 구절이 보이지 않고 단지 초월산 숭복사비문(初月山崇福寺碑文)에 ‘益丘隴餘二百結’이란 구절이 보일 뿐인데, 이 글도 역시 《경세유표》 권6 〈지관수제 전제고 6〉 방전의 조에 인용되었다.
[주-D010] 고려사(高麗史) …… 2결이니 : 이 대문도 《경세유표》 권9 〈지관수제 전제별고1〉 결부고변 조에 인용되었는데, 《고려사》 식화지에는 “문종(文宗) 8년(1054)……해마다 경작하는 산전(山田) 1결은 평전 1결에 준하고, 한 해 걸러 경작하는 산전 2결은 평전 1결에 준하며, 이태 걸러 경작하는 산전 3결은 평전 1결에 준한다.” 하였다.
[주-D011] 체가(遞加) : 등수를 따라서 더해가는 일이다.
[주-D012] 전제고(田制考)에 자세히 보인다 : 《경세유표》 권9 〈지관수제 전제별고1〉 결부고변에 “고려시대에 결부의 법은 이미 한 결이라 부르면, 그 땅의 면적이 모두 같았으니, 그 경묘(頃畝)를 결부로 한 것이 분명하다. 고려 문종 23년(1069)에 양전 보수(量田步數) 및 전세(田稅)를 정했는데, 그 보법(步法)은 6촌이 1분, 10분이 1척, 6척이 1보로 되었고, 전지 1결은 사방이 33보, 2결은 사방이 47보, 3결은 사방이 57보 3분, 4결은 사방이 66보, 5결은 사방이 73보 8분, 6결은 사방이 80보 8분, 7결은 사방이 87보 4분, 8결은 사방이 90보 7분, 9결은 사방이 99보, 10결은 사방이 104보 3분이다. 그 세법은 10부(負)에 쌀 7홉 5작을 내는데, 1결에는 쌀이 7승 5홉이 되고, 20결에는 쌀이 1석이 된다.(고려 문종 이하는 《문헌비고(文獻備考)》 권141 〈전부고 1(田賦考一)〉에서 인용한 것임) 문종의 양전법은 작게는 1결에서 크게는 10결까지 반드시 모두 개방(開方)해서 방전(方田)으로 만들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D013] 3등척(三等尺) : 세 등급의 논밭을 재는 자이다. 길이는 상등전(上等田)을 재는 자가 20지(指), 중등전을 재는 자가 25지, 하등전을 재는 자가 30지인데, 다산의 말에 따르면, 지(指)는 뼘의 뜻이니,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한 번 뼘해서 재는 길이를 1지라고 부른다 한다. 그리고 다산은 3등척에 대하여 “3등척은 어느 때에 생겼는지 꼭 알 수는 없으나, 《고려사》 식화지에 ‘공양왕 2년에 공사 전적(公私田籍)을 죄다 소실, 그 불이 며칠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3등척은 고려 말기에 만들어지고 국초(조선조 초기)에 그대로 사용한 듯한데,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하였다. 《經世遺表 卷9 田制別考 1 結負考辨》
[주-D014] 전안(田案) : 전지의 소재ㆍ형태 등을 기록한 장부.
[주-D015] 5등척(五等尺)을 …… 것이다 : 《경세유표》 권9 〈지관수제 전제별고1〉 결부고변 조에서는 “세종 때에 전지를 5등으로 나눈 것은 바로 토질의 기름지고 메마른 등급을 전안(田案)에 기재한 것이고, 5등 전지의 그 실제 면적은 모두 같았다.”라는 말을 강(綱)으로 내세우고, 세종 25년 호조(戶曹)에 하교(下敎)했던 “……지금은 수전(水田 논)과 한전(旱田 밭)을 각각 5등으로 나누어 한전 제1등은 수전 제2등에 준하고, 한전 제5등은 수전 제5등 다음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내용을 목(目)으로 인용하고서는 “윗글을 잇달아서 보면 이것은 조세(租稅)에 대한 등급이고 5등척이 있어 지금 법과 같았던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 ‘5등척을 제정하니’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주-D016] 6등척(六等尺) : 세종 26년(1444)에 제정한 것인데, 주척(周尺)으로 따져서, 1등척은 4척 7촌 7분 5리, 2등척은 5척 1촌 7분 9리, 3등척은 5척 7촌 3리, 4등척은 6척 4촌 3분 4리, 5등척은 7척 5촌 5분, 6등척은 9척 5촌 6분이었다. 《文獻備考 卷141 田賦考一》
[주-D017]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 : 세종 26년(1444)에 토지 및 조세제도 등을 연구 제정하기 위해 설치했던 임시 관청이다.
[주-D018]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 고쳤다 : 《문헌비고》 〈전부고〉에 의하면, 세종 26년(1444)에 전제상정소를 설치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의 군호(君號)임)이 도제조(都提調)가 되고 좌찬성(左贊成) 하연(河演)ㆍ호조 판서 박종우(朴從愚)ㆍ지중추(知中樞) 정인지(鄭麟趾)가 제조(提調)가 되어 전지를 6등으로 가르고, 연사를 9등으로 나누어서, 곡식의 여문 상태가 10분이면 상상년(上上年), 9분이면 상중년, 8분이면 상하년, 7분이면 중상년(中上年), 6분이면 중중년, 5분이면 중하년, 4분이면 하상년(下上年), 3분이면 하중년, 2분이면 하하년으로 하여 당년의 풍흉에 따랐으며, 1분인 때에는 면세하였다. 그리고 결법(結法)을 고쳐 정하였으니, 그 제도는 먼저 57묘(畝)로 하는 옛 제도의 결(結)을 주고 매등(每等)에 나오는 수량을 살펴서 정하는 것이다. 즉 상상년에는 1등전에서 피곡(皮穀) 80석이 나오는데, 20분의 1을 거두므로 그 세(稅)가 30두니 1묘에 5승 2홉 6작 남짓을 거두는 셈이고, 2등전에서는 68석이 나오는데, 그 세가 25두 5승이므로 1묘에 4승 4홉 7작 남짓을 거두는 셈이고, 3등전에서는 56석이 나오는데, 그 세가 21두이므로 1묘에 3승 6홉 8작 남짓을 거두는 셈이고, 4등전에서는 44석이 나오는데, 그 세가 16두 5승이므로 1묘에 2승 8홉 9작 남짓을 거두는 셈이고, 5등전에서는 32석이 나오는데, 그 세가 12두이므로 1묘에 2승 1홉 남짓을 거두는 셈이고, 6등전에서는 20석이 나오는데, 그 세가 7두 5승이므로 1묘에 1승 3홉 1작 남짓을 거두는 셈이다. 이 숫자에 의거하여 미루어 계산하고, 다시 20두로써 과(科)를 같이하여 결(結)을 정하는데, 곧 1등전은 38묘(면적은 주척으로 22만 8천 척임), 2등전은 44묘 7분(分)(면적은 주척으로 26만 3백 척임), 3등전은 54묘 2분(면적은 주척으로 32만 5200척임), 4등전은 69묘(면적은 주척으로 41만 4천 척임), 5등전은 95묘(면적은 주척으로 57만 척임), 6등전은 152묘(면적은 주척으로 90만 2천 척임)였다. 상상년에는 20두, 상중년에는 18두, 상하년에는 16두, 중상년에는 14두, 중중년에는 12두, 중하년에는 10두, 하상년에는 8두, 하중년에는 6두, 하하년에는 4두이고, 주척으로 따져서 1등결(結)은 면적이 22만 8천 척, 2등결은 26만 8200척, 3등결은 32만 5200척, 4등결은 41만 40척, 5등결은 57만 척, 6등결은 91만 2천 척이었는데, 그 숫자를 개방(開方)하여 1백분에 1을 취해서 매등 양척(每等量尺)의 길이를 정했으니, 1등척은 주척으로 4척 7촌 7분 5리, 2등척은 5척 1촌 7분 9리, 3등척은 5척 7촌 3리, 4등척은 6척 4촌 3분 4리, 5등척은 7척 5촌 5분, 6등척은 9척 5촌 5분이다. 자에는 길고 짧은 차이를 두었으나 모두 실제 면적 1백으로 부(負)를 하고 1만 척으로 결(結)을 하였다.
[주-D019] 준수책(遵守册) : 《경세유표》 권6 〈지관수제 전제고 6〉 방전의조에 의하면, 효종 4년(1653) 즉 계사년 8월에 경기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고 나서 반포한 책인데, 이보다 19년 전인 갑술년(1634)에 삼남(三南)의 전지를 측량하여 결법을 개정하고 6등에 같은 자를 통용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좌의정 김육(金堉)의 차자에 의하여 또 경기의 전지를 측량하면서 갑술년의 법을 따랐으니, 이를 《준수책》이라 이른다 한다.
[주-D020] 황제(黃帝)가 들을 구획(區劃)하고 : 《사기(史記)》 〈오제기(五帝紀)〉 등에 의하면, 황제 때에 와서 땅에 곡식 심는 일이 시작되었고, 궁실(宮室)ㆍ기용(器用)ㆍ의복(衣服)의 제도도 모두 이때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주-D021] 우왕(禹王)과 …… 일 : 우왕은 중국 고대 하(夏)나라 임금으로 요(堯) 임금의 신하로 있을 때 홍수를 다스린 뒤에 구주(九州)의 토지를 정리하였다. 후직은 주(周)의 시조로 이름은 기(棄)인데, 순(舜) 임금의 신하로 있을 때 농사에 관한 일을 맡았다. 《書經 舜典ㆍ禹貢》
[주-D022] 비옥한 …… 제도 : 이 말은 초(楚)나라 위엄(蔿掩)이 토지정리하던 일을 적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25년 조에 보인다.
[주-D023] 상앙(商鞅)이 …… 법 : 상앙은 중국 전국 시대 위(衛)나라 서얼 공자(庶孽公子)로 성은 공손씨(公孫氏)이다. 그는 진 효공(秦孝公)의 좌서장(左庶長)이 되어 정전제도(井田制度)를 폐지하고 천맥(阡陌)으로 전지를 정리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부세법(賦稅法)을 개정하였다. 《史記 商君傳》
[주-D024] 이회(李悝)가 …… 제도 : 이회는 이회(里悝)라고도 하는데, 중국 전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이다. 문후(文侯)를 섬기면서 지력을 다 빼먹는 방법을 연구해내고 또 평조법(平糶法)을 창제하여서 위나라가 부강하게 되었다 한다.
[주-D025] 체가(遞加) : 등수를 따라서 더해가는 일이다.
[주-D026] 예수(隷首) : 중국 황제 시대 사람으로 산수(算數)와 도량형(度量衡)을 처음 발명했다 한다. 《後漢書 馬融列傳》
[주-D027] 이주(離朱) : 이루(離婁)라고도 하는데 역시 황제 시대 사람으로 눈이 밝아 1백 보 밖에서도 털끝을 분간할 수 있었다 한다. 《愼子內篇》
牧之職五十四條。田政最難。以吾東田法。本自未善也。
中國以頃畝解田。吾東以結負解田。夫長短闊狹。其體有形。肥瘠膏涸。其性無形。然且有形之體。今古不變。無形之性。時月以殊。土之肥瘠在人功。 結負經田。非善法也。
原夫田結之名。起於管子。禁藏篇。 而新羅之時。已有結負。故崔致遠山寺碑銘。有賜田十結之語。高麗史食貨志。有山田一結平田二結諸語。然其所謂一結一負。仍是一頃一畝。非以土之肥瘠。遞加其地如今法也。詳見田制考。
高麗之末。始制三等之尺。以之量田。國初制五等之尺。其差等益多。而肥瘠五等。載於田案而已。五等之田。其實積皆同。
世宗末年。改制六等之尺。置田制詳定所。大改田法。然其算積之法。與今不同。詳見田制考。
至孝宗朝改量諸路之田。始頒遵守之冊。於是一等百負。二等八五。三等七十。四等五五。五等單四。六等二五之差。遂爲金石之典矣。此法在古無徵。
黃帝畫野。禹稷濬畎。以至井地衍沃之制。商君阡陌之法。李悝水利之田。幷以實積。打算其肥瘠之差。別自分等而已。
今此遞加之法。雖隷首握算。離朱察尺。實無以昭其度數。今之牧者。將何以發其奸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