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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기 천주교의 전래 및 포교, 박해에 대한 개괄적 고찰
들어가는 글
[1] 초기 천주교의 전래 과정
1. 중국을 통한 전래
2. 이벽(李檗)과 이승훈(李承薰)
[2] 박해의 시작
1.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1785): 김범우의 유배
2. 자의적인 성사거행과 제사 금지 규율
[3] 계속되어지는 박해: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
1. 윤지충(尹指忠),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하다
2. 윤지충(尹指忠)과 권상연(權尙然)의 압송행로
3. 신해박해(辛亥迫害)의 결과
[4] 절정에 다다른 박해: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
1. 신유박해(辛酉迫害)의 시작
2. 신유박해(辛酉迫害) 추안(推案)
3. 신유박해(辛酉迫害)시 조정에 압수된 천주교 서적들
4.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조선 잠입과 활동
[5] 신유박해(辛酉迫害)의 대표적인 순교자
1. 정약종(丁若鐘, 1760~1801)
2. 황사영(黃嗣永, 1775~1801)
[6] 신유박해(辛酉迫害), 그 이후의 천주교
1. 연속되는 시련들
2. 거듭되는 박해와 그 마지막
3. 외세에 의해 열려지는 포교 자유의 문
◈ 생각해볼 문제: 천주교에서 말하는 제사
나가는 글
들어가는 글
조선에 전래된 천주교는 중국이라는 정류장을 통해 들어왔다. 부연사라는 조선 사절단이 들여온 천주교 관련 서적들이 씨앗이 되어 조선에 자생적으로 자라났다. 초기의 수효자로서 이벽(李檗), 이승훈(李承薰), 권일신(權日身), 김범우(金範禹), 정약종(丁若種)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서학에 대한 호기심을 통해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그 실천을 통해 초기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되었던 인물들이었다. 적극적인 포교로 인해 교세의 확장이 수월이 이루어가던 찰나, 그 발걸음을 붙잡는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했으니 그것은 곧 제사문제였다. 북경으로부터 들은 제사 금지 서한은 많은 천주교인, 특히 양반 지주층의 교인들을 천주교에서 이탈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길을 걸으며 제사 문제에 대해 과감히 도전했던 인물도 있었다.
제사 문제와 더불어 정치적인 이유 등은 천주교를 배타시하는 법령으로 포고되었으며 결국 천주교는 100여년간의 길고 긴 박해의 기간을 맞는다.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등은 포교된지 20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 종교인 천주교에 대한 가혹한 핍박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후에 발생한 크고 작은 박해들과 기해박해(己亥迫亥, 1839), 병오박해(丙午迫亥, 1846),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 등은 천주교의 역사를 박해의 역사로 점철지웠다. 하지만 박해 뒤에도 끝이지 않는 재생의 노력과 서양 신부들의 목숨을 건 국내 잠입으로 천주교는 말살되지 않고 도리어 그 생명력을 꿋꿋이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박해는 1866년 6월에 이루어진 한불조약(韓佛條約)의 채결 등으로 인해 포교의 자유를 얻음으로 종식되어진다.
이제 우리는 초기 조선에 전래되어진 천주교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다만 그 시기를 초기 전래 과정부터 신유박해(1801)로 국한지어 알아보려 한다. 이는 100년이라는 박해와 재생의 역사를 다루기에는 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전래되어지는 과정부터 시작해 조선에 뿌리내리는 자생적 과정, 그에 대한 도전인 박해와 핍박의 사건들을 살펴볼 것이다. 해당시기와 관련된 저명한 책으로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韓國天主敎會史)를 꼽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1차 자료로 삼고, ‘한국기독교회사’와 ‘교회와 역사’를 2차 자료로 삼아 초기 천주교의 전래와 포교, 그리고 박해의 과정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1] 초기 천주교의 전래 과정
1. 중국을 통한 전래
조선이 천주교를 접하게 된 것은 중국을 통해서였다. 이미 17세기경부터 중국에서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마테오 리치(Mattheo Rich, 1552~1610)였다. 그는 1582년 중국에 도착해 1610년 북경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중국 선교에 헌신했다. 그의 포교는 중국의 종교적 정서에 반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는 유교 경전에 나오는 천제(天帝)와 천(天)의 개념을 천주교의 천주와 동일시했던 전략 때문이었다. 또한 단순히 교리적 가르침만을 전함이 아닌, 수학과 천문학 및 서양 과학에 대한 폭넓은 식견으로 중국 조정의 관리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다. 이미 마테오 리치의 작품 중 일부가 북경에 파송되는 조선의 사절인 부연사를 통해 조선에 입수되었기에 조선 역시 외국 문화와 사상에 대한 관심을 숨길 수 없었다. 부연사들이 북경에 머무는 동안 유숙했던 객사 근처에는 남당(南堂)이라는 천주교 성당이 있어 부연사 일행은 가끔씩 이곳에 들러 외국 천주교 신부들과 교분을 나누기도 하였다. 동양의 유교 사상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이유와 그것이 신앙의 목적이라기보다는 학문적 영역에서의 관심으로 표출되었기에 서학에 대한 금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서학은 순풍을 달고 중국으로부터 조선에 입항했는데 그것의 본격적인 정착은 18세기 후반부터 이루어졌다.
2. 이벽(李檗)과 이승훈(李承薰)
당시 이벽(李檗)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경주(慶州) 이씨(李氏)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미 고려조(高麗朝) 때 높은 벼슬을 한 그의 조상들 중에는 학문에 이름을 날린 인물들과 가장 높은 관공직의 영광을 누린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자라나면서 키가 크고 힘이 무척 센 사람이 되었다. 그의 당당한 풍채도 보는 이의 주목을 끌었으나 그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빛났으며 언변은 기세 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다. 그는 모든 문제를 연구하여 파고 들었으며 그 나라의 경서(經書)를 배울 때에도 어려서부터 문장 속에 숨은 신비스러운 뜻을 탐구하려는 습성이 있었다. 또한 이벽은 책들을 배우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의 학문 습득을 지도하고 도와줄 만한 다른 학자들과 교제하였다. 그러던 중 정유(丁酉, 1777)년, 이벽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인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이 학식을 얻기를 원하는 그 밖의 학자들과 함께 방해를 받지 않고 깊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외딴 절로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학자들간의 연구는 10여일간 계속되었다. 하늘, 세상, 인생 등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탐구하였다. 이전 학자들의 의견들을 끌어내어 하나하나 토의하였다. 그 다음에는 성현(聖賢)들의 윤리서(倫理書)들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지은 철학(哲學), 수학(數學), 종교(宗敎)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고 그 깊은 뜻을 해득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온 주의를 집중시켰다. 이 책들은 조선 사절(使節)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북경(北京)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 과학(科學) 서적 중에는 종교의 초보적(初步的) 개론(槪論)도 몇가지 들어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存在)와 섭리(攝理), 영혼의 신령성(神靈性)과 불멸성(不滅性) 및 칠죄종(七罪宗)을 그와 반대되는 덕행으로 극복함으로써 행실을 닦는 방법 등을 다룬 책들이었다. 그들의 지적 호기심은 서적을 통해 어느 정도 충족되었으며 그들은 이내 새 종교에 대하여 아는 것을 실천하고자 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7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읽은 후로는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고 묵상과 전심하였으며 또 그 날에는 육식을 피하였다. 이 모든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히 비밀리에 실천하였다. 이처럼 이벽의 마음속에 천주교의 씨앗이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이 초보적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마음은 자기 교양을 보완하는데 필요한 더 많고 더 상세한 서적이 있을 북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이벽은 자신의 친구인 이승훈(李承薰)이 자기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이승훈을 찾아가 천주교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해주고 그 친구로 하여금 종교에 호기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북경으로 향하는 이승훈에게 서양인 학자들을 만나 그들과 상의하고 예배의 행위에 대해 주의깊게 알아보며 필요한 서적을 조심스레 가져올 것을 당부한다. 드디어 이승훈은 1783년 말 경에 북경을 향하여 떠났다. 이승훈은 북경의 천주당을 찾아가서 예수회 소속 그라몽(Jean-Joshep de Grammont) 신부를 만났다. 이미 천주교 신앙을 접한 바 있는 이승훈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라몽 신부에게 천주교 교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이승훈은 귀국 직전인 1784년 2월,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洗禮名)까지 얻었다.
갑진(甲辰, 1784)년 봄에 이승훈은 북경에서 얻은 많은 책과 십자고상(十字苦像)과 상본(像本), 몇 가지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에게 제일 급한 것은 이벽에게 자기 보물의 일부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벽은 친구가 보내준 많은 서적을 받자마자 외딴집을 세내어 그 독서와 묵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들어앉았다. 이제 그는 종교의 진리의 더 많은 증거와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미신(迷信)에 대한 철저한 반박과 7성사(七聖事)의 해설, 교리문답(敎理問答)과 복음성서(福音聖書) 주해(註解)와 그날그날의 성인행적(聖人行蹟)과 기도서 등을 가지게 되었다. 얼마동안 연구한 뒤에 자기 은신처에서 나와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용 형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이요, 위대하신 천주께서는 우리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요.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어.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 진리를 깨달은 이벽은 더 이상 천주교 전래를 주저하거나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이전에 천주교를 연구하였던 분위기와는 달리 이제는 분명한 종교와 신앙으로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노력으로 역관 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김종교(金宗敎), 이가환(李家煥), 권철신(權哲身), 권일신(權日身)이 천주교의 신앙을 확신하게 되었고 뛰어난 명문 출신 유학자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조선의 천주교는 새로운 궤도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2] 박해의 시작
1. 을사추조적발사건(1785): 김범우의 유배
한편, 복음이 조선에 들어온지 겨우 1년 후인 을사(乙巳, 1785)년 초에 형조판서(刑曹判書) 김화진(金華鎭)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를 일으킬 만한 어떤 과감한 조처로 천주교 포교의 진전을 막고자 했다. 천주교인들의 이름난 지도자들에게는 감히 직접 손을 댈 수 없으므로 그는 본명을 토마스라는 김범우(金範禹)를 잡아 자기 법정에 끌어오게 하였다. 김범우는 서울 태생으로 주요한 역관(譯官) 집안 중 하나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는 이벽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1784년에 천주교를 배운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그는 배운 바 지식을 열심히 실천했으며 자신의 가족 뿐 아니라 친구들, 특히 역관 계급에서 여러 사람을 가르쳐 입교시켰다.
김범우는 형조판서 앞에 불려가서 배교하라고 재촉을 받았다. 그러나 배교를 거부하자 여러 가지 고문이 가해졌다. 한편 이러한 소식을 들은 권일신(權日身, 사베리오)은 자기의 충실한 동교인(同敎人)을 버려두는 것이 자기답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신자들과 함께 판서 앞에 나아가 용감히 외쳤다. “우리도 모두가 김범우와 같은 종교를 신봉하니, 대감이 그에게 내리는 운명을 우리도 같이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판서는 유력한 집안의 사람들은 손대지 않은 채 모두 돌려보냈다. 오직 김범우만을 계속 잡아두어 박해하였다.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한 뒤에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자, 결국에는 그를 충청도 동쪽 끝에 있는 단양(丹陽)읍으로 귀양보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상처의 악화로 단양에 도착한지 몇 주 후에 죽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2년 후에 죽었다고 한다.
2. 자의적인 성사거행과 제사 금지 규율
이미 북경을 방문해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북경에서 주교, 신부, 그 밑의 성직자들로 된 가톨릭의 교계제도(敎階制度)가 실제로 적용되는 것을 보았었다. 그는 그 도시의 성당에서 미사에도 참여하였었고 그가 있는 곳에서 성사가 거행되는 것도 보았었다. 그는 자기의 모든 기억을 되살렸고 그들은 신자용 예절서(禮節書)나 교리서에 있는 여러 가지 설명을 빌어 완전한 조직 계통을 세우고 곧 목자(牧者)들의 선정에 들어갔다. 그 지위와 학식과 덕망으로 가장 뛰어난 권신일이 주교로 지명되었고 이승훈(李承薰), 유항검(柳恒儉), 최창현(崔昌顯) 등이 신부로 선출되었다. 그들은 각기 자기 임지로 직행하여 설교하고 성세를 주고 고백성사와 견진성사를 주었다. 그리고 미사를 드리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명하여 주는 등 일종의 신자행정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조선 성직자들은 많은 성과를 거두며 또 온전한 선의(善意)로 거의 2년 동안 그렇게 그 직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기유(己酉, 1789)년에 교회서적의 어떤 구절을 더 자세히 연구한 결과 주교와 신부들의 머리에는 자기들의 선출과 그 직품의 유효성에 대한 중대한 의혹이 생겨났다. 그들은 일체의 성직 수행을 경솔한 처사로 생각하여 즉시 중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북경의 주교에게 문의하는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윤유일에 의해 북경의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전해졌으며 그들은 주교로부터 회답을 받았다. 편지는 윤유일이 옷 속에 더 쉽게 감춰서 더 확실히 조선에 들여올 수 있도록 명주 조각에 쓰여 있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은 이승훈과 권일신으로 되어 있었다. 주교는 그들이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지 않았으므로 미사를 절대로 거행할 수 없고 영세를 제외한 성사를 행할 수가 절대로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미신자들을 입교시킴으로써 하느님께 대단히 기쁜 일을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동을 꾸준히 계속 하라고 격려하였다.
그러나 조선 교우들은 성사를 받을 마음이 간절하였다. 이에 그들은 조선에 신부를 보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쓰고자 했다. 더하여 그 편지에는 목자를 얻기 위한 간청외에 자기들 나라의 계약 관계와 미신과 조상숭배와 그 밖의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도 들어있었다. 윤유일은 편지를 들고 다시 북경으로 떠났다. 하지만 윤유일은 신부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구베아 주교로부터 조상제사 금지 명령을 듣게 된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던 윤유일은 “제사를 드리는 것을 돌아간 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기 위함인데 천주교를 믿으면서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면 이는 매우 곤란한 일이온데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주교가 대답하기를 “천주교는 반드시 성실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사람이 죽은 후 음식을 차려 놓는다는 것은 크게 성실한 도리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결국 1790년 윤유일이 구베아 주교의 서한을 갖고 조선에 돌아오자 조선 교회는 일대 파문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훈과 정약용 등은 조상제사 금지 명령에 반발을 갖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많은 이들이 술렁이면서 신앙의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3] 계속되어지는 박해: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
1. 윤지충(尹指忠),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하다
조상에 대한 제사 문제는 마치 남과 북, 동과 서와 같은 양극단의 결과를 초래했다. 이승훈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제사 문제에 발목이 잡혀 배도의 길을 걸은 반면, 윤지충은 반대의 길을 걸으며 천주교 신앙을 지키고자 했다. 윤지충(尹指忠)은 해남 윤씨 어초은(漁樵隱) 파의 22대손으로 근세 가사문학의 대가인 고산 윤선도의 6대손이고 영조 때의 대화가인 공제(恭劑) 윤두서(尹斗緖)의 증손이다. 윤두서의 다섯째 아들인 덕열(德烈)은 진산에 터를 잡았다. 그는 경(憬, 1723~1771)과 등(燈, 1730~1797) 두 아들과 네 달을 두었는데, 둘째 딸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어머니이다. 윤지충은 한의학에 종사하는 아버지 경과 어머니 안동 권(權)씨의 장자로 기묘년(1759)에 태어났다.
윤지충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단정한 품행을 지녔다고 한다. 1783년 계묘년에 그는 25세로 진사(進士)가 되었다. 다음해 그는 서울에 올라가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천주교 서적 두권,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을 보고는 그것을 빌려 베꼈다. 그러나 아직 신앙을 실천하지는 않았다. 3년쯤 뒤에 자기 사촌 정약전(丁若銓)에게서 천주교에 대해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결정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그 본분을 지키기 시작했다.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겁이 나서 자기 책의 일부분을 불살랐으나 그래도 비밀스럽게 본분을 지키는 것을 계속하였다. 그가 교우들과 드러나게 많은 접촉을 하였다던가 미신자(未信者)들의 교화에 힘썼다던가 한 일은 볼 수 없다.
윤지충 천주교인으로서 조상신을 모셔서는 안된다는 令을 듣고 신주(神主)를 불살랐다. 이런 상황에서 신해(辛亥, 1791)년 여름에 윤지충은 모친상을 당하였다. 처지가 난처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윤지충의 친척과 친구들이 그에게 조상(弔喪)을 하고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올 참이었다. 그는 최소한 외면적으로 만이라도 자기의 신앙을 짓밟고 하느님을 배반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비난과 욕설과 저주를 무릅쓸 준비를 갖추어야만 하였다. 결국 윤지충은 상복을 입고 어머니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였으며 그런 경우에 견식있고 사리에 밝은 효성이 종용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하였다. 어머니에게 대한 자식의 사랑과 체면이 요구하는 것에서 아무 것도 빠지지 않았으나 다만 제사만이 없었다. 이내 불평이 터져 나왔다. 그 때까지 특히 양반집 자식으로서는 일찍이 없었던 그 위배에 대한 말 밖에는 없게 되었다. 그 소식이 멀리까지 퍼졌고 오래지 않아 가장 친하게 지내던 이들로부터 불효자로 지목되었다.
한편 윤지충의 친척인 권상연(權尙然) 역시 자기 사촌의 행동을 고스란히 따라했다. 권상연은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웠다. 그는 이내 敎에 들어왔고 충실히 실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역시 윤지충의 어머니인 고모가 세상을 떠나자 아무런 제사도 올리지 않았다. 그는 윤지충과 함께 친척과 친구들의 비난과 욕설을 받았다. 결국 이 둘에 대한 조정의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에 윤지충은 한산으로, 권상연은 공주로 피신하였다. 그러다 환갑이 지난 숙부 등이 대신 볼모로 갇히었다는 소식을 듣자 10월 26일 진산 관가에 밤새 달려와 자수하였다. 이 둘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불효불충 악덕죄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33세, 권상연은 41세였다. 이로써 윤지충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단양으로 유배간 김범우를 최초의 순교자로 보기도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증거자이고 최초의 직접적인 순교자는 윤지충, 권상연이다.
2. 윤지충(尹指忠)과 권상연(權尙然)의 압송행로
진산(珍山)은 조선 정부와 초대 한국천주교간에 조상제사 문제로 야기된 최초의 충돌지이다. 문제가 발발하자 진산군사 신사원은 1791년 10월 28일 윤지충과 그의 외종형 권상연을 전주감사 정민시에게 압송할 것을 결정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28일 저녁에 압송하도록 결정되었지만 날이 저물어 면임(面任)집에서 밤을 지냈다. 29일 밤중 첫닭이 울자 사령과 옥졸 셋 그리고 두 죄인은 전주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신거런’ 주막에 와서 아침을 먹었다. 다시 ‘개바우’ 주막에 와서 말죽을 먹이며 두어 시간 지체하다 떠나 해질 무렵에 ‘안덕’ 주막을 지나 작은 고개를 넘으니 전주 영문의 나졸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윤지충 일행이 29일 하룻길에 전주를 도착했다면 진산에서는 첫 닭이 운 밤 두시 정도였을 것이고, 신거런 주막에서 9시쯤 아침을 먹었을 것이다. 이후 개바우에서 말죽을 먹인 것은 오후 3~4시쯤이었을 것이고, 안덕을 지나간 것은 5~6시, 동헌에 도착한 것은 7시 정도였을 것이다. 이들은 120여리 길을 17시간에 걸은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3. 신해박해(辛亥迫害)의 결과
1791년에 있었던 신해박해는 윤지충의 조상 제사 문제로 인해 야기된 박해였다. 신해박해로 조선천주교는 일대 위기를 만났다. 이처럼 자생적으로 생겨난 조선 천주교는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큰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1791년 ‘폐제분주’(廢祭焚主)의 죄명으로 윤지충, 권상연이 순교하게 되자, 조선의 초대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재정립 하든지 아니면 천주 신앙을 포기하든지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와같은 상황 속에서 뿌리가 깊지 못한 조선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을 비롯해 이벽, 정약전, 권일신, 최필공, 최인철, 양덕윤, 최필제, 정인혁, 손경윤, 양덕윤 등이 배교하고 말았다.
잠시 이벽의 배교 과정에 대해 살펴보자. 이벽의 아버지는 성질이 급한 사람으로서 새 종교 이야기를 듣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그는 자기 아들의 마음에서 신앙을 빼버리기 위해서 일찍이 들어본 일이 없는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그 일을 성공할 수 없으므로 실망에 빠져 하루는 자살을 하려고 목에 줄을 감았다. 이벽은 이런 광경을 보고 마음이 흔들려 용기가 없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어떤 사람이 찾아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계락과 거짓말을 써서 배교를 유도했다. 결국 이벽은 실망에 빠진 아버지를 보고 그의 말을 들음으로 해서 배교의 길을 걸었다. 명백한 배교는 주저하여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을 써서 자기의 신앙을 감추었다. 그 뒤 그는 무서운 양심의 가책에 쫓겨다녔다는 말이 있다. 그는 기운이 없고 말 수가 적은 우울한 사람이 되었다.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주 비통한 탄식을 하는 것도 들렸다고 한다. 이후 병오(丙午, 1786)년 봄에 기세를 떨치던 페스트에 걸려 8일간 앓은 뒤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4] 절정에 이른 박해: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
1. 신유박해(辛酉迫害)의 시작
1785년에 일어난 을사추조적발사건과 1791년의 신해박해에 이어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조선천주교는 불과 20년도 되지 않아 연속적인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 신유박해는 1776년 천주교에 동정적이던 남인의 지원을 받으며 천주교 박해를 반대하던 정조가 1800년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에 올라 어린 순조의 계조모가 섭정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는 순조 원년인 그 해 김대비가 자기 오빠 김구주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개인감정과 당쟁과 권력욕에서 시작되었다. 음력 1801년 1월에 “사학은 무군무부(無君無父) 야 훼괴인륜(毁壞人倫) 하고 부존부모(不尊父母) 야 멸기난상(蔑紀亂常) 하다며 사학을 금하는 제 1차 교서를 공포하고 2월에 제 2차 교서를 공포한 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2. 신유박해(辛酉迫害) 추안(推案)
조선왕조와 같은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범죄로 취급되던 것은 강상죄(綱常罪)이다. 전근대사회의 기본적인 상하질서(上下秩序)를 무너뜨리려는 범죄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엄중히 다스려졌던 것이다. 이 강상에 대한 범죄는 의금부(義禁府)에서 직접 다루었고 의금부의 심문기록을 추안(推案)이라 한다. 조선후기사회에 유포되던 천주교 신앙은 전통적인 왕조질서체계를 부정하는 혁명사상으로 집권자에게 이해되었으므로 그들은 천주교신자들을 강상죄인으로 취급하였다.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단행되자 신도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들은 강상죄인이 되어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고 조서가 작성되었다. 이때의 심문기록으로 죄인이가환등추안(罪人李家煥等推案), 죄인이기양등추안(罪人李基讓等推案), 죄인강이천등추안(罪人姜龜天等推案), 죄인김려등추안(罪人金鑢等推案), 죄인유항검등추안(罪人柳恒儉等推案), 죄인황사영등추안(罪人黃嗣永等推案) 등이 있다.
3. 신유박해(辛酉迫害)시 조정에 압수된 천주교 서적들
1801년 신유박해시 관부에 압수된 천주교회 서적들은 첨례용(瞻禮用)과 신공용(神功用)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우선 첨례용(祝日, 主日, 미사 등을 포함)을 위한 책들로는 첨례단(瞻禮單), 주년첨례(周年瞻禮), 성경광익, 성경직해, 성경광익직해, 예수성탄첨례, 저성첨례 등을 들 수 있는데 그중 성경직해는 첨례를 위한 대표적 교리서로서 복음 성서를 번역한 것이었다. 한편 첨례 때 급한 도문(禱文)들로 보이는 성인열품도문, 천신도문, 예수수난도문, 연옥도문 등이 나타나며 미사에 관한 것도 나타나고 있다.
다음으로 신공용(神功用) 책들로는 祈禱書(聖敎日課, 성호경, 천주십계, 매괴경)와 신심묵상서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밖에 교리문답(요리문답, 고해요리, 성체문답, 성사칠적, 고해성찬 등), 윤리서(칠극, 사말론), 호교서(성세추요, 교요서론), 성인전 등도 상당수 발견되고 있다.
이와 같이 기도서, 신심서가 교회 서적들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천주실의, 진도자증(眞道自證)과 같은 어려운 교리서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초기 천주교회의 신앙이 대중적이고 실천적이며 신심, 기도 생활 중심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4.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신부의 조선 잠입과 활동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래로 아직 조선에는 한 명의 신부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도들의 수가 늘어났을 때는 그에 대한 수요로, 박해로 성도가 급감했을 때에는 교세의 보존과 신도들의 위로를 위해 필요했다. 언제나 신부의 필요성을 지닌 조선 천주교였지만 늘 그 부재가 뒤따랐다. 그러나 조선에 신부를 보내기 위한 북경의 조선 선교에 대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이미 한차례 포르투갈인 레메디오스 존(Jean dos Remedios)이 조선으로 가려했지만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신부의 수요를 갈망하던 조선의 요청에 구베아 주교는 서양인 신부가 아닌, 중국인 신부 한 명을 파송했다. 그 사람이 바로 1794년 서울에 와서 선교 활동을 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1752~1801)였다. 그는 조선에 온 첫 외국인 선교사가 되었다.
주문모 신부가 국내에 잠입해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독실한 여인 강완숙이 있었다. 강완숙은 충청도 예산의 양반 집 딸로 태어나 덕산의 홍지영의 후실로 출가한 후 천주교에 입문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덕산의 자기 집 나무광에 마련한 은신처에 주 신부를 은닉시키고 그가 숨어서 선교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불신자였던 남편이 반대하자 시어머니, 딸, 전실 자식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한 후 신부를 계속 보호했다. 처음에는 나무 광에 숨겨 두었다가 3개월 뒤에는 시어머니를 움직여 사랑방으로 모셔 들이게 했다. 천주교의 주요 지도자들 외에는 주 신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철저하게 보완과 비밀을 유지하면서 주 신부의 선교활동을 지원했다. 주 신부는 철저하게 변장을 하고는 가끔 지방 순회도 하고 낮에는 밀실에서 조선어를 배우고 조선어로 천주교 서적을 번역했다.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서 무려 6년간이나 은신하면서 선교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입국 당시 4천여 명에 불과하던 천주교 신도는 5년 후인 1799년에 약 1만명에 달했다. 불과 5년 만에 교세가 배로 증가한 것이다.
한편, 박해가 완화되기를 기다렸으나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더 이상 숨어 지낼 수 없었던 주문모 신부는 이같은 조선천주교회의 상황을 북경의 주교에게 알리기 위해 편지를 썼다. 하지만 천주교가 전통적인 조상숭배를 거부하며 반국가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조선 정부로서는 천주교의 종교적 자유를 허락할리 만무했다. 오히려 주문모 신부의 요청이 조선 정부에 알려지면서 주 신부의 그와 같은 행동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1797년 천주교에 대한 더 극심한 박해가 이어져 천주교는 전래 후 가장 큰 위기를 만나게 된 것이다.
신앙의 자유를 기대하면서 피신해 있던 주문모 신부는 천주교 포교의 자유는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더욱 박해가 심해지자 자신이 자수하면 박해를 완화하리라는 기대를 안고 1801년 4월 9일 의금부에 자수했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바와 같이 박해는 완화되지 않고 도리어 1801년 5월 31일 주문모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에 처해졌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를 숨겨 준 강완숙도 얼마 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와 함께 양반 출신의 조선 천주교 창설의 주역들인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이단원, 이가환과 함께 주문모를 숨겨준 최인길, 윤유일, 지황, 황사영, 그리고 왕족으로부터 궁녀, 귀부인, 양반, 중인, 상인, 심지어 종에 이르기까지 300여명의 신도가 순교했다.
[5] 신유박해(辛酉迫害)의 대표적인 순교자
1. 정약종(丁若鐘, 1760~1801)
정약종(丁若鐘)은 다산 정약용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정약종처럼 학자로서 또한 모범적인 천주교인으로서 인생을 살다 간 인물도 드물 것이다. 실로 정약종이 한국 천주교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초기의 한국 천주교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을 남겼으니 그것은 바로 그가 주교요지(主敎要旨)란 한글 교리서를 내놓은 것이다. 한국 교회 사상 최초의 한글 교리서로서 또한 최초의 토착화된 신앙의 교리서로서 그것은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더욱이 정약종은 그의 형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이 박해의 희생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여러 차례 배교와 회두(回頭)로 나약함을 보일 때도 유독 형제 중 그만은 짧지만 굵게 초지일관(初志一貫) 신앙을 지키고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정약종은 진주(晋州) 목사(牧使) 정재원(丁載遠)의 아들 약현(若鉉), 약전, 약종, 약용의 4형제중 셋째 아들로서 영조(英祖) 36년 즉 1760년 서울에서 멀지 않은 마재(馬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정조가 즉인한 후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낸 바 있고 그의 모친은 해남윤씨(海南尹氏)였다. 그는 일찍이 성호(星湖) 이익(李瀷)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그는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쏟아 천주교의 참된 교리를 깨닫고는 입교하여 더욱 천주교 교리를 연구함으로써 교리 지식이 당대에서 가장 뛰어났을 뿐 아니라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그의 형제와 친한 친구들이 모두 배교 또는 냉담했어도 그만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는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되자 곧 그것을 배웠다(1786년에 입교하였다). 그러나 즉시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이벽(李檗)이 서학(西學)에 전념할 때 참된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자주 되내었고 4, 5년 뒤에야 비로소 은총의 권유에 순종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주저한 것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망설임을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영세할 때 이 성인을 주보(主保)로 삼았다. 교우가 되자 그는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어떤 찬사도 미칠 수 없는 열심과 항구심으로 천주교를 봉행(奉行)하였다. 그는 결혼을 했었지만 그 아내가 정하상(丁夏祥) 카롤로라는 아들 하나만을 남겨 놓고는 아주 젊어서 죽는 불행을 당하였다. 정약종은 후에 재취(再娶)하였지만 그 아들에게 교우의 모든 본분을 정성껏 가르쳤다.
그는 광주(廣州) 분원(分院)에서 살고 있었으나, 1799년 기미년(己未年)에 서울로 이사하여 문영인(文榮仁)의 집을 빌어 살고 있었는데 1801년 초부터 박해가 일어나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성상과 교리서적,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을 고리짝에 넣어 임대인(任大仁) 토마스로 하여금 옮기게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밀도살한 쇠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오인받아 포도청에 끌려가 진상이 탄로남으로써 박해가 가열되었고 자신도 (음) 2월 11일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의 체포되는 경위는 다음과 같다.
“2월 11일(음) 마재(馬峴)에서 서울로 말을 타고 오는 길에서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는 금부도사(禁府都事)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이미 지나쳤는데 그 관리가 자기를 잡을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종을 그에게 보내어 누구를 잡으러 가느냐고 묻게 하고 자기를 잡으러 가는 길이라면 더 멀리 갈 필요가 없다고 덧붙이라고 하였다. 도사는 과연 그를 잡으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정약종은 그 자리에서 잡혀 곧장 옥으로 끌려갔다.”
그는 (음)1월 19일 압수된 성물 상자에 대해서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자백하였으나 그 속에 들어있는 주문모 신부의 편지에 대해 질문을 받자 침묵을 지켰다. 신문을 받는 동안에도 그는 점잖게 신앙을 고백하고 관리들 앞에서 천주교의 지리를 설명하며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천주를 배반하는 일은 절대로 동의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결국 그는 1801년 (음)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뒤 그의 아내(유 세시리아)와 아들 정하상 딸 정혜도 19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그를 따라 순교하였다.
2. 황사영(黃嗣永, 1775~1801)
1775년 출생한 황사영(黃嗣永)은 자를 덕소(德紹)라 하였고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그의 집안은 고려 말기부터 이씨조선에 이르기까지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문거족으로서 뒤에 남인에 속하여 활약하였다. 이런 가문에 태어난 황사영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1790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당시의 임금이었던 정조(正祖)가 친히 손을 잡고 “네가 20세가 되면 곧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를 중히 써 주겠노라”라고까지 한 유망한 인물이었다. 황사영은 그 뒤 왕이 손수 잡아주던 영광스러운 자기 손목을 붉은 비단을 감고 다녔다. 황사영이 배론(舟論) 토굴에서 잡혔을 때도 포졸들이 그의 손목을 잡지 못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일생을 그렇게 하고 다녔던 것 같다. 그는 평소에 성학(聖學)이라 여겼던 주자학(朱子學)에 곧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1791경 처삼촌인 정약종이 들려준 천주학에 매료되어 알렉산델(Alexander)이란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는 진사가 된 후 정약용(丁若鏞)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 명련(命連, 마리아)과 결혼하였다. 1791년 이승훈(李承薰)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으며 정약종, 홍낙민(洪樂敏)과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한 후 영세 입교하였다. 그의 영세 직후인 1791년 10월(음) 신해박해(辛亥迫害)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포기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고 주문모 신부와 함께 전교 사업에 힘을 기울이며 교회내의 중요한 인물로 성장하여 갔다. 그는 1798년 이후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고양(高陽)을 떠나 서울에 이주하여 애오개, 북촌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거기서 신자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지냈고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며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날 당시 그는 가장 활동적인 교회지도자로 부상되어 갔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길고도 윤이 나는 자기의 수염을 잘랐고 상복을 입고 제천(堤川)의 배론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 그는 성을 이(李)씨로 바꾸고 자칭 ‘경중 이상인’(京中 李喪人)이라 불렀다. 그는 배론 동굴에 은신해 있으면서 그를 찾아온 황심(黃沁)과 의논하여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는 방책으로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를 흰 명주위에 작성했다. 이것이 바로 황사영의 백서이다. 황심이 체포당하게 되면서 그의 거처지가 알려져 배론 동굴에서 포졸들에게 잡혀 이 백서가 압수되어 그의 소망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는 대역죄인으로 목이 잘리는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는 1801년 9월 29일(음) 체포되어 그해 11월 5일(음)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27세였다.
황사영의 백서는 대략 세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백서에는 그 때의 교세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 신유박해 사실 및 이때 죽은 순교자들의 약전이 실려 있다. 다음으로 주문모 신부의자수와 처형사실을 소상하게 적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조선 정치계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데 필요한 그가 생각한 방안들을 적기하고 있다. 처음 두 부분은 매우 정확한 일차적인 기록으로서 교회사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 번째 부분에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법 중에 하나로 서양 여러 나라의 무력시위를 요구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교회사를 연구하며 까탈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 내용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황사영은 박해받는 형제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얻게 해주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교황이 중국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어 천주교인들을 편안하게 두고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일단 종교의 자유가 중국에서 허락되면 그 여파로 조선에서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리라는 것이었다. 만약 조선 정부가 말썽을 부리면 중국 황제가 무력으로 조선 정부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쉬우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이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나는 경우에 대하여서는 북경 주교가 서양의 천주교 국가들에게 호소하여 6만 내지 7만 명의 군대를 보내어 조선을 정복하도록 간청하고, 그렇게 많은 군대를 모으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7천 내지 8천 명을 가지고 시도하도록 간청하라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유럽 기독교 제국이 6만 내지 7만의 대군을 조선에 파송해 조선을 정복해 달라고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낸 백서의 저자 알렉산더 황사영은 바램은 조선의 천주교도들이 얼마나 백해를 견디기 힘들었는가를 말해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얼마나 반민족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황사영의 요청은 주문모가 했던 것처럼 밀사의 옷 속에 꿰매어서 비밀리에 시행하려 했으나 밀사가 정부 관헌에 발각되는 바람에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이 일로 정부는 더욱 천주교에 대한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고 이어 천주교에 대해 더욱 무서운 박해를 가했다. 뒷날 뮈텔 주교 역시 백서의 불란서 번역본 서문에서 이 부분을 가리켜 음모의 대부분은 공상적이며 위험천만한 것이었다고 지적한 바가 있었다. 이와같이 황사영의 그러한 계획은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었으며 아직까지도 많은 문제점을 남겨 놓고 있다.
[6] 신유박해(辛酉迫害), 그 이후의 천주교
1. 연속되는 시련들
조선천주교로부터 구원의 요청을 받은 북경 주교는 불란서 혁명으로 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단절되었고 중국 내에서도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이 내려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에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중국 내에서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조선 정부가 천주교에 대한 탄압정책을 더 강화시켜 국내 천주교 신도들은 1815년, 1819년 그리고 1827년에 또 다시 가혹한 정부의 박해를 받아야 했다. 신유박해 때 살아남은 신도들이 서울과 경기지방, 강원도, 경상도 등 산간벽지로 숨어 들어가 그곳에 정착하여 신앙을 계속 유지했다.
2. 거듭되는 박해와 그 마지막
천주교 교세는 1784년 교회가 창설된 직후 이미 1천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수는 7백만을 밑돌고 있었고 서울의 인구는 18만 정도였다. 그러므로 서울과 경기 일대에만 한정되어 있던 초창기의 천주교 신자 수 1천여 명이란 적지 않은 숫자였다. 10년 후인 1794년에는 4천여 명으로 증가되었고,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여 전교 활동을 하게 되면서 1800년 무렵에는 1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처럼 증가일로에 있던 교세가 위축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인해서였다. 이 박해는 교회 초기의 지도자층을 궤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신자들까지도 뿔뿔이 흩어지게 하였다. 그 결과 1836년경 신자 수는 6천명도 되지 못하였고 각처에 흩어져 생활하는 신자들의 정황도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1836년 말부터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잠입하여 활동함에 따라 2년 후인 1838년 말에는 전국 신자수가 9천명에 이르게 되었으며,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직전에는 다시 1만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발생한 기해박해로 인해 조선교구는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재건은 박해가 끝난 후 얼마되지 않아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페레올(Ferreol) 주교와 서양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입국하고 김대건(金大建), 최량업(崔良業) 등 한국인 성직자들이 활발한 전교 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1858년에는 신자수 11,000명 이상이 되었다. 이러한 교세 확대는 그 후에도 계속되어 1857년에는 신자 수 15,206명, 1861년에는 신자 수 18,035명, 병인박해(丙寅迫害) 직전인 1865년에는 신자수 23,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인해 총 신자 수는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3. 외세에 의해 열려지는 포교 자유의 문
1881년, 조선에서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에서는 정조 이래로 시행되었던 천주교에 대한 탄압정책이 아직도 유효한 것임을 거듭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일 다시 사교(邪敎)에 깊이 물들어 그 습속을 고치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속이고 달래며 맑고 밝은 것을 흐리고 더럽히면 온 집을 다 죽이고 일족을 멸하겠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의 변동에 따라 척사윤음은 이미 그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었다. 이미 조선은 1882년 한미조약에 의해 기독교 선교사의 조선 입국을 묵인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인박해의 책임을 묻는 프랑스와 한불조약(韓佛條約, 1886)을 맺음으로 인해 조선에서 프랑스 신부의 전교 활동은 묵인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신부들은 조선의 내지 여행시에 반드시 호조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으며 제물포, 부산, 원산, 양화진 등에서는 자유롭게 거주하는 것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원산의 경우, 한불조약에 체결된지 1년이 지난 1887년에 드게트 신부가 조약의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던 관장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호송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포교의 자유는 확보되어 있었으며, 1899년 교민조약과 1904년 선교조약(宣敎條約)을 거치면서 신앙의 자유가 더욱 확고히 되었다.
◈ 생각해볼 문제: 천주교에서 말하는 제사
중국내 천주교의 씨앗을 뿌렸던 마태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은 제사 문제에 대해 응당 천주교에서 수용해야할 문화적 의식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중국의 유교적 사상과 관점을 살피면서 그것과 더불어 천주교의 조화를 도모하는 보유론적(補儒論的)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다가 예수회보다 반세기 늦게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보유론적 입장을 영합주의(迎合主義)라 비난하면서 조상제사, 공자(孔子)의 석존제(釋尊祭)를 우상숭배 내지는 미신행위라 규탄하였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처음에는 제사를 금하였고 그 다음에는 허용하였다가 마침내 베네딕토 14세(1742) 때 이르러 결정적으로 단죄하였다. 이로인해 중국뿐 아니라 조선에서 역시 천주교인으로서 제사는 금지되었다. 이는 천주교의 포교에 큰 타격을 가하는 방침으로서 윤지충의 죽음 역시 제사 문제가 그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뒤, 교황 비오 11세는 1935년 중국에 공자 존경 의식을 허용하였고 또한 1년 뒤 1936년에는 일본에 신사 참배를 허용하면서 지금까지 금지되었던 혼인, 장례 그 밖의 사회 풍습에 대해서도 폭넓게 허용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교황 비호 12세는 1939년 12월 9일에는 위폐를 모시고 존경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하고 시체나 죽은 이의 상 또는 단순히 이름이 기록된 위폐 앞에서 머리를 숙임과 기타 민간적 예모로 표시함이 가하고 타당한 일이라는 관용적 조치를 취하였다. 이 훈령에 의거하여 한국 주교단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관한 보다 상세한 지침을 정하였다.
일제 치하, 신사참배의 수용과 더불어 제사 문제는 과감히 수용되었다. 이미 터져버린 수문을 나선 물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지켜오던 제사 금지 규정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처음 천주교가 전래되고 100여년간 조선 천주교는 제사 문제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고 그로 인한 순교자만도무려 10,000명이나 되었다. 조정의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박해 속에서도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을 따라 조상 제사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순교적 신앙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이제는 결코 그 때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인간의 기호에 맞게 변해버린 교리의 왜곡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물론 천주교 내에서의 반대 또한 존재했다. 예를 들어 경성(서울)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신사 참배를 용인하였지만, 평양 지목구장이었던 모리스 몬시뇰을 비롯한 메리놀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또한 콜만 신부 역시 중국 예식을 단죄하고 베네딕토 14세의 말을 상기시키면서 모든 선교사들은 이교 의식에 대한 서약을 했으므로 중국 제사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사 참배 역시 거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교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일제로부터 여러 기관들이 누리던 특혜를 잃게 되거나 선교사들이 추방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교회가 불이익을 당하게 되더라도 참교 견뎌내야 한다고 말했다. 더하여 일부 다른 선교사들 역시 1934년 5월 15일의 메리놀 평의회 회합에서 학교의 학생들을 신사에 참배시키지 않겠다는 것을 문서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황청 포교성성의 교령은 일반인의 인식과 관계 당국의 성명에 의해 신사 참배가 더 이상 종교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 아니므로 신자들의 수동적인 참석을 허락하였다. 신도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의 참석 역시 같은 범주에서 허용하였다. 포교성성의 교령이 나온 후 한국 주교 회의는 1936년 6월 12일 대구에서 있었던 회합에서 1932년의 한국 교회 지도서의 신사 참배 부분을 다음과 같이 수정했다. “신사에서 행해지는 예식들에 참여하는 것은 애국심의 표현인 한에서 허용된다...”
참으로 가슴 아픈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신사참배를 적극 만류했던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소수가 존재했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했다. 신사참배의 합헌적 결정과 더불어 천주교 교리에 있어서 제사 문제는 지극히 타당한 요소로 자리매김하였다. 초기 천주교회사와 관련된 글을 읽다가 “왜 우리는 천주교인인가?”란 제목의 칼럼을 하나 발견했다. 천주교인과 타(무)종교인과의 차이점이 거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오늘날의 현상을 보며 다시한번 천주교의 정체성의 문제를 묻는 자기 반성적인 글이었다. 성당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세속인이 되어버리는 종교인과 과거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곧은 신념의 신자가 어찌 대동소이한 천주교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안타까운 참회의 고백이었다.
시대와 인간에 호소하는 종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종교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다. 시대와 인간 모두 변개한다는 특성을 지닌다. 이 둘은 이성의 고려대상으로서 합리적으로 바뀌어지기 위해 조변석개와 같이 모습을 바꾼다. 시대와 인간에게 호소했던 천주교의 가슴 아픈 결과는 개신교도들로 하여금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교훈이 된다. 돌을 던지기에 앞서 우리를 먼저 돌아보는 넉넉한 마음을 소유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리라 생각된다. 이미 우리 역시 쓰라린 실수를 경험했다. 하나님 앞에 크나큰 죄인들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과거에 행했던 죄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진정한 회개로의 도약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시대와 이성을 초월하여 변개치 아니하는 진리를 붙들기 위해 절차탁마하는 신앙인의 자세가 필요하리라 믿는다. 붙들어주시는 은총을 통해 변치 않는 진리속에 거해야함을 믿는다.
나가는 글
우리는 지금까지 조선에 전래된 초기 천주교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았다. 마테오 리치 등의 역량으로 이미 중국내에 자리잡았던 천주교는 조선 국왕의 사신으로 북경으로 오가는 사절단들로 인해 그 씨앗이 국내로 들어오게 된다. 이 씨앗은 서학에 관심을 보였던 학자들에 의해 실천되어지고 그들은 초기 조선의 천주교 신자가 되어 포교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이러한 가운데 북경의 신부로부터 제사 금지에 대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양반 출신의 많은 천주교인들은 천주교를 등져야만 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윤지충(尹指忠)과 권상연(權尙然) 등이었다. 그들은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상 역시 거부함으로 인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이러한 신해박해(辛亥迫害)는 10년만에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이어졌고 그 박해 기간동안 조선에 잠입했던 최초의 신부였던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비롯해, 정약종(丁若鐘)과 황사영(黃嗣永) 등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신유박해가 박해의 종식은 결코 아니었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박해들이 있었으며 기해박해(己亥迫亥, 1839)와 병오박해(丙午迫亥, 1846),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 등의 참혹했던 박해도 존재했다. 이러한 박해의 끝은 한불조약(韓佛條約, 1866)으로 인해 얻어지게 된다.
지면의 제한과 능력의 부족으로 그 범위를 중국으로부터의 전래시부터 신유박해까지로 국한지었음은 적지않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100년이란 천주교 역사를 시간과 사건의 추이속에서 물 흐르듯 고리에 고리를 이어 살펴보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물론 한 챕터를 빌어 신유박해 이후부터 병인박해, 한불조약 등의 내용을 실었지만 그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사례와 사건을 기술하지 못하였음이 미련으로 남는다. 신유박해 이후의 특징들로는 또 다른 연구의 과제로 남겨두었으면 한다. 다만 지면의 뒷부분에 제사 문제와 관련하여 나름의 생각을 피력하였음은 스스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100여년이 넘도록 고수해온 제사 금지의 전통을 일제 치하시기에 와해시킴으로 천주교의 세속화는 급물살을 타며 진행되었다. 단순한 비판으로 그 사건을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를 돌아보며 좀 더 나은 내일을 그려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