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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에 관한 추억을 올려주셔서 저도 두 시간 분량의 인터뷰동영상을 찾아 그 중 UP에 관한 동영상을 올렸습니다. 1980년 대 초의 추억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2시간 분량의 인터뷰를 모두 올려달라고 하셔서 나름 욕심을 내어 준비를 해봤지만, 정말 역부족이네요! 영문 자막 넣는 것도 쉽지 않고요. 여러 차례 시도하다가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자막 없이 원문청취내용을 글로 정리해서 올리고 Art Rock Magazine과 1990년대 초 제 1회, 2회 Art Rock Festival에 관한 일부 동영상만을 올려봅니다.
아래 내용들중 인터뷰 동영상을 원하시면 그 부분만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시완, '시완'을 말하다
- 열정을 부르는 순수로 가능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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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시완 레코드 & 튜브뮤직
성시완은 시완 레코드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나의 공동체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성시완의 음악관이 곧 시완 레코드를 이끌어가는 중심축이라는 점에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시완 레코드가 설립된 것 역시 그의 음반 수집과 심야 라디오 방송의 DJ로 활동한 이력으로부터 비롯됐기 때문이다. 시완 레코드의 모든 앨범들은 그의 남다른 음악적 애정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불가능의 세계에 놓여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1981년부터 아트 록의 불모지나 다름 없던 국내에, 그의 표현대로 '보물'과 같은 음악들을 소개해 왔다. 그 보물들이 튜브 뮤직을 통해 뒤늦게라도 음악 애호가들과 만나다는 사실에 한껏 자부심이 고조돼 냉큼 성시완 선생님(무례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이후 존칭은 생략하기로 하자)께 인터뷰를 청했다. 아트 록의 문외한이나 다름 없는 사람이 '아트 록의 전도사', '아트 록의 대가'를 만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완의 몇몇 앨범에 매료됐던 많은 밤들의 기억을 안고, '음악이 흐르는 밤에'를 통해 잊을 수 없는 감격을 안겨준 뉴 트롤스(New Trolls)의 [Concerto Grosso]가 처음 소개됐었다는 사실에 더욱 설레는 마음으로, 동교동에 위치한 시완을 찾게 됐다. 그곳은 수많은 LP와 CD, 그리고 20개쯤은 거뜬히 넘을 만큼 각종 턴테이블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처음 인터뷰는 사진 촬영만으로 이뤄질 계획이었으나 시완 직원 분들의 도움으로 비디오 촬영이 가능케 됐다. 또다시 무엇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것일까? 성시완은 밤샘을 한 채 인터뷰에 응했다. 그러나 음악만큼이나 그의 시완에 대한 애정은 특별한 것이었다. 질문은 몇 개 채 안 되는데 인터뷰는 꼬박 두 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중간에 비디오 테입이 가득 차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가져야 했을 정도. 물론 그의 음악 인생이 1,2년에 걸친 것이 아니기에 그 두 시간의 인터뷰 후에도 뭔가 모자란 아쉬움을 느껴야만 했다. 빠르게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늦게는 1981년 MBC FM DJ로 활동하면서부터 그의 외길이 여기에 이르지 않았는가. 하룻밤을 꼬박 새워도 역시 모자랄 것은 마찬가지다.
시완 레코드와 그의 음악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은 내내 감탄사의 연발이었다. 그 모든 음악적 연륜이 전설처럼 들렸던 것. 그런데 놀라움은 인터뷰 이후에 다시 한번 찾아 왔다. 오랜 방랑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처럼 평온했던 그는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순식간에 어린 아이로 돌아가버렸던 것. 방금 전 명상에 잠긴 듯한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는 이곳저곳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기웃거리는 아이처럼 자신의 사무실 곳곳을 분주히 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녁 끼니를 채우기 위해 나선 길, 20미터 앞 횡단보도에 파란 불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그의 호령에 일제히 우리는 파란 신호등을 틈타 길을 건너기 시작했는데, 슬쩍 비보호 도로를 건너는 우리 저편에서 그는 횡단보도 앞까지 열심히 뛰어가는 것이었다. "경찰에게 걸릴지도 몰라!"하면서 말이다. 그제서야 시완의 한 직원이 그를 두고 "저렇게 어린 아이 같은 분은 처음"이라고 말한 의미를 깨닫게 됐다.
그것이 시완을 12년간 지켜온 원천이자 비밀이다. 아무리 음악에 대한 애정이 넘친들 세상을 향한 욕심이 과하면 지금의 시완과 같은 레이블은 존재할 수 없으리라. 음악에 대한, 그리고 인생을 바라보는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가 바로 욕심을 버리게 한 가장 중요한 힘이었을 것이다. 그 순수는 곧 그의 '열정'과 다름 아니다. 1년에 절반 이상을 좋은 음악 혹은 앨범을 찾기 위해 외국 각지를 떠돌며 소요하고 그것을 라이센스로 소개할 수 있는 열정. 앨범에 대한 깊은 애정 탓에 60종에 이르는 사전을 지니고 있는([동영상]) 열정은 쉽게 얻어질 수 없다. 초라한 질문에 10분에 이르는 긴 답변으로 응수할 수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인터뷰 한 시간째에 이르면서 밤샘을 한 탓에 그는 무척이나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의 세심한 이야기들이 이번 시완 레코드 특집의 모든 것을 대신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세심한 배려를 제대로 느끼려면 가능한 이 인터뷰야말로 텍스트가 아닌 동영상으로 직접 들어야 한다. 또한 익히 우리가 FM을 통해 들어왔던 낯익은 목소리를 듣는 기쁨도 함께 누릴 수 있다.
좋음 음악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야 한다
Q) 시완 레코드가 언제 설립 됐으며, 그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성시완) [동영상] 설립 연도는 1989년이고요. 그 때 제가 MBC에서 '성시완의 디스크쇼'를 할 때인데, 전문적으로 음반을 수입해서 파는, 일부 레코드상들이 음반들을 고가로 팔았어요. 가까운 일본에 그런 음반들이 좀 있었는데 그 음반들을 사다가 국내에 너무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음반을 판매해서 많은 이익을 남겼죠. 이익 남긴 것은 괜찮은데 그것을 사는 소비자들이 커다란 불이익을 당했던 것 같아요. 제가 1981년 초반에 이런 음악을 소개했는데, 유학 간 공백기에 이런 상점들이 생겼지요. 이익에만 급급해서 이익을 많이 남기며 파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뭔가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시완 레코드를 만들었는데... 맨 처음에는 제 이름으로 안 했어요. 피닉스(Phoenix)하고 드래곤(Dragon)의 합성어인 페라곤(Phoeragon)이란 단어를 만들었는데... (제가 단어 합성하는 것을 매우 좋아해요) 로고를 생각하다가... 그 때 당시
Q) 맨 처음 시완 레코드에서 발매하신 앨범은 무엇입니까?
성시완) [동영상] 맨 처음 발매한 것은 '시완 레코드 뮤지엄(museum)'이라고 압구정동에 대형샵이 있었는데... 일본 회사 에디슨(Edison)하고 같이 만든 줄리앙 제이 사바린(Julian Jay Savarin)의 [Waitors On The Dance]이 1호입니다. 그 앨범은 한정 발매로 만들었어요. 저희가 천 장정도 발매했는데, 지금 아주 보기 힘든 음반 중 하나입니다. [Waitors On The Dance]를 1990년 초경에 아마 발매한 것으로 기억해요. 그 다음이 '프랑스 뮤지아(France Musea)'와 함께 발매한 뿔샤(Pulsar)의 [Halloween]인데, 그 때 당시 그게 해적판이 나왔어요, 한국에서. 그래서 약간 연기됐었고. 진짜 시완 레코드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라떼 에 미엘레(Latte E Miele)의 [Passio Secundum Mattheum]. 그 앨범은 저희의 베스트 셀러입니다. 그 다음이 라떼 에 미엘레의 [Papillon], 어쓰 앤 파이어(Earth & Fire)의 [Song Of The Marching Children], 네 번째가 이비스(Ibis)(의 [Ibis]), 다섯 번째가 마우로 펠로시(Mauro Pelosi)의 [Al Mercato Degli Uomini Piccoli]. 그리고 너무 많아서... 초창기는 이탈리아 음반이 판매가 참 좋았어요. 그 동안 구하기도 힘들었고요. 어제 한 친구하고 차를 같이 타고 가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까 얘기했던 우리 나라 일부 레코드 상인들이 폭리를 취할 때, 그 때 당시 (그 친구가) 고가로 많이 산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 회사에서 음반이 나오기 시작하자마자 이 친구는 음반 모으는 것을 포기했대요. "왜 그랬냐?"고 했더니 자기가 그렇게 힘들게 고가의 대가를 지불하고 음반을 사왔는데 이런 음반들이 보물처럼 쏟아지니깐 마음이 좀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런 사람들도 있고 반면에는 쉽게 편하게 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죠. 서로 장단점이 있어요. 어렵게 구한 음반이 더 귀하게 느껴지고 더 정을 쏟는 반면에 음반이 흔해지면 좀 정이 덜 가는 사람들 있는 것 같아요. 좀 아쉽더군요. 우리 음반 시리즈가 계속 나오니깐 상대적으로 음반의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일단 좋은 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많이 공유할 수 있는 것, 그런 취지에서 우리 회사가 설립되지 않았나 싶어요
Q) 시완 레코드의 설립 취지를 말씀 하셨는데,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는 하나 시완 레코드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시완) [동영상]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아이덴터티(identity).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지금까지 해온 작업들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폴리시(policy, 정책)라고 생각해요. 양질의 음악을, 많이 음반이 판매되지 않더라도 발매하는 거죠. 사실 회사는 경영이 잘 돼야 회사가 잘 이끌어지는데 우리 회사는 경영보다는 원래의 폴리시, 양질의 음악을 소량이라도 발매해서 보급한다는 것에 너무 치중했던 것 같아요. 이 회사가 12년 됐는데, 글쎄요... 좋은 날도 있었고 참 어려운 날도 있었는데 요 몇 년간은 좀 어려운 것 같아요.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러나 워낙 어려웠기 때문에 지금 어려운데 어려운 줄 몰라요.
Q) 그렇다 하더라도 시완 레코드를 운영하시면서 남다른 보람을 많이 느끼실 것 같다.
성시완) [동영상] 제가 음반을 수집하러 자주 외국을 나가는데 우리 나라 음반, 특히 우리 회사 음반이 없을 줄 알고 갔던 곳에 딱 놓여 있을 때 굉장히 기쁘더라구요. 그리고 다른 음반과 비교해 가격을 매기는 밸류(value)가 다른 나라 음반에 비해서 두서너 배 높을 때 기쁘고요. 예를 들어, 아주 조그만 나라 우크라이나나 슬로베니아나, 또 저 북구 아이슬란드나, 이런 나라 레코드샵에서 한국의 시완 레코드 음반을 발견했을 때, 그것도 엄청난 가격으로 Value가 매겨져 있을 때 기쁘더라구요. 독일의 큰 레코드샵인데 거기 가보면 우리 회사 섹션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직접 수출한 것은 아니고 네덜란드나 다른 나라를 통해 받은 것 같은데, 그 많은 타이틀이 전시된다는 것이 기쁘고요. 그 반면에 우리 레코드샵에 가서 시완 레코드 음반을 찾으면 없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최초의 아트 록 매거진 'Underground Papyrus' 혹은 'Art Rock Magazine'
Q) 지금도 '아트 록 매거진(Art Rock Magazine)'을 발간하고 계시지만 이미 예전에도 '언더그라운드 파피루스(Underground Papyrus)'라는 음악 매거진을 발간하신 적이 있으신데,
성시완) [동영상] 언더그라운드 파피루스는 원래 잡지는 아니고 하나의 팜플렛 형식이예요. 80년대 초반에 이쪽 음반을 소개하다 보니 만들게 됐죠. 그 프로그램(MBC '성시완의 음악이 흐르는 밤에')이 우리 나라 최초로 프로그레시브 록이나 아트 록, 이쪽 음반을 소개하다 보니 사람들이 언어도 생소해 하고... 엽서나 편지를 받아 보면 스펠링 뿐만 아니라 발음(저한테도 발음 문제가 있었겠지만)도 거의 맞는 것이 없었어요. 예를 들어 독일 그룹 발렌스타인(Wallenstein) 같은 경우는 '발렌타인(Valentine)'이라 많이 그랬고. 그런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청취자들에게 올바른 인포메이션(information)을 전달하자,는 생각이었죠. 워드프로세서도 없었고 컴퓨터도 보급이 안 된 상태에서 타자기로 4호까지 만들었는데 청취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어요. 그래서 그 분들에게 사진도 좀 전달할 겸 마스터 인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킹 크림슨(King Crimson) 특집인가, 그 때부터 옵션인쇄에 들어갔고.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역사를 담은 포스터도 직접 그려 만들었고. 정식으로 책자처럼 된 것이 8호인데 두꺼운 책자를 흑백으로 만들었죠. 그 때부터 더 많은 청취자들이 모이게 되더라고요. 그 책을 처음에는 우편 발송했는데 그 다음에는 장소를 정하고 배포했어요. 8호 같은 경우 영등포의 모 백화점 있는 어딘가에서 나눠준 것 같은데... 그 때 당시 중공기 하나가 한국에 넘어와 사이렌이 울리고 라디오에서는 긴급방송이 나오고 그랬는데. 저 그거 나눠주려 갔다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9호는, 제가 '음악이 흐르는 밤에'를
Q) '아트 록 매거진'의 경우는 어떻게 만드시게 되셨는지
성시완) [동영상] 89년에 '성시완의 디스크쇼'를 하면서 '언더그라운드 파피루스'를 부활시켰어요. 제가 방송했던 것 중 그게 가장 짧았던 것인데 90년에 그만 두고, 96년도에 SBS FM에 PD로 들어가면서 97년인가, 98년인가... 다시 언더그라운드 파피루스 부활시켰죠. 그러니깐 세 번 부활된 거죠. 그 중간중간에도 제가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이건 무료 배포지여였거든요. 사실 잡지 성격도 아니고 팜플렛 성격이에요. 그래서 잡지를 한번 만들어보자 생각했어요. 이 쪽 음악 좋아하는 친구들과 모여서, 92년에 - 물론 그 준비는 3년이 걸렸습니다. 3년 동안 군복무하면서도 틈틈이 준비했죠. 군복무가 없었으면 '아트 록'도 창간이 안 됐을 것 같아요.
Q) 라떼 에 미엘레의 비디오는 어떤 내용을 담으셨는지요?
성시완) [동영상] 'Il Calvario'와 'Il Dono Della Vita'까지 넣었는데. 그 곡들이 예수의 최후 장면을 한 거잖아요. 어떤 영상 클립을 약간 변형시켜 만든 것인데, 거기에 라떼 에 미엘레의 [Passio Secundum Mattheum] 11번, 12번 트랙을 넣었어요. 아주 유명한 감독 것인데 그 영화가 잘 볼 수 없었던 영화예요. 나온 지도 얼마 안 됐었고. 그 클립을 변형시켜서 (한 거죠.) 그래서는 안 되지만 보여드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Papillon] 같은 경우도 제가 여러 가지 클립을 모아 넣고, 로고도 직접 다 만들었고. 세 번째 앨범([Aquile E Scoiattoli])의 'Pavane'인가, 그 곡은 싱글 사진들을 다 찍어 그것을 변형시켜 만들었어요. 그 때 그 두 시간짜리 다큐멘터리가 반응이 너무 좋아 카피해 달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작년에 이탈리아 친구가 저희 사무실에 와서 우연히 그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가져가겠다고 해서 아주 실랑이를 벌였죠. 다섯 개가 남아 있는데 그 중 보이는 것이 한 개고 네 개는 도난 당한 것 같아요.
Q) 시완 레코드가 라이센스 앨범을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성시완) [동영상] 우리 나라 시장이 굉장히 작기 때문에 우리 나라 시장만 보고는 음반을 찍을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시완 레코드 초창기에 라떼 에 미엘레 같은 경우에도 만 장을 판매했는데 그 정도면 충분히 이 회사를 이끌어 갈 수 있죠. 그런데 최근 우리 나라 음반 시장이 특히 이 쪽 분야에 있어서는 오백 장이 맥시멈(maximum)이에요. 저희가 음반을 선정할 때는 우리 나라에 일본 관광객이 와서 시완 레코드 음반을 사서 돌아갈 때 여행 경비가 다 빠지게 하는... 그런 취지는 아니지만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편이예요. 특히 음악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저희 매장에 와서 음반 몇 장 사면 그것으로 여행 경비가 빠진다고 그러더군요. 국내 인지도보다 외국에서 지명도가 더 높으니깐 외국 음악 매니아를 타켓으로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메일을 통해서 오더(order)가 들어오는 경우도 많고. 예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가서 음반을 사가지고 여기서 판매했던 사람들도 많은데 역으로 외국 사람들이 와서 음반을 사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Spirogyra와 Devil Doll, 그 뜻밖의 선물
Q) 최근에는 스파이로자이라(Spirogyra)의 미발표 앨범을 발표하시고, 데블 돌(Devil Doll)이 팬클럽을 위해 500매 한정판으로 발매한 앨범 중 250장을 가져오셨다. 이러한 단적인 예를 보더라도 시완 레코드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은데요. 한편 그것은 엄청난 마당발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도 같은데요.
성시완) [동영상] 모든 인간 관계가 그런 것 같아요, 살면서 한 사람 알게 되면 다른 사람 알게 되고. 재미있는 것은 데블 돌의 리더 미스터 닥터(Mr. Doctor)는 저하고 의형제까지 맺은 사이죠. 저는 그 사람의 본명이나 언제 태어났는지 다 알고 생김새부터 그 사람의 음악 취향, 그리고 그 사람의 철학까지 다 알고 있는데..... 베네치아에 살고 있는 이 친구의 집을 여섯, 일곱번 방문했어요. 음반이 많아서도 아니고 그 사람 음악때문만도 아니에요. 관광하려는 더욱 아니고. 가서 밤 새면서 얘기하고 느낀 것은 나와 살아온 (음악적) 환경도 비슷하고. 그런 얘길 하면서 굉장히 (사이가) 두터워졌어요. 삶도 굉장히 자유롭고. 90년대 초 의형제를 맺게 됐는데, "우리는 서로 다른 부모로부터 태어났지만 음악적인 것이나 철학적인 것이나 너무 비슷하니 우리는 브라더(brother)다" 그랬죠. 제가 의형제를 맺은 사람이 딱 두 사람이에요. 한 친구는 제가 군대에서 만났던 한 친구인데... 앞으로 그리스 사람하고 또 의형제를 맺어볼까 (생각 중이예요.) 데블 돌 음반을 우리 회사가 가장 많이 판매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쪽에서도 굉장히 놀라워 하고. 우리가 리미티드 에디션(limited edition)을 처음 수입한 것은 아니에요. 예전에 [Eliogabalus]라는 두 번째 앨범이 있는데 그 LP를 이 친구가 750장 한정 판매로 발매했어요. 제가 그 때 의형제를 맺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가 750장 다 갖고 있겠다" 해서, 제가 다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만 그것이 판매됐는데 일본 사람들도 저한테 사가지고 갔습니다. 이번에 500매 한정은 그래도 팬들을 위해 만든 것인데 그 사람들한테도 가야하잖아요. 그래서 그 반을 받게 됐습니다.
Q) 스파이로자이라의 미발표 앨범은 어떻게 라이센스로 발매하실 수 있으셨나요?
성시완) [동영상] 스파이로자이라 같은 경우 라이센스로 추진한 것은 굉장히 오래 됐습니다. 준비 작업은 1990년부터 했는데... 모 음반 수입상이 먼저 수입을 했죠. 그래서 그 단계에서는 계약을 안 하려고 했어요. 그 당시 만해도 외제 선호사상이 있어서 'made in Germeny'를 사려했지 'made in Korea'를 사려하지는 않았거든요. 그것을 염두에 두고 포기했었는데,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라이센스 추진을 다시 했죠. 영국을 그 일 때문에 갔습니다. B&C라는 레이블을 갖고 있는 큰 회사 사장을 만났는데...... 거기 가기 전에 이미 스파이로자이라 멤버들하고는 연락이 다 됐습니다. 특히 바바라 개스킨(Barbara Gaskin)하고 굉장히 친했고. 뮤지션들을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회사 사장이 저하고 계약하는 상황이 무척 껄끄러웠죠...... 뮤지션들의 도움으로 계약을 빨리 했고. 또 저희가 굉장히 많이 판매했어요. 스파이로자이라 같은 경우는 처음 세 타이틀의 권리를 갖고 있었는데 판매 실적이 굉장히 좋으니 뮤지션들도 굉장히 만족했고. 바바라 개스킨은 계속 우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주 봤고요. 그것이 미발표곡들을 발굴하는 데에 자극제가 된 것 같아요. 제가 만날 때마다 많이 물어봤거든요. "너희 혹시 필름 중에 남아 있는 것이 있냐"했더니 BBC 방송에 두 번 출연했대요. 저희가 BBC에 요청해서 클립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고... "그러면 음원은 있지 않냐" 했더니 자기 생각으로는 없대요. 그 후에 찾다 보니 나타난 거죠. 저는 미발표곡에 대한 인식이 원래 아주 부정적입니다. 상태도 안 좋고 기존의 곡보다 안 좋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복원해 디지털로 리마스터링한 마스터테입이 왔을 때 너무 만족했습니다. 원래는 전세계 권리를 갖기로 돼 있었는데, 바바라 개스킨이 데이브 스튜어트(Dave Stewart)하고 음반을 내고 있어요. 그 음반을 배급하는 회사가 유럽은 자기네 회사에 달라고 했대요. 우리한테 다 줘버리면 데이브 스튜어트하고 낸 듀오 앨범 판매에 영향이 있고... 양해해 달라 하여 우리가 아시아, 미국, 캐나다 쪽 권리를 갖게 됐어요. 이제 경쟁이 되는 거 아니예요? 유럽 회사에서도 [Burn The Bridges]라는 앨범을 발매할 것이고... 경쟁 심리가 일더니 우리는 더 잘 만들어야 하지 않냐 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바바라 개스킨도 우리에게 좋은 혜택을 줬죠. 마스터 테입이나 커버 디자인에 쓸 필름도 먼저 줬고... 일본에서 요즘 유행하는 페이퍼 슬리브(paper sleeve)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가 그 기술이 무척 뒤져 있습니다. 큰 인쇄소에도 없어 작은 인쇄소에 부탁해 고가로 커버를 제작했고 거기에 스티커, 책자도 무척 신경을 써서 만들었죠...... 서너 번 작업해서 결과물이 나왔고, 최종적으로 보내줬는데 그 쪽에서도 대만족이었죠. 심지어 유럽에서 우리 음반을 찾지 그 쪽에서 나온 음반은 안 찾는답니다. 거기에 거래되는 음반도 두배 정도 차이가 나고. 미국에도 우리 음반하고 유럽 음반이 함께 가 있는데 우리 음반만 찾는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때 보람을 많이 느꼈어요. 스파이로자이라에게서는 보람을 느낀 경우가 많아요.
일을 추진할 때는 일단 발을 넣어버린다
Q) 데블 돌이나 스파이로자이라는 물론 그 외에도 너무 많겠지만 그렇게 발매한 앨범들, 혹은 아티스트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무엇인지요?
성시완) [동영상] 다 애착이 가요. 장기간 시간을 소요한 작품이 많아요. 예를 들자면 트라임비리트(Triumvirat)의 [A La Carte]도 한 4년간 기다리다가 마스터 테입이 안 와서 하는 수 없이 LP를 복각하게 됐고...... 결국에 마스터가 분실된 것으로 판명 돼 할 수 없이 좋은 음반 여섯, 일곱 장 중에서 제일 좋은 부분만 발췌해 아날로그로 리마스터링했는데. 특히 팬클럽 회장정도 되니깐 그 음반을 보고 드디어 시완에서 해적판이 나왔다고 이메일 보내고 자기네 홈페이지에 올리고 해서 제가 하루 만에 수습했습니다. 또 오래 기다렸던 것들 중에 터키 여성계가 있는데. 저희가 월드 뮤직 쪽으로 음악 방향을 설정했어요. 그리스나 터키나 그 외 제 3세계권의 음반이 많이 나올 거예요. 제가 조만간 그리스하고 터키를 그 작업때문에 갈 생각인데, 물론 다큐멘터리 작업을 위해서도 갑니다만...... 다 애착이 가요. 제일 재미 있었던 사건은, 초창기 라떼 에 미엘레(Latte E Miele) 음반이 너무 판매가 잘 됐죠. 라떼 에밀레 데뷔 LP 만장을 찍어서 거의 한달 안에 다 판매했어요. 이탈리아 산레모에 갔을 때 라떼 에밀레 멤버를 만났는데 멤버들이 너무 흥분했죠. 라떼 에 미엘레 [Passio Secundum Mattheum]가 1972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발매됐는데 그 때 천오백 장을 팔았다고 합니다. 거의 20년 후에 한국에서 발매 됐는데 만 장을 팔았으니 얼마나 경이적인 일이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재결성해 한국에서 공연을 하고 싶다 했죠. 그 때 당시 라이너 노트를 영문으로 번역해 넣었는데 그걸 보고 더 감동했다고 했죠. 우리도 그들을 초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라떼 에 미엘레, 훠르물라 뜨레(Formula 3)가 그랬었고, 몇몇 팀들이 재결성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작업에 들어갔었는데...... 그 때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공연도 대중음악계통은 받아 주지 않겠다고 하여 슬며시 그 꿈이 사라졌죠. 어떻게 보면 운이 없었다는 생각도 들고... 저는 일을 추진할 때 일단 발을 넣어버립니다. 나중에 못 빼게. 좀 즉흥적인 면도 있는데. 만약 그런 사건만 없었다면 라떼 에 미엘레나 뽀르 물라떼 재결성 공연이 한국에서 있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이 남아요. 그리고 또 너무 할 얘기가 많은데, 앨범 하나하나마다 다 에피소드가 있어요.
Q) 음반 수집가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성시완) [동영상] 자기가 만약에 태국 음악을 좋아한다면 태국 사람을 알아야 해요. 서로 교류를 하게 되면 굉장한 발전이 있어요...... 아트 록이나 프로그레시브 록은 그 나라의 전통적인 색채에 록이 퓨전된 것이기 때문에 각 나라마다 특색이 있어요. 만약 내가 이스라엘 친구를 알게 됐다. 그러면 이스라엘 친구가 다른 나라 친구를 소개해주고... 서로 소개해주다 보면 친구도 늘어나고 인포메이션(information)도 늘어나고 음반도 늘어나고 그런 거죠. 우리 회사가 음반을 많이 발매하면서 우리 나라 매니아들에게 굉장히 도움을 준 부분이 있어요. 그것은 어떤 사람도 부정을 못할 것입니다. 유럽에서 우리 음반을 찾으니깐 우리 음반을 한국 매니아들이 여러 장 사다가 그것을 트레이드(trade)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사실은 외국 음반을 그냥 사려고 하면 우송료도 들고 가격도 비싸고 해서 지출이 많은데 우리 음반을 보내주면 거의 돈이 안 드니깐 그런 방법으로 음반을 많이 모아온 친구들이 많습니다.
한국 최초의 프로그레시브 록
Q) 개인적으로 조윤의 데뷔작이 처음 시완 레코드와 인연을 맺은 앨범이기도 한데, 그 외 신인을 발굴하고 또 동서남북이나 시나위,
성시완) [동영상] 외국 음반을 300 타이틀 정도 냈을 때일 거예요. 외국 친구들이 한국에는 이런 음악이 없냐? 굉장히 부끄럽더군요. 하드 록이나 사이키델릭도 아닌데 그 근처까지 갔던 몇몇 음반들을 보내주고 하다 보니. 우리 자체 내에서도 뭔가 발굴해내야 하지 않을까. 그 마음은 사실 그 이전부터 있었어요. 90년대 초반 우리 회사 출범하면서부터... 계속 외국 음반만 수입하니깐 우리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뭔가 허전하고... 그래서 찾다가 조윤(輪)(본명:
Q) 처음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요?
성시완) [동영상] 그건 잘 기억이 안 나요. 옛날에 전축 옆에 서 있거나 춤추는 사진을 보면 어릴 때부터 음악은 계속 들은 것 같은데... 누나들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특히 큰누님이 음악을 좋아해서. 음반을 사러 다니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고. 몇 년 전에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갔더니... 옛날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 때 크롬, 세미크롬 테입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고 하더라고요. 전 몰랐던 사실입니다만. 그 때 음반도 많이 모았지만 기계쪽으로 관심이 많았죠. 본격적으로 유럽 음악을 알게 된 것은... 그 때 당시 유럽 음악하면 샹송, 깐초네 정도였는데... 그 때 제가 펜팔을 했어요.... 스웨덴 소녀하고 특히 친해졌는데... 그 친구가 먼저 제게 준 충격이 뭐냐면 "너네 나라 축구팀이 있냐" 그러더라고요. 전 우리 나라가 축구를 굉장히 잘하는 줄 알았어요... 두 번째 충격은 뭐냐면, 그 친구가 마누스 어글라(Magnus Uggla)라는 스웨덴 뮤지션 것을 보내왔는데 그것 듣고 너무 충격이었어요. 전 록/팝 문화가 영국이나 미국 정도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전 아프리카 음악을 참 좋아했어요. 그런 걸 보내 주면 그 친구는 스웨덴 뮤지션들 보내주고. 그 때 알았어요, 유러피언 록이 존재한다는 것을. 중학교 때부터 교류하면서 그 쪽 음반을 많이 모으기 시작했죠.
나의 천직은 DJ였다.
Q) 중고등학교 때는 무슨 음악을 들었는가 물으려 했었는데, 무척 어릴 때부터 이미 이쪽 음악을 듣기 시작하셨다니. 하긴 이미 대학 시절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셨으니...
성시완) [동영상] 예, 대학교 1학년 때죠. 제가 방송에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7년일 거예요. 고등학교 땐데 모 프로그램에 나의 애장 디스크란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서 제가 갖고 있는 음반을 소개했죠... 제가 대학교를 방송반 때문에 갔어요. 성대를 들어갔는데, 이탈리아 음악이 좋아서 외대 이탈리어학과나 연대 천문기상학과를 가려 했는데. 결정적으로 제게 자극을 줬던 것은 원서 내러 갔는데 성균관대 방송 SUBS가 스피커로 나오더라구요. '아, 내가 가야할 데는 저기야!' ......시험을 봤는데 1차에 붙었어요. 2차 면접 후 결과가 나왔는데... 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의 (학생을 합격 시키더라고요). 사회의 첫 비리를 보고 굉장히 화가 나 있었어요... 종로의 선비촌이라는 술집에서 그렇게 술을 많이 먹어본 것도 처음이에요..... (그 때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가 별로 크게 생각 안 했는데, 집에 와보니깐 스튜디오와 음반 이런 것들을 보고 '얘가 그냥 취미가 아니구나' 하고 느낀 것 같아요...... (그 후에) 그 친구가 어제 라디오 들으니깐 MBC에서 전국 대학생 DJ 콘테스트를 한다더라, 한번 응모해보지 않겠냐 해서... '이번이 복수할 기회다.' 360여 명이 1차 응모했고 60명이 1차 합격자였는데, 거기에 나와 우리 학교 방송국 학생들이 4,5명 정도 있었어요...... 최종 경연대회에서 제가 대상을 받았는데. 그 DJ 경연대회가 왜 시작 된 이유가, 통행금지가 해제 돼서 (방송 시간)이 한 시간 더 늘어난 거예요. 새벽 1시이 생기는 거죠. 그것도 우리 나라 최초의 새벽 1시대 방송이었죠. 그 프로그램을 주겠다 해서 한 거예요.
"두 곡이면 어떻습니까? 설명이 죽이지 않습니까?"
Q) 당시 그 첫 라디오 프로그램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성시완) [동영상]
좋은 음악엔 좋은 환경이 뒤따라야 한다
Q) '이것이 좋은 음악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남다른 음악관을 지니고 계실 듯한데
성시완) [동영상] 일단 '감동'을 주면 돼요. (그 때마다 주어진) 환경에 적절한 음악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내가 짜증 나고 불쾌한 상황에서 아무리 좋은 음악을 들어도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환경이란 게 무척 중요하고. 이 쪽 음악이 환경에 굉장히 의지를 많이 해요. 재즈, 클래식도 마찬가지지만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해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안 되면 아무리 좋은 음악도 해가 될 수 있죠. 때, 장소, 분위기 그리고 음악이 매치가 돼야 정말 좋은 음악을 좋은 음악으로 들을 수가 있는 것이지...... 요즘은 음악을 잘 안 들어요. 하루에 한 곡도 안 들을 때가 많아요. 그러나 한번 '발동'이 걸리면 밤새도록 듣게 되죠.
Q) 이미 말씀해 주셨지만, 먼저 길을 개척해 나가신 선배의 입장으로 매니아들에게 보다 친절한 조언을 해주신다면,
성시완) [동영상] 음반을 많이 갖고 있는 게 중요하지 않고 단 백장을 갖고 있더라도 자꾸 손이 가고 듣게 되면 그 음반이 더 빛나는 것 같아요. 음반이 수백만 장 되는데 그 중에서 들을 것이 없다면 그것만큼 불행이 없잖아요...... 음반이 조금 있을 때는 그 음반을 다 기억하잖아요. 1번부터 100번까지 다 외울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음반에 어떤 곡들이 담겼는지, 그 곡에 어떤 부분이 좋다는 것을 알 텐데. 자식이 하나였을 때보다 많을 때 쏟는 정성이 덜 할 것 같아요. 적을 때가 가장 행복하지 않았나 싶어요. 제 자신도 앞가림 못하면서 조언이라니... 그냥 즐기면서 사는 거죠, 뭐. 많은 사람이 저를 부러워하고 뭔가 이뤘다고 얘기하는데, 저는 그걸 이루기 위해서 빼앗긴 것도, 포기한 것도 많아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거죠.
영감이 떠오를 때, 그 때를 주저하지 않는다
Q) 시완 레코드, 음악지 발간, DJ, 음악 평론가, 그리고 대학 강단에 서기까지... 그 많은 일들을 모두 소화해낼 수 있는 '정열'의 원천은 과연 무엇인가요?
성시완) [동영상] 열정을 살리기 위해서 불규칙하게 지내요. 제 생활이 굉장히 불규칙해요.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자기만 하고 어떤 날은 안 자고... 정열이라는 것은 규칙적으로 오는 게 아니거든요. 정열이 떨어졌을 때는 (단지 일에) 매달리는 거죠.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면 이런 정열은 안 왔을 것 같아요. 정열은 밤에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불규칙적인 생활을 해야만 정열이 나온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어떤 때는 막 영감이 떠오르고 뭔가 빠지고 싶고 그러잖아요. 그 때를 저는 주저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 충동을 보통 모범적인 사람들은 억제하는데 저는 억제하려 하지 않아요. 그냥 실행에 옮기는 스타일이에요. 실행에 옮기면서 정열의 가속이 붙는 것 같아요...
Q) 개인적으로나 레코드사에서나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지요?
성시완) [동영상] 제 천직은 레코드 회사 사장이 아니에요. 전 천직이 디스크 쟈키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아까도 환경 얘길 했지만 환경이 안 따라주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제가 아무리 열심히 하고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을 위해서 3일, 일주일, 한달 동안 준비한 것도 있는데. 물론 일부 청취자들은 제 노력에 대해서 칭찬을 해주지만 대부분 같이 일하는 실무자들이나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왜 쓸데없이 열심히 하냐"는 반응을 받았을 때 굉장히 힘들었어요. 천직이라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니깐 방황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주위에서 자꾸 방송 언제 복귀하냐고 말하는데 예전에는 "언젠가 다시 하겠죠" 했지만 지금은 계획이 없어요. 환경을 만드는 데 앞으로 시간을 투자할 거예요. 웹캐스팅이 너무 많고 난립 된 상황이고 또 다 힘든데... 올해 말부터 준비해서 내년 정도에 우리 사이트의 한 부분이나 독자적으로 조그만, 정말 손가락 만한 방송이 생길 것 같아요...... 저는 웹캐스팅이라도 혼자 방송하고 (제 관점에서) 좋은 음악 선별해서 소개하고 싶어요. 이 세상에는 좋은 음악이 너무 많은데... 너무 답답해요. 기존 채널에 있는 방송 매체에서는 항상 되풀이하는 음악만 나가고... 제가 가진 자료를 이제는 공유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들고... 이제는 중고등학생이 조그만 방송국을 가져도 될 때인데 나도 조그만 웹캐스팅을 가져서 동아리를 형성하는 거죠......
Q) 어리석은 질문이 될 것으로 짐작되지만 튜브 뮤직 음악 애호가들을 위해서 추천음반을 소개해 주신다면
성시완) [동영상] ... 저는 추천을 못해요. 추천이란 것은 그 사람의 취향을 알아야 추천할 수 있는 거거든요. 튜브 뮤직의 모든 분들의 취향을 다 알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건 상당히 무리한 질문이에요. 저는 추천해 달라 하면 먼저 어떤 음악을 좋아하시냐고 물어 봐요. 그러면 추천할 수가 있는데 무작정 추천해달라면... (그렇다면 죽기 전에 이 앨범은 꼭 들어봐야 한다, 이런 질문도 물론 어리석은 것이겠죠?) 예, 무모한 질문입니다.
삶은 즉흥적인 것. 정열 역시 아낄 것이 없는 것
Q)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치시면서 한 말씀 더 해주신다면
성시완) [동영상]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면 최대의 행복인 것 같고요. 그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더 힘든 고난의 시간들이 많이 찾아 오는 것 같아요. 사람이 행복을 지키는 것이 가장 힘든 것 같아요. 둘째는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정열을 다 써야 한다는 것. 뭔가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이 있다는 것. 반대로 해석하면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는 거죠. 인생은 살면 살수록 힘들다는 것하고. 십대에 느끼는 인생의 비중은 와 닿지 않잖아요. 이,삼,사십대 되면서 사는 게 점점 더 힘든 것 같아요. 고통 그 자체인 것 같아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복합적'으로 힘든 것 같아요. 우리보다 앞서 살고 가신 분들이 다 대단해 보이는 것 있죠. 삶이 즉흥적인 거니까... 오늘 얘기한 것은 오늘 순간의 얘기지, 내일 인터뷰에서는 삶이란 것은 살면 살수록 재미난 것 같아요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오늘 분위기로서는 그래요. 오늘 순간의 인터뷰일 뿐입니다.
첫댓글 덕분에 정말 잘봤습니다..수고많으셨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잘 봤습니다. 새로운것을 배워가는 기분이에요. *^^*
아아아.. 진짜 대박..
거의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게시물에 이렇게 몰입해서 만족감을 느껴보는게 얼마만인지..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음흐밤 관련 인터뷰 부분만 보고싶은데.. 나중에 시간이 나시면 다시 인코딩해서 올려주세요 ㅎ
요즘 자주 못 들어와서 게시물들을 좀 뒤늦게 읽는 편입니다. 이 게시물도 몇일전에 읽으려고 했다가 오늘에서야 읽었는데 정말 재밌네요.
복사해두고 싶은데 복사가 안 되네요. ㅠ.ㅠ
하여간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