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My Life 19
진정한 수컷은 네비를 달지 않는다
신성욱(37회
51세)) 과학저널리스트,
작가
그날도 허둥지둥 택시를 타고 말았다. 미리미리 서두르면 좋을 텐데 시간에 쫓겨 허둥대는 버릇은 나이 50을
넘어 중년이 되어도 나아지질 않는다.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그날 따라 길은 또
얼마나 막히는지.
“혹시 지름길은 없을까요? 10시까지는 도착해야 하는데.” 다급해진 나는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하고 있었다.
흰 머리가 히끗히끗한 노년의 기사님은 슬쩍 시계를 한번
보더니 “20분 정도 남았네요.” 하고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씽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핸들을 돌려 큰 길을 벗어났고 주택가 사이를
요리조리 달리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난 핸드폰의 지도앱을 켜고 목적지와의 거리와 도착 예정시간을
연신 확인했다. 그렇게 달리기를 10분 남짓 마술처럼 목적지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게 아닌가. 도착 예정시간은 무려 5분이나
여유가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기사님
덕분에 5분이나 시간이 남네요?” 고마워서 한마디 했다.
조금 여유가 생기니까 차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사님의 신상이 적힌 카드도 보였는데 70이 가까운 연세였다. ‘운전을 오래 하셔서 샛길도 잘 아시는구나’하면서 찬찬히 살펴보는데
네비게이션이 없는 게 아닌가. 보통은 귀찮을 정도로 띨룽띨룽 조잘조잘 안내음이 요란한데 어쩐지 조용하다
싶었다.
“근데 이 차에는 네비게이션이 없네요?” 궁금해서 여쭸다.
기사님은 역시 한번 씽긋 웃으면서 “진정한 수컷은 네비를 달지 않지요. 하하하.”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기사님은 40년 가까이 운전한 이야기, 네비게이션이
처음 나왔을 때 신기했던 경험, 그런데 서울처럼 복잡한 도로 환경에서는 기계보다 자신의 경험이 더 좋은
경우가 많더라는 이야기, 뻔한 길을 두고 안내 한답시고 조잘조잘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네비게이션을 아예
꺼놓은 지 오래됐다는 이야기 등등을 들려 주셨다. 노련한 기사님 덕분에 여유 있게 강연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강연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그분의 한 마디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진정한 수컷은
네비를 달지 않는다” 뇌가 가장 똑똑해지는 나이는 40대
후반~ 50대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나는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침에 만난 노년의 기사님이 던진 위트 넘치는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길을
찾아가는 능력은 동물들에게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길을 찾아갈 때 뇌에서는 매우 복잡한 작용이 일어난다. 뇌과학에서는 이를 공간지각력 이라고 부른다. ‘어디에서 와서 지금은
어디쯤에 있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이 단순해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뇌는 인지, 판단, 결정, 기억의
되새김, 운동 명령 등 다양한 메카니즘을 활용한다. 공간지각력의
발달과 관련된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다.
영국 런던의 택시기사들의 뇌를 조사한 연구다. 런던은 서울처럼 쭉쭉 뻗은 대로보다는 꼬불꼬불한 좁은 도로가 많은 도시다. 연구팀은 20년 이상 택시를 운전한 기사들의 뇌를 조사했는데 공간지각과 관련된 대뇌 피질의 어떤 영역이 일반인보다 훨씬
더 두텁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비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매일같이 다니다 보니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발달한
공간지각력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젊은 기사들만 그랬을까? 아니다. 20년 이상 운전 경력을 가진 중년 이상의 기사들에게서 이런 현상은 더 확연하게 드러났다.
중년이 지나도 뇌가 계속 발달하는 이유는 뇌의 가소성(Brain Plasticity)으로 설명할 수 있다. 뇌는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뤄져 있는데 이 신경세포들이 자극을 통해 서로 연결돼 회로, 네트워크, 모듈을 형성하는 것을 뇌발달(Brain Development)이라고 부른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뇌의 발달은 어린 시절에 완성되지 않는다. 뇌가 가장 똑똑해지는 나이는 40대 후반에서 50대이다. 살아가면서
획득하는 자극과 경험이 ‘4가지의 R’이라는 흥미로운 현상을
통해 우리 뇌를 지속적으로 리모델링한다. ‘4가지의 R’은
Reconnection, Rewiring, Regeneration, Reweighting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말이다. 한번 연결된 신경세포들은 죽을 때까지 고정되는 게 아니라 다시 연결되고 다시 배선되고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강화 혹은 약화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90년대 이후 매우 급격한 진전을 이룬 현대 뇌과학은 우리의 상식을 뒤흔드는 새로운 사실을 속속 알려
주고 있는데 중년의 뇌에 관한 새로운 가설들은 매혹적이다. 미국의 항공관제사들의 뇌를 조사한 연구도
이를 입증한다. 2, 30대의 젊은 관제사들보다 20년 이상
경력을 가진 50대 이상 중년의 관제사들이 종합적인 통제력에서 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진정한 수컷은 네비를 달지 않습니다.” 택시 기사님이 농담삼아
건넨 한마디는 뇌 과학의 최신 성과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오랜 경험이 빚어낸 지혜로운 명언이다.
중년의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고정관념에 머물기보다 늘 새로운 것에 마음을 기울이세요”, “오래
앉아 있기 보다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세요” 인생에서 가장 똑똑한 중년들에게 전해주는 과학자들의 권고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평범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