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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신체적 능력향상과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사닥다리의 경험
사색(思索:구속의 경륜에 따르는 진리와 사랑)의 주제들을 다양하게 하라.— 오직 한 가지 방면의 사색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자칫 두뇌의 균형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지력과 체력을 동등하게 쓰고, 사색의 주제들을 다양하게 한다면, 모든 신체의 기능이 안전하게 발휘될 것이다.[교육,209] 쇠약하게 만드는 행습은 피해야 함.— 신체적 및 정신적 능력을 약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만드신 창조주를 위해, 봉사하기에 부적당하게 만든다.[대쟁투,473] 학문연구가 등한시되어서는 안 됨.—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와 특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자기수양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참된 교육은 대학에서 줄 수 있는, 교육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학문을 연구하는 일도 등한히 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과 산 연결을 맺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고상한 교육을 얻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성경을 그들의 교과서로 삼고, 크신 교사와 교통하도록 하라. 신령한 진리를 탐구할 때에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하도록 마음을 교육하고 훈련시켜라.[실물,334] 불결한 공기는 정신력에 영향을 미침.—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병으로, 끊임없이 불평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들이 항상 그런 이유는, 현명(賢明:진리에 명확)하게 일하지 않거나, 건강의 법칙을 준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실내[방안]에 머물러 있으며, 불결한 공기로 가득 찬 더운 방에 앉아 있다. 거기서 그들은 열심히 연구나 저술에 전념하며, 육체적 운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자세의 변화도 거의 없다. 그 결과로 피는 느리게 흐르며[순환장애], 정상적인 능력들은 연약해진다.[증언4,264] 정신력을 보존하는 법.— 모든 습관에서 단순성을 유지하고 식욕을 제한하며, 정욕을 통제할 사람은 자신의 정신적 능력들을 강하고, 활동적이며, 원기왕성하고, 생각이나 행동을 요구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데, 빠르고 거룩한 것과 불결한 것을 구별하는 데, 예민(銳敏:진리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민첩)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일에, 종사할 태세[자세]가 되도록 보존시킬 수 있어야 한다.(2BC,1006).
가장 높은 능률성에 도달하도록 훈련을 받음.— 애정과 아울러 신체적 능력과 정신적 능력 모두를 훈련시켜, 최고의 능률성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CH,224) 전류(電流:한 방향으로 흐르는 전기와 같이, 신경의 흐름으로 순간 깨우침의 성령역사)는 활력에 영향을 미침.— 활동하지 않는 신체는 지력뿐만 아니라, 도덕적 능력까지도 저하된다. 신체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뇌신경은, 하늘이 사람과 교통하고 내적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매개체이다. 신경조직 내의 전류가 순환을 방해[죄악성]받아, 활력을 약화시키고 지적 감수성을 감소시킨다면, 도덕적 본성을 일깨우는 일은 훨씬 더 어렵게 된다.[교육,209]
자주적 사고와 도덕적 분별력—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고 자주적 사고를 좌절시키는 교육은, 사람들이 식별하지 못하는 도덕적 문제를 일으킨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주적인 사고의 능력을 계발하지 못할 때, 학생들은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 없게 되어, 쉽사리 악[죄악]의 속임수[미혹, 유혹 거짓교리]에 속아 넘어간다. 그런 사람에게 전통과 관습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일은 아주 쉽다.[교육,230] 천연 계에 대한연구로 능력이 강화됨— 천연계로부터 직접적으로 얻는 이런 교훈들 가운데는, 그것들을 매우가치 있게 만드는 단순성과 순결성이 있다. 모든 사람은 이 원천에서 비롯되는 교훈을 받아야 한다.
천연계의 아름다움 그 자체는, 우리의 심령을 죄와 세속적 매력을 떠나, 순결과 화평과 하나님 쪽으로 가도록 인도한다. 연구자들의 마음은 사람들의 이론과 가설과 거짓됨이 일컫는, 과학과 철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천연 계와 밀접히 접촉할 필요가 있다. 그들로 하여금 천연 계와 그리스도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라.(2MCP 446.4) 그들에게 천연 계와 영적사물들 사이에 있는, 조화를 보도록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다. 그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들이, 품성형성에 필요한 공과(工課:학업과 진리의 연구하는 과정에 결과)가 되도록 하라. 그렇게 함으로 정신력이 강해지고, 품성은 계발되어 생애전체가 고상하게 될 것이다.[실물,24]
성경말씀 연구로 마음에 능력을 얻음— 동료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지식을 갈망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함으로, 그들의 지력은 열심히 활동하도록 각성(覺醒:깨달아 정신을 차리게)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기능들은 확장되고 계발될 것이며, 지력은 능력과 능률성을 얻게 될 것이다.[실물,334]
회심은 마음에서 무지의 어둠을 제거함—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묵시, 예언]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들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말씀들이다. 이 진리들을 자신의 생애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새 피조물[완전 재창조함]이 된다.
그에게 새 정신적 능력들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무지(無智:모름의 자세)와 죄를 통해서 이해력을 흐리게 해 왔던 어둠이 제거된다. “새 심령을 너희에게 주되”라는 말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를 뜻한다. 마음의 변화에는 항상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명확한 자각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동반(同伴:같은 마음과 생각이 하나)된다. 성경에 대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면밀(綿密:자세하고 빈틈없는 연구에 철저)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이킴으로써 마치 더 높은 차원의 지성(至誠:지극정성)에, 도달한 것처럼 명민(明敏:밝고 영민)한 이해력과, 건전한 판단력을 얻을 것이다.(2MCP 447.2)
죄책감은 생명력을 해침— 슬픔, 걱정, 불만, 후회, 죄책감, 불신, 이 모든 것은 생명력을 파괴시키고 쇠퇴와 사망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치료봉사,241]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법— 죄책감을 ‘갈바리’의 십자가 밑에 내려놓아야 한다. 이런 죄책감으로 인해, 생명과 참된 행복의 샘에는 독이 퍼졌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것을 내게 내려놓아라. 내가 네 죄를 질 것이다. 내가 네게 평화를 주리라. 더 이상 네 자존감을 해치지 말라. 이는 내가 너를 내 피 값을 주고 샀기 때문이다. 너는 내 것이라. 약해진 네 의지를 내가 강하게 하리라. 네 죄책(罪責:죄지은 책임)을 내가 제거[용서,속죄]해 주리라”고 하신다.(2MCP 451.2)
그러므로 불확실성으로 떠는 그대의 마음을 돌려, 그대 앞에 놓여 진 희망을 굳게 붙잡아라.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상(傷:처절하게 피폐해진 불행한 형편의 모습)하고, 통회(痛悔:애통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받아 주신다. 그분은, 그대에게 값없는 용서를 제공하신다.
그분은 그대를 가족의 일원으로 입양하시고, 그분의 은혜로 그대가 연약함을 도우시겠다고 제의하신다. 만일 그대가 그분의 손을 붙잡고, 그분께서 이끄시고 인도하시도록 허락[승락하고 순종]한다면 사랑의 예수님께서는, 그대를 한 걸음, 한 걸음씩 계속적으로 인도하여 영원히 구원하실 것이다.(2MCP 451.3)
예수님은 용서를 말씀하심—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전능하신 조력자로부터 떠나게 만들고, 우리 영혼의 타락상을 깊이 생각하게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예수께서 과거의 죄악을 보셨어도, 그분의 용서를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의심함으로써, 그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2MCP 451.4) 그분의 사랑은 우리를 죄책감에서 해방시킴— 그리스도께서 온 몸을 통하여 나누어 주시는 것은, 은혜의 사랑으로써 일종의 생명력이며 뇌, 심장, 신경 등과 같은 모든 중요한 부분을 치료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신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최고의 능력들이 일깨움을 받아 활동에 들어간다.
이것은 생명력을 파멸시키는 죄책감과 슬픔, 근심과 걱정에서 심령을 해방시켜 준다. 그것과 아울러 평온과 안정(安靜:평안과 안식)이 온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없는 기쁨, 곧 성령 안에 있는 기쁨, 건강을 주고 생명을 주는 기쁨을 심령 속에 심어 준다.[치료봉사,115] 가장 흉악한 죄인에게는 가장 위대한 구주가 필요함— 만일 그대 자신이 가장 흉악한 죄인이라고 느낀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대가 필요로 하는 분, 즉 가장 위대한 구주이시다.
머리를 들고 그대 자신과 그대의 죄에서, [이스라엘시대의 광야에서 들린 놋 뱀과 같이 들리신 구주를 향해]시선(視線:눈길 가는 곳과 상처의 고통과 관심)을 돌이켜 높이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들리신 구주를 쳐다보라. 독사(毒蛇:뱀의 죽을 독)에게 물린 곳을 보지 말고,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속죄제물의 희생양]을 쳐다보라.(2MCP 452.2)
그분께서 안식을 주실 것임— 주님께서 우리의 죄 짐을 지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피곤한 어깨에서, 짐을 벗겨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것이다. 근심과 슬픔의 짐 역시 그분께서 지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근심을 그분께 맡기라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그분의 가슴속에 품고 다니시기 때문이다.[치료봉사,71] 모든 죄는 등급이 같지 않음—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동일하게 보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처럼 어떤 죄들은, 다른 죄보다 더 악하다고 생각하신다. 어떤 잘못은 우리에게 작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어떤 죄도 작지 않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물을 [죄의]실상(實狀:실제상태의 모습) 그대로 보신다.
사람들은 술주정뱅이를 싫어하고, 그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만과 이기심과 남의 물건을 탐하는 것 등에 관해서는, 흔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하나님께 거슬리는 죄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에, 너무나 배치(背馳:반대되고 어긋 지게)되기 때문이다. 이타적[경천애인(敬天愛人:하나님숭경, 인간사랑) ‘아가페’적]인 사랑은 하늘의 본질의 일부이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은,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만은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오셔서 주시고자 한 많은 축복들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기 때문이다.[정로계단,30]
죄지은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접근이 필요함— 탄핵(彈劾:죄상을 밝혀 처벌)과 비난으로 개선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혹받은 영혼에게 죄책을 지적해 준다고, 그가 더 잘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릇 행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에게 그분께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예수님을 가르쳐주라. 그에게는 하나님께 가납될만한 것이 조금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가납될 수 있도록, 그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해주라.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라. 그 사람 앞에 가능성을 재고(再考:다시 생각할 수 있게)해 주라.
그에게 그가 달성할 수 있는 높이를 가리켜 주라. 그가 주님의 자비를 붙잡고, 그분의 용서하시는 능력을 의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 예수님은 그를 꼭 껴안으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시며, 그에게 고상하고 덕행 있는 삶을 살 능력을 주기위해 기다리고 계신다.(2MCP 453.1)
사단은 죄책감을 깊이 느끼게 함— 이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백성이 법정에서, 공판 받는 죄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큰 환난 가운데 있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하늘의 축복을 구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고 있을 때에,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고 있었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참소(讒訴:중상모략으로 고발)하고 그들의 죄악상을 할 수 있는 대로 과장해서, 그들이 구원받을 가망(可望:가능성 있는 소망)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호와 앞에 그들의 악행과 결점을 낱낱이 고발한다.
그는 그들의 허물과 실패를 일일이 열거해서, 그들에게 도움이 몹시 필요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도와줄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죄상이, 흉악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여호수아’는 누추한 옷을 입은 정죄 받은 죄인으로 서 있다. 그의 백성의 죄를 잘 아는 ‘여호수아’는 낙담하고 있다. 사단은 죄에 대한 가책을 절실히 느끼도록 그의 심령을 짓눌러서, 그를 거의 절망에 빠뜨리고 있다. 그럴지라도 ‘여호수아’는 자기를 대적하는 사단이 있는 곳에 간구자로 서 있다.[실물,166,7]
하나님의 약속들을 주장하는 데 실패함— 그 후 나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많은 사람들이, 내가 겪은 것과 유사한 경험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들의 양심은 죄책감에 짓눌렸고 그들의 떨리는 믿음은, 약속된 하나님의 용서를 감히 주장하지 못했다.
지옥에 대한 정통적 [가톨릭과 일반 기독교회들의 거짓교리]설명이 그들의 피를 혈관 속에서 굳어지게 만들고, 그 인상[영상]이 그들의 기억의 판(板)에 생생하게 새겨질 때까지, 그들은 그 이야기를 들었다.[그리고 단단한 철석같이 믿고 신앙(?)하였다.]
[적그리스도의 가톨릭과 그의 딸들인, 개신교들의 세뇌신앙으로, 창조주의 은혜와 사랑과 순종의 속죄함 보다는, 죄인에 대한 무서운 영원한 지옥(?)심판만을 주장하여, 사단의 미혹과 사상을 주입한 결과로 항상 죄의식에 살도록 하였고, 질병의 고통과 고난은 일반적인 생애의 현상이 아니고, 죄 값으로 받는 하나님의 천벌이라 생각하여, 완전히 절망에 빠져버린다. 특히 십자가로 모든 죄 사함을 받았으므로, 무조건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면서도, 양심은 더욱 괴로워 죄책감에 빠져버리고, 급기야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적마귀의 완전한 포로가 되어, 영멸의 심판만을 기다리는 무서운 상태에서, 아직도 성경의 율법을 순종하면 구원되심의 진리말씀보다, 교단과 목자의 말만을 믿는 왜곡된 신앙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나 깨나 무시무시한 장면이, 언제나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실은 상상 속에서 파묻혀 버리고, 그들은 다만 황당무계(荒唐無稽:허황되며 터무니없고, 적그리스도 교리로 못 믿게)한 지옥(地獄:영원히 불타는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불꽃을 보고, 멸망하는 자들의 부르짖음만을 항상 들었다. 이성(理性)은 물러나고 뇌는 무서운 꿈에서 비롯된, 터무니없는 환상으로 가득 채워졌다. 영원한 지옥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그처럼 잔인한 신조(信條:믿음의 거짓교리)에 대한 그들의 권위를,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1증언,25,6]
위기를 통해 자주능력의 원천되시는 분을 주목하게 됨—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약점을 보여 주시고, 능력의 원천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위기[고난시련의 인고]를 허락하신다. 그들이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깨어 있는 용감하게 싸운다면, 그들의 약점은 강점이 될 것이다. ‘야곱’의 경험에는 많은 귀중한 교훈이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승리를 그 자력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과, 위로부터 능력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2MCP 454.2)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라—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자기 형 에서에게 속한 축복을 빼앗을 후, 집을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홀로, 그의 가족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생각이 다른 모든 것보다, 그를 더욱 괴롭혔다. 그는 자기의 죄가 그를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게 하고, 하늘에서 버림받게 하지 않았을까 두려워하였다.(2MCP 454.3) ‘야곱’은 슬픔을 안고 맨땅에 누워서 자게 되었다. 그의 주변에는 쓸쓸한 언덕들만이 있었다. 하늘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별들이 박혀 있었다. 그가 자는 동안 그는 꿈속에서, 주위에 밝은 빛이 비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누워 있는 곳에서 하늘 문까지 도달한 것처럼 보이는, 한 사다리가 나타났다. 천사들이 그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야곱’은 영광의 빛이 있는 높은 곳에서, 위로와 소망의 기별을 전해 주는 한 음성을 들었다.(2MCP 455.1) 그 방랑자는 그것이 그의 진정한 소원을, 응답해 주는 하늘의 기별임을 깨달았다. 그는 그의 구주를 보았다. ‘야곱’은 죄인 된 그가 다시 하나님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기뻐하고 감사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난 사다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예수님을 나타낸다.[정로계단,19,20]
죄책감은 많은 질병의 토대(土臺:중요한 밑바닥의 기초)임— 중풍병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과 육체를 모두 고치시는 능력을 발견하였다. 육체적 치료가 영적치료를 뒤따랐다. 이 교훈은 간과[중요치 않음으로]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무수한 자들이 있는바, 그들은 이 중풍병자와 같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5:20)는 기별을 듣기를 갈망하고 있다. 죄의 불안과 채워지지 않은 욕망과 아울러, 죄의 짐이 그들 질병의 기초이다. 그들은 심령의 치료자 앞에, 나오기 전에는 위안을 찾을 수 없다.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화평이 심령에 활력을 주고, 육체에 건강을 줄 것이다.[소망,27]
무지[몰랐다는 이유]로 인해 죄책[범죄행위 책임]이 제거[용서]되지 않았음— 범죄 한 인류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그분을 고문[고통당하게]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가 알았다면, 그들은 후회와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로 인해 그들의 죄책은 제거되지 않았으며, 이는 예수님을 그들의 구주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의 특권이기 때문이었다.[소망,744] 변명으로 죄를 감소시키려고 하지 말라— 우리는 변명으로 우리의 죄를, 감소시키고자 노력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은 실로 무섭다. 오직 ‘갈바리’만이 죄의 무서운 흉악성을 나타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를 담당해야 한다면, 죄가 우리를 짓눌러 버릴 것이다.
그러나 죄 없는 분께서, 우리와 입장을 바꾸셨다. 그렇게 하실 아무런 책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지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산상보훈,116] 자신을 낮춘 영혼들은 죄책을 인정함— 자신의 허물을 인정함으로 심령을 하나님 앞에 낮추지 못한 자들은, 가납 받을 첫 번째 조건도 아직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만일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경험 하지 않고, 진정한 영혼의 겸비와 심령의 통회로써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우리의 죄악을 미워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진정으로 죄의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코 구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평안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죄의 사함을 받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즐겨 낮추지 않고, 진리의 말씀의 조건에 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2MCP 456.1) 이 문제에 관하여 명백한 교훈이 주어져 있다. 죄의 고백은, 공적이건 사적이건,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거리낌 없이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은 죄인에게 강요되어서는 안 되고 죄의 가증한 성격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강요되어서도 안 된다. 눈물과 슬픔이 섞인 고백, 심령의 깊은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고백은, 무한한 자비의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발견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시34:18)라고 말한다.[5증언,636,7] 죄는 버리는 일이 필수적임— 그대가 죄를 짓는 일을 계속한다면, 자신을 정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죄 짓는 일을 그치라. 은혜가 그대와 함께 거할 수 있도록, 죄가 그 증오스러운 모습 그대로, 즉 죄로서 항상 보일 수 있도록 모든 준비가 마련되었다. 만일 “죄를 범해도”(요일2:1) 그 사람은 낙망 가운데서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이 그리스도께 잃어버린 사람이 된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2MCP 456.3)
하나님은 그분께 오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그들의 개인의 구주로 삼지 않는 모든 자들을 공의롭게 정죄하신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분께 나오는 모든 영혼을 용서하시며, 하나님의 사업을 행하도록 능력을 주시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충분하고도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얻어,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모든 준비를 갖춰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의의 태양의 밝은 빛을 받아, 모든 영혼이 진리의 빛을 가질 수 있도록 계획해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독생자를 선물로 주시는, 무한한 대가를 치르시면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준비하셨다. 사도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라고 질문하셨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편에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들 편에 잘못이 있기 때문이며, 우리들이 신령한 대리자들과 협력하는 일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와 조화되지 않았다.[가려,375].
모두를 위한 희망— 아무도 스스로 자포자기(自暴自棄:낙망하여 자신을 포기)하여 낙심하고 실망할 필요가 없다. 사단이 “너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어. 너는 회복될 가망이 전혀 없어.”라는 잔인한 암시(暗示:넌지시 일러바치고 기만하기)를 가지고 그에게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에게는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힘으로, 승리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심령과 육체를 아무리 억누르고 있을지라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기다리고 계신다.[치료봉사,249]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땅 위에 사다리를 굳건히 세우셨다.
그 사다리는 제일 높은 하늘에까지 미치어 천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기별을 받아 가지고 사람들에게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한 사람들의 탄원과 찬양을 가지고 하나님께 올라가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이 그 꼭대기에서 비취어 나오며 흡족히 빛내고 있었다. ‘야곱’의 묵시 가운데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의 결합이 나타났다. 천사들이 사다리에 오르락내리락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의 공로로 인하여 애정을 가지고, 인간의 자녀들을 바라보시고 계심이 나타났다.... (TMK 21.4)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경우를 그보다 더 잘 이해하셨다.
그는 밤중에 꿈 가운데 한 사다리를 보게 되었는데, 그 바닥은 땅에 견고히 서 있고 꼭대기는, 높은 하늘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서 신비한 사다리를 따라, 그분의 영광을 펼치고 계셨다. 그리고 천사들은 그 사다리를 오르내리면서, 하나님의 아들 위에 있었다. 이제 우리는 ‘야곱’이 그 아버지의 집에서 매우 실망하여 나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길을 따라 빛을 비추시고, 용기를 주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창28:12-17]을 읽어 보라.(2SAT 58.3)
그리스도께서 심연에 다리를 놓으심— ‘야곱’은 속임수를 써서 장자권[쌍둥이 동생이 ‘에서’형의 권리탈취 함]을 얻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실망으로 끝났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곧 하나님과 그의 연합, 그의 집, 게다가 이제는 절망에 찬 도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그분은 희망 잃은 ‘야곱’의 상태를 보셨다. 그의 절망을 보셨다. 그분이 ‘야곱’의 이 같은 상태를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 그 신비한 사다리를 보여 주셨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연합을, 온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하늘의 하나님은 그를 보시고 죄가 만들어 놓은 심연(深淵:깊은 멸망의 못) 위에다, 그리스도께서 사다리를 놓게 하신다.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지만 내가 어떻게 그곳에 이를 수가 있는가? 길이 없구나.”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다리의 계시를 보여 주신 것이다. 인간은 그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다. 그 사다리의 밑은 땅이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다.(1BC 10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