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7일
본문 : 막2:1-12
제목 : 예수님의 가족. 교회
교회의 주인이시고 머리 되시며 우리 안의 왕의 자리에 앉아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증거자라는 존재만으로 영광스럽습니다.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가장 흔한 오해는 교회와 예배당을 혼돈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은 말 그대로 건물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으며 성령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피조물 중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사람들을 가리켜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를 준비하시고 만드셨으며, 교회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은 삼위일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존재도, 세상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우주의 광활함도, 영적인 신비도 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교회를 소개하는 가장 보편적인 신학적 방법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여 교회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부 하나님입니다. 성부는 말 그대로 ‘아버지’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를 중심으로 교회는 하나의 가족이 됩니다. 그래서 당연히 교인들은 서로 형제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를 보고 배우며 거룩함으로 교육과 양육을 받는 자녀들은 아버지 하나님을 진지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다음으로 성자 하나님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참된 신부입니다. 성도 하나하나가 주님의 신부인 동시에 믿음의 공동체도 그분의 신부가 됩니다. 신부가 지아비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신부로서 순결과 정결을 유지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신랑이신 주님의 영광과 존귀에 참여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성령의 전’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집으로 삼고 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전이므로 그분의 거룩하심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거룩을 닮아가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짜 교회라면 우리의 주인께서 우리로 거룩한 길을 걷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분을 통합한 이미지로 교회를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곧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의 지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속의 장기나 DNA를 스스로 어찌할 수 없듯이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건강한 믿음 생활은 곧 예배의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질문들과 그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우리에게 ‘하나님이 진짜 있으면 그분을 보여달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닌 여러분의 부모나 형제자매나 가장 친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관계가 난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따분할 정도로 많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된 존재입니다. 이 귀한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곧 주님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정말 중요한 내용입니다.
교회는 존재의 이유를 확실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즉 경건의 모양이 아닌 경건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릴 적 가끔 듣던 말 중에 ‘아들을 보니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 얼굴을 쏙 빼닮았다는 말은 듣기 좋은 소리임에 분명합니다. 내가 아버지, 어머니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증명에는 부끄러운 것과 행복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성경적으로 하면 우리는 어둠 속의 빛이 됩니다. 죽음만이 있는 부패한 곳에서는 소금의 사역을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손과 발을 만지고 싶으면 교회를 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교회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녀들로서 그분의 뜻에 순종할 때 행복할 의무와 권리가 주어지며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또한 디모데전서 3장 15절은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하는데 이것 역시 교회를 가리키는 대표적 믿음의 표현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정초(定礎)하며 그분의 진리만을 수호하고 전하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면 교회는 군대입니다. ‘하나님의 군대’, 제가 대단히 좋아하는 표현인데요, 공중의 권세 잡은 악의 세력들과 싸우기 위해 부름 받은 백성들입니다. 우리 군의 대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끊임없이 영적 전쟁을 치르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신실하고 강력한 믿음의 군대, 이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참 좋습니다.
성경의 한 사건을 보며 우리가 찾고 나아가야 할 교회의 모습과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찾아온 4명의 친구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3개의 복음서에 기록될 만큼 중요한 말씀이며 교회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초,중반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이유는 마땅히 갖춰야 할 교회의 모습이라는 영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중에서 마가복음 2장 1~12절 말씀으로 저와 성도님들이 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늘 한곳에 있지 아니하시고 부지런히 돌아다니시며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사탄 권세를 무너뜨리셨습니다. 본문에서도 가버나움 한 집에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는데 믿음의 사람들 네 명이 아픈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주님께 왔습니다. 그 네 사람도 아픈 곳이 있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네 친구는 걷고 들 수 있는 힘이 있고, 아픈 친구는 걸을 수조차 없는 중풍에 걸린 환자라는 것입니다. 소망 없이 중풍병에 걸려 가장 비참하고 초라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짐이 되는 또 다른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슬픈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참 고맙고 귀한 4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언제부터인가 유일한 희망이 되어버린 한 분이 계셨는데, 마침 그분이 그들이 사는 지역에, 그것도 그들이 아는 집에 와 계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급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그들은 서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병 때문에 오늘내일하는 소망 없는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기고 결단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인생은 타이밍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정말 시간이 없어. 예수님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면 어떡해,’ 급한 마음에 들것을 만들어 중풍에 걸린 아픈 친구를 메고 네 친구가 각각 포지션을 잡고 합을 맞춰 힘을 씁니다. 누구 하나 빠르거나 늦으면 발란스가 맞지 않아서 모두 넘어지거나 병상에 누워있는 친구가 추락하여 더 크게 다칠 수 있습니다. 아마 먼 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마음 급한 사람이 빨리 가자고 재촉하면 다른 사람은 급하게 가는 것보다 안전하게 가는 게 중요하다며 서로 의논했을것입니다. 한참 가다가 어깨도 아프고 팔도 아프면 서로 자리를 바꾸어 들고 갔을 것입니다. 누워서 하늘만 쳐다보며 자기 때문에 땀을 흘리며 고생하는 친구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눈물만 흘리는 아픈 친구는 이내 애쓴 보람이 없진 않을까 염려 반 기대 반으로 목이 메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날 진짜 고쳐주실 수 있을까? 진짜 고침 받으면 어떡하지? 그런 기적이 내게도 올까?’ 복잡한 심정으로 견인되어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운명의 시간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했습니다. 서로 수고했다고 격려하는 기쁨도 잠시, 이미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저기로 어떻게 들어가지? 모두 우리처럼 마음의 소원을 품고 절박한 심정으로 왔을 텐데 저기를 어떻게 지나서 예수님께 가지?” 그때 다른 한 사람이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께 가야 돼. 오늘 반드시 가야 돼.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내고 끈을 매달아서라도 이 아픈 친구를 주님께 내려보내야 돼.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야.” 그러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단결하여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집 외벽의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믿음을 행함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신 예수님께서 네 명의 친구와 아픈 중풍병자를 귀하게 여기시고 축복하시며 병을 고쳐주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는 수많은 교회와 그곳들을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앙인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다른 사람 볼 것 없이 나부터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찾기를 원하십니까? 잠시 시간 내어 군중들 속에서 예배드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종교인의 모습은 아닙니까?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를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군중 가운데서 비판하고, 힐난하며, 고소할 목적으로 항상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을까요?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던 네 친구의 행동 하나하나가 예배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곧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며, 예배자로 세워주시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왕으로 계십니다. 네 명의 고마운 친구들이 우리 인생의 예수님이십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픈 환우가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 공동체 안에 우리의 기도와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계시면 주저 말고 함께 하십시오. 왜냐하면 진정 그분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 일을 하려고 태어났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일을 감당하라고 주께서 오늘 하루 더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왜 교회에 있습니까? 우리는 왜 우리 스스로를 교회라고 부릅니까? 우리가 사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힘든 사역이라 할지라도 하나하나 자처하여 기도와 헌신과 재정으로 사랑과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살게 하심을 감사하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인정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 귀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참으로 영광스럽고 행복합니다. 자 이제 우리 주님의 뜻에 조용히 귀기울이며 오늘도 주님과 함께 병자가 누워있는 병상의 손잡이를 잡아봅시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며, 우리의 삶은 행복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