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가장 추웠던 겨울
항공 후퇴로가 뚫리다
미 1해병사단 지휘관 스미스 소장의 절치부심이라는 지성(至誠)이 통했는지, 미 공군이 보낸 C-47은 무사히 하갈우리 활주로에 안전하게 내려앉을 수 있었다. 장진호의 가혹한 겨울 추위, 수적으로 압도적 우세를 보인 중공군의 공격에서 미 해병대가 비교적 순탄하게 후퇴할 수 있는 서광(曙光)이 잠시 비쳤다. 그러나 흥남으로 갈 길은 아직 멀고도 어둡기만 했다.
1950년 12월 강추위와 많은 적설(積雪) 속에서 압록강을 넘어온 중공군 대군(大軍)에 둘러싸여 사투(死鬪)를 거듭해야 했던 미 해병대는 사실 고래로부터 잔혹하게 벌어졌던 한반도 군대와 외적(外敵)의 싸움터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곳 또한 앞서 지나왔던 서부전선의 평안북도 운산, 안주 등과 함께 한반도의 군대가 밖으로부터 경계를 넘어섰던 외부의 적과 늘 싸우던 지역이었다. 해병대는 흥남으로 철수하기 위해 우선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해발 1200m 높이의 황초령은 험준한 부전령(赴戰嶺) 산맥의 남쪽 끝에 해당한다. 이곳을 넘어야 함흥과 흥남, 원산으로 내려올 수 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코스였던 셈이다.
항공 후퇴로가 뚫리다
미 1해병사단 지휘관 스미스 소장의 절치부심이라는 지성(至誠)이 통했는지, 미 공군이 보낸 C-47은 무사히 하갈우리 활주로에 안전하게 내려앉을 수 있었다. 장진호의 가혹한 겨울 추위, 수적으로 압도적 우세를 보인 중공군의 공격에서 미 해병대가 비교적 순탄하게 후퇴할 수 있는 서광(曙光)이 잠시 비쳤다. 그러나 흥남으로 갈 길은 아직 멀고도 어둡기만 했다.
1950년 12월 강추위와 많은 적설(積雪) 속에서 압록강을 넘어온 중공군 대군(大軍)에 둘러싸여 사투(死鬪)를 거듭해야 했던 미 해병대는 사실 고래로부터 잔혹하게 벌어졌던 한반도 군대와 외적(外敵)의 싸움터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곳 또한 앞서 지나왔던 서부전선의 평안북도 운산, 안주 등과 함께 한반도의 군대가 밖으로부터 경계를 넘어섰던 외부의 적과 늘 싸우던 지역이었다. 해병대는 흥남으로 철수하기 위해 우선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해발 1200m 높이의 황초령은 험준한 부전령(赴戰嶺) 산맥의 남쪽 끝에 해당한다. 이곳을 넘어야 함흥과 흥남, 원산으로 내려올 수 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코스였던 셈이다.
- 1950년 12월 후퇴길에 올라선 장진호 미 해병사단의 행렬.
미 1해병사단은 황초령을 넘기 위해 하갈우리를 떠나 남쪽의 고토리에 집결해야 했다. 그런 과정이 순탄했을 수 없었다. 압도적인 숫자로 다가섰던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이 일찌감치 하갈우리와 고토리를 잇는 전선 곳곳에 매복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 1해병사단의 후퇴 또한 사투가 줄곧 이어지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어려운 길을 택하다
그럼에도 하갈우리에 이어 유담리로 진출했던 미 1해병사단의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일찌감치 사단 본부가 있던 하갈우리에 서둘러 비행장 활주로를 닦았다. 동토(凍土)의 얼음장 같던 지표면을 닦아 채 이루지는 못했어도, 이 비행기 활주로는 미 해병대의 후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대형 수송기였던 C-47을 불러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형 수송기가 활주로를 통해 내려앉을 수 있다는 점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병력 모두를 안전하게 건질 수 있다는 얘기와 같았다. 특히 미 해병대는 4000여 명에 달하는 부상자를 옮기는 데 이 공중 수송로를 활용할 수 있었다.
미 해병대가 적을 두고 잠시 물러서서 가야 할 길은 아주 멀고 험난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전우애(戰友愛)에 충실한 미 해병대원들은 부상한 동료를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을 옮겨야 했던 해병대원들의 전투력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갈우리 비행장에 도착했던 C-47 수송기는 이런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또 남았다. 중공군이 곳곳에 매복함으로써 고단한 전투를 벌이며 흥남으로 후퇴하는 미 해병사단이 육로로 계속 험난한 길을 가야 하느냐, 아니면 수송기를 통해 보다 편안하게 후퇴하느냐를 선택하는 문제였다.
- 유담리에 진출했다가 하갈우리로 후퇴한 뒤 다시 철수길에 오른 미 1해병사단 7연대.
당시 미 해병사단을 따라 장진호 일대로 진출한 사람 중에는 외신 종군기자들이 많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미 해병사단의 고투(苦鬪)는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자세히 알려졌다. 잔혹한 추위의 사지(死地)에 몰렸고, 수를 헤아리기조차도 어려울 정도로 몰려든 낯선 중공군의 포위에 갇혔던 미 해병사단의 분투는 현지에 있던 종군기자들의 필설(筆舌)에 실려 서방세계에 전해졌다.
“후퇴가 아닌 새로운 공격”
항공편 철수를 거절했던 스미스 소장은 그런 말도 했다고 한다. “사단은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후방의 적을 격멸하고 함흥까지 진출하기 위해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에 나서는 것이다”는 내용이다. 하갈우리에 이어 고토리, 다시 황초령을 남쪽으로 넘기 위해 철수준비를 하던 해병사단 장병에게 내린 훈시였다. 하갈우리에 여러 노력을 기울여 닦은 비행기 활주로 덕분에 미 해병사단은 그동안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스스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던 동료를 비행기에 태웠다. 그로써 손이 가벼워진 미 해병사단의 나머지 장병은 12월 6일 새벽 집결명령 지역이었던 흥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마고원의 험준한 산악지대 곳곳을 누비며 남하했던 중공군 병력은 그러나 이미 미 해병사단의 철수로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20군(군단)이 철수로를 차단하면서 공격을 펼칠 준비에 들어갔고, 후방에 예비로 뒀던 26군이 미 해병대 철수병력의 후미(後尾)를 따라 공격을 벌일 계획이었다고 한다.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결연하게 후퇴에 나섰다. 그의 말대로 적의 공세에 밀려 그저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격의 개념으로 나선다는 자세였다. 그럼에도 중공군 공격은 집요해 미 해병사단의 철수로 곳곳을 막았다. 육군본부가 펴낸 전사(戰史)에 따르면 첫날 미 해병사단의 철수는 결코 순조롭지 못했다.
후퇴에 들어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공군 공세가 벌어졌고, 6일 밤 10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선두 부대가 하갈우리 남쪽 5㎞ 지점에 도착할 정도였다. 이어지는 협곡은 철수부대로서는 높은 경계심을 지녀야 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중공군은 그런 협곡 지형 곳곳에 매복해 공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선두부대가 겨우 고토리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뒤를 따랐던 후속 부대 또한 천신만고 끝에 고토리에 당도했다. 피난민 1000여 명과 함께였다. 그러나 해병사단은 100여 명의 전사자, 506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피를 말리는 후퇴작전이었다. 그럼에도 미 1해병사단은 또 하나 큰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후퇴가 성공하느냐, 좌절하느냐를 가르는 중요한 고비였다.
-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갔던 장진호의 강추위속에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다 숨진 미 해병사단 대원의 시신.
흥남으로 가는 길은 아직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해병사단 장병은 길에 나섰다. 중공군이 차지하고 있던 1081고지를 향해 공격을 벌였고, 마침내 거센 화력을 동원해 길을 뚫었다. 고지를 차지하고 있던 중공군은 해병대원의 공격에 밀려 고지에서 도망쳤다. 중공군에게도 황초령 일대의 강추위는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첫댓글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