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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그토록 따지고 드는가? | ||||||
[평신도 복음묵상-대림3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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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대림 제3주입니다. 이제 기다림이 얼마 안 남았다는 뜻입니다. 얼마 안 남은만큼 이 기다림의 의미를 제대로 성찰해보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지내고 있는 기다림의 기간이 그저 시간만 흘러 보내는 것으로 그 뜻을 다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무엇을 기다리는지, 왜 기다리는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대림 제3주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제 나름대로 이 기다림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저는 이 성서 구절을 묵상하면서 좀 다른 부분에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와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그들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일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당신은 누구요?...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그러면 그 예언자요?...당신은 누구요?...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누군가에게 질문을 할 때에는 크게 두 가지 의도에 따른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나는 정말 알고 싶어서 질문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굳이 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따지고 추궁하려는 의도인 경우입니다. 지금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와 질문하는 사람들은 분명 후자의 경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했던 질문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그들은 왜 그토록 따지고 드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두려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낸 사람들도 그렇고, 지금 직접 세례자 요한에게 질문하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기본적으로 세례자 요한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그토록 초조하고 절박하게 세례자 요한을 추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많은 민중들에게 불러일으키고 있는 반향이 자칫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을지 두려웠을 것입니다. 요즘 저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일 중에 하나가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반포하려는 일을 당시 관료 유학자들이 극구 반대합니다. 드라마에서는 실제 역사적 사실보다 좀 과장해서 더 극렬하고 조직적인 반대가 일어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쨌든 드라마의 이야기상으로 관료 유학자들이 한글 창제를 극렬 반대하는 근본 이유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미 무언가를 틀어쥐고 그것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항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닙니다. 다시 성서 묵상으로 돌아와서, 저는 이번 묵상에서 그들의 두려움 저변에는 빛이 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빛을 두려워하는 내면의 어두움을 본 것입니다. 정작 빛이 온 것도 아니고,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인데도 이렇게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빛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빛이 오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빛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내면의 어두움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아마도 그것은 빛을 따르는 삶, 진리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적 요구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빛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진정 그 빛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전까지의 삶, 이전까지 세상과 인간을 대하던 방식을 버리고, 마땅한 진리에 의한 전혀 다른 삶으로 완전히 거듭나는 일이 진정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기에 막상 그렇게 변화된 삶으로의 요구가 두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이 오는 것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솔직히 저는 좀 두렵습니다. 대림 제3주, 기다림의 끝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니 더 두렵고 초조합니다. 지금처럼 세상의 가치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삶에 편안해 하다가, 진정 빛을 받아들이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결코 녹록치 않기에 부담스럽고 두렵습니다. 그냥 나를 이대로 내버려두라고, 왜 굳이 오려고 하느냐고 빛을 찾아가 따지고 대들고 싶은 마음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누구이기에 내가 틀어쥐고 있는 현세적 안주의 기득권을 빼앗으려 하십니까?” 오지섭(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