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달도 금새 한 주를 보냅니다. 다음 한 주를 지나면 명절 연휴가 기다립니다. 그러니 이 한달을 어정쩡하다가 놓쳐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더위는 그냥 버티고 있는 듯하여 좀 짜증이 납니다. 그나마 아침저녁이 나아져서 다행입니다. 금년 더위 정말 끝내줍니다. 어디까지 가려는지, 행여 추석도 30도를 이고 가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아무튼 시간은 가고 있고 계절도 지나가고 올 것은 오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더뎌도 온다 이겁니다. 다만 앞을 깎아먹었으니 뒤가 얼마나 남으려나 걱정됩니다. 그냥 건너뛰고 겨울로 향할지 누가 압니까? 바쁘다고 그 좋은 가을을 단축시키다니! 안 됩니다. 되고 안 되고는 우리 사정이 아니기는 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때가 되면 달력 바꾸면 됩니다. ㅋㅋ
근간 비를 맞으며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슬비 보슬비 부슬비 가랑비 등등 참 우리는 계절마다 비가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봄비, 여름비, 가을비, 겨울비 등 그깟 비도 4계절이 확실하구나 싶습니다. 과연 우리나라 좋은 나라, 아마 있을 것 다 있는 나라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계절마다 잘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지요. 복 받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인생들이 복 받을 짓들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지요. 그래도 용케 버티며 살고 있습니다. 북에는 없으니까 쓰레기를 내려보낸다지만 우리는 많으니까 좋은 것 보내주면 어떨까요? 서로 가지려고 지들끼리 쌈나겠지요?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 통일의 길이 아닐까 싶은데 말입니다. ㅎㅎ
덥거나 말거나 주말은 즐거운 시간,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4년 9월 7일 김종우 목사 드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6 : 33)
<빅토리>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그럼 뭐 힘들어요? 칫!’
‘그래, 나는 힘들다.’
그렇습니다. 십대 때에 힘든 것이 있겠습니까? 뭐든 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때입니다. 까짓것 못할 게 뭐 있어, 하면 되는 거지. 그 때는 그렇게 여기고 살아갑니다. 안 되면 다 때려치고 다시 시작하면 되지, 뭐! 그런데 아빠의 세대는 다릅니다. 정말 힘듭니다.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든가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여기저기 굽신대기도 하고 자존심 팍 죽여가면서 해고당하지 않도록 애씁니다.
정작 폭력을 날린 학생은 따로 있었지만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더 이상 아빠가 나이도 어린 상사에게 무릎까지 끓고 사정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 하나 그만두면 끝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했어요. 뭐 어때서요?’ 쏘아붙이고 교무실을 뛰쳐나왔습니다. 당장 짐 싸들고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어쩌면 학교에 그냥 머물러봐야 희망이 없다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다지 인기도 없는 듯하고, 그러니 내 좋아하는 춤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길을 찾아가자 생각하였습니다. 내 자리 잡으면 너도 불러줄게, 친구에게 다짐하고 버스에 오릅니다. 과연 그 때가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에 부딪치기 전의 용기입니다.
사실 서울에 올라와 고시원 생활을 하며 친구 소개로 엔터테인먼트 회사 견습생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고 나니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디션도 치러가며 열심히 나름 노력합니다. 자기와 비슷한 또래들이 많습니다. 하기야 회사가 여기뿐이겠습니까? 그야말로 정글이지요. 그 많은 경쟁자들을 뚫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냥 춤이 좋아서 하는 것과 그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일단 좋아야 뛰어들 수 있습니다. 나아가 재능도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끊임없는 노력과 실력의 향상이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들의 화려한 모습 뒤에 서려있는 고충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경기에는 선수들의 실력 외에 작용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말, 공감합니다. 그래서 특히 응원이 중요하게 떠오릅니다. 팀의 소속 지역에서 경기를 하는 것과 타 지역으로 이동하여 하는 것에도 차이가 생깁니다. 그 분위기가 달라지고 응원 모습이 달라집니다. 그것은 자연히 선수들의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아무리 실력이 남달라도 그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달려있습니다. 말 그대로 신나게 경기하는 것과 마음이 움츠러져서 하는 것과는 나타나는 결과가 다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감독도 코치도 선수들의 감정선을 다독여주는 역할까지 하는 것입니다. 출중한 실력에 사기충천하여 있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저그런 팀이었습니다. 감독도 그런 태도로 경기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기고 지는 일에 크게 좌우되지 않습니다. 교장선생님도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극을 줍니다. 선수들의 실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도록 허락헤주십시오. 끈질긴 설득으로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얻습니다. 그리고 단원을 모집합니다. 서울에서 전학 온 치어리더 ‘세현’과 합작하여 치어리딩 동아리를 만들어 시작합니다. 단원 9명, 부족한 듯하지만 좋아하는 춤실력을 맘껏 발산하며 연습합니다. 고등학교에도 치어리더가 있다고?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들이었지만 볼수록 괜찮습니다. 실수도 실패도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자라는 것이지요.
리더 격인 ‘필선’이가 학교를 떠나고 나서는 해체됩니다.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했던 그 동아리에 대한 미련은 남아있습니다. 그렇지요. 자기들끼리 나누었던 연대감과 그 좋아는 춤으로 발산하는 열정, 어디에서도 누려보지 못하는 그들만의 끼의 향연입니다. 그들의 부모는 그곳에 있는 조선소에서 일하거나 조그만 자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종종 겪는 일상들이 이어지고 아픔도 슬픔도 나눕니다. 그런 속에서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 바로 연대감 아니겠습니까? 함께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삶의 활력소입니다. 서로 힘이 되어주고 아무리 어렵고 슬퍼도 이겨내고 전진할 수 있는 동기도 부여해줍니다. 그래서 더욱 그리워집니다.
여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는 아직 때가 아닌가보다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필선이 다시 결심하고 짐을 싸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교장선생님도 그 때 필선이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퇴학처분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그 고마움을 보답하고도 싶습니다. 동아리 동료들을 다시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가 한 마음으로 자리에 돌아옵니다. 다시 쌓았던 열정을 쏟아내며 연습합니다. 그 힘을 받았는지 학교 축구팀도 일취월장합니다. 부모들도 아이들의 그 열정에 힘입어 삶의 현장에서 용기를 냅니다. 좋은 분위기가 전파됩니다. 학교 전체가 축제가 되고 모두의 즐거움이 됩니다. 영화 ‘빅토리’(Victory)를 보았습니다. 그냥 신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를 아십니까?
우리 지난 시간에 말씀 들으면서 한 가지 생각할 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아무나 들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누가 들을 수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 말씀, 예수님 말씀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누가 듣는다고요? ‘귀 있는자’입니다. 예수님은 가끔 이 말씀을 하십니다. 자 여기서도 나옵니다. 마 11 : 13 - 15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누가 들으라고 합니까? 귀 있는 자입니다. 여기 귀 없는 사람 있습니까? 귀가 없이 태어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선천성 장애인이라면 모르되 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원하시는 귀가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그 귀는 어떤 귀인가? 이 귀를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8 :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무슨 귀요? ‘들을 귀’입니다. 아니 귀가 하는 역할이 듣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들을 귀’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듣지 못하는 귀도 있다는 뜻입니다. 다 귀를 가지고 있는데 누구는 듣고 누구는 듣지 못한다는 말씀이지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들을 수 없는 귀가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이해하고 누구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면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들어도 깨닫지 못할까요? 둘 중 하나입니다. 잘못 전했거나 잘못 들었거나, 그렇지요? 그런데 사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혹시 기도원 갔다가 이상한 말하는 것 들어본 적 있습니까? 그거 뭐라고 합니까? ‘방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태여 방언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일본어로 이야기한다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하기야 말할 사람도 없고 들을 사람도 없습니다. 언어가 다르면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요 3 :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여기 ‘위로부터 오시는 이’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땅에서 난 이가 아니고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뒤에 다시 ‘하늘로서 오시는 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하늘의 언어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 없다? 32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렇지요? 알아듣지를 못하니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 백성 유대인들이 율법 곧 하나님 말씀, 당시에는 구약을 가지고 신앙하였습니다. 그 약속의 끝부분에 가면 최종적으로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말 3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약속의 목자 곧 하나님이 보내주마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기 전에 길 예배 사자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가 누구냐? 말 4 :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누구를 보내신다고요? 선지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선지 엘리야는 언제 사람인가? 왕상 17장에 북이스라엘에 아주 악한 왕 아합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왕후가 더 악명 높지만 아무튼 성경에서 가장 악명 높은 왕입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가장 막강한 선지자를 세워서 역사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우리가 흔히 ‘능력의 선지자’라고 말하지요. 아무튼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보다 약 4 - 5백 년 앞서 있던 선지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보다는 8 - 9백 년 앞서 활동하던 선지자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이야기인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누구를 기다렸습니까? 알기는 알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오기 전에 선지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것을. 왜? 성경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성경을 워낙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말 그대로 거의 천 년 전의 사람인 엘리야가 다시 나타나는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이 다니면서 우리 예수님이 바로 기다렸던 메시야다, 라고 전도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이 이의를 제기했겠지요. 야, 이 무식한 놈들아, 너희 선생이라는 자가 메시야라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할 텐데 엘리야가 어디 있냐? 제자들이 그런가? 하고 말도 못하고 꿍꿍 앓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 묻습니다. 마 17 :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그야 성경에 그렇게 약속되어 있으니 그 말씀대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 엘리야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천년전의 엘리야가 부활해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가 신앙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르게 인식해야 합니다. 대부분 성도들이 자기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신앙합니다. 그저 예수나 믿는다고 하고 교회만 다니면 다 되는 줄 알고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제가 정말 간절히 바라고 애쓰고 있는 거 보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으로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저는 그 하나님의 자녀들을 맡아 양육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이렇게 키웠습니다, 자랑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성실히 잘 배워서 똑똑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냥 믿지 말고 알고 믿으십시오, 설교할 때마다 노래하고 있지요? 왜요?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무식하게 만들면 무슨 책망을 듣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가 자부하고 저도 하나님 앞에 당당해질 수 있도록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식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누구 앞에 서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맘껏 자랑하고 전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배웁시다.
유대인들이 엘리야를 기다렸습니다. 도대체 그 엘리야가 누구인지나 알고 기다렸을까요? 당시 엘리야를 본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천 년 전의 사람을 누가 봅니까? 그런데 무작정 기다립니다.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온다 해도 알아보겠습니까? 우리도 똑같습니다. 교회 잘 다닌다는 성도들은 주님 다시 오신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설령 오셔도 알아볼까요? 얼마나 무모하게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누가 가르쳐줍니까? 가르쳐야할 목자는 알고 있을까요? 미안하지만 자기도 모릅니다. 그러니 가르쳐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막연히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신앙하라고 말합니다. 다시 오면 어떻게 알아보고 영접하라는 이야기는 합니까, 못합니까? 못합니다. 자기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르칩니까? 그러니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된다고요?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이렇게 되지 맙시다.
예수님이 설명해주십니다. 누가 엘리야라고요. 마 11 : 13 - 14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누가 엘리야입니까? 예, 세례 요한이 엘리야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몸은 세례 요한인데 그 속의 영은 누구다? 엘리야다, 그 말입니다. 이해됩니까? 유대인들이 눈에 보는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고 꿈에나 생각하겠습니까? 절대로 모릅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천 년 전의 그 몸으로 오실까요?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까? 돌아가시기 전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면 알아보았겠지요. 그런데 그 몸이 아닙니다. 그래서 몰라본 것입니다. 지금은 어디 계십니까?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이 어디라고요? 저 하늘입니까? 우리 배운 대로 한다면 어디입니까? 영계입니다. 그러니 영으로 계십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실 때 영으로 오십니다. 영은 어디로 온다고요? 육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엘리야가 누구에게 왔다고요? 세례 요한에게 왔습니다. 세례 요한이 어떻게 태어났나 보겠습니다. 눅 1 : 13 - 17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세례 요한이 누구의 심령을 갖는다고 말씀합니까? 엘리야의 심령을 갖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갖고 있었지만 유대인들,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이런 일을 알겠습니까?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모르는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말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따라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우리 주님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생각해보았겠습니까? 그런 일 없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아버지가 자식들을 내려다보시며 얼마나 답답해하실까 생각을 해보겠습니까? 다 자기 잘났다고 열심히 떠들 줄이나 알지 들으려 할까요? 아무리 이야기해도 따라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비유하여 말씀합니다. 마 11 : 16 - 17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노래를 불러도 통곡을 해도 모릅니다. 그러니 따라할 수 없습니다. 기적과 이적을 행하면서 회개를 촉구해도 모릅니다. 차라리 이방인들에게 전했더라면 오히려 그들이 돌아왔으리라 탄식하십니다. 23 - 24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아버지 입장에서는 속이 뒤집힐 일이지요.
우리가 신자에게 전도하기가 쉽습니까, 불신자에게 전도하기가 쉽습니까? 말이 이상하지요? 전도라고 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불신자에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로마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나요,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전도했나요? 어디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다고 했습니까? 회당에서.(마 4 : 23) 회당에는 누가 모입니까? 이방인들입니까, 유대인들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백성에게 전도했을까요? 말씀을 가지고 있어도 안다,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말씀을 다른 교회 성도들이 알까요, 모를까요? 알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알까요? 그래서 가르쳐준다고 하면 들을까요, 안 들을까요? 듣기를 바랍니다. 누가 돈 달라고 합니까? 그냥 들으라고 전하지요. 문제는 들으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복습해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 곧 약속입니다. 약속은 어제도 오늘도 아니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은 왜 합니까? 지키려고, 깨려고? 그렇다면 무엇을 약속했는지 알아야 지키지요. 우리는 지금 신약(새 약속)을 가지고 신앙합니다. 새 약속이 무엇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다시 온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이. 그런데 다시 오신다 한들 알아볼까요? 어떻게 알아보는지 누가 가르쳐준 적 있습니까? 어떻게 오시는지, 어디에 오시는지, 누구에게 오시는지, 뭐하려 오시는지, 왜 오시는지 안다, 모른다? 그냥 기다리는 겁니다. 그래서야 만날 수 있겠습니까? 나 결혼한다, 말만 있습니다. 그래서야 하객이 오겠습니까? 내용이 있어야지요. 내용을 알아야 가서 축하를 해주든지 할 것입니다. 내용이 없는 약속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막연히 오신다, 그것만 알고 있으면 주님을 영접하겠느냐 그 말입니다.
이런 것을 말해주려는데 온다, 안 온다? 안 온다. 왜요? 자기들은 다 안다는 것이지요. 뭘 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들이 지혜롭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25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숨기셨습니다. 누가 알까요? 어린아이들입니다. 우선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배워야 하지요. 안다고 하는 어른들은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다 생각하는 어린아이들은 알려고 배우겠지요. 왜 천국에 어린아이들이 쉽게 들어갈까 생각해보았나요? 마 18 :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순수하다기보다 배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면 배우려하지 않습니다. 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겸손히 자꾸 배웁시다. 그래서 누구를 알자고요? 아버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를 알아야 그 아들로 오신 예수님도 알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마 11 :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누가 아버지를 안다고 합니까? 첫째, 아들입니다. 다음,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입니다. 계시 받으셨나요? 계시가 무슨 뜻입니까? ‘열어서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닫혀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열어서 보여주는 것이지요. 무엇이 닫혀있다는 말입니까? 성경에서는 닫혀있다는 것을 ‘봉해졌다’라고 표현합니다. 약속은 언제 이루어진다? 미래에. 그러니 이루어질 때까지는 안다, 모른다? 모른다. 그래서 닫혀있다, 봉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열릴까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니 열릴 때가 오겠지요. 그 때가 언제일까요? 누가 열까요? 예,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입니다.
자, 이제 생각해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일이 쉽다, 어렵다?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알았다, 몰랐다? 오죽하면 우리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알라고 부탁까지 하시겠습니까?(호 6 : 6) 오늘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니까 어려운 겁니다. 배웁시다. 과연 천국을 소망한다면 배워서 아버지를 만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