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책 <<케빈에 대하여>>와 약간 다르다.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그 울림과 깊이에서는 책을 따라올 수 없다. 책과 영화를 읽고 본 입장에서 두 배우의 연기에 감탄을 금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책이 훨씬 더 충격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우리는 케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케빈은 주인공 이바의 아들로 전형적인 소시오패스 증후를 보인다.
어느 날 케빈은 체육관 문을 잠그고 화살을 쏘아 학우들과 선생을 살해한다. 뿐만 아니다. 집에는 그의 아버지와 여동생이 화살을 맞고 죽어 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케빈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다. 학우들을 향해 화살을 쏘는 그의 모습은 오락을 즐기는 것처럼 즐거워 보인다. 그는 순순히 경찰에게 붙잡힐 뿐 아니라 어머니를 향해 미소 짓기까지 한다. 그의 행동에는 이유가 없으며 그 행동에 대한 죄책감도 윤리의식도 후회도 없다.
케빈의 무감각함은 공감 결여에서 온다. 그에게는 감정이입의 능력이 완전히 결여 되어 있고 오로지 자신의 이득 혹은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할 뿐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과 공감하지 못하는 정신병적 증후를 소시오 패스라고 한다.
그동안 심리학자들은 병적 증후에 관해 수없이 많은 연구를 해왔다.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거나 압박감에 시달리거나 강박증적인 증후들, 정상적인 성생활이 불가능하거나, 인간관계에서 항상 두려움을 느끼거나 매를 맞지만 헤어 나오지 못한다거나. 어떤 사물에 집착하거나. 이처럼 인간관계에서부터 물건과 특정 장소, 일까지 정신병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에 해를 끼치는 증후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프로이트의 뒤를 이었거나 다소간의 차이로 반발하거나 혹은 보다 더 발전시킨 심리학 이론들은 외면으로는 정상인임에 틀림없으나 바람직하지 못한 생활을 하는 성인들 혹은 아이들에 관한 무수한 이론을 내놓았고 그 이론들은 많은 도움을 준다. 실제로 트라우마는 반드시 전쟁이나 성폭력 또는 화재와 같은 큰 사건을 겪어야 생기는 것이 아니다. 주디스 허먼(Judith Herman)에 의하면 트라우마는 일상적인 사건들로 인해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방관, 무관심, 압박이 트라우마를 낳는 것이다.
소시오패스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한 증상이다. 학자들이 흔히 들먹이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의 학대 혹은 정신적인 버림받음으로 인한 상처는 그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소시오패스는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낮다. 혹은 아예 없다. 내가 이렇게 하면 타인에게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 혹은 타인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철저히 자신 위주로 생활하게 된다.
그가 사회의 원리,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원칙을 체득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기준을 세워 살아간다면 문제는 심각하지 않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소시오 패스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 이기주의는 결국은 자신의 생존에 해롭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이들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회와 타협할 뿐이다. 성공한 사업가나 정치인들, 혹은 기타 직업군 중에서도 소시오패스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들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으므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끼치는 온갖 피해를 무시한다. 소시오패스의 특징은 준비가 철저하고 대단히 치밀하게 계획을 실천해나간다는데 있다. 쉽게 잡히지 않는 연쇄 살인자들 중에 소시오패스가 많은 것은 이들이 철저한 대비를 하고 극히 치밀한 계산을 거쳐 행동에 옮기기 때문이다.
뿐더러 이들은 살인에 대해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못할 뿐더러 타인의 고통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번 저지른 범죄를 계속해서 저지른다.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힘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심리치료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심리치료는 근본적으로 어느 시절, 특히 어린 시절에 상처를 입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에 등장하는 연쇄살인자, 버팔로 빌은 소시오패스가 아니다. 버팔로 빌은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트라우마의 행태를 보인다. 또 다른 연쇄살인자로 사건을 풀어나가는데 도움을 주는 천재인 한니발 렉터 박사가 소시오패스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싫은 사람의 뇌를 잘라내 요리해 맛을 감상하면서 먹는 렉터의 모습은 섬찟하다. 끈질기게 괴롭히는 사람을 마취해 뇌를 잘라내고 그를 앞에 앉힌 채 요리한 뇌를 먹는 모습앞에서는 말을 잃는다. 그에게는 인간이 하나의 물건으로 보이는 것이다.
렉터에게 부족한 것이 없듯 케빈에게도 부족함이 없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를 방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케빈이 부모, 특히 어머니를 괴롭히는 쪽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치지 않는 그의 울음은 어머니를 고통으로 몰아간다. 여행자로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데 서툴러서 아이가 안정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울어댄다고 볼수도 있다. 이런 울음은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 법을 익히면서 차츰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케빈의 울음은 시간이 아니라 대상의 문제다. 그의 울음은 아버지를 대할 때 사라진다.
어머니에게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에게는 착한 아이인 척 하는 이중 행태는 끝까지 이어진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그를 집어던져 팔이 부러졌을 때도 케빈은 의사에게 그것이 자신의 실수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잘못을 감싸주는 듯 보이지만 이로 인해 그가 얻을 이득은 엄청나다. 어머니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그의 말을 더 잘들어주게 되는 것이다. 그가 어머니에게 기대는 것은 단 한번, 앓을 때 뿐이다.
이처럼 그의 행위는 언제나 계산적이다. 아버지에게는 살갑게 대해 선물과 다른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여동생은 심부름을 시킬 수 있으므로 사랑하는 척 한다. 그리고 그날을 위해 그는 준비한다. 마치 평생을 그날을 위해 살아온 것처럼. 활쏘기는 그의 취미로 그의 열성에 감복한, 아버지는 그에게 값비싼 활을 선물한다.
열여섯이 되기 직전(열여섯은 형사책임을 지는 나이다),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그는 대형자물쇠를 집으로 주문하고 그것이 실험을 위한 것이라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는 체육관 문을 그 대형 자물쇠로 잠그고 아이들과 선생을 향해 활을 쏘는 것이다.
이런 아이는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것일까?
영화는 묻는다. 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케빈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이제는 더이상 소시오패스에 대해 묻어두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그 소시오패스에 대해서 입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시오패스는 부모의 책임도, 배우자의 책임도,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사회가 입을 열어 공론화하고 합쳐 논의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누구나 조금은 이기적이지 않은가?
사족: 책을 읽어보니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은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남편은 항상 케빈에게 관대하고 케빈의 이야기는 무조건 받아준다. 케빈에 관한 이견 때문에 이바와의 이혼까지 생각하는 남편, 그러나 케빈의 정체는 엄마가 훨씬 더 잘 안다. 결국 케빈은 정체를 드러내고 감옥에 갇힌다. 케빈을 꼬박꼬박 면회가면서 아내는 죽어버린 남편에게 편지를 쓴다. 케빈의 현재 동정과 키울 때 겪었던 일들에 관해. 물질주의, 긍정적 양육방식, 곧 미국식 철학이 과연 옳은가를 신랄하게 꼬집는 좋은 작품.
첫댓글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이 영화가 원작이 따로 있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싶어서 글 옮겨 갑니다. 고맙습니다.
아, 저는 영화가 대단히 압축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소시오패스에 대한 지식이 약간 있어서 케빈의 성향을 금세 파악할 수 있었고 따라서 더 깊은 것이 있을텐데 그 점들이 표현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지요. 해서 책을 찾아본 거랍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기적이죠! 소시오패스??? 내면아이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해 본 적이 있습니다. 참여한 사람들이 어릴 때 겪었던 악몽같은 기억들을 재생해 내는 데 경악을 금치 못하고... 다시는 가지 않았습니다. 오제은 목사가 진행하는 프로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