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66/충효忠孝의 고장]임실치즈도 좋지만…
전라북도 임실任實하면 대부분 ‘치즈의 고장’으로 알고 있을 터. 벨기에 신부(지정환) 한 분의 공적으로 인한 효과가 그토록 큰 것이다https://cafe.daum.net/jrsix/h8dk/833. 치즈가 아니었으면 임실을 누가 얼마나 알겠는가. ‘임실치즈’로나마 안다는 게 어디인가. 그러나 어제 지역내 유적지 4곳을 답사한 소감은 ‘임실치즈’만이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임실은 <충忠․효孝․의義의 고장>일뿐아니라 그 사실을 널리 자랑하는데 앞장서야겠다고 느꼈다.
첫 번째 찾은 곳은 옥정호 주변의 <충장공양대박장군운암승전비>였다. 1592년 6월 25일 임진왜란때 주변 율치에서 일본군 1만여명을 아들을 비롯한 1천명의 의병으로 왜군 1천여명을 사살하는 등 대파하여 호남지역에 얼씬하지 못하게 한 남원출신 양대박梁大樸장군(1543-1592.6.25.) 1796년 정조임금은“내가 그의 유고를 보고 그 사람을 알게 됐다. 어려울 때 용단은 이순신보다 낫고, 변란소식을 처음 듣고 의병을 일으킴은 고경명보다 우선하다”며 명신 윤행임尹行恁에게 승전비 비문을 쓰게 했다. 일제가 파멸시킨 승전비를 2006년 향토회장이 비문 등 고증을 거쳐 새로이 세웠다한다. 나라에서는 당연히 병조판서를 증贈했다. 윤행임 찬 비문을 현대문으로 고쳐 새겨놓았는데 한문투가 아니고 우리말로 아주 잘 번역한 것같아 무척 흐뭇했다. 이런 승전지가 있는 줄도, 양대박 장군도 처음 알았다.
두 번째 찾은 곳은 <효자운암이선생조삼대>였다. 임실군 운암면은 이흥발李興渤(1600-1672)의 호 운암雲巖을 빌린 것이다.병자호란때 의병을 일으켜 동생과 함께 강화도로 향하던 중, 청군에 함락됐다는 소식에 낙망하고, 고향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냐 전북의 유학 학맥學脈을 이뤘다던가. 효자인 그가 하루는 낚시를 하는데, 물고기가 아닌 삼蔘 한 뿌리가 낚여, 아픈 어머니께 달여 드리니 쾌유했다. 전설같은‘효자의 삼’을 낚은 ‘조삼대釣蔘臺’는 아쉽게도 섬진강댐 공사때 수몰됐다고 한다. 비문을 찬한 사람이 숙종때 영의정 등을 지낸 명신 김수항金壽恒인 게 눈에 띈다. 김수항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효자들(왕상, 맹종, 검루 등)의 예를 들며“지극하도다! 낚시터가 삼을 낚는 조삼대가 아니더냐. 무릇 사람의 아들된 자의 효도여! 하늘이 감동하고 귀신이 감동하여 영물이 스스로 오게 하였다”며 “그 얘기를 듣고 두렵고 공경한 마음으로 눈물을 머금고 썼다”고 했다. 믿거나말거나이겠지만, 이런 설화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이 비문 역시 향토사학자인 최종춘-이형남 선생님이 현대문으로 쉽게 옮겨놓아 그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이분들의 공이 컸다고 들었다.
세 번째 찾은 곳은 옥정호 붕어섬 출렁다리를 세우는 등 <섬진강 르네상스> 현장에 있는 요산공원樂山이었다. 임진왜란때 성균관 진사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했다는 공로로 공신이 된 최응숙崔應淑이 낙향하여 자연을 즐기며 살았다는 곳이다. 호를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문구에서 따와 양요兩樂라 했다한다.
네 번째 찾은 임실군 성수면 <소충사昭忠祠>이다. 구한말 의병장 이석용李錫鏞(1878-1914)과 의병 28인을 기리는 사당이다. 3대독자 이석용은 을사늑약 소식에 의병 1천여명을 모집, 4년여 동안 전북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여러 차례 벌이며 일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오죽하면 일제가 1만명의 <호남의병토벌대>를 조직했을까. 세가 너무 불리하자 1909년 의병대(호남의병창의동맹단)를 자진 해산하고, 천황 암살, 중국망명 투쟁 등을 계획하다 밀고로 잡혀 37세에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고 한다. 그가 쓴 절절한 한시 등 기록이 여러 문헌에 나오고, 나라는 1962년 건국훈장으로 그를 기렸다. 그와 생사를 같이 한 28인의 의사義士봉분도 그의 무덤 아래 같이 있는 게 보기 좋았다. 아, 이렇게나 훌륭한 의병장이 우리 고향에 있었구나. 왜 우리는 이제껏 이런 사실들을 몰랐을까. 알고 보니 우리 고장이 충과 효와 의의 고장이었구나. 은근 뿌듯한 나들이였다. 고려초 설화인 ‘오수개 이야기’를 모두 아시겠지만, 오죽하면 미물인 개까지 의견, 충견일 것인가?
호남가의 <나무나무 임실이요, 가지가지 옥과로다> 구절처럼 임실은 오래 전부터 열매의 고장으로 알려져왔다. 한때 <미스고추 선발대회>도 있었고, 지금도 해마다 <사선문화제>를 지내며 <미스 4선녀>를 뽑고 있는 내 고향 임실. 어제의 유적 나들이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임실은 ‘씨앗(任)이 튼실하게 영그는(實) 고을’이라기도 하고, 순수한 우리말로 ‘그리운 임이 사는 곳’의 뜻이라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임실이 ‘운수雲水’라고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운수파출소 등 흔적이 남아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지명이 가장 마음에 든다. 구름과 물, 자연과 벗 삼는다는 말이 아닌가. 1984년 내가 결혼할 때 원로서예가 명심보감에 나오는‘팔반가八反歌’를 통째 써 기념선물로 주셨는데(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병풍으로 하면 좋겠는데, 돈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 낙관이‘운수초부雲水樵夫’여서 여쭤봐 알게 된 임실이라는 옛 지명이 너무 마음에 든다. 돌아가셨지만, 내가 이어 ‘운수산인雲水散人’으로 쓸까 생각하고 있다. <섬진강 르네상스> 임실이여! 비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