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필의 「호두껍질과 미래」 평설 / 박동억
호두껍질과 미래
김연필
무대 위의 침대 위에 수조를 놓는다 수조는 30x30x30cm로 바다를 담고 있다
관객은 무대에서 수조를 바라본다 수조에서 움직이는 작은 작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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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 속의 바다에도 태풍이 분다 찻잔 속의 태풍처럼 작은 곳에서 부는 태풍이라도 태풍이 아닌 것은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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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과 장을 끊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수조 속의 바다와 바닷속의 수조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비슷하며 다르고 다르며 같다 같으며 바뀌고 달라지며 웃는다 이것은 바다 위에 서서 바다 위를 걷는 어떤 사람의 형상으로, 사람은 사람을 보며 웃는다 수조 속의 작은 작가를 보며 수조속의 작은 작가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가리키는 손가락이 조금씩 작가에 닿는다 작가는 손가락에 눌린다 작가는 곧 터질 듯 보이지만
아무리 작은 작가라도 쉽게 터지지 않는다 그것이 무대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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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것을 은유라고 부르기로 했다 작은 작가가 헤엄친다 작가에게는 손도 없고 발도 없다 지느러미도 없고 입도 없다 작가는 눈으로 보고 눈으로 적는다 작가가 적은 글을 배우가 재현한다 작가는 팔랑팔랑한 몸통만 남아 꿈틀대며 수조 속을 헤엄친다 배우는 그런 작가를 재현한다 무대 위에서 조금씩 자라는 희망 같은 것인 양 그러다 무너지는 절망 같은 것인 양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눈은 언제나 둥글고 새파랗습니다 그것은 단단하고 깨지지 않는
상징적인 단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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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속에서 말을 한다, 울면서 말하기, 울면서 달리기, 달리면서 넘어지기, 넘어지며 일어나기, 일어나도 울기, 울면서 말을 하는 두 사람의 배우, 배우는 배우를 따라한다 배우는 마치 하나인 것처럼, 하나의 배우가 하나의 배우로 화하고 나면 무대에는 사랑만이 남는다, 두 사람의 배우가 사랑을 나누면 관객은 조심스레 그 사랑을 들고 자리로 떠난다, 관객의 자리는 너무 멀어서, 30⨉30⨉30cm의 수조 속을 바라보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관객이 볼 수 없어도 수조는 생동한다 수조는 살아 있고 수조는 숨을 쉬고 수조 속 바다는 조금씩 깊어지고 그렇게 심연이 된다 심연이 되어 슬픔도 남지 않는다
라고 작가는 적는다,
라고 배우는 재현하는지도 모른다 관객의 자리는 너무 멀고 누가 무엇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측량사가 나타나서 조금씩 그림을 그린다 그림엔 알 수 없는 것들이 알 수 없는 형체를 하고 조금씩 웅크리고
순간을 그림에 담아도 그것은 순간이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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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는 깨진다 관객의 마지막 말로 이제는 바닥에서 퍼덕이는 작가의 마지막 말을 듣는다
—계간 《문학의 오늘》 202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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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필 시인의 시는 생경하다. 이 작품에 언급된 사랑이라는 시어 또한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두 사람의 배우가 사랑을 나누면 관객은 조심스레 그 사랑을 들고 자리로 떠난다”라는 묘사에서 먼저 분석해야 할 것은 ‘배우-무대’와 ‘관객-사랑’의 관계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제 또한 사랑으로 한정할 수 없지만, 나는 이 매혹적인 작품을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 이 작품의 주제는 독자와 작가의 관계로 판단된다. 따라서 형식미학적인 논리를 따라 전개되는 이 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 시를 향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독서 과정에서 독자가 이해하는 것은 작가의 마음인가. 김연필 시인은 현실의 작가와 작품속의 작가를 구분하듯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관객은 무대에 머무르고, 작가는 수조 안에 있다. ‘관객(무대)’은 ‘작가(수조)’를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수조’는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 세계이고, ‘무대’는 현실에 대한 극화된 비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관객은 작가를 향해 손을 뻗는다. 이에 관객의 손짓에도 “아무리 작은 작가라도 쉽게 터지지 않는다 그것이 무대의 법칙이다”라는 진술이 뒤따른다. 요컨대 독자는 작가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대신 ‘배우’라고 하는 제3의 인물이 등장한다. “배우는 그런 작가를 재현한다”. 요컨대 ‘배우’는 작품 안에 재현된 작가이고, 그것은 익히 작가와 화자를 구분하는 서구 근대문학의 모델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 속의 목소리는 작가의 것이 아니야, 단지 이런 말을 남기기 위해서 이 작품이 쓰였다면 문학 이론을 시로 번역한 지루한 작품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론적 답습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김연필 시인 자신의 특수한 작품론이 여기에는 깃들어 있다. 다시금 작품을 읽어나가자. 배우들의 연기가 시작한다. 그들은 “슬픔 속에서 말을 한다,” 울면서 말하고 달리고 넘어진다. 그것은 만약 작가가 어떤 슬픔의 경험 속에서 쓴다면, 작품 속의 화자는 슬픔을 모사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사의 구조는 마치 프랙털 구조처럼 영원히 반복될 수 있다. “배우는 배우를 따라한다 배우는 마치 하나인 것처럼,” 작가는 자신의 마음을 모사하는 존재를, 또 모사하는 존재를, 또 모사하는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 이 시는 근본적으로 ‘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성찰은 작가의 방향과 독자의 방향이라는 이중으로 행해진다. 작가에게 작품이란 승화이다. 그가 어떤 참혹과 슬픔을 경험하든 쓴다는 행위는 그것을 하나의 가상으로, 가상의 가상으로 바꾸면서 고통을 경감하는 승화의 방식이 된다. 한편 독자는 무엇을 소유하는가. 그는 그 끝없는 가상, 즉 작가의 마음이라는 원형에 비추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작품을 소유할 떠나갈 뿐이다. 작가와 독자의 위치는 견고해서 자리바꿈할 수 없다. 관객-독자의 손이 닿더라도 훼손되지 않는 작가의 이미지와 “상징적인 단단함”을 지닌 ‘독자의 눈’이라는 이미지는 이를 표현한다. 견고함은 각 위치의 완결성을 표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절된 구조 안에서 “관객이 볼 수 없어도 수조는 생동한다. 수조는 살아 있고 수조는 숨을 쉬고 수조 속 바다는 조금씩 깊어지고 그렇게 심연이 된다. 심연이 되어 슬픔도 남지 않는다”라고 시인은 적는다. 요컨대 작품은 작가와 독자를 잇는 통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언어를 통해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은 작품이다. 작품 자체가 마치 스스로 살아 있는 것처럼 작가와 독자에게 무엇인가를 전한다는 것이 이 시에 표현된 작품론인 셈이다. 이 구조를 분석한 이후에야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이채롭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 수 잇다. 무대에 남게 되는 것이 오직 ‘사랑’뿐이라고 김연필 시인은 표현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긍정적 진술일까, 부정적 진술일까. 시인의 슬픔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 시라면, 시인의 비참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감상하도록 만드는 것이 시라면, 시인에게 시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는 이 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결론을 유추할 수 있다. “수조는 깨진다 관객의 마지막 말로 / 이제는 바닥에서 퍼덕이는 작가의 마지막 말을 듣는다”라는 장면에서, 시인은 작품을 깨고 나오는 시인의 진실한 비명을 상상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의 결말을 뒤집어 읽고 싶다. 이 작품이 표현하는 상징적 파국은, 실상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오직 작품 속에서만 표현된 것이기에 의미 있는 것이다. 사실 누구든지 마음을 직설할 수 있다. 그저 행하면 된다. 가슴속의 목소리를 끌어내고 온몸으로 세상을 내리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안다. 그 때문에 김연필 시인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택했던 것이 아닐까. 김연필의 시 「호두껍질과 미래」가 표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언어의 구조이고, 언어를 통해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이다. 무엇보다 김연필의 시는 언어라는 체계가 아니라 언어가 매개한 관계를 주제로 삼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시인은 의미체계로서의 언어보다 언어 행위 자체의 본질을 더 깊이 실감하는 자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보다 시인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서, 미적인 언어의 미로를 만들어서 스스로 헤매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 헤맴은 자신의 마음을 직설하는 순간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마음을 배반하고 속이고 잃어버리기 위한 여정이다. 드러내는 동시에 감추고, 진실한 동시에 속일 때만 비로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언어 행위이고, 이러한 언어 행위의 본질에 대한 추궁이 「호두껍질과 미래」의 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3년 11월호 ------------------- 박동억 / 문학평론가.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