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카라 여행9 - 겐츨릭 공원을 보고 6.25 전쟁 한국 공원에서 참전용사 노병을 만나다!
5월 14일 앙카라에서 터키 건국의 아버지인 케말 파샤 의 영묘 인 아타튀르크 추도원 을
보고는 아나톨리아 박물관 에 들른 후에 언덕 위 정상에 위치한 앙카라성 에 오릅니다.
그라고 언덕길을 내려와 은행과 금은방 이 밀접한 울루스 광장 Ulus Meydani 을 거쳐 터키
독립전쟁 기념관 에 들러 오스만 터키제국 멸망후 터키 공화국 건국의 역사 를 봅니다.
그러고는 지하철 울루스역 을 지나 겐츨릭 공원 Genclik Parki 으로 들어서는데
구글맵 지도 에서 보니 큰 호수 가 있기로 마눌에게 말했더니.....
처음 부터 기대가 컸었던 탓인지 생각보다 규모가 작으니 실망하는 눈치 입니다!
아니 산이나 들판이라면 몰라도 시내 한복판 에 이 정도 규모면
크다고 말할수도 있건만 무슨 큰 풀장 같다고 불평할건 뭐람....
나무와 꽃 이 우거진 호수 에는 조각상과 기념물 이 많아 볼만한데
가족 단위 로 휴일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도 아주 많습니다.
그러고는 사람들에게 6.25 한국전쟁 참전 용사를 기념 하기 위해
만든 한국 공원 Kore Parkı 이 어디에 있는지 묻습니다.
코레 파르크 네레데? Kore Parkı Nerede?
젊은 중국인 커플 은 스마트폰 을 열어 검색 을 하더니 가르쳐 주는지라 걷습니다.
겐츨릭 공원 반대편에 이르러 보자니 무슨 조형물 이 보이는데.....
이것도 기념비 Memorial Monument 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찾는 곳은 아니라?
밖으로 나가서는 오른쪽으로 길을 따라 둘러보다가 보이지 않기로 되돌아와서는
저 앞쪽으로 철도청 건물이 보이는지라 다시 행인에게 물으니...
저기 보이는 철도청 도로 맞은편 에 있다고 알려주기에 길을 건너 5분쯤 걷습니다.
먼저 전쟁 기념관 같은 집이 보이고....그기에 인접해 불국사 석가탑 같은게 보여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을 빨리하니... 담 벽에 "태극기와 터키 국기" 가 교차로 그려져 있네요?
한달음에 달려가니 정문 이 보이고 왠일인지 군인들 이 많이 보이는데
무슨 정복 차림 보다는 풀어진 차림 이 많으니...... 휴식중 인가?
안으로 들어가니 석가탑 을 본뜬 기념비 아랫부분은 6.25 한국전쟁
에서 전사한 터키군 장병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는데.....
왠 노인 이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 하면서 그 중에 이름 하나를 손가락 으로
가르키기에 뭔가 짚이는게 있기로 다가가 한국에서 왔다며 인사 를 합니다.
그러자 노인이 지갑에서 "빛바랜 사진" 을 꺼내는데 그 사진이 자기 라고 하는걸
보면 6.25 전쟁 참전 용사 인가 본데, 할아버지도 뜻밖에 한국인을 만났으니
새삼스레 옛날일이 회상되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저 기념비에 적힌 이름을 말하는데...
죽은 자 가 여기 앉아 말할리는 없고....그럼 저 전사자 는 할아버지
와 함께 참전했던 친구인 전우 를 말하는 것일까요?
더욱 내가 터키군 전사자 들이 묻혀있는 유엔묘지 가 자리한 부산시 대연동에 살았으며
여러차례 묘지를 찾아..... 터키군 묘역 도 보았다고 하니 더욱 감격해 합니다.
나야 뭐 철원 6사단에서 34개월을 복무했으니 군대 이야기라면 몇시간도 땡큐입니다?
저 유엔 묘지 에 어느해 겨울에 미국등 유엔군 관계자들 이 오는데 묘역에 잔디 가
없는지라 겨울철에 갑자기 잔디를 구할수도 없고해서.... 현대 정주영
씨가 아이디어 를 내서 밭에서 "보리" 를 뽑아다가 심었다는 일화 가 떠오르네요?
박대통령 때 얘기인데..... 그때 대통령이 유엔묘지를 보러 적기로 해서 감만동 고개를 넘어
오는데 도로가 포장이 안된지라 밤을 새워 긴급하게 아스팔트 를 깔고는 도로변
집들은 수선에 페인트칠 을 하고 일부는 가리고 철거한다고 난리를 부렸던게 생각납니다?
주변에 사람들도 모여드니 할아버지는 신이나서 "전쟁 이야기" 를 풀어 놓습니다.
6.25에 참전한 터키군의 규모 는 타흐신 야즈즈 장군이 지휘하는
2개 여단 "만오천명" 으로 미국과 영연방 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큰 규모 입니다.
그중에 721명이 전사 하고 175명이 행방불명 되었으며 234명 포로에 2,490명
명이 부상당했으니..... 모두 3,600여명의 인명 손실 을 입었습니다.
해서 대한민국 코레아 와는 칸카르데쉬, 즉 "피로 맺어진 형제" 라고 부른답니다.
터키군은 1950년 10월 17일에 긴 항해 끝에 부산항 에 도착했는데 불과 1주일후인
10월 25일 중공군이 개입 하자 터키군은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최전선에
투입 되었으니.... 11월 26일 부터 터키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격 을 받습니다!
터키군 은 생존을 위해 백병전 으로 활로를 개척할수 밖에 없는 처절한 혈투 를
벌이게 되니 26일 부터 와원리에서, 28일 밤 부터는 신립리에서 그리고
29일 저녁 부터 30일 새벽 까지는 봉오리와 군우리 간의 철수로를 방어 했습니다.
군우리- 평양 간 철수로 에서 중공군과 전투 를 벌여 미군을 무사히 철수하게 결정적인
역활을 했는데 터키군이 최초로 최전선에 투입되던 날 미군 사령부에 무전이 오기를
북한 인민군 200여명을 포로 로 잡고있다고 하여 미고문관이 현장에 가서 확인해 보니...
국군 제6사단 이 중공군에게 밀려 남하 하다가 터키군에게 발각되어 포로로 잡힌 혼란
스러운 시기였으니! 그런데 제가 1970년대에 저 6사단에 근무했기로 말하자면
6.25전쟁시 서부전선은 쉽게 뚫리고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당하지만 동부전선 에서는....
동부 전선 6사단 은 2연대가 춘천방어에 성공 하고 19연대의 육탄 11용사 가 적 탱크
(자주포) 를 파괴하는등 첫 승리를 거두고 후퇴한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3.8선을 최초로 돌파 하고 4개월후인 10월 26일 7연대가 압록강에 최초로 도달합니다.
이후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다가 1951년 4월 22일 화천에서 중공군에게 참패 해
미군의 비웃음 을 사는데, 터키군이 후퇴하는 6사단 장병을 포로 로 잡은건
이보다 앞서 압록강에서 물러나 평안도 군우리에서 패해 후퇴하던 무렵인가 봅니다?
이후 5월 17일 중공군 63군 187, 188, 189사단이 경기도 용문산에 주둔한 6사단
2연대를 공격 하자 측면에서 갑자기 7연대와 19연대가 튀어나와 포위 해서는
적 17,000명을 사살한 6사단 의 "용문산 전투" 는 한국전 최대의 승리가 되었지요?
터키군의 슐레이만 은 한 여자아이를 주워 병영에 데리다 키우면서 아일라 라고 부르다가
수원의 앙카라 학원 에 맡겼는데... 앙카라 학원은 1,960년대 까지 유지되었으니
슐레이만은 양딸을 60년만에 다시 찾아 참전용사 30명이 초대받아 해후한 방송을 보았네요?
지평리 전투가 프랑스군 이 분전한 전투라면 터키군이 용맹을 떨친 전투로 울프하운드
전투 (일명 썬더볼트 작전) 를 들수 있으니..... 경기도 김량장리 와 151고지에서
중공군 149사단 447연대 및 150사단 448 연대를 맞아 지원화력과 근접항공지원을 요청한후!
중공군의 진지가 폭격 을 당하자 “알라 후 아크바르!” 를 외치면서 돌격
을 실시하여 백병전을 통해 중공군 사살 1,900여명 이라는
큰 전과를 올려 6.25전쟁 내내 “백병전의 터키군” 이라는 명성을 얻습니다.
평안도 군우리 전투 패배를 설욕한 것인데 또 터키군은 1951년 1월말 금양장 전투
에서 중공군으로 부터 151고지를 탈환 하며 유엔군의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같은해 4월 장승천 전투 에서는 66명 전사, 105명 실종이라는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진지를 사수해 인접한 아군 부대들이 안전하게 철수할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주었습니다.
해서 몇년전 육군 55사단은 용인시 기흥구 마성 IC 인근에 위치한 “터키 참전기념비”
에서 6․25 전쟁에 희생한 터키군 장병의 넋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행사 를 개최 했습니다.
터키군 장병들 을 추모하기 위해 70년대 후반 부터 실시되는 연례행사로 터키의
수도 앙카라 에서도 매년 1월 25일에 기념행사 를 개최하고 있다고 합니다.
황성준씨에 따르면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다리를 잃은뒤 자신의 삶을 원망하고 살았다는
터키군의 노병 이 있었는데, 그런데 1988년 TV를 통해 비춰진 서울 올림픽 이 개최
된 한국의 모습은 경이 그 자체였으니.... “정말 저것이 내가 참전했던 한국이란 말인가?”
세계 최빈국 으로 먹을게 없어 길거리를 떠돌던 거지 한국인 들이 눈에 선한지라 처음
에는 믿을 수 없어 "언론 조작" 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마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 한국의 발전상 은 뉴스가 아닌 생활을 통해 더욱 와 닿기 시작했으니....
삼성전자 제품과 현대자동차 가 바로 그것이었다고 하네요? 이러한 사실들이 확인
되면서 인생이 변화되기 시작했으니.... 자신의 희생과 삶 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다리가 바로 저런 번영 을 일궈내기 위한 밑거름이었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삶이 더 없이 값진 것 이 됐다며..... 한국인을 만나서는 울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정말 고맙다. 너희가 잘 살게 돼서...." 만약 너희가 그때 처럼
계속 굶주림속에 거지처럼 있었다면 나는 나의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 남의 나라 내전 에 끼어들어 다리만 잃어 버렸나 하고 삶을 원망해 왔는데.....
나는 수백만, 아니 수천만이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살 수 있도록 정말
조그맣기는 하지만 이제는 기여 를 했다는 "자부심" 을 가지고 살수 있게 된 거야.”
이 나라 터키인 들은 남의 나라 내전 에서 3,600여명의 인명 손실 을 입은 탓인지...
대한민국 코레아 를 칸카르데쉬, 즉 "피로 맺어진 형제" 라고 부른다지만!
저를 포함한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중에 이런 고마운 마음을 갖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1592년 부터 7년간 벌어진 임진왜란 에서 참전자는 연인원으로 일본군 30만에, 명나라
25만 그리고 조선군 10만이며, 1597년 정유재란만 본다면 일본군 14만에 명나라
11만 7천 그리고 조선군 3만 8천인데, 만일 명나라가 조선에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오늘날 "중국인을 보고 고마움을 느끼는 한국인" 은 얼마나 될까요?
첫댓글 즐거운 시간되세요
터키는 참 좋네요
터키..... 가히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이지요?
자연풍광, 역사유적, 싼 물가에 친절한 사람들
까지 아? 이스탄불 같은 대도시는 제외하구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별 재미도 없는 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