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일본군 출신이라라걸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당시 일본군이 하는일이 무엇인가?
요즘 말로하면 주적이 독립운동가들 아닌가?
일본군 장교라고 해서 독립군을 죽인 증거는 없지 않는가?
하는 사람들은.... 머리는 장식품으로만 사용하는걸까?
박정희는 평소 음침하고 어두운 성격이었는데...독립군을 잡으러 간다고 하면 "요오시" 우리말로 "좋다"..
하면서 신나했다고 합니다.. 박정희의 행적을 보면.. 저는 이런 증언들이 매우 신빙성있다고 믿는다.
박정희가 민주화 운동한 사람들을 고문하고 잡아죽인것들..
박정희 비리를 고발한 김형욱이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일
최근에 박지만 사촌 박용수가 "박지만의 누나 박근령 남편 신동욱 살해지시 의혹 진술"을 앞두고 석연치 않은 죽음
일가친척들의 4조원대 재산..
이런데도 좋다고 그 가족들을 추종하는 대한민국에 머저리들이 40%이상 된다는게
대한민국에 슬픔,아픔.고통이지.
▲ 박정희 혈서 관련 기사가 수록된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7면
그들이 그렇게도 조작이라고 믿고 싶은 박정희 혈서가 실린 1939년 3월 31일 자
만주신문 원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반인은 마이크로필름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출력도 가능하다[<滿洲新聞> 康德 六年(昭和 十四年) 三月 三十一日, 日本 國會圖書館 所藏 마이크로필름].
이조차 일본이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조작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정신분석학적 처방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혈서 발굴의 일등 공로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조갑제씨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박정희>(1992, 까치)에서 박정희가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쓴 사실을 처음 언급하여 발굴추적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박정희 연구자들의 끈질긴 조사에도 결정적인 증거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친일인명사전 집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2009년 10월에 가서야 가까스로 관련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증언만 있었을 뿐 확실한 증거가 발굴되지 않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지 못할 뻔했던 엄청난 내용들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우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지막 순간에 순국선열들의 보살핌이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기고 있다.
혈서 자체도 충격이거니와 '조국(일본)을 위해 일사봉공(一死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이지 일본군으로 복무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친일인명사전이 허위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모함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도 연구소는 확고한 반증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둔다.[<舊時陸軍軍人(軍屬)屆> 昭和 二十年 三月 一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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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가 일본군 예비역 소위임을 입증하는 공문서 |
ⓒ 조세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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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며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일본군 현역 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엄연한 일본군 예비역 소위이며, 관동군에서 복무한 시기도 있었다.
또 박정희가 대적한 팔로군은 중공군이므로 공비토벌이지 항일세력 탄압이 아니라는 유치한 발상도 연구소를 공격하는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팔로군도 항일부대이며 중국 소련에 대한 적대 행위는 당시로서는 연합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상식 수준의 이해도 하지 못하는 억설이라 치부하겠다. 특히 다수의 조선 청년들이 항일을 위해 팔로군에 복무하고 있었던 사정을 감안하면 이런 궤변은 더더욱 삼가야 마땅하다.
중위를 단순하게 하급장교 정도로 간주하는 '대범함'도 당시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관대한 시각이다. 당시의 위관급 장교는 지금과 달리 군이 절대적 우위에 있던 파시즘 국가의 고등관으로서 군수나 경찰서장도 쩔쩔맬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박정희가 연령 제한에 걸리고도 혈서까지 써가며 거듭 군관을 지원했던 이유의 하나이다. 참고로 일제 35년간을 통틀어 자발적으로 일본제국의 장교된 자는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출신을 포함 17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식민지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간택받은 존재들이었던 셈이다.
무엇보다도 대일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는 바로 적국의 장교다. 비록 착수 전에 해방이 되긴 했지만 만약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이 개시되었다면, 박정희는 그토록 꺼려했던 장준하처럼 사선을 넘어 광복군에 입대한 상당수의 일본군 출신 애국자들과 전장에서 만나는 운명이 되었을지도 알 수 없다.
박정희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대우와 존경을 받고 안정적인 직업이었던 교직을 버리고 군관의 길을 선택하였다. 강요에 의한 입대도 아니었으며 생계나 생존이 위협받는 불가피한 상황도 아니었다. 목적이 출세였든 영웅심의 발로였든 간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부일협력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사실과 정황이 이를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만주신문> 기사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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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신문"에서 발췌한 박정희 혈서 관련 기사 |
ⓒ 조세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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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가 봉입(封入)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만주신문> 1939.3.31. 7면)
박정희 친일 맞고.
실제 독립군 잡았는지는 확실치 않음.
그런데 어떤 사람이 미쳤다고 그 시절에 집팔고 논팔고 처자식 버리고 독립운동 합니까? 누구처럼 친일파해서 출세하고 재산 모으고 처자식 따뜻하게 배불리 먹이지 그래 누구는 수신제가 잘해서 후손들도 잘살고, 누구는 수신제가 못해서 후손까지도 거지로 만드나요. 나중에 나라가 또 어려워지면 수신제가나 잘하고 살아야 현실적으로 사는거네요. 역사를 생각한다면 정답은 나와 있지 않을까요?
음..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기 가 힘드네요
굉장히 헷갈리는 글임
어쨋든 박정희는 친일파
창씨개명도 두번이나 했다고 들었음
한국이름 티안나게 하려고
독립군 대위 장준하선생님의 지적입니다
박정희는
1 왜왕에게 개같이 충성하겠다고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면서 민족을 배반했고
2 자기 목숨을 건지고자 좌익 동료를 밀고하며(대략 100명 정도 총살) 동료를 배신했고
3 권력을 잡으려고 516 쿠테타로 국가를 배신했다
좀 더붙이면 딸보다 어린 여대생들을 끼고 더러운 짓거리를 하다 그 자리에총에 맞아 죽었다
무슨 말을 더하려고 변명하나
2,3번 그리고 어린여대생을 끼고 그런건 박정희의 결점이지만, 1번은 좀 애매한것도(예를들어서 1858년생인 이완용은 민족을 배반했다고 할순있지만, 1917년생인 박정희는 과연?) 사실입니다.
그리고 장준하선생이(1918년생) 독립군이였을때는 독립군내에서 장준하보다 나이가 많은분들이(그러니까 조선시대때 태어나신분들) 대부분이였습니다. 장준하하고 동갑이거나 장준하보다 나이가 어린자들은 극소수였지요.
1 다까끼 마사오가 만주군관학교 입학하려고 혈서 쓸때에 나이가 24살 그 전에 교사까지 한 사람이 민족도 몰랐다고요 아무리 대구사범을 69/70등을 해도 고등교육을 받은 넘이 자기 핏줄도 몰랐다고 이렇게 변명해주시는 분은 택도 아닌 헛소리지요
2 장준하 독립군 때에 그보다 나이 어린 사람은 극소수라고 그때에 마사오처럼 왜왕에게 혈서까지 쓰고 기를 쓰고 친일하려고 나선 악질들도 한 손에 꼽히고 또 당시 독립군들이 만주간도특설대의 집중적인 추적으로 괴명될 위기에서 러시아로 넘어간 사람들도 있고 또 관동군왜놈들과 싸우기 위해서 공산당 동북항일연군이나 국민당군에 들어간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독립군이 있었습니다
간도특설대의 창설목적이 만주에서 활동하는 조선독립군을 토벌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백선엽 회고록에도 나오고 자신이 독립군을 토벌한 사실도 시인했고요
당시 조선독립군이 없었는데 간도 특설대를 창성했겠습니까
박정희가 복무한 부대도 당연히 독립군을 만나거나 정보가 들어오면 토벌했을 것이고요
또 박정희가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으로 복무할 그즈음에 많은 한국청년들은 탈영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까끼 마사오 박정희는 왜왕에게 개같이 충성을 하고자 끝까지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합니까 독립군을 죽인일이 없다고 누가 헛소리를 하나요
많은 한국청년이 아닌 극소수의(비율이 극소수) 한국청년. 왜냐면은 1. 그게 쉬운일이 아닙니다. 탈영이라는거는 목숨을 엄청 걸어야되죠. 2. 40년대 당시 청년들은 1910년이후에 태어난 분들이 많기때문에. 동북항일연군이나 국민당군에 들어간자 그리고 40년대 그때까지도 있었던 독립군들은 그 구성원들의 연령이 대부분 40대이상의 노장들이고요.
그리고 박정희가 나온 사범학교는 정규과정의 학교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식 교육을 하는곳이 아니라 일본식 교육을 하는곳이였습니다. 물론 일본육사나 만주군관학교는 더 말할나위도 없었지만요. 이미 사범학교때부터 박정희는 정체성을 일본으로(조선민족이 아니라 일본민족으로) 생각한 요소가 많을껍니다.
일제말기때는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체성은 사실상 2등 일본인이였습니다. 특히 일제말기때 나이가 젊은사람들은(일제시대때 태어난 자들) 말이죠. 박정희는 2등일본인에서 완벽한 일본인으로 거듭날려고 한것도 있습니다.
박정희가 자기 정체성을 왜넘으로 생각할 정도로 돌대가리로 보입니까 자신을 일본 사람으로 생각했다면 혈서를 써고 개같이 충성하겠다고 했습니까 친일파넘들은 자신이 조선사람이란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왜넘들보다 더 악질적인 방법으로 조선사람들을 고문했습니다 완벽한 왜놈이 되려고 했다는 말은 자신은 왜넘이 아니라 조선사람임을 확인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1917년생이잖아요. 그래서 일본인으로 태어난거죠. 물론 정확히는 일본인이 아니라, 애매한 2등 일본인(2등 시민취급받음)으로 태어났지만요.
위글에서 글쓴이의 본질이 나오구먼 독립군들이 반역자라는 말이네 글쓴사람 완전히 매국노 역적이네 총살해야 하겠구먼
이완용은 1858년생인데도 즉, 조선이라는 나라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민족을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자이고요. 그리고 독립군들은 생년이 1910년생 이전생들이 대부분입니다.
또한 일제시대당시 생년이 1910년생이후는 조선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본인이라고도 볼수없는 애매한 2등 일본인으로 태어난것이지요.
아니 왜 말을 고치나 2등이든지 3등이든지 일본인이라면서
애초에 나라를 일제에 넘긴 이완용하고 그리고 이완용을 그렇게 만든(이완용이 조선의 지리멸렬함을 보고 그렇게 된것도 있으니까요) 구한말의 조선의 지리멸렬함을 탓해야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