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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터 서트클리프는 영국 잉글랜드 요크셔 출신의 연쇄살인범이다.
그는 1975년 7월부터 5년에 걸쳐 13명을 살해하고 10명에게 상해를 입혔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매춘부라는 점이 잭 더 리퍼와 비슷하다고 하여, 영국 언론에서는 그를 요크셔 리퍼(The Yorkshire Ripper)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경찰이 수십년 동안 연쇄살인범을 잡지 못했고, 범인이 화물차를 운전했다는 것을 이유로 영국판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화성 연쇄살인 사건, 살인의 추억)이라고 하기도 한다.
1984년부터 브로드무어 특별병원에 수용되어 있었으나 2016년 HM 프랭클랜드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감염되어,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피터 서트클리프는 영국 잉글랜드 요크셔의 빙리(Bingley)에서 한 가톨릭계 노동계급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윌리엄(John William Sutcliffe)은 주변인들로부터 남성다움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각종 스포츠에 능한데다 외향적인 성격 덕분에 그는 지역의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피터는 그런 아버지와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반대였다.
유년기의 그는 체구가 작고 몸이 약한데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그래서인지 피터는 난폭할 정도로 마초적인 아버지보다는 상냥한 어머니의 곁에 머무르기를 좋아했다.
유년기의 피터는 그가 속해 있었던 노동계급 아이들의 놀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형제자매나 친구들과 거친 놀이나 싸움을 하며 어울리기보다, 방 안에서 책을 읽는 것을 선호했다.
초등학교에서 그는 놀림받거나 겉돌았고, 중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 따돌림은 학교의 조치로 곧 멈추었으며, 피터가 성장하면서 보디빌딩을 하고 여러 스포츠를 익혀 그의 아버지가 흡족해할 만큼의 남자다운 체격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근본적인 성향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오토바이를 몰거나 손보는 데에 큰 애착을 가지긴 했으나, 그는 여전히 다른 노동계급 남성들과는 달리 동네 펍에서의 사교 활동을 꺼렸다.
그 대신에 피터는 집에서 어머니를 도우며 대부분의 여가시간을 보냈다.
피터는 자녀들에게 헌신적인 어머니 캐슬린(Kathleen Frances Sutcliffe)에게 매우 각별했던 반면, 아버지인 존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존은 알콜중독에 가정폭력을 저질러댔다.
존이 4~5살배기 때의 피터와 말싸움을 하다 머리쪽으로 맥주잔을 깨뜨려 위협했고, 벨트로 아이들을 채찍질하곤 했다.
또 존은 아내의 앞에서 다른 젊은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거나 집에 놀러 온 딸의 친구들에게 추근댔다.
때문에 서트클리프 집안에는 언제나 성적 긴장이 흘렀고, 그런 환경의 영향인지 피터는 금욕적이고 성적으로 억압된 소년으로 자라났다.
17세 무렵에는 함께 여행을 온 친구가 섹스에 대한 음담패설을 했다는 이유로 비이성적으로 분노하여,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날뛰다 친구의 성기에 나이프로 상처를 내기도 했다.
또 이성에게 심하게 수줍음을 타는 성격 탓에, 그는 또래 소녀들에게 관심을 표하거나 접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먼저 접근해 오는 소녀들이 있었으나, 그의 어색한 태도 때문에 결국 그는 청소년기 내내 어떤 여자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1967년에 피터는 자신보다 5살 연하의 소니아 서마(Sonia Szurma)를 만났다.
소니아는 피터보다도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선생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소니아의 부모는 그녀가 당시에 묘지기로 일하고 있던 피터와 만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그들은 1969년에 본격적인 교제를 시작했고, 1974년에 결혼했다.
피터는 어머니를 비롯한 식구들에게 바른 생활 사나이로 통했다.
큰 싸움을 일으키는 일도 없었거니와, 집안일을 잘 돕고 가족에게 헌신적이었으며, 사창가에 드나들거나 자신의 아버지처럼 오입질하는 남성들을 비난했다.
또 그는 정숙하지 못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특히 매춘부에 대해서는 집착이라고 할 만한 혐오감을 표출하곤 했다.
청소년기 후반부터 그는 매춘부들 그리고 그녀들을 사서 동행하는 남성들을 몰래 따라다니며 지켜보곤 했다.
젊은 시절에는 리즈와 브래드포드에서 정기적으로 매춘을 했으며, 그러다가 폭력을 휘둘렀던 적이 있는데 포주에게서 돈을 사기당하자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한 뒤 피터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는데, 이는 그가 사교성이 요구되는 업무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나마 장기간, 성실하게 했던 일은 바로 묘지기였다.
이때 함께 일했던 동료는 피터가 시체를 다루는 일에 직업적인 것 이상의 열의를 보였고, 가끔씩 뼈다귀들로 장난을 치거나 함께 매장되어 있던 반지 등을 가져가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피터는 텔레비전 조립 공장에서 일했는데, 영업사원으로 보직이 변경되자 곧바로 그만두어 버렸다.
그러나 1975년 피터는 화물차 기사로 취직했고, 이후 체포 직전까지 이 직업을 유지했다.
2.2. 범행
피터 서트클리프는 범행 기간 동안 13명의 여성들을 살해했으며 10명의 여성에게 상해를 입혔다.
그는 총 23건의 범행 중 10건을 웨스트요크셔주의 리즈에서, 5건을 브래드포드에서 저질렀으며, 그 외에 핼리팩스와 맨체스터와 허더즈필드에서 각 2건을, 카일리(Keighley)와 실스덴(Silsden)에서 각 1건을 저질렀다.
피터 서트클리프는 23세이던 1969년에 사실상의 첫 번째 범행을 저질렀다.
그는 친구에게 자신이 길거리에서 마주친 매춘부 하나를 몰래 뒤따라가, 돌덩이를 넣은 양말로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고 고백했다.
다음 날 피해자 여성의 신고로 경찰들이 그를 찾아왔고 그는 범행을 시인했으나, 피해자 여성이 처벌을 원치 않아 어떤 후속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피터 서트클리프의 공식적인 첫 번째 범행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975년에 카일리에서 일어났다.
41세의 안나 로굴스키(Anna Rogulski)는 자신에게 폭력을 일삼던 파트너에게 항의차 방문했다가 자기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와 마주쳤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망치로 때려 기절시킨 후 그녀의 배를 칼로 그었으나, 이웃의 방해로 그녀를 죽이지 못하고 달아났다.
로굴스키는 수술을 받고 살아남았으나 이후 PTSD에 시달렸다.
8월 15일 밤, 피터 서트클리프는 핼리팩스에서 두 번째 범행을 일으켰다.
그는 46세의 올리브 스멜트(Olive Smelt)에게 농을 걸며 접근해, 망치로 그녀의 후두부를 가격한 뒤 그녀의 등을 칼로 찌르고 달아났다.
올리브 스멜트 역시 수술을 받고 살아남았으나 정신적 외상으로 고통받았다.
세번째 범행은 며칠뒤인 8월 27일, 실스덴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있던 14세의 트레이시 브라운(Tracy Brown)에게 접근해 그녀의 머리를 5차례 가격했으나 트레이시가 지나가는 차의 불빛을 보고 도움을 요청해 미수에 그쳤다.
트레이시는 중상을 입어 뇌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그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걸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비롯한 외양을 아주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으며, 피터 서트클리프가 체포된 이후 자신을 공격했던 남성으로 그를 지목했으나 이는 실스덴의 경찰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92년에 피터 서트클리프가 직접 트레이시 브라운에 대한 범행을 시인한 뒤에야 그녀의 주장이 사실로 인정되었다.
최초의 사망자는 네 번째 범행에서 발생했다.
윌마 맥캔(Wilma McCann)은 네 아이의 엄마로서 리즈에 거주하는 28세의 여성이었다.
10월 30일, 피터 서트클리프는 그녀의 후두부를 망치로 두 번 가격한 뒤, 그녀의 목과 가슴, 하복부를 칼로 15번 난자해 무참히 죽였다.
윌마 맥캔의 어린 자식들은 그녀의 죽음 이후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게 되었으며, 그녀의 장녀 소냐는 이를 비관하여 2007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피터 서트클리프의 다섯 번째 범행은 이듬해인 1976년 1월 20일에 일어났다.
리즈에 거주하던 42세의 에밀리 잭슨(Emily Jackson)은 심각한 재정적 곤란에 빠져 있었고, 남편의 권유로 늦은 나이에 매춘부가 되었다.
서트클리프는 라운드해이 로드(Raunghay Roadd)의 펍 외부에서 그녀를 데려와 0.5마일 떨어진 메이너 인더스트리얼 에스테이트(Manor Industrial Estate)의 엔필드 테라스(Enfield Terrace)에 있는 버려진 건물로 향한 뒤, 그녀의 머리를 망치로 가격해 기절시킨 뒤 스크류 드라이버로 그녀의 몸 곳곳을 52번 난자해 죽였다.
1976년 5월 9일 리즈에서, 피터 서트클리프는 여섯 번째 범행을 저질렀다.
그는 귀가 중이던 20세 여성 마르셀라 클랙스턴(Marcella Claxton)을 차에 태웠고,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마르셀라의 머리를 수차례 가격했다.
마르셀라는 수차례의 대수술 끝에 살아남았으나 당시에 임신하고 있었던 아기를 잃었고, 이후로도 만성적인 기절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언제부터인가 지미 새빌과 이상하게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1977년 2월 5일, 서트클리프는 라운드해이 공원(Roundhay Park)에서 28세 매춘부 아이린 리처드슨(Irene Richardson, 1949?~1977)을 망치로 공격해 살해하였는데, 시신이 지미 새빌의 소유지에서 불과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의문의 이빨 자국과 함께 발견되자 영국 경찰은 이 치아 자국이 새빌의 것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확인했고 새빌이 사건 조사 과정에서 경찰의 심문을 받은 바가 있다.
게다가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는 이 살인이 새빌의 펜트하우스에서 벌어졌음을 암시하며 서트클리프의 다른 살인 중에서도 요크셔와 리즈의 새빌의 땅에서 벌어진 사건들도 있다.
지미 새빌은 2011년 사후에 여러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나중에 드러난다.
두 달 후인 4월 23일, 브래드포드의 아파트에서 매춘부인 32세 패트리샤 앳킨슨(Patricia "Tina" Atkinson)을 살해했다.
그러나 이 여덟 번째까지의 범행은, 행실이 부정하거나 매춘에 연루된 여성들이 희생된 것으로 간주되어, 규모에 걸맞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6월 26일, 그는 채플타운에서 16세의 제인 맥도날드(Jayne MacDonald)를 살해했다.
제인은 매춘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중과 언론 양쪽의 동정을 받았으며, ‘요크셔 리퍼’ 사건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제인 맥도널드의 자매인 데브라의 말에 따르면, 정작 제인의 가족들은 희생자들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 시선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
경찰은 그녀를 ‘최초의 무고한 희생자’ 이며 ‘존중받아 마땅한 소녀’ 로 묘사했다.
사실상 영국의 모든 여성들이 요크셔 리퍼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자, 영국 여성들 사이에는 사건에 대한 경찰의 대처가 안온하고 미진하다는 의견과 함께 아홉번째 범행을 전후로 한 언론의 태도 차이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었다.
이는 리즈 지역의 여성들을 주축으로 하여 ‘밤 되찾기(Reclaim the Night)’ 행진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달인 7월 24일에 서트클리프는 브래드포드에서 마우린 롱(Maureen Long)을 공격했지만 마우린의 언니가 현장을 목격하자 도주하였다.
마우린 롱은 9주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당시 목격자가 목격한 자동차의 브랜드를 잘못 기억하는 바람에 수사에 혼선이 빚어졌고, 이는 수사가 지연되는 원인이 되었다.
1977년 10월 1일, 서트클리프는 맨체스터 출신의 26세 매춘부 진 조던(Jean Jordan)을 습격해 살해하였다.
조던의 시신은 10월 9일에 지역 낙농 노동자이자 미래의 배우인 브루스 존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진이 가지고 있던 핸드백 속에 남아있던 5파운드 지폐는 쉽레이(Shipley)와 빙레이(Bingley)에 있는 미들랜드 은행(Midland Bank)의 지점으로 추적되었고, 경찰은 은행 운영에 대한 분석을 통해 조사 범위를 이 지폐를 받았던 8,000명의 직원으로 좁힐 수 있었다.
3개월 동안 경찰은 서트클리프를 포함하여 5,000명의 남성을 조사했으나 서트클리프는 사건 당시 가족모임에 참석했다고 증언했고, 이 증언이 사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용의선상에서 우선 배제되었다.
결국 5파운드 지폐에 대한 몇 주간의 조사는 아무 결과도 얻지 못했다.
12월 14일, 서트클리프는 리즈 출신의 매춘부인 마릴린 무어(Marilyn Moore)를 공격했다.
마릴린은 살아 남았고 경찰에 공격자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타이어 자국은 이전 마우린 롱 공격사건의 타이어 자국과 일치했다.
경찰은 1978년 1월에 5파운드 지폐를 받은 사람에 대한 수색을 중단했다.
서트클리프는 이에 대해 수사를 받았지만 더 이상 조사를 받지는 않았다.
그 달에 그는 브래드포드에서 21세 매춘부 이본 피어슨(Yvonne Pearson)을 습격해 망치로 머리를 때린 다음 이본의 얼굴에 총을 쏴 살해한 후 럼브 레인(Lumb Lane) 근처에 유기하였다.
10일 후에 서트클리프는 허더스필드(Huddersfield)에서 18세 매춘부 헬렌 리트카(Helen Rytka)를 차량에 태운후 내리려는 헬렌의 머리를 다섯 번 내리친 후 옷을 벗기고 가슴을 찔러 살해했다.
헬렌 리트카의 시신은 게러드(Garrards)의 철로 밑에서 3일 후에 발견되었다.
1978년 9월 1일, 서트클리프는 브래드포드 대학교 학생인 20세의 바버라 리치(Barbara Leach)를 살해하고 대학교 숙소 근처 애스그로브 13번 거리(13 Ashgrove Street) 벽돌 더미 뒤편에 유기하였다.
바버라 리치 역시 매춘부가 아니었고 이는 다시 대중을 경악시켰다.
이전에 진 조던 사건에서 발견된 5파운드 지폐로 인해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 중 바버라 리치 사건으로 다시 추려진 300명의 유력 용의자 중엔 피터 서트클리프가 있었으나 그는 강하게 의심을 받진 않았다.
15번째 사건은 1979년 4월 4일, 핼리팩스의 세이빌 파크 무어(Savile Park Moor)에서 발생했다.
서트클리프는 퇴근하던 19세의 점원 조세핀 위테이커(Josephine Whitaker)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조세핀 역시 매춘부가 아니었다.
이때 당시 살인 현장과 밴드 조이 디비전의 투어 동선과 겹치는 바람에 조이 디비전에서 활동하던 베이시스트 피터 훅과 드러머 스티븐 모리스가 경찰 쪽에서 용의자 선상에 오른적이 있다.
당시 언론에 공표가 되지 않았는지, 2011년 발매된 피터 훅의 회고록에서 처음 밝혀진 사실.
피터 훅에 따르면 대부분 위험한 지역으로 가는 수상쩍은 프로모터가 주도한 공연 스케줄을 따랐다가 수사 중이던 경찰이 차량 번호판 조사 도중 스티븐과 피터 훅의 차량 번호판이 두 번이나 걸려서 심문했다.
스티븐은 심문 받던 도중 상당히 패닉하는 바람에 경찰서로 소환되었고, 스티븐의 엄마가 와야 했다.
1980년 4월, 서트클리프는 음주 운전으로 체포되었다.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던 1980년 8월 20일 밤에 서트클리프는 47세의 마르게리트 웰스(Marguerite Walls)를 살해하였고, 1980년 11월 17일 밤에는 리즈 대학교 학생인 20세의 재클린 힐(Jacqueline Hill)을 살해하였다.
또한 이 사이에는 미수에 그친 사건이 3건 있었는데, 1980년 9월 24일 리즈에서 우파디아 반다라(Uphadya Bandara)가 공격당했고, 10월 25일에는 리즈대학교 운동장에서 24세의 대학생 마우린 리에(Maureen Lea)가, 11월 5일 밤에는 허더즈필드에서 16세 테레사 사익스(Theresa Sykes)가 공격받았다.
1980년 11월 25일, 서트클리프의 동료인 트레버 버드셀(Trevor Birdsall)은 그를 용의자로 경찰에 신고하였고, 서트클리프는 최종 체포 및 유죄 판결을 받기 전에 사건과 관련하여 총 9번에 걸쳐 경찰의 심문을 받았다.
3. 매체
더 리퍼: 넷플릭스에서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해당 다큐가 공개하기 한 달 전에 피터 서트클리프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사망했다.
Archives of Pain: 1994년 발매된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의 곡.
도입부가 그의 재판 기록에서 발췌했고, 목소리는 희생자 어머니의 음성이다.
첫댓글 미친새끼네 지도 매춘하는주제에 혐오ㅋㅋㅋ... 더러우면 남자들 죽이고 재기나 할것이지 또 약한 여자들만 죽이지 쪼다새끼
시작부터 끝까지 관계된 모든 사람이 여혐범벅이네 심지어 대중마젇ᆢ
십색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