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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성시대 치르치르 미치르
일단 명확한 사실 하나는 명시해두자. 이 세계는 망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죽어가고 있다.
딱히 엄청나게 큰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생명체가 때가 되면 죽는 것처럼 세계 역시 때가 되면 죽는 것이다.
뭐, 불탄 자리에 다시 새싹이 돋듯 죽어가는 세계에도 새로운 생명체들이 찾아온다.
새로운 생명체들이 다시 세계를 되살리겠지.
근데 왜 나는 남겨뒀냐.
죽은 세계에서 살아가기
-미드나잇 썸머쇼-
내가 뭐 특별한 능력을 가졌거나 대단히 큰일을 했거나 엄청난 운으로 닥쳐오는 재앙을 피했거나 한 건 아니다. 내가 남겨진 아니, 살아남은 건 그냥이다. 어쩌다보니 다 파괴되고 다 죽고 이상한 생명체들이나 돌아다니고 이상한 방송이나 나오는 이 요상망측한 세계에서 오늘도 나는 살아있으니까 일단 살아간다.
사실 살기에는 딱히 나쁜 조건은 아니다. 아직 덜 부서진 집에 마음대로 들어가서 잘 수도 있고, 유통기한이 좀 남아있는 통조림도 까먹고, 어디서 송출하는지 모를 이상한 방송도 볼 수 있고. 그래. 오늘은 방송 이야기나 좀 해보자.
미드나잇 썸머쇼는 갑자기 방송되는 티비쇼다. 티비 채널을 한참 돌리고 있다보면 화면이 검게 변했다가 점점 밝아지며 쇼가 시작된다. 물론, 나오는 방송은 이거 하나다. 채널을 돌리는 건 그냥 이 방송을 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미드나잇 썸머쇼의 사회자는 항상 기분이 좋아보인다. 방송인이라 그런가.
사회자는 검은 정장에 검은 중절모를 쓰고 있다. 얼굴엔 항상 가면을 쓰고 있는데, 그때그때 가면은 바뀐다. 아, 노래소리가 들린다. 방송 시작이다.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웰컴 웰컴!! 미드나잇 썸머쇼를 시청하시고 계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귀염둥이 사회자 διάβολος입니다! 네? 발음이 어려우세요? 그중에 무엇이냐고요? 걱정 마세요! 여러분이 제 이름을 부를 일은 많지 않으니까요!
그건..아무래도 그렇지. 사회자가 귀염둥인 건 잘 모르겠지만. 오늘 가면은 양이다.
지금 이 쇼를 시청하시는 분들은 당연히 다 성인이겠죠? 그야, 저희 프로는 심야 프로니까요! 부모님의 출장/실종/사망등의 이유로 보호자 없이 이 채널을 시청하고 있는 어린이가 있다면, 어서 주무시길 바랍니다! 티비는 끄고요! 예로부터 티비는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구요!
맞는 말이다. 티비는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 근데 이 세계에서는 할 게 많지 않다. 시간을 떼울 수 있다면 이거라도 보는 게 낫다. ...어린이는...아직 있을지 모르겠다.
아, 어른은 괜찮냐고요? 하하하하하. 그런 질문 참 많이 받죠. 어른은 괜찮답니다! 이미 뇌가 티비에 절여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어린이들은, 아직 뽀송뽀송한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뇌가 곤죽이 되기 전에 티비를 끄는 게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침대 밑 괴물이 왁!!!! 하고 잡아먹어 버릴 거랍니다!
말이 너무 심하다. 곤죽까지는 아니다. 그리고 침대 밑에 뭐가 어쩐다고...?
응? 아니야? 아, 여긴 이 정서가 아니라고? 생방송 중이니까 넘어갑시다.
응, 그치. 여긴 아무래도 한국이니까. 미국에도 동시 송출중일까? 그러고보면 해외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다른 나라에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일단 내가 돌아다녀 본 지역에는 사람은 없었다.
자자. 쇼를 시청하고 계신 어른 여러분! 이 늦은 시간까지 의미 없이 화면을 넘기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마도 우리 쇼를 시청하기 위해서였겠죠?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쇼의 시청자가 될 자격을 얻으셨어요!
고마워요, 사회자!
이쯤이면 궁금한 게 있겠죠? 어라아아~? 지금은 자정도 아니고 여름도 아닌데 왜 미드나잇 썸머 쇼지이~? 에이, 다 그런거죠. 그, 그, 그으으으으- 뭐죠? 뭐라고 하더라, 그런걸?
관용구.
아! 관용구! 그래에에~ 관용구인거죠. 자고로 오싹오싹한 이야기는 여름밤, 늦은 저녁에 하는 게 제맛이니까!
매번 나오는 레퍼토리다. 사회자가 진짜로 관용구라는 단어를 잊는 건지, 그냥 쇼의 한 부분인지는 모르겠다.
자아- 오늘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긴장감을 주는 북소리 주시고!
와! 오늘의 주제는 깜짝 상자네요! 깜짝 상자는 정말 두근거리는 물건이죠.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 설렘!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푸는 것과 같다니까요. 자. 어디 한번 볼까요~?
이야. 보이시나요 여러분?
사회자가 손에 뭔가를 들고는 있는데 잘 보이지는 않는다. 눈을 찌푸리고 있자니 사회자가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온다.
아, 조금 먼가요? 그럼 제가 가까이 보여드리죠! 지금은 어때요, 잘 보이죠? 이 디테일 보세요. 손가락을 이용해서 이렇게 예쁜 리본을 만들 수 있는 건 우리 제작진뿐일 거예요.
음~ 리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좀 긁혔나. 상처가 있네요......
예쁘게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사회자가 손에 들고 있는 건 상자 모양의...접힌 인간이다. 접힌 인간이라는 표현이 맞는 진 모르겠는데, 일단 상자의 가장 윗부분에 사람 손가락을 묶어 리본을 만들어놨다. 이 방송에는 가끔 저런 게 나온다. 처음 봤을 때는 역겹고, 무섭고, 보고 나서 한참동안 먹은 것도 없는데 위액을 토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신경써봐야 내 정신건강에만 해롭지.
뭐! 중요한 건 겉모양이 아니죠! 자아-풀어볼까요? 귀찮게 꿈틀거리죠? 하지만 능숙한 사회자인 저!는 이러어어엏게~ 쨔쟌! 쉽게 풀렸죠?
왁!!!
왁, 놀라라. 와, 진짜 놀랐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오랜만에 이렇게 놀라본다. 사회자님, 쇼에 너무 충실하시군요. 저 살짝 눈물도 났어요.
오...오 이건 놀랍군요. 상자 안에 또 상자가 있네요! 우리 제작진들이 심혈을 많이 기울인 모양이에요. 사람을 이렇게 차곡차곡, 죽지 않게 접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 시청자 여러분은 다 아시죠?
그...사람이 아니라 어떤 생물체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저렇게 접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자아~ 마저 열어봅시다. 접힌 다리를 풀며어어언~ 이러엏게~
퍼엉! 하고, 머리가 나오네요!
사람 머리다. 사람 머리가 중앙에서 튀어나와서, 울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 것 같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뭐라고 외치는데, 아마 살려달라는 소리겠지. 이 쇼의 나름 애청자로서 말하면, 그건 불가능하다. 아마도 저 사람은―
그리고 한 번 더어~ 퍼어어엉!
터졌다.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리게 된다. 안녕히 가세요, 어디에 사는지 모를 이름 모를 누군가.
어디서 본 사람 같기도 한데 제 착각이겠죠.
아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학!!! 오늘도 즐거운 쇼였네요! 다음번엔 또 어떤 즐거운 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오~? 여러분, 기대되시나요~?
네~니요! 솔직히, 오늘같은 쇼는 좀 힘들다. 다음번엔 좀 더 온건한 쇼로 부탁해요. 전에 했던 환상의 나라 쇼가 좋았는데.
음, 음, 음! 그렇군요! 좋아요~! 그럼, 이제 어른들도 다 잘 시간이네요! 다같이 꿈나라로 갑시다! 오늘도 좋은 밤, 좋은 아침, 좋은 하루를 기원하는 저는 미드나잇 썸머쑈의 사회자였습니다. 다들, 안녀어여엉!
안녀엉~!
티비를 향해 손을 흔들자 이내 픽, 하고 화면이 꺼진다.
아. 오늘도 충실하지 못한 그저그런 하루였다.
죽어가는 세계에서 하루하루 힘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첫댓글 하나씩 저렇ㄱㅔ 죽어가고 있는거야? ㅠ 그롬 다음이 내가 될수도 있나 씻핥
도입부 좋다 죽어가는 세계에 남겨진 주인공은 사실 수많은 남겨진 이 중 하나 아닐까? 매일 그들 중 몇명이 미드나잇 썸머쇼에 잡혀가서 희생당하는거지...
사회자랑 의사소통이 되고있어!!!!
접혀진인간인데 살아있다니 너무 끔찍하구만...
넘재미잇다…..
너무 좋아서 이마 박박 치다가 거북목 완치
오오 재밌다!!!
재밌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 잡아다가 저런 쇼 하는건가.. 화자도 곧 잡혀가는거 아니냐구..
세계관 진짜 흥미돋이다......
너무 재밌어 미드나잇 하는거보니끄 악마와의 토크쇼 생각낰ㅋㅋ
내 생각 듣고 있는 것 같은데요 사회자 양반
소통하기있는겨!?
내 말을 다 알아들시는 건가요 ㅠ?
으아아아아 너무끔찍해 상황이 ...
세계관 미쳣다...
어유...
어라라 대화중인거 같은데요 ㄷㄷ
이게 뭐람... 무서워
뭐야 무슨일이일어난거야
저 부분드래그아닌건가???
웅 그냥 티비 화면을 표현해보고 싶었어..!
@치르치르 미치르 아 그렇구나!혹시나싶어서 다긁어보려하는..근데진짜표현잘했다
더허헉...뭐예요
헉 떨린다 넘 재밌을것같아
개존잼 정식연재해주라 결제하게
무슨일이야이게
존잼....
머리가 비상하다 진짜 너무 재밌어
맨바깥쪽 사람이 어떻게 접힌걸까..
등을 바닥에 두고 움크린듯이 접힌걸까
배를 바닥에 두고 유연성과 고문 그 사이의 정도로 접힐걸까
헐 이런 거 짱 좋아하는데 연재되고 있었다니.
나도 어떻게 접혀있능건지 궁금하다
으아아앙아아아아아악 왁 한글자에 나도 놀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