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년 전의 일이다. 내가 갓 PK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환자케이스 발표 슬라이드 만드느라 밤새던 때다. 파워내과 보다가 모처럼 원문좀 있으면 쳐서 붙이려고 학교 도서열람실 왔다가 허탕치고 불이나 끄고 가자 해서 뒷문으로 나가려는데, 구석 정보검색용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한손으로 마우스만 끄적거리던 나이 좀 들어보이는 실습생 한분이 있었다. 같은 내과 실습생인 듯 하여 혹시 슬라이드 만들어 놓은거 있으면 가져가서 참고나 할 심산으로 복사좀 해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환자케이스 피피티 처음이오? 칼피스 한 통 사 올 돈 없으면 그냥 대충 긁어다 붙이시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걸로 발표해봐야 교수님한테 완전 난도질 당하고 사후에 던트샘까지 합세해 니가 한의사냐부터 시작해서 공고나왔냐느니 장사나 시작하라느니 떡실신 당할게 뻔하니, 쿨피스 한통 사올테니까 좀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매점에 다녀오니 그는 잠자코 열심히 편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70개쯤 되는 자기가 모은 케이스 파일중에 하나 붙여넣기 해 주는듯 하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줄맞추고 폰트잡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다듬고 있었다.
인제 진단근거도 잡히고 치료까지 다 나와 무난히 넘어갈 정도는 된거 같아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오늘도 열시까지 당직서고 내일 아침 드레싱땜에 일찍 잘 계획이었던 것이라, 졸리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었다.
“그정도만 해도 교수님이 화까지 내시지는 않을것 같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프로그레스 노트랑 디지즈 리뷰가 꼼꼼해야 발표가 되지,
진단치료만 있다고 케이스가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읽을 놈이 좋다는데 무얼 더 넣겠단 말이오? 거, 외고집이시구먼,
내일 드레싱이랑 아침컨퍼런스 땜에 일찍 가아 된다 했잖소.”
노인은 퉁명스럽게.
“방에나 가서 만드시우. 난 내꺼나 하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어차피 두시간 자나 못자나 하루종일 졸리는건 마찬가지인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만들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군데군데 빵꾸가 난다니까. 환자정보란 있는대로 모아서 깔 껀덕지를 주지 말아야지, 폰트 꾸미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피피티 프로그램을 최소화해 작업 표시줄에 내려놓고 태연스럽게 디씨인사이드 여친갤에 들어가 리플을 달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마우스 휠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파워포인트였다.
잠자기도 다 틀렸고 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편집을 해 가지고 통과가 될 턱이 없다. 교수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칼피스는 또 쳐먹는다. 내과 의국 분위기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PK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 실습생은 태연히 고개를 들이대고 여친갤 짤방을 감상하고 있다. 그때, 그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폐인다워 보이고, 여유있는 눈매와 늘어진 학교 티셔츠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다음날 아침컨퍼런스 시간에 와서 발표를 끝냈더니, 교수님도 해리슨을 참고해 환자를 잘 봤다고 야단이다. 첫턴답지 않게 파워내과도 안본것 같아서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만들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우리조 옵세 학우의 설명을 들어 보니, 영어가 너무 많으면 해석이 꼬여서 진단근거가 부족해 깨지기 쉽고 같은 슬라이드장수라도 지적이 많이 나오며, 한글만 너무 많으면 파워내과 타이핑한거 다 뽀록나고 완전 개박살 나서 첫턴부터 지진아로 찍히기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발표족보는 워낙에 영문원서 레퍼런스가 많고 해석도 난해하긴 하지만 일단 한번 만들어서 해리슨에서 딴 부분에 굵은글씨로 표시해 놓기만 하면 교수님이 좀처럼 폭발하시는 일이 없고, 가끔 R/O 목록이 한두개 빠져도 머리 긁적이며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자식 그럴수도 있지 하며 좀처럼 뭐라 하시는 일이 없다. 이것을 족보 탄다고 한다. 그러나 요새 나온 족보대로 따라가다 진단근거가 하나 빠져서 감별이 안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특히나 파워내과에 나온 왕족을 어설프게 영어로 번역해놓은 티가 나면 그날은 완전 주물럭 당하고 실습기간 내내 오전 오후 회진시간마다 농락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요새는 다음턴되면 기억도 안나게 될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굳이 생고생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디지즈 리뷰만 해도 그렇다. 리뷰 작성할때 정의 역학 진단 치료 등등 원서에 충실해서 만들어 놓은 것을 복사해 붙이면 이게 제대로 된건가 하고 한번 쭉 보기에도 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의국 앞에서 발표까지 하려면 시간도 걸린다. 하지만 이게 왜 이러는지 이유는 묻지 말고 거의 외울 정도로 머리에 집어넣지 않으면 안된다. 일단 붙이고 나면 그냥 무조건 달달 외우는거다. 이게 바로 족보다. 지금은 그런 믿음이 없다. 이게 파워내과를 영문번역한건지 네이버 지식인에서 긁은건지 레퍼런스 적을 리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곧이곧대로 붙여서 달달 외울 사람도 없다.
옛날 PK들은 원서은 원서요, 시험이나 발표땐 오로지 족보지만, 환자케이스를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한군데도 지적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원서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나도 공부좀 하는구나 낄낄 하는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발표족보들을 만들어 냈다.
이 슬라이드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어떻게 통과를 해 먹는담.”하던 말은 “그런 PK선생님이 나 같은 날라리 실습생에게 한갖 장수생 옵세 취급을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칭찬받는 발표자료가 탄생할 수 있담.”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분을 찾아가서 보름달 빵에 바나나우유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등교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분이 앉았던 자리에 그분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디씨인사이드 여친갤 게시물 리스트를 바라보았다. 슬슬 오늘도 달릴 채비를 하며 러너의 등장을 기다리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 그때 그 PK 노인이 바로 말로만 듣던 러너였구나. 열심히 피피티 파일을 편집하다 우연히 여친갤 짤방을 바라보며 달릴 준비를 하던 그분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옵세는 도서관에서 공부하지 않는다. 남들 보는 곳에선 컴질을 하다가 방에서 하루종일 원서를 정독할 뿐.'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오늘, 집에 들어갔더니 룸메이트가 파워포인트 만들다가 후달리는 표정으로 해리슨 Index를 들여다보며 되도 않는 원서정독을 시도하고 있었다. 전에 로빈슨 영문판 읽으면서 도대체 이딴걸 다 읽는 싸이코가 있긴 할까 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고 보니 본과 1학년 1학기 이후로 원서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영문 읽느라 혀 굴러가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In United States, the prevalence rate of this disease is blabla..." 듣기만 해도 R/O intracranial hemorrhage 뜨는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1년 전 환자케이스 만들던 이름모를 PK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첫댓글 ㄲㄲㄲ 재밌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구냐 진짜 잘썼다 캐공감
예1때 본4형이 시키셔서 ppt 존나게 네이버에서 자료찾아서 copy & paste 해서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감별진단 이딴거 뜻 하나도 모르고 하늘같은 본4형님이 시키신거라 존나 덜덜거리며 고민하다가 걍 막 대충 만들었는데 잘했다고 칭찬받고...ㅋㅋㅋ 하나도 모르던 그때에 어떻게 했나 싶다..
디씨 의갤 구월팬더가 쓴거래 ㅋㅋ 퍼왔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