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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성시대 치르치르 미치르
죽은 세계에서 살아가기(5)
-학교 수업-
안녕하세요, 여러분(0명)
저는 지금 매우 난감한 상황이랍니다. 왜냐구요? 팔자에도 없는 학교 수업을 듣고 있거든요.
뭐야. 세계 죽었다매. 무슨 학교고 뭔 수업이야? 사실 다 망상인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들 하고 계시죠? 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걸 보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니, 제발. 내가 왜 고등학교 수업을 들어야 하냐고요. 나는 심지어 2n살이라고요.
속으로 암만 혼자 불만은 터트려봤자 내 눈앞에 있는 건 현실이었다. 눈앞에는 녹색 칠판이 있었고, 칠판에는 탁, 탁, 탁 필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뒤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아서 최대한 또랑또랑한 눈으로 칠판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없는 손에 연필을 쥔 척하고, 사각거리는 소리에 맞춰 무언가를 받아적는 척하고 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학교는 생각보다 튼튼하게 지어져 있다. 무너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 건물들 중 가장 원탑은 학교다. 가끔 운이 좋으면 거의 원래 모습 그대로의 학교에서 잘 수 있을 때도 있다.
게다가 학교 안에는 생각보다 유용한 물건이 많다. 여러 조리도구는 물론이고 현시점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종이나 필기구도 챙길 수 있다.
지금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적고있는 글도 빈 학교들에서 그런 것들을 털어왔기에 가능한거다.
글을 쓰는 건 좋은 취미다. 일단 누군가랑 의사소통하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고, 글도 계속 읽을 수 있고, 멍청해지는 듯한 느낌이 좀 완화되기도 한다. 아무 말도 안하고 한달가량 지내면 뇌가 약간 녹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멍청해진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서 제가 수업을 듣겠다는 말은 아니었는데요.
그리고 같이 수업 듣는 애들과 선생님은... 저랑 종이 다른 것 같은데요.
아니, 다른 개체들에 비하면 비교적 사람처럼 보이긴 했다. 머리 하나, 팔 두 개, 다리 두 개. 눈코입이 없고 한 손에 손가락 같은 게 10개씩 달려있는 것만 빼면. 발가락은 안보여서 몇 개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수업 중이었다. 당당하게 앞문을 열고 들어가자 눈이 없는 그 학생들과 선생님이 한번에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데....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선생님이 빈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수업 중에 꼭 지켜주세요~
수업 중인지 몰랐는데요! 이 학교 운영 중인가요.....!!
...진짜 이상한 건, 얘들 말을 알아먹지는 못하겠는데 문자는 읽힌다는거다. 예전에 만났던 그 노란 막대기들 덕분이지 않을까, 하고 추측만 하는 중이다.
기왕 이럴 거 말도 알아듣게 해주지... 아니, 아니다. 쟤네랑 말이 다 통하면 그게 더 힘들 것 같다.
수업을 들을 생각이 없었기에 마저 뒷걸음질로 교실을 빠져나가려 하자 선생님의 몸이 샛노래졌다. 선생님은 노랗게 깜빡거리며 종이를 손으로 툭툭 쳤다.
뭔데요 이게.
~수업 중에 꼭 지켜주세요~
일 번.
선생님과 학생들은 수업을 방해받는 걸 싫어한답니다. 수업에 참여했다면 끝까지 성실한 자세로 수업에 임해주세요. 수업에 집중하지 않거나, 수업 중간에 나가거나, 수업 중에 고성과 같은 행위로 수업을 방해하거나, 수업 시간에 음식을 먹는 행동 등은 나쁜 학생입니다. 나쁜 학생은 교칙에 의해 회초리부터 신체 절단까지의 체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관련 사항은 학칙 280번부터 340번까지를 참고해주세요.
이 번.
선생님의 질문에는 그것이 어떤 질문이든 성심성의껏 대답하세요. 선생님의 질문을 무시하는 학생은 당연히 나쁜 학생이겠죠? 해당 사항은 학칙 170조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학칙을 어겨서 독방으로 가는 문제아 학생이 없길 바라요!
삼 번.
수업 중에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고 싶다거나, 큰 소리로 책을 낭독하고 싶다거나, 비명을 지르고 싶다거나, 살을 파버리고 싶다거나, 눈알을 쥐어짜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성숙한 학생이라면 잠깐의 충동 정도는 참을 수 있어야겠죠? 충동을 참지 못하면 어떻게 되냐구요? 일 번 규칙을 다시 한번 참고해주세요.
사 번.
창문으로 뛰어내려.
오 번.
친구들을 힐끔거리지 마세요. 상대방을 힐끔거리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랍니다. 특히 수업 중이라면 친구의 필기를 베끼거나, 친구를 괴롭히려는 목적으로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겠죠? 우리 학교는 자신의 노력 없이 무언가를 성취하는 행위나 학교 폭력을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철저하게 앞만 바라보며 선생님의 설명에 집중해주세요.
+) 덧붙입니다. 수업 시간에 필기를 하지 않다니, 불성실한 학생이군요! 우리 학교는 학생들의 성취를 위해서 수업이 끝나면 쪽지 시험을 실시한답니다. 쪽지 시험에서 80점 이하로 맞은 학생들은 재수업을, 재수업에서도 80점 이하로 맞은 학생들은 방과후를, 방과후를 듣고도 쪽지 시험 성적이 나오지 않는 학생들은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게 된답니다.
학교 기숙사에 들어간 이후로는 외부로 나올 수 없습니다. 학생들은 기숙사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 또 조심 합시다!
육 번.
자리에 바른 자세로 앉아주세요. 구부정한 자세로 앉는 것은 학생의 신체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겠죠?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있다면 선생님께서 그 자세가 가장 바른 자세라고 생각하셔서 그 자세로 학생의 신체를 고정할 수 있어요. 원치 않는 신체 구조를 갖고 싶은 학생은 없겠죠? 항상 바른 자세를 유지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선생님이 가리킨 자리에 가 앉았다.
수업을 듣는 도중에 앞자리에 앉은 애(다른 표현을 모르겠다. 한 개라고 하기엔 물건이 아니고 한 녀석...은 너무 친해보이잖아.)가 벌떡 일어나서 소프라노 톤으로 노래를 흥얼거렸고 이내 머리가 터졌다.
십 분 정도나 지났을까. 내 뒷자리에 앉은 애가 갑자기 앞뒤로 몸을 흔들거리더니 자기 팔을 갉작거리기 시작했다. 느낌이 그랬다는 거다. 뭔가를 물어뜯는 소리가 나더라고. 물어뜯는 게 팔인지 다리인지 손인지 몸통인지 알 바는 아니었지만, 일단 팔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면 잘려서 내 자리로 날아온 게 여전히 꿈틀거리는 10개의 손가락을 가진 한쪽 팔이었으니까.
이때부터는 필사적으로 미소 지으며 칠판만 바라보았다. 저 생명체들은 신체 절단이 단순한 체벌일지 모르지만 나는 생명의 위협이었으니까. 약한 인간 좀 살려주세요...!
너무너무 졸리고, 한번은 일어나서 교실을 달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한국인의 의지로 이겨냈다. 내가 직장 상사도 총으로 쏴죽이고 싶은 충동도 이겨냈던 K-직장인이었다 이거야..!
하지만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나눠준 쪽지 시험은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일단 옆자리 애한테 필기구 비슷한 걸 빌리긴 했는데.
1. 현 행성의 소멸연도와 생성연도를 적은 후, 소멸과 생성 사이의 소각 과정에 대해 적으시오.
2. 천왕성 23-1번지에서 34년도에 발생한 사건을 적으시오.
3. 마젤란 23,789-927의 유명 유적지를 세 개 이상 적으시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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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내 인생은 여기까지였나봐요. 소멸연도는 대충 알긴 하겠는데 그거 말곤 한 개도 모르겠네요.
와들와들 떨며 백지인 시험지를 선생님에게 내자 선생님의 몸이 빨개졌다가 시험지를 잡고있는 내 손을 보고는 급격하게 파래졌다. 선생님은 빨개졌다, 노래졌다, 파래졌다, 다홍색이 됐다가, 이내 흰색으로 변하고선 20개의 손가락으로 우아하게 내 시험지를 가져갔다.
그리곤 내 한쪽 손을 가져가서는(엄마야!) 조심스레 손가락을 하나하나 만졌다. 손 위로 회색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우냐?
선생님은 한참동안이나 내 손을 만지작대더니 이내 양손을 모아 교실 문을 가리켰다. 그 와중에 두 손가락은 아마도 눈이 있을 위치에서 떨어지는 회색 액체를 닦아내고 있었다.
........제 손가락이 총 열 개밖에 없어서 충격을 먹으셨나요.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꾸벅, 90도 인사를 하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 학칙도 있을 게 분명해서 종종걸음으로 학교를 나오자 이내 수업 종이 쳤다.
운동장에서 바라본 교실엔 그 무엇도 없었다.
팔자에도 없는 수업 들은 썰.SSUL
다음회차는 소로마을 주민들 인터뷰인데요(안물안궁)
쓰고 있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아직도 소로마을을 찾아주는 홍시들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주민들한테 궁금한 게 있다면 같이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죽은세계는 대략 10화정도에서 끝날 것 같아요!
첫댓글 재밌다ㅋㅋㅋㅋ
혹시 김여시 선생님이십니까
너무 재밋서요... 저는 궁금한건 없구요... 많은 분량을 원합니다,, 글 길게 써주세요..넘잼써..
멸종한 인간인걸 알아채셨나봐 멸종희귀종 불쌍한 인간 ㅜ
불쌍해서 보내준거야?ㅠㅋㅋㅋㅋ
아 너무 재밌어요.. 또조요 또조요..
와 진짜 이런 생각 어케해...
선생님 불쌍한 인간이라는걸 알아보셨나봐요 다행입니다
이것만 기다리는중
사번은 뭐지..? 왜 창문으로 뛰어내리라는 걸까
ㄷㄷㄷ그래도 다행히 선생님이라 그런지 인자하시네;; 무사히 보내주시고
불쌍해서 봐준겨? ㅋㅌㅋ 너무 재밌어
불쌍해서 봐줬나? ㅋㅋㅋㅋㅋㅋㅋ 존잼이다
와 그래도 선생님 착하다 난 창문으로 나가는 결말일줄 ㅋㅋ
그래도 문화?가 다를뿐 기본적으로 다정한 외계인들이네,,
진짜 너무재밌다🥹🧡ㅎㅎㅎㅎ
참스승
ㅋㅋㅋㅋㅋㅋㅋㅋ그냥 보내주네
ㅋㅋㅋ따흐흑 울어주는거였군ㅋㅋ너무 재밋다❤️
너무 재밌다ㅠㅠ 외계인들 입장에서는 주인공이 원시시대때부터 있던 생명체니깐 이상하게 보이겠지..? 그냥 돌연변이라 생각하고 품고 같이 살아주라...
이새끼 장래 어떡하지...? 하고 운 듯 ㅠㅠ 참선생님
학생을 위해 눈물까지 흘려주다니,, 참 스승
진짜 너무 재밌다... 선생님 그래도 착하셔
기다리고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운 거야?? ㅋㅋㅋㅋㅋㅋ 너무 재밌다
포기했냐고ㅠㅠ
그냥 보내줘서 다행이다ㅜㅜㅋㅋㅋ
성적 보고 울어주시네
아 손가락 때문이구낰ㅋㅋ
아니 근데 뛰어내려 저건 뭐지…..
몇 층이길래
아 선생님 운거 어케 ㅜㅜㅋㅋㅋㅋㅋ
아놔ㅋㅋㅋㅋㅋㅋㅋㅋㅋ쪽지시험 어떡하나 싶었는데 봐줬네 감사합니다..
그래요 쌤 좀 봐주세요...ㅠㅋㅋㅋㅋㅋ
애가 얼마나 고생하겠음ㅠㅠ
쟤네도 눈물흘리는거 보면 인간처럼 측은지심이 드는거겠지..? 뭐 암튼 착하다고 해야할지ㅠㅠㅠ귀엽고 웃긴데 존나안쓰러워ㅠㅠ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아 웃기다 ㅠ 봐주셨어.. 감사합니다... 근데. 창문으로 뛰어내리라는 건 뭔데!!!!!!
선생님 그래도 따수우시네요…
선생님이 봐준거야?ㅠ 감동..
오 손가락 잘리는 줄 알고 식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