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 단원들이 해미로 성지 여행을 떠나는 아침.
주임 신부님의 강복과 총회장님, 꼬미시움 단장부단장님의 격려를 받으며 본당을 출발.
일기 예보에 중부지방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하루를 주님께 맡기고,
하루 일정에는 먼 거리인 해미로 떠났다.
뿌연 안개가 가로수의 단풍잎을 퇴색시켰지만 멀리 겹쳐있는 산능성과 작은 집들이
또 다른 시야로 안내해갔다.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 오후 1시나 되어 해미에 도착.
성지 주임 신부님의 기다림으로 조금은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식당 앞에 줄서기부터 먼저 해결하고.
신부님의 안내로 소성당에서 모든 성인의 축일
미사봉헌을 시작, 신부님의 강론말씀이
때때로 양들을 웃음으로 인도하여 대구에서 너댓 시간의 버스 속의 울렁거림을
말금히 해결? 미사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가 등불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것 모양 내겐 우산이 없었다.
또 어쩌랴 윗 옷을 벗어쓰고 성지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생매장지 여숫골 부터 시작.
생매장지라 발굴당시 뼈들이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한다.
아직도 남아있는 시신의 일부인 뼈 조각과 치아를 보존 하여 모셔둔 곳을
참배하면서 그 날의 참담한 신앙인의 모습이 오늘 이 자유와 풍요로운
시간들을 남겨준 선조들임이 가슴 아리게 다가왔다.
젓먹이 아기 딸린 아낙도 있었을텐데......쓰린 마음을 담은 채 진둠벙으로 향했다.
진둠벙.
외나무 다리 위에서 물길에 움푹 패인 곳에 산채로 밀어넣어 둠벙 속에 쳐박혀
죽었다한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동리 사람들 입에 "죄인 둠벙" 이라
일컬어지다가 오늘날 "진둠벙" 이라 불리어진단다.
비 오는 날 진둠벙 모습은 처연함 그 자체였다.
고여있는 물 속에는 그 날의 무명 순교자들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모양 수초가 자라
엉켜 있었다.
무명 순교자들의 남아있는 시신들을 수습하여 함께 봉안한 무덤에 촛불 하나 밝히고
성당 뒤끝을 돌아 나오려니 나뭇잎 떨어져 비에젖은 모양새가 젊은 나이에
이름없이 아스라히 떠나버린 순교자처럼 더욱 곱고 선명한 색깔로 다가왔다.
내가 지금 살아있음을 주님께 감사함에서 일까?
돌아와야할 시간에 쫓겨 젖은 발길로 버스에 올랐다.
기사님의 빨리 가야 한다는 재촉에 해미읍성 호야나무를 보지못하고 가야한다니,
여기까지왔는데 지척에 두고 대구로 향하다니 안되지.
비가와도 볼사람은 비 맞고 볼것인께 20분만조금 달라고 사정해 봐야제
하고, 돌아가는 길목에 잠깐만 세워 달랬드니 고맙게도 들어주셨다.
호야나무.
감옥 바로 옆에 호야나무가 있었다.
목에 오랏줄을 묶어 사람을 켜켜이 목을 메달아 죽었다는 호야나무.
"나무야. 너는 같은 회나무이면서 어찌 사람의 숨통조이는데 쓰이고자 그자리에
있었느냐 "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인간의 사악함이 나무를 이지경으로 만들었구나.
너의 고뇌로움이 알것같다. 아직도 그날의 몸부림을 고스란히 안은채 서러워하는것
같았다.
서문밖 자리개돌 까지는 걸어야하는 거리가있어 아쉬운 발길을 돌려 버스로 향했다.
자리개돌은 사람을 돌에 패대기쳐서 죽었다한다. 아직도 그 때 흘린 피의 흔적이 남아
붉은돌이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패대기 쳐 죽어갔으면 그렇게 깊이
돌에 피가 물들어 아직도 붉게 남아있을까.
대구로 돌아가는 길은 수천명의 무명순교자들이 흘린눈물인양 계속 비가
내렸다. 예정시간보다 늦어지니 총회장님의 걱정스러운 전화를 받고보니
"아차" 또 실수, 죄송스러워 모두 무사히 귀가중이니 나오시지말라고
말씀드렸더니 벌써 성당에 기다리고계신다.
늦은 귀가었지만 두분 수녀님 전임 총회장님, 여성회장님, 총구역장님, 형님, 아우님들
덕분에 뜻깊은 순례였다
첫댓글 벌써 다녀오셨네요. 우리는 14일에 부산 '오륜대'로 갑니다. 덕분에 해미 성지를 덤으로 다녀온 기분이예요.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