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生과 사死의 기로에 서서』
수필가ㆍ시인 주현중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명이 다하는 날까지 세 번 울고, 성공의 기회가 세 번 오고, 생사의 문턱에도 세 번 든다고 한다.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른들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일단 믿는다. 학창시절 스승님 중에 한 분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먼저 우는 것은 어미 뱃속에서 나오면서 한번, 객지에 나가 집 생각 날 때 한번,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한번이라고 한다. 이것은 남자일 경우이고 여자일 경우에는 시집 갈 때 한 번 더 운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세 번의 울 기회가 다 지나갔다. 갓난쟁일 때를 제외하고 나면 학교졸업 후 서울이라는 타관객지에 올라와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집 생각이 나서 울었다. 아마 당시 한 시간 정도는 운 것 같다. 그리고 나머지 한번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인데, 이상하게도 그 때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당시 그런 나를 두고 동네에서는 굉장히 냉정한 아이라고 빈정거렸다. 그러면서도 부자지간에 정이 없어서 그럴 것이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그 이후 몇 년이 흐른 후에야 아버지가 그리워 울게 되었는데, 불혹을 문 앞에 두고 있지만 가장 서럽게 운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고 보니 울기는 세 번 다 운 것인가! 태어날 때 우는 것이야 기뻐서 우는지 슬퍼서 우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말고도 울 일이야 많지만ㆍㆍㆍㆍㆍㆍ,
그리고 성공의 기회와 생사에 대한 이야기인데, 사실 인간의 일생동안 오는 세 번의 기회가 언제 오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죽고 사는 문제도 그렇다. 아마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라는 짐작만 해 본다.
우선, 성공의 기회인데 나에게 있어서 기회는 이미 한번 지나갔다. 누가 들으면 그걸 어찌 아느냐하겠지만,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말이다. 그 지나가버린 기회란 사업 운이었다. 지금껏 직장을 하도 많이 옮겨 다녀서 몇 월 며칠까지는 기억하기 어렵지만, 1992년 겨울이지 싶다.
당시 나는 경기도 수원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나의 주특기는 글 쓰는 작가 말고 요리하는 일이다. 당시 수원역전 로터리를 끼고 돌아 앞 골목에서 ‘해바라기’라는 아담한 경양식레스토랑 주방에서 조리실장으로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해는 넘겨 2월 무렵이었는데, 당시‘광산 金氏’성을 가진 레스토랑 주인이 하루는 영업종료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주방으로 들어와서는 일마치고 약속된 일이 있냐고 물었다.
별 약속 잡힌 일이 없기에 “아무 약속도 없는데요, 왜 그러십니까?”라고 하니, 일 마무리하고 퇴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전에 없던 일이라 궁금증이 인 나머지 속성으로 일을 마무리하고 대기하고 있는데, “이봐! 朱군? 나하고 가 볼 떼가 있네.”라는 말만 하고는 무조건 당신의 자가용에 올라타라는 것이었다. 속으로 도대체 어디를 가기에 장소도 알려주지 않는가 싶어 장소를 물어도 그냥 가보면 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더 묻지 못하고 벙어리냉가슴 앓듯 하고 한참을 달려가서는 어느 골목 앞에 자가용을 세우는데, 장소는 ‘룸싸롱’이었다. 내 머리 자라고 생전처음 가보는 ‘룸싸롱’을 말이다. 어리둥절해진 나는 “여기엔 뭐하시게요, 저랑 술 마시게요?”라고 의중을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은 퉁명스럽게도 “어디 못 올 떼 왔나, 어서 들어가기나 하게.”라며, 들어서자마자 단 둘이 술을 마실 것이니 아가씨는 들이지 말고 ‘섬씽스페셜’을 주문하며 이어 하는 말이 “어이, 긴장되나?”이다.
긴장 되냐고 묻는 말이 더 긴장 되어 온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러고는 뜬금없이 “자네 나랑 동업하려는가?”라는 전혀 기대도 못한 말에 몹시 놀랐다. 당시 내 나이 겨우 26세였다.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동업이라니 더욱이 나에겐 동업을 할 만한 노하우도 자본도 없는 단순한 봉급쟁이뿐이었는데, 그런 엄청난 제의를 하다니 하며 멍해져 있는 나를 보고는 “자네는 기능만 대면되네, 자본은 내가 대고, 거 꾀 괜찮지, 50대 50으로 나누어 주면 되지 않겠나?”라며 히죽 웃는 것이었다.
사실 ‘광산 金氏’집안은 재산이 많았다. 지난 과거에는 다 그러했겠지만 당신의 아버지가 경찰관 정년퇴임을 한 분이라 그간 끌어 모은 재산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실 놀자니 지겹고 영업을 하자니 체질이 아니라, 가게에 하루 종일 붙어 있는 다는 것은 당신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며 나에게 넌지시 의중을 묻는 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제의에 응하지 않았다. 자본 들지 않는 사업으로 50/50이면 남는 장사였지만, 나는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 50/50으로 나누어 준다는 좀 의아스러운 제의였다. 거두절미하고 그 이후 나는 레스토랑을 그만 두고 1년 뒤인가 그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나에게 바보라며 “그냥 줘도 못 먹느냐?”라며 인연이 아니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를 의심했던 게 나의 첫 번째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결과가 되었다. 그 때 나는 사람의 길흉화복이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모르고 지나쳤는지 모를 일이나 아직까지는 성공의 기회는 오지 않고 있다.
이쯤하고 하나 남은 생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이란 때 때로 삶이 몹시 괴로울 때 누구나 한번쯤은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을 게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삶이란 자체가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었던 적이 지금 현재까지 딱 두 번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중학3학년 때였다. 사실 나는 유소년시절 당시 지금으로서는 왜 그랬던가 싶을 정도로 성격이 난폭하였다. 지금은 성격이 180도로 확 변해 있지만 당시 나는 지나치게 내성적이었다. 누가 묻지 않으면 내가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가정환경 탓이기도 했다. 집이 싫고 부모형제가 싫었다. 그리고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긴 하지만 가난이 싫었다. 부모님의 부적절한 관계도 싫었다. 그래서 중3학년 때 가출소년이기도 했다.
중학3년 늦가을 무렵 나는 자살소동을 벌인 일이 있다. 유별나게 내성적인 성격에 비뚤어질 때로 비뚤어진 나는, 학업성적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주로 특기생(특별활동)으로서 개성이 강했다. 과외 특기수업에 큰 관심이 있어 그 방면으로는 일면모를 보였다.
그렇게 졸업을 앞두고 있던 늦가을 어느 날, 당시에는 분기별로 납입하는 공납금(수업료)을 제 때 내지 못하여 늘 담임선생님께 주의를 받게 되었다. 중학3년 내내 그랬다. 그러한 환경에서 나는 비록 공부는 남과 같이 월등히 못하지만, 기타부문에 있어서는 다른 아이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시골학교라고 해도 퇴비를 방학 숙제로 낸다거나, 학기 중 퇴비하는 일이 없지만(농업시간 제외), 당시엔 퇴비나 공병 모으기 또는 폐비닐 모으기도 방학기간 중 숙제이기도 했다. 그런 과외적인 일에는 남보다 뒤지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아마 지금 되돌아 생각해 보면 그것이 학업성적 불량에 대한 대리만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공납금을 내지 못하여 학급에서 공납금 미납입 꼴찌학생으로 낙인이 찍히고 하였는데, 그것이 못마땅해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공납금 내놓으라며 매일 재촉을 하였다. 당시 공납금 4만 원도 안 되는 돈이었지만, 시골아주머니들의 하루 노임이 3천 원이고 보면 당시로서는 목돈인 것이었다.
근 일주일간 재촉을 해도 공납금을 주지 않자, 나는 철딱서니 없게도 ‘이렇게 살아봐야 뭐하느냐?’며 수업 종료 후 집으로 돌아와서는 집 후원에 있던 액체로 된 제초제(잡초 제거제)라는 농약으로 음독자살을 하려했다. 농약병 뚜껑을 따고 입에 들여대는데,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지 이웃에 사는 같은 학년 동창 아버지께서 길을 지나다 우연히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달려와 장화발로 마시려던 농약병을 냅다 차버렸다. 그것이 첫 번째 생사의 문턱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1986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아버지와 이혼을 하신 어머니가 새살림을 차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신가 싶어 어머니가 살고 계신다는 곳을 찾게 되었는데, 찾아간 곳이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장전리라는 가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두메산골산간벽지였다.
사람이 오가는 길이라는 길은 양쪽으로 겹겹이 에워싼 험하고 험한 산골짜기를 갔다가 돌아오는 저녁 무렵,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저녁부터 장마가 지기 시작했다. 계곡이란 장대비로 한 시간만 내려도 금세 급물살로 바뀌곤 하였는데, 평상시 같으면 어린아이도 건널 수 있는 계곡의 폭인데도 불어난 물살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여간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지만 건너야만 했기에 가장 좁은 폭을 찾아 넓이 뛰기로 껑충 뛰어 넘다 그만 빗물에 젖은 이끼에 미끄러져 계곡물에 휩쓸리고 말았다. 순간 나는 ‘나는 죽어선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라는 살고자하는 강한 집념이 생겼다. 그런 와중에 허우적거리면서도 무엇인가 손에 잡히기를 바라며 이리저리 손을 휘저었다.
장맛비에 불어난 계곡물에 휩쓸려 2분 정도만 호흡을 못해도 죽는 일은 번한 일이다. 강물보다 더 위험한 물이 계곡물이기 때문이다. 1분 정도 될까! 그렇게 한참을 휘젓는데 손에 뭔가가 잡혔다. 손에 잡힌 뭔가를 젖 먹던 힘껏 부여잡고 뭍으로 기어올라보니 그것은 버드나무 줄기였다.
이렇게 나는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던 일생동안 세 번의 눈물을 다 흘린 셈이 되었고, 세 번이라는 성공의 기회 중 한 번이 지나갔고, 세 번의 죽을 고비 중 두 번을 천운으로 살아남아 이제 두 번 남은 성공의 기회와 한 번 남은 죽음의 문턱이 기다리고 있다.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남아 있는 모든 기회와 고비가 환희와 무사 무탈하게 잘 넘어갔으면 좋겠다.
요즘 현대사회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더 쉽게 여기고, 많이 가질 수는 없다하더라도 하루 세 끼 굶지 않고 큰 빚지지 않는 이상 행복할 일 일진데, 인터넷 자살사이트까지 성행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며, 불혹의 문턱 앞에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절실히 깨닫는 것은, 어떻게 살던 어떻게 죽든 인간의 생生과 사死는 모두가 운명運命에 달려 있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 인간사에 있어 타고난 운명運命을 믿게 된다. 죽고자하는데 죽어지지 않고, 분명 죽을 사람인데 살아남는 일이 그렇고, 아무 죽을 이유가 없는데도 죽어가는 일이 말이다. 2006년7월 생각할수록 서늘한 장마철에 쓰다.
2007년 동인문집 ≪시인과 사색≫ 3호집으로 발표.
※ 삽입 곡 ; 유현서 낭송가가 낭송한 필자의 詩 ‘침묵이 사랑이라 하오시면’
첫댓글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은 잘 모르는 눈물로 살아온 사람들 많지요...오죽했으면 자살을 했을까 싶기도 하구요...그한순간을 넘기고 잘사는 사람들도 많을텐데요...사람의 선택이 일생에 큰 영향을 주는것은 맞는것 같습니다...성공이나 죽음이나 모든일에 선택을 어찌하느냐가 인생을 좌우한다 할수 있단 거네요....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좋은 시간 되세요.....
그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글은 잘 배우셨네요.. 세상사 일은 지내고 나면 참 영화같은 인생이라서... 좋은 글 자주 보여주셔서 아름다운 세상을 맛보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존경하는 시인님..^^ 주신 글 마음에 소중히 담아갑니다..^^설명절 ~ 즐겁게 보내시고~ 복 가득 받으세요~~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