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5일 [사순 제2주일]
마르코 9,2-10
변화는 신에 대한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변모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모하실 때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어떤 인물일까요? 모세는 진리와 엘리야는 은총과 관련이 깊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엘리야는 불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은총과 진리는 마치 어머니의 젖과 가르침처럼 자녀를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은총과 진리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고 그 새로운 존재의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만, 또 제자들도 새로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기도는 진정 새로 태어남의 시간이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는 기적의 시간입니다.
사순절에 교회에서 권고하는 세 가지 재계, 곧 기도-자선-단식에서 오늘은 기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기도하건 하지 않건 사람은 조금씩 변해갑니다. 더 높은 본성으로 변하든지 더 악해지든지 할 뿐입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것 때문입니다.
안 좋은 것을 받아들일 때는 안 좋게 되고 좋은 것을 받아들일 때는 좋게 변화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악마와 같이 변화되었다면 그런 것들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SNS에 N번방을 만들어 수십 명의 여성을 노예처럼 착취하며 돈을 번 일당이 잡혔습니다.
그중 상당수가 미성년자였습니다.
천재적인 수법으로 사람의 인권을 철저히 짓밟으며 그것을 돈벌이로 이용한 젊은 청년 중
주도자 두 명이 자신들의 아이디 ‘갓갓’(GodGod) ‘붓다’라고 한 것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신이 되려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신으로 불러줬기 때문입니다.
신이 되는 방법은 돈을 소유함으로, 쾌락을 추구함으로, 힘을 과시함으로써입니다.
곧 스스로 주님, 창조자, 심판자가 되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신이 되려 했는데 알고 보니 악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경찰에 잡혀 자신들의 악마와 같은 삶을 끝내줘서 감사하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들은 왜 스스로 신이 되려 했을까요? 세상에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언가 만들어주는 도구입니다.
아기가 짐승에게 사랑받고 길러지면 짐승이 되고 사람에게 길러지면 사람이 되며 하느님께 길러지면 하느님이 됩니다.
그들은 사랑받지 못했기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이때 스스로 높아지는 방법은 돈과 여자, 힘이었던 것이고 그것이 사람을 악마로 만듭니다.
영화 ‘한공주’(2014)는 집단 성폭행을 당한 아이가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 했지만, 부모로부터 외면당하고 학교, 그리고 친구에게마저 외면당함으로써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나옵니다.
목숨을 끊는다는 말도 내가 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안타깝지만, 자기 힘으로는 절대 높은 수준의 본성으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사람을 한층 더 높은 수준의 본성으로 상승시킵니다.
주윤발 배우와 같은 이들은 세상에 가진 전 재산을 아낌없이 주고 가겠다고 말하며 자신들은 매우 검소하게 삽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은 세상이 자기들을 그만큼 사랑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만큼 본성이 상승하여 다른 이들도 들어 높일 줄 압니다.
그의 오랜 친구 오맹달이 술과 쾌락에 빠져 그에게 돈을 빌리려고 왔을 때 주윤발은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 그가 분노로 재기할 수 있도록 감독들에게 전화해서 그를 써 달라고 청합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안 오맹달은 그때 자신에게 주윤발이 돈을 빌려주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주윤발이 준 교훈은 진리이고 그가 오맹달이 재기할 수 있도록 감독에게 한 전화는 은총입니다.
기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아 본성이 새롭게 변모하는 시간입니다.
베드로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변모하여갑니다.
그가 타볼산에서 본 변모는 은총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은 진리를 받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십자가에 거꾸로 순교하면서 또 누군가에게 은총과 진리를 베푸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갓갓이나 붓다는 가지는 것과 즐기는 것, 강해지는 것으로 무언가 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대로 부모로부터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기도라는 시간이 있고 기도하면 은총과 진리로 누구나 작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5일 [사순 제2주일]
복음: 마르 9,1-9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그러나 시선은 언제나 발밑을 향해!
오늘 우리는 타볼산 정상에서 다시 한번, 인간적인, 아니 너무나 인간적인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찰라같은 순간이었지만, 살짝 천국의 한 장면을 맛본 베드로 사도는 무아지경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외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비록 잠깐이지만 맛보고, 느끼고, 만끽한 천국 체험을 붙들고 싶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인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지 않고, 여기 지금, 타볼산 위에서, 광채로 빛나는 인물들 사이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은 동료들과 함께 초막 셋을 짓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잠깐이지만 맛본 천상 체험을 뒤로 하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잠깐동안의 천상을 체험한 사도들이었지만, 하산(下山)해보니, 무정하게도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피곤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고, 어제와 같은 인간 실존의 비참함은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아직 영광과 완성의 때가 도래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스승님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도래할 그 순간을 맞이하려면, 먼저 그분처럼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타볼 산에서의 변모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신원과 정체를 핵심 제자들에게 뚜렷히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외아들이시며, 머지 않아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시겠지만,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으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실 것이며,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실 것이며 세세대대로 세상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형제들과 공동체 식사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 후 기도를 하려고, 계속 분위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식탁에서는 한 형제의 주도로 나라와 민족, 인류와 지구 온난화 등을 주제로 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습니다.
“자, 그럼 나라는 나중에 구하고, 우선 마침 기도부터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의 발밑을 향해야겠습니다.
매일의 귀찮고 짜증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부족하고 죄투성이인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귀찮겠지만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내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맛본 감미로운 천상 체험을 이웃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박해받으며,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2주일 강론>
(2024. 2. 25.)(마르 9,2-10)
<희망>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9,2-6).”
이 이야기는,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영광을 직접 목격했고,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했다는 증언이고,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수난 예고 말씀 때문에 기가 꺾여 있는 제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당신의 본 모습과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 주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고,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눈부시게 빛났다는 뜻인데, 그것을 정확하게 묘사하기가 어려워서 하얀 색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구약시대 예언의 대표자와 율법의 대표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언입니다.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이대로 영원히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뜻이고, 하느님 나라가 너무나도 행복한 곳이라는 증언입니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라는 말과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라는 말은,
그들이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무엇이 그렇게 행복하고 황홀한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사도들도 그것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습니다.
이것도 인간의 언어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냥 “너무나도 행복했고, 황홀했다.” 라는 증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보통,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 모든 희망이 이루어져서
‘더 바랄 것이 없는 곳’으로 표현됩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서 하는 생활입니다.
그곳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미리 당신의 본 모습을 보여 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제자들에게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지를 미리 보여 주신 일이고,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시련과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 일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여기서 ‘보이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인의 희망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는 확실한 희망입니다.
희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7-10).”
여기서 ‘그의 말’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라는 예수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알고, 어디인지 알고 있다고 해도, 지상에서의 인생을 생략하고 그곳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의 ‘인생’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기 때문에 생략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신앙 여정’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앙 여정은 끝까지 충실하게 수행해야 할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수난, 죽음, 부활을 모두 체험하고, 믿고, 증언하게 될 때까지는 예수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