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도 둘째 토요일 오후 3시 탑골공원 앞 정문으로 가면서 '푸르미'노처녀님 어디 있느냐고 손전화로 문자를 보냈더니, 벌써 와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 어느새 낯익은 상기된 얼굴이다. 첫인상 때 보다 더 예쁘게 보였다. 우선 웃는 얼굴로 악수부터 했죠. 먼저 와서 판을 벌려놓은 조아세(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세상) 회원들이 홍보물(신문) 배포를 준비하고 있는 데 도와주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이 자리에서, 옥천의 물총(안티조선) 전정표님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또 한 분이신 김계명님, 이들은 '언론개혁촉구 국민서명운동 및 조선일보 바로 알리기' 100일 째를 하루 앞두고 전국을 두루 거처 서울에 입성한 것이다. 이들이 전국을 순회하는 동안 욕설과 삿대질하는 사람 등, 그 지역 조선일보 관계자들의 방해로 위험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경찰을 불러 호통을 치기도... "발로 뛴 안티조선 100일"(한겨레7월16일)
탑골공원 앞거리에서 마이크를 들고 가두연설로 '조선일보의 역사적인 비리'들을 폭로함으로, 그 증거들을 제시하는 조아세신문을 받아든 50대 중반의 한 아주머니는 나를 보며 독백하듯 "조선일보 때문에 큰 일이군요"라고 하면서 분노를 삭이지 못한다. 이렇게 우리 시민(국민)들이 깨닫게 된 것이 반세기를 넘겼다. 그 동안 이 신문 속에 깊숙이 잠들어 있던 '민주의식'이 앞으로 얼만 큼 더 세월을 보내야 저들이 방해하는 '통일조국'을 맞이할 것인가. 지금 조선일보가 발악적으로 참여정부를 물어뜯고 있건만, 이 신문 독자들의 눈은 다른 진보적인 언론이 보이지 않는가 보다. 장님이 따로 없다.
잠시 후 1.5톤 트럭 한 대가 <한겨레>신문뭉치 수 십 개와 큰상을 싣고 왔다. 이것들을 펴놓고 홍보 활동할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여러 단체들이 시간대 별로 이 장소에 집회신고가 되어 있고, 먼저 온 한사모 회원들은 현수막을 공원 울타리에 내걸었다. 날씨도 무덥고, 빗방울이 떨어진다. 장마기간이라 걱정된다. 차츰 모여드는 회원은 20대 청년, 40대 후반의 삼청동 아주머니, 일흔을 훌쩍 넘기신 목동의 성경희 할머니도, 지난봄에 춘천에서 결혼한 새댁(부회장)도 나와 그때 찍은 사진을 내게 주었다. 이 사진엔 13명의 웃는 얼굴들은 극성스런 조아세 한사모 회원. 주례를 섰던 명계남 배우도 왼손을 든 포즈이다. 신랑 입은 벌어져 웃고, 신부는 입을 다물고도 웃는다.
한겨레200만 구독확산운동본부 공동대표 노재우님도 오셨다. 여기 모인 분들은 연령으로 따지면 도저히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는 세대차이가 있다. 그러나 <한겨레>를 중심으로 모임을 갖는 한사모는 국내 어느 단체와 비교할 수 없는 결속력을 자랑한다. 여기 '국론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겨레의 대변지는 오로지 국민신문 한겨레 뿐'이라는 홍보물의 내용이 입증한다. '지금 구독하여 주십시오! 여러분의 한 부가 세상을 바꿉니다, 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무더위에 누가 시켜서 일당 받고 하는 것도 아닌 스스로 좋아서 열정적으로 찾아 나선 우리들은 '한겨레사랑' 어깨띠를 두르고 지나는 시민들에게 "한겨레 좀 봐 주세요"라고 하면서 신문과 홍보물을 나눠주었다. 시민들의 반응도 다양하다. 1,적극적으로 다가와서 먼저 손을 내밀어 받아 가는 사람 2, 주는 대로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 가는 사람 3,거절하며 뿌리치듯 마지못해 하다가 받아 가는 사람 4,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방인처럼 외면하는 사람 등. 또 10대, 20대들은 신문을 읽으려는 성의가 부족하다. 여자보다는 남자가 잘 받아간다. 적극적으로 줄 때 거절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받아 가는 그들이 과연 갖고 가서 읽어 볼 것인지, 내버릴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이란 읽지 않고는 알지 못한다. 인류는 문자(글)가 발전하고 발달함에 '문명인'이 되었다. 문명국의 표상인 신문은 온 세계의 축소판으로서, 이것을 읽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문명 속의 '야만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야만의 세상'거리에서 언제까지 온몸으로 홍보를 해야만 하나. 답답한 현실이다. 그러나 한사모 회원 직업들도 학생, 노동자, 공무원, 상업, 자영업, 무역업, 주부 등 다양하다. 팔순 할아버지도 계시니 이 어른이 보수언론의 젊은 독자들보다도 더 진보적인 생각을 하시니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정신이 젊다는 증거이다. 김종열 회장은 내게 말하기를 "한겨레 평양 명예 지국장"을 '임명'한다는 거다. 이 얼마나 지극한 표현들인가. 내년 6월엔 6.15 공동선언 4주년을 맞아 한사모 깃발 들고 육로로 휴전선을 넘어 평양과 금강산을 기필코 다녀오리라는 꿈을 키우고 있음이여.
7월 정기 모임을 저녁 6시 30분에 갖기 위해 느티나무카페로 가야 했다. 그런데 조아세는 계속 스피커로 연설하고 있다. 여전히 지치지도 않고 옥천 물총 전 대표님은 열심히 나눠주고 있다. 30분만이라도 나는 도와야겠다 싶어 "조아세 신문입니다!"라고 외치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눠주다 보니 등어리에 땀이 흘러내린다. 외면하지 않고 잘 받아 갈 때는 신명이 절로 난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오자 전교조 선생님들이 나타나 홍보활동을 한다. 이렇게 탑골공원 앞은 오늘의 '혁명적 시위 장소'로 부상하고 있는 것일까. 이곳에서 잡다한 생활용품들을 팔고 있는 예순을 넘기신 분이 시끄럽게 군다고 노발대발이다. 여기 내 눈에 쏙 들어오는 물건이 태극기다. 여러 나라 국기들(탁상용)도 시선을 잡아당긴다. 값을 물어보니 1만원이란다. 미국의 성조기,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등. 그러나 북한의 인공기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물어 보았더니 "없다"고했다. 왜 없느냐고 했더니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국기 만드는 공장에서부터 만들지 않는가. 저 악법 중의 악법인 '국가보안법' 때문일까. 이곳에 인공기가 있다면 '기념품'으로 한 개 사다가 우리 안방의 텔레비 위에 얹어 놓고 싶다. 태극기와 나란히! 이런 내 생각이 국가보안법의 입장에서 보면 당장 교도소로 잡아 쳐 넣고 말겠지. 이 법이 존속하는 한 웃끼는 세상인 것이다. 물건값을 농담으로 물어본 게 아닐진대
한가지는 사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담배 곽의 절반 크기 태극기(명찰용)를 천 원 주고 사서 왼쪽 가슴 위에 달았다. 바로 그 밑자리에 <한겨레>표찰도 달았다. 이렇게 작은 인공기라도 있으면, 북한도 법률상 우리 영토고 조국이니까 '애국'하는 자세로 오른쪽 가슴 위에 달면 보기가 좋지 않을까. 이러한 내 뜻을 조선일보의 시각으로 보면 또라이 짓이라고 대서특필하지 않겠나. 아, 지금 나는 이상한 반쪽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인가.
정기모임엔 낮에는 사정상 거리 홍보활동에 못나왔던 분들이 여럿 나왔고, 새로 나온 분, 낯선 분도 있다. 안건으로는 새로 만든 한사모 홈페이지(hansamo.or.kr)에 관한 의견이 비중을 차지했다.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지만 차츰 개선해 나가면 되겠지. 모임이 끝날 때까지 나느 배가 너무 고팠다. 토요일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신문배달 마치고, 씻고, 아침식사는 8시인데 지난 2월부터 건강상 이유로 '과일식사'로 하여 몸무게가 5키로 줄었다. 이 다이어트로 오전엔 늘 허기가 진다. 그래도 참고 견딘다. 그리고 열차 안에서 김밥을 사서 먹으면 시간도 절약되고.... 저녁은 남양주의 '일영'으로 가서 야유회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먹고 노는 친목단체 만은 아닌 한사모는 그야말로 낮에는 일하고 여름밤의 낭만적인 '주연휴식'이 펼쳐진다. 이 즐거움을 그 누가 알랴. 축복 받은 뒤풀이 시간이다. 찌들은 시내에서 불과 한 두 시간의 가까운 곳에 이렇게 조용한 별천지가 있다는 것을 정형기 명예회장이 언제가 숨겨 두었다가 찾아내어 제공하다니, 실로 감격스럽고도 신기하다.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게 되었으니 너무 고마웠죠. 밤비 내리는 도심을 벗어나 지프차 승용차 모두 세대로 나눠 타고 일영으로 찾아 들 때까지 내 배는 '빈 항아리'였다. 밤 열 시가 넘었지. 사방은 숲 속이다. 이런 밀림 속에서 게릴라전쟁이 펼쳐지면 어쩔 것인가, 그 옛날 빨찌산 부대들의 싸움을 소재로 쓴 소설<아름다운 집>을 다시 상상하게 되다니...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터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빈 항아리를 '보신탕'과 소주로 채워 넣기에 정신이 없었다. 노래 좋아하는 분들은 먹다말고 앞으로 나가 노래방기계 마이크를 잡고 흥겹다. 성질 겁한 분은 춤을 춘다.
이런 자리에서 언제부턴가 자신감이 없다. 특히 내 인생의 황금기 같은 70년대 말과 80년대에 저는 노래(대중가요)를 배우지 못 했다. 늘 '농민가' 아니면 '님을 위한 행진곡'만 부를 줄 알았지, 나훈아 현철의 노래 가사 하나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농민운동 한답시고 캄캄한'지하조직'하러 다니며 노래를 들을 기회도 배울 여유도 없이 흘러간 세월이다. 간혹 뻐스를
타면 귀머거리가 아닌지라 라디오에서 들어 대충 배운 것으로 남들이 부르면 따라 흥얼거린다. 하지만 때로는 '신명'이 있었기에 최근에는 노래대신 시를 암송하여, 취미 삼아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노래 대신 시낭송으로 대응한다. 요즘 새로 외운 시 <핵의 노래>(홍윤숙)는 실로 가공할 노릇이다. 그러나 술이 너무 취하면 낭송이 되질 않고 까먹는다. 이럴 때는 무조건 흔들면 된다. 이러다가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머리 속의 필림이 끊어진 걸까. 잠이 깨어보니, 먹다만 음식상은 그대로 있는 방갈로에서 물소리만 들여온다. 몇 사람이 시체처럼 나동그라져 있다. 다른 잠자리를 찾아 갔나보다. 새벽 4시 45분 평일 같으면 배달을 하고 있을 시간이다. 푸르미님은 무슨 겁한 사정이 있어 5시에 먼저 간다고 택시를 약속해 뒀을까. 어디서 자고 있을까. 손전화로 시호를 보냈다. 깨어났단다. 금새 어디서 나타나 뜻밖의 <민통선>이란 신간을 선물로 주고 떠난다. 이 책 첫 장에는 "흰머리소년님! 깊은 뜻의 희망을 /푸르게 꽃피우시길/ 바랍니다/늘 건강하세요! 2003,7,12 푸르미 올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사모 회원 여러분, 푸르미의 책선물 받은 우리 둘만의 '인연'을 시샘하셔도 좋고 특히 카라님, 난초님이 질투하시면 더 열심히 '한사모 사랑'으로 승화시켜가지 않겠어요. 난초님께는 별도로 <등나무 집> 빌려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 잊지 않고 있을께요.
일영의 아침에 일찍 일어난 형님 같으신 노재우 고문님과 김형순님 셋이서 2키로 남짓 산책길을 걸으면서 참 행복함을 느꼈죠. 푸짐한 아침 식탁 논의에서, 다시 휴전선 가까운 '산정호수'로 가서 점심을 송어회로 한다기에 내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들뜨기 시작했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