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룡 馬天龍 (1894~1930 )】
"홍범도(洪範圖) 부대의 일원으로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참여"
1919년 철혈광복단 가입, 북간도국민회 참여,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참여, 1921년 대한의용군사회 재무부 모연원으로 군자금 모집, 12월 이만전투 참여, 1923년 초 적기단 참여, 1926년 5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입당, 1930년 10월 중국공산당 연화혁명위원회 군사위원 선임
1894년 4월 4일 함경북도 길주군(吉州郡) 동해면(東海面) 불로동(不老洞)에서 마진(馬晉)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이명은 마건(馬建)·마인룡(馬仁龍)·마천용(馬天容)·안장영(安長榮)이다. 동생은 마천목(馬天穆)이다.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와 연화혁명위원회의(延和革命委員會)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와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에서는 모연원(募捐員)으로 군자금을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1900년 초 아버지를 따라 북간도 개산둔(開山屯) 일대로 건너가 거주하다가, 1905년 허룽현(和龍縣) 덕신사(德新社)로 이주하였다. 1914년 명동학교를 졸업하고, 김약연(金躍淵) 등과 함께 간민회(墾民會)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던 아버지 마진을 도왔다. 1919년 윤준희(尹俊熙)·임국정(林國貞)·한상호(韓相浩) 등이 조직한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가입하였고, 만세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북간도국민회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4월에는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을 위해 이광(李光)·고덕승(高德承) 등과 함께 노령(露領)으로 파견되었다. 8월에는 홍범도(洪範圖) 부대의 일원으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다.
1921년 10월 북간도국민회가 서간도군비단(西間島軍備團)과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재무부 모연원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의용군사회는 김찬(金燦)·김덕은(金德殷)·임표(林彪)·이용(李鏞)·마용하(馬龍河)·주학섭(朱學燮)·강재관(姜載官)·박춘근(朴春根)·최기학(崔基學) 등이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사령부는 사령관 이용, 참모장 임표, 참모관 한운용(韓雲用)·김홍일(金弘一), 재무부장 김덕은, 문화부장 주학섭, 서무부장 김찬, 외교부장 강재관이 맡았다.
1921년 12월 김홍일이 지휘하는 대한의용군 제2중대 제1소대장으로서 연해주 백위파(白衛派)에 반대해 이만 전투와 볼로차에프스크 전투에 참전하였다. 1923년 초 적기단(赤旗團) 결성에 참여해 동만(東滿) 사령부장을 맡았다.
1926년 5월 조봉암(曺奉岩)·윤자영(尹滋瑛) 등이 결성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입당하여 옹성랍자(甕聲磖子) 야체이카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9년 2월 둔화(敦化)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8월 검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10월 중국공산당 연화혁명위원회(延和革命委員會)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북간도 일대에서의 반일운동을 지휘하였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 당시, 항일유격대 조직사업에 치중하였다. 1933년 11월 러시아로 이동하던 중 지뢰를 밟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