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 선생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아버지 이석주와 어머니 홍주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워낙에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난데다 태어난지 10개월째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 자라다가 10살 되던 해에 할머니와 아버지를 두 달 차이로 여의게 된다.
그는 이 가난과 천대를 부지런함으로 메워나갔다. 10살에 유기점 사환으로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며 입에 풀칠을 했고, 15세에 결혼한 후 생계를 위해 유기 행상을 시작했다. 행상일은 고달팠지만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사회의 변화를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업 수완이 좋아 24살이던 1887년에 유기제조공장을 짓고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잘 되었으나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공장이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돈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다시 사업을 일으켜, 당시 조선 제일의 무역상이 되었다. 1899년 그는 사업으로 번 돈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오산리 용동(龍洞)에 농지를 조성하고 마을을 만들었다.
그가 사상적 대전환을 맞게 된 것은 안창호와의 만남이었다. 1907년 7월 40대 중반의 이승훈은 20대 젊은이 안창호의 평양 강연에 참석해 큰 감명을 받았다. 안창호는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 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 없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새로운 교육을 일으킴으로써 새사람을 키워 미래를 도모하자.”고 했다. 강연을 듣고 이승훈은 곧바로 그의 사상을 수용하고, 결심의 증거로 단발을 하고 담뱃대를 버렸다. 머리를 자르는 것은 유교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당시로선 큰 용기였고, 담배를 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한번 결심하면 주저하지 않았다. 안창호 강연을 듣고 2주후 서당이었던 용동글방을 수리해 빛을 가르친다는 의미의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는 신식초등학교를 설립했다. 곧이어 중등학교의 필요성을 느껴 용동에서 가까운 오산(五山) 승천재(昇薦齋)에 유림의 투자를 받아 오산학교를 개교했다. 1907년 12월 24일이었다. 이승훈은 학교설립의 취지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학교를 경영하는 것은 오직 우리 민족에 대한 나의 책임감 때문입니다. 내가 학교를 경영하거나 그 외 사회의 모든 일을 할 때 신조로 삼고 나가는 것은 첫째, “민족을 본위로 하라”는 것과 둘째, “죽기까지 심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장은 유림인 백이행이 맡았고, 교육과정은 예비반(1학년)과 상급반(2-3학년)의 2개반으로 구성되었다. 학생은 7명으로 시작했고, 영어, 문학, 법제, 지리, 한문, 수학, 역사, 체육을 가르쳤다.
개교한지 2년째 도던 1909년 8월 11일자 황성신문은 오산학교를 ”평북 일대에서 교육 정도가 제일“이라고 평가했다.
학교를 세울때만 해도 이승훈은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1910년 20살의 류영모(柳永謨)가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학교에 찬송과 성경을 가르치고 집회를 열도록 하용했다. 해 9월 이승훈은 평양의 한 교회집회에 참석했다가 한석진 목사의 ”십자가의 고난“이란 설교에 감명을 받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구원했다는 내용은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ᅟᅦᆨ 구원이 될 것을 생각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그는 학교를 기독교 정신으로 교육하고자 했고, 정주에서 활동하던 라부열(Slacy L. Robert) 목사를 명예교장으로 초빙하고, 류영모으로 하여금 성경을 가르치게 했다.
오산학교는 설립초기부터 기독교 정신이 결합되어 민족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초창기 교사로는 역사, 지리, 경제를 가르쳤던 시당 여준(1907-1911), 영어와 문학을 가르친 춘원 이광수(1910-1913), 물리와 천문학, 그리고 성경을 가르친 다석 류영모, 법제·경제·지리를 가르친 고당 조만식(1914-1923) 등이 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단재 신채호가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오산학교에서 배출된 졸업생 가운데는 김도태(교육인), 서춘(경제학자), 김억(시인), 주기철(목사), 김홍일(항일광복군), 한경직(목사), 김소월(시인), 함석헌(신학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