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 통덕랑 전주 이공 휘 제언 비명.
公의 諱는 제언(齊彦)이시고 字는 백미(伯美)로 조선 왕족 출신이시다. 우리 世宗大王의 第18男 담양군(潭陽君) 諱 거(璖)는 어린 나이에 돌아가심으로서 上이 슬퍼하고 가엾게 여겨 이애(夷哀)라는 호를 내리시고 형 계양군(桂陽君) 諱 증(璔)의 제2자 강양군(江陽君) 諱 숙(潚)으로서 후사를 잇게 하셨는데 절조 있는 행실로서 응당 모든 종친을 규찰하고 바로 잡는데 선출되셨고 임금이 내린 호가 금헌(琴軒)과 양도(良悼)이시다. 이분이 희안군(喜安君) 諱 집(輯)을 낳으시고 이 분은 순천군(順川君) 諱 관(琯)을 낳으셨으니 號가 혼계(渾溪)이시고 이소재 이선생중호(履素齋 李先生仲虎)를 스승으로 섬기시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물의 이치와 본질을 배웠고 충효로 정려 되고 세상에서 유학으로 이름났으니 公의 6代祖가 되신다. 5代祖는 諱 시중(時中)으로 行 한성부우윤(行漢城府右尹)이시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 되셨다. 高祖는 諱가 유수(幼洙)로 行 창평현령(昌平縣令)이시고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증직되었다. 증조 휘 명귀(命龜)는 진사(進士)이시고 후사를 이은 진일(震一)은 형의 아들이시고 생원, 진사(生員, 進士) 양 시험에 합격하셨으니 곧 公의 조부이시다. 부친은 휘가 봉령(鳳齡)이시고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이시다. 初娶 능성구씨(綾城 具氏)는, 문유(文遊)의 여식으로 자식을 낳지 못하셨다. 再娶 의령 남씨(宜寧 南氏)는, 하구(夏龜)의 여식인데 좌의정 의성부원군 지(智)의 후손으로 이분이 公을 낳으셨다. 三娶 안동권씨(安東 權氏)는, 만정(萬鼎)의 여식으로 사헌부 지평 제현(齊顯)과 통덕랑 제임(齊任)을 낳으셨다. 南淑人은 公이 네 살 때 세상을 떠나셨다. 公은 1714年 肅宗40 甲午年에 태어나시고, 1744年 英宗(英祖)20 甲子年에 돌아가셨으니 享年이 단지 三十一이다. 처음에 경기도 坡州 坡平山 先塋 산자락에 묻히셨는데 땅이 불길하다 하여 1778年 正祖2 戊戌年, 경기도 장단(長湍) 동도면 효곡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1781年 正祖5 辛丑年, 이장하였으니 같은 면의 남성 엄진안동 갑좌 언덕이다. 公은 문과 급제하여 현령을 지내신 사천인목천수(泗川人 睦天壽)의 여식을 娶 하여 아들 둘을 낳으셨으니 맏이 장경(章慶)은 淸州 韓氏 進士 종한(宗漢)의 여식을 娶 하였고 後娶는 承文院 正字 여산인 송복창(礪山人 宋昌復)의 여식이다. 차남 전경(全慶)은 司憲府 掌令 여산인 송수겸(礪山人 宋守謙)의 여식을 娶 하여 1男 2女를 낳았으니 아들은 정관(廷觀)으로 동래인 정담(東萊人 鄭潭)의 여식을 娶 하였고 장녀는 한산인 이영복(韓山人 李永復)의 정실이고 다음은 연안인 이경덕(延安人 李敬德)의 정실이다. 장경(章慶)은 無子하여 전경의 아들 정관으로 후사를 이었다. 公은 하늘에서 효우를 타고나시고 갓난아이 때부터 병을 앓고 있으면서 소남(邵南) 윤선생 동규(尹先生 東奎)에게 수업하셨으나 성취하지 못하시고 불행히도 어린 나이에 장례를 치르게 되자 날마다 尹公이 친히 산 아래에 조성하고 제사도 지내셨다. 公에게 한 말의 대략은 “겉은 온순한 기질이고 속은 옥결 같은 성품으로 효도하였고 순하면서 심성이 자비롭고 뛰어난 기질인데 도리어 장수할까 재촉하며 거두는 형국이니 하늘은 또 어찌하여 그 아름다움은 주시고 그 수명엔 인색한가? ” 하였으니 公의 성품과 행실은 추어올려 보일만 한 것이다.
오호! 슬프도다!
소자 불초하여 어찌 감히 의론을 찬찬하게 이를 수 있겠습니까?
숭정 기원 후 삼년 병오년 오월 일.
아들 章慶이 피눈물 흘리며 삼가 지문을 짓고
종자 基慶이 삼가 썼다.
[주D-001] 李齊彦: 1714年 肅宗40年 甲午年 3月5日生-1744年 英宗(英祖)20年 甲子年 3月10日卒. 享年31. 字 伯美. 실학자 星湖 李瀷, 邵南 尹東奎의 門人. 소남 윤동규는 坡谷 李誠中의 5世孫 李齊寅의 사위이다. 이제언의 5대조 李時中의 사촌형이 戶曹判書 李誠中이다.
이제언은 宗統으로 世宗王子 潭陽君의 9世孫이고 血統으로 世宗王子 桂陽君 李璔의 9世孫이다. 8代祖 興祿大夫 江陽君 李潚이 후사 없이 죽은 숙부 담양군의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7代祖 正義大夫 喜安君 李輯과 6代祖 正義大夫 順川君 李琯까지 종친부 왕족으로 우대받고 종친부 관직과 품계를 받았다. 4대 연속 君號를 받았다.
5代祖 贈吏曹參判 漢城府庶尹 李時中은 음보로 관직에 나갔고 임진왜란 공훈으로 그 부친이 明善大夫 順川都正에서 順川君으로 추증되었다. 高祖 李幼洙는 생원으로 관직은 창평 현령으로 마쳤고 승정원좌부승지로 추증되었다. 曾祖 李命龜는 進士이다. 祖父 李震一은 生員 進士이고 生父는 李命虎이다. 父親 李鳳齡은 文科及第 사간원 정언이다. 星湖 李瀷이 이봉령의 비문을 짓고, 이봉령의 장남 이제언의 비명은 소남 윤동규가 지었다.
동생 李齊顯은 字가 淑遠이다. 1723年 景宗3年 癸卯年 2月12日生-1756年 英祖32年 丙子年 12月26日卒. 享年34. 1747年 英祖23年 3月 丁卯式年試 文科 丙科2位 及第 24歲.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다. 1756年 英祖32年 丙子年 5月, 부친과 모친이 며칠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시묘하던 중 체포되어 英祖의 취조를 받고 함경도 鍾城에 유배 도중 경기도 抱川에 이르러 죽었다. 승정원일기에는 12월28일 英祖에게 보고된 것이 나타나 있다. 이제현의 장남은 進士 李完慶, 차남이 文科及第 執義 瘠庵 李基慶이다. 星湖 李瀷이 지은 이봉령의 비문에 이제현의 일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제현이 죽기 전에 이미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막내 동생 李齊任은 字가 希尹, 號 素隱이다. 1736年 英祖12 丙辰生으로 1779年 正祖3年 己亥年 44歲 卒. 소남 윤동규와 성호 이익의 제자이며 실학자로 순암 안정복 등과 교류하였다. 후계자 李存慶도 남인 사이에서 이름 있는 선비였다. 1756年 병자년에 부모와 중형 이제현이 한꺼번에 죽고 이제임이 약관의 나이로 어린 조카들을 돌보게 되었는데 조카 瘠庵 李基慶은 3개월 된 갓난아기였다. 이때 이제임도 英祖의 취조를 받았다.
이기경의 5대조 順川君 李琯은 시호가 孝文이다. 순천군이 살던 남산 아래 鑄字洞 집에 忠孝 旌門이 세워졌다. 평소 형 錦川君 李瑊과 함께 유교경전대로 이행하여 향당 사람을 감화 시켰던 왕족으로 宗英, 宗班公子로 칭송되었다. 유학자로서 宗室孔孟, 渾溪先生으로 불렸고 東國新續三綱行實圖, 東儒師友錄, 海東名臣錄 등에 행적이 남아 있다. 후손 대대로 훌륭한 순천군의 전통을 잇고 지금도 양수리 龍津(龍谷)에 순천군 별묘 사당에서 제향 한다.
이기경의 아들 李廷泰는 進士이고 백부 이완경(進士)의 후계자로 나갔고 그 처는 順菴 安鼎福의 증손이다. 이기경의 후계자는 이정겸이고 그 처는 進士 목인규의 여식이고 목만중의 손녀이다. 이기경 사위는 좌의정 강시영이고 강준흠의 아들이다. 이기경이 죽은 후 강시영의 처 이 씨도 죽었다. 이기경과 목만중과 강준흠은 정조 순조 조 문신으로 천주교도를 박해한 대표적인 공서파 남인이다. 최초 천주교 세례 신부 이승훈은 이기경의 고조모 평창 이씨의 친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