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사료 가치 근거 '난하의 위치'
북부여기에서 조금 더 살펴본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에는 아래 내용이 나온다.
「해모수단군 임신 31년 진승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귀순하는 자가 수 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운장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하였다.
壬辰三十一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口分置於上下雲障遣將監之」
「해모수단군 기해 38년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날의 난하이다.
己亥三十八年燕盧綰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浿水今灤河也」
「고우루단군 병인 6년(B.C 115년) 단제가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르니 구려하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 왔다.
丙寅六年帝親率精銳五千襲破海城追至薩水九黎河以東悉降」
위 북부여기 내용에는 해모수단군 당시 조선과 중국왕조와의 경계가 오늘날의 난하라고
적혀 있고, 난하 동쪽에 상하운장이 있으며, 연, 제, 조 나라에서 도망 온 사람들을 상하운장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고 적혀 있다.
진개의 조선 침략 후 조선과 연나라의 경계는 난하였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노생이
가져온 귀신서를 보고 북쪽의 호(胡)가 진나라로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였는데, 진시황의 명을 받은 몽염은 난하 서쪽은 기존의 장성을 보수하고 끊어진 곳은
연결하여 장성을 완성하였고,
조선과 중국왕조 경계 중 유일하게 장성이 없는 동쪽 난하 방면은 난하와 장성이 만나는
연장성 끝에서 난하 동쪽으로 난하를 따라 북에서 남으로 상하장을 지나 난하 하구 방면에
있는 갈석까지 이르러 진장성을 완성하여 진나라의 동변은 난하와 진장성 2중의 방어선을
구축하여 호(胡)의 침략을 막았다.
즉 진장성을 쌓은 후에도 조선과 진나라의 경계는 난하였다.
그 후 한나라 때도 조선과 한나라와의 경계는 난하였다.
그런데 1970년 당시에는 한국의 저명한 사학교수 대부분은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경계는
청천강이라 주장하는 학자, 압록강 또는 태자하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이유립이 1970년대에 환단고기를 위작하였다면 역사를 전공하지도 않고
한국고대사와 관련이 있는 중국의 정사조차 제대로 구비하지 못한 이유립이
진개의 조선 침략 후 조선과 중국왕조의 경계가 난하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위와 같이 북부여기에 적을 수 있었을까?
또 준왕으로부터 위만이 조선을 빼앗았을 때 조선의 영역은 서쪽으로 난하에서 동으로 요하를
지나 요동반도를 지나 청천강까지 머물러 있었는데, 고구려가 B.C 115년에 구려하(요하)
동쪽을 모두 빼앗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위와 같이 북부여기에 적을 수 있었을까?
이런 내용은 사기 조선전 등 중국의 정사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사기 조선전 문구를 살펴본다.
「조선왕 만은 원래 연나라 사람이었다. 연나라는 그 전성기에 진번조선(註 기자조선)을 공략해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었으며, 장새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조선은 요동의
국경 밖 땅이 되었다. 한나라가 일어났지만 조선은 너무 먼 곳이어서 지킬 수가 없었으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개축하여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칠 무렵 위만도 연나라에서 망명해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머리를 상투 모양으로 틀고 만이의 복장으로 동쪽의 요새를 벗어나서
패수를 건너 진나라 때의 공지인 상하장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위만은 점차 진번조선의 만이들과 옛 연, 제, 조의 망명자들을 부하로 만들어
왕이 되었고 왕험에 도읍하였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 朝鮮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
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
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 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그 아들에서 손자 우거로 왕위가 전해지니 많은 한인들이 유혹을 받고 도망쳐 와 더욱
불어났다. 조선왕은 한나라에 입조하지 않고 또 진번의 이웃 여러 나라에서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는 것을 가로 막아 한나라와의 교통을 저지하였다. 원봉 2년에 한나라는 섭하를
사신으로 보내 그런 우거를 꾸짖고 나무랐으나 그는 끝내 조칙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가다가 국경 패수에 이르렀을 때 부하를 시켜 그 곳까지 전송 나온 조선의
비왕 장을 찔러 죽이고, 그 길로 패수를 건너 한나라 요새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돌아와
천자에게 "조선의 장군을 죽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천자는 잘한 일이라 여겨 섭하를 책하지
않고 요동의 동부도위에 임명하였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며 병을 일으켜 섭하를 죽였다.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眾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
涉河譙諭 右渠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 朝鮮裨王長 即渡 馳入塞 遂歸報
天子曰 殺朝鮮將 上爲其名美 即不詰 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 注 正義入
平州榆林關也
사기 조선전을 주석한 사기 정의에는 섭하가 패수까지 마중 나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패수(浿水)를 건너 들어간 요동군 요새가 평주(平州) 유림관(榆林關)이라고 적혀
있다(正義入平州榆林關也). 유림관이라는 명칭은 산서성에도 보이지만 평주 유림관은 난하
방면이다. 따라서 한나라와 위만조선간의 경계인 패수(浿水)는 난하였다.
그리고 패수 동쪽이 진 나라 때의 공지이므로, 연, 제, 조나라에서 도망온 무리들은
난하 동쪽에 나누어 살았고, 위만도 동으로 패수(난하)를 건너서는 난하 동쪽에 있는
상하장에 터를 잡았다. 이 무렵 위만조선의 수도는 요하보다 서쪽에 있었다.
「集解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韋昭云 古邑名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應劭注 地理志遼東險瀆
縣 朝鮮王舊都 臣瓚云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집해에서 서광은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하였고, 색은에서 위소는 옛 읍의 이름이라 하였다...
응소는 주석하기를 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 하였고, 신찬은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史記 朝鮮傳 王險 注釋
진 시대 창려의 위치에 대하여 독사방여기요 직예 영평부 조에는 "창려현은 한나라가 교려현
을 두어 요서군에 속했던 것인데, 후한이 창려로 고쳤으니, 그 땅은 지금 폐 영주: 조양 방면)
경(境)에 있었다"고 하였고, 한서보주에는 "지금 영주고성(營州故城) 동남 170리"로, 후한서집해
에는 "지금 금주부(錦州府) 의주(義州 : 義縣) 서북경"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한서보주에는
요동군 험독현 위치에 대하여 요동의 서경(西境)이고, 지금의 광녕현 동남이라고 적혀 있고
(遼東之西境..今廣寧縣東南. 漢書補注 地里志 第八下一), 대청일통지에는 험독고성이 광녕현
동남 빈해(濱海)의 지(地)에 있다고 적혀 있다
(險瀆故城 在今廣寧縣東南漢置隸屬遼東郡 應召曰 縣依水險故曰險瀆 後漢屬遼東屬國 晉省 按遼
史 以集州爲漢險瀆縣非是 以後漢書考之當在今廣寧東南濱海之地. 大淸一統志 卷43 錦州府1).
누구의 주석에 의하던 위만조선의 수도는 요하보다 서쪽에 있었다.
그리고 한나라는 B.C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곳에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을
설치하고, 다음해 B.C 107년에 요하 동쪽 고구려 지역을 점령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을 두고
고구려를 고구려현으로 하였다(武帝滅朝鮮 以高句驪爲縣.후한서).
한나라는 B.C 107년 요하 동쪽 고구려 지역을 점령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을 두고 행정은
낙랑군이, 군사는 현도군이 담당하게 하였다. 중국왕조는 부여 무리를 맥이(貊夷)라 불렀는데,
북부여를 북맥(北貊)이라 불렀다. 그리고 현(玄)은 북이라는 뜻이고, 도(菟)는 맥(貊)과 같이
호랑이과 짐승을 가리킨다. 즉 현도군은 북부여 일명 고구려 방어를 담당하는 군(郡)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나라는 고구려 무리를 통치하는 치소 고구려현을 고구려(북부여)의 남쪽
수도(심양 방면)에 두고 그곳에 한나라가 임명한 허수아비 고구려 통치자 고구려후(高句麗侯)를
두어 고구려 무리를 다스렸다.
앞에 나온 북부여기 해모수단군 기해 38년조 문구와 고우루단군 병인 6년조 문구는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중국의 정사에 두루 정통하지 않고는 지어낼 수 없는 문구이다. 1970년대
당시 서울의 저명한 사학교수들 대부분은 위만조선이 서북한(西北韓)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처럼 1970년대에 서울의 저명한 사학교수들도 이해하지 못한 위만조선의 위치와
멸망할 무렵 위만조선의 영역 즉 난하에서 요하 사이였다는 것을 역사를 전공하지도 않고,
한국고대사와 관련이 있는 중국의 정사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한 이유립이 1970년대에 위와
같은 내용으로 북부여기를 지을려면 이유립은 아이큐가 1,000도 넘는 천재라야 한다.
[출처] 환단고기 사료 가치 근거 '난하의 위치'|작성자 홍익인간
<빙혼>
환단고기가 위서임을 입증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러나 만일 소설 환단고기를 창작해 보라고 하면 과연 어떨까?
역사소설은 반드시 역사 자료를 근거로 픽션을 가공하는 것이다.
환단고기가 픽션인 역사서라고 해도 역사를 비전공한 사람이 환단고기를 작성하였다면
그것은 신내림을 받아 신들린 상태에서 작성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짧은 문장 안에는 중국 역사와 고대 지역을 달달 꿰뜷고 있어야만 한다.
역사서는 어차피 가공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가공의 정도에 따라 역사서의 신뢰도가 결정될 것이다.
사람을 흙으로 만들거나 곰이 낳았다고 하면 그것은 역사서가 아닌 신화일 뿐이다.
문제는 최초를 설명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자기 나라의 최초 인간을 멋지게 만들어야 한다.
조상이 호모이렉투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돌을 가지고 놀다가 나라를 일으켰다 하면
역사서가 좀 무게가 없기 때문에 최초 출발은 어쩔 수 없이 도자기나 곰출신이 나올 수 있고
특히 하늘에서 내려와야만 멋지게 보이기 때문에 모든 민족은 자지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 천사, 선녀, 신들의 후손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역사서와 신화는 다르다.
제우스신화는 그리스 역사서가 아니다.
한국에는 환단고기가 있기 전까지는 단군신화만 있었다.
환단고기는 단군은 곰새끼가 아닌 단군조선이라는 역사를 깊은 잠에서 일깨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