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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데지마에서 오우라 천주당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서 구라바엔을 구경하다!
2025년 12월 9일 시마바라에서 기차로 나가사키에 도착해 관광센터에서 600엔(1회권은 150엔)
하는 트램 원데이 패스를 구입해 1호선 소후쿠지 (崇福寺) 행 트램을 타고 데지마
(出島 출도) 정류소에 내려서 바로 옆에 네델란드인들이 무역을 위해 거주했던 데지마를 봅니다.
포르투칼인들은 원래 북쪽 히라도섬에서 일본인들과 무역했는데 종교 문제로 마찰이 있는 것을 알게된
히젠 오무라번 다이묘로 기리시탄 (크리스천) 인 오무라 스미타마가 포르투칼인들에게 나가사키로
옮기라고 권유하면서 이후 나가사키는 포르투칼인들과의 무역에다가 예수교가 성한 도시가 된 것입니다.
1637년에 시마바라의 난이 발생하자 막부는 기독교(가톨릭) 포교를 이유로 1639년 포르투갈인들을
추방해 데지마에는 사람이 살지않았는데..... 이에 데지마에 자금을 투자했던 지역
유력자들의 불만이 있자 사가현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상관을 데지마로 옮긴 것입니다.
1호선 소후쿠지 (崇福寺) 행 전차를 타고 1정거장 신치 차이나타운에서 내려 5호선 녹색 이시바시
(石橋) 행 전차를 환승하여 3정거장을 가서 오우라천주당 (大浦 天主堂 ) 역에 내려
미나미야마테 (南山手 남산수) 라 불리는 언덕을 올라 오우라천주당 (大浦 天主堂 ) 을 구경합니다.
드디어 오우라 텐슈도 (오우라천주당 大浦 天主堂 Oura Catholic Church, おおうらてんしゅどう)
에 도착하는데.... 나가사키시에 위치한 가톨릭 성당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일본의
국보이며, 가톨릭 교회의 성지로 세계 교회사에 길이 남을 ‘신도발견‘ 사건의 현장인데 입장료는 천엔입니다.
1분 거리에 구라바엔 (글로버 가든) 으로 찾아가는데.... 여긴 에스컬레이터가 몇 개 설치되어 있어
방문객은 아주 편하게 언덕을 오르는데..... 입장료는 700엔 하며 1번 게이트에 제1번 건물
구미쓰비시 제2독 하우스에서 시작해 시게 방향으로 도는데 링거 주택에서 오르골을 볼수 있습니다.
구라바엔 (グラバー園) 이라는 글로버 가든 (Glover Garden) 은 "오페라 나비부인: 의 배경
이 된 곳으로 나가사키시 미나미야마테에 있는 관광지니 미국 페리 제독 함대의
강요에 의해 1859년에 나가사키는 요코하마, 고베, 하코다테, 니가타와 함께 문을 열었습니다.
글로버 가든은 1858년 안세이 5년 ( 安政 あんせい 조선은 중국 연호를 썼는데 일본은 645년 다이카
大化 이래 1,380년간 독자 연호! ) 에 에도막부가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등 5개국과
우호무역 조약을 체결하니 영국인 토머스 글로버와 프레드릭 링거, 윌리엄 올트와 워커 등이 몰려옵니다.
82년이 흐른 1641년 항구 도시가 된 나가사키에 '정착지' 가 탄생했으니...... 나가사키항을
내려다 볼수 있는 구릉지에는 비롯해 나가사키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서양식 건물
들을 구경하노라면 에도 시대 말 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나가사키의 역사를 느낄수 있습니다.
구라바엔 공원 안의 바닥에 조약돌 중 하나에서 하트 스톤을 찾는 것도 좋을 것이니.....
이 돌을 만지고 소원을 빌고는 레트로 사진관에서 의상을 빌려서 촬영하는
것도 추억이 될수 있으며 가든 숍에서는 그래버 원 오리지널 상품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구 글로버 하우스, 구 오르토 하우스, 구 링거 하우스는 정착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150년 이상 세워져 온 귀중한 건물인지라, 이 3개의 건물은 국가 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언덕 정상에 글로버 하우스는 나가사키 시내와 항구 전망이 탁월합니다.
그외 워커하우스, 옛 자유관, 전 스틸러 기념학교, 구미쓰비시 제2부두소, 구나가사키 지방법원 고나사,
구 나가사키 다카쇼, 오모테몬 경바소등은 메이지 시대 나가사키시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 글로버 정원으로 이전되었으니 건물에는 특징이 있어 메이지 시대의 나가사키를 알수 있습니다.
1863년에 지은 글로버 주택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
이자 문화재이며 글로버씨는 조슈번에서 찾아온 다카스키 신사쿠와 이토 히로부미
에게 신식 소총과 기관포에 대포등을 팔았으니..... 1868년 조슈, 사쓰마, 히젠, 도사번
5천명 존왕양이파 반란군이 교토에서 1만 5천 도쿠가와 막부군에 승리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오페라 나비 부인을 작곡한 푸치니 동상과 오페라에서 비운의 처녀 쵸쵸상을 연기한 미우라
다마키의 동상이 있는데, 오페라 나비부인 Madama Butterfly 은 자코모 푸치니가
작곡한 3막 오페라로..... 루이지 일리카와 주세페 자코사가 이탈리아어 리브레토를
썼는데 이 작품은 존 루터 롱의 단편 소설 〈마담 버터플라이 1898년〉 를 바탕으로 합니다.
롱의 소설은 누이 제니가 들려준 이야기와 피에르 로티의 반자전적 프랑스 소설 마담 크리장템에 기반을
두니 롱의 버전은 데이비드 벨라스코가 1막짜리 연극 마담 버터플라이 : 일본의 비극 로 각색했고, 이
연극은 1900년 뉴욕에서 초연후 런던으로 갔는데, 푸치니는 그해 여름 런던에서 이 연극을 관람했답니다.
오페라 나비 부인은 1904년 2월 17일에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 되었으니.....
소프라노 로지나 스토르키오, 테너 조반니 체나텔로, 바리톤 주세페 데 루카와
같은 유명 가수들이 주역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후 푸치니는 저 오페라를 수정하여 3막으로 1904년 5월 28일 브레시아에서의 첫
공연을 시작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1907년에 오페라에 최종 수정을 가하여
다섯번째 개정판을 완성하였으니 "표준 버전" 으로 오늘날 자주 공연되는 버전 이랍니다.
1915년부터 1920년 사이 일본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 가수 미우라 타마키는 초초상 역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니, 이 가수를 기리는 기념비와 함께 푸치니를 기리는
기념비를 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나가사키의 구라바엔(글로버 가든)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막 : 1904년 미국 해군 장교 핑커턴은 아내가 될 "나비 부인" 을 위해 나가사키의 언덕에 있는
집을 빌린다. 그는 15세 일본 소녀 초초상 (蝶々さん, 나비) 과 현지에서의 편의를 위해
결혼하는 것으로 일본의 이혼법이 느슨하기 때문에 미국인 아내를 찾게되면 소녀를 떠날 작정이다.
2막 : 미국 영사 샤플레스가 핑커턴에게 받은 편지를 가지고 집을 찾아온다. 샤플레스는 핑커턴이
일본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하고자 편지를 가져온 것이지만,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만으로 흥분한 나비 부인의 모습을 보고 차마 편지의 좋지 않은 내용까지 읽어주지는 못한다.
3막 : 스즈키가 아침에 깨어나고 나비 부인은 마침내 잠이 든다. 샤플레스와 핑커턴이 새로운 미국인 아내
케이트와 함께 집에 도착한다. 그들은 케이트가 아이를 키우기로 동의했기 때문에 온 것이다. 그러나
핑커턴은 나비부인이 그의 귀환을 위해 집을 장식한 것을 보고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이 겁쟁이이며 나비 부인을 직접 대면할 수 없다고 시인하고, 스즈키와
샤플리스 , 케이트에게 나비 부인에게 이 소식을 전하도록 한 채 떠난다.
나비 부인은 핑커턴이 직접 자신을 보러 온다면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동의한다.
그후 그는 불단에 기도를 올리고 아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뒤 아들의 눈을 가린다. 그는
아들의 손에 작은 성조기를 쥐어주고 병풍 뒤로 가서 아버지의 할복 단도로
자신을 찌른다. 핑커턴이 급히 들어오지만 이미 늦었고, 나비 부인은 죽음을 맞이한다.
월남전쟁에서 한국군인과 사업가들이 베트남 현지처에게서 낳은 1만여명 의 "라이 따이한" 과
필리핀 에간 사업가와 유학생들이 현지 처녀에게서 낳은 3만에 달하는 "코피노" 도 문제라!
한국인 아버지 들은 처자식을 버리고 도망쳐온 후 새 장가를 들고는 제 자식들을 찾지 않습니다!
한국인 아이를 낳은 베트남 여인들은 공산통일후 적의 자식을 낳았다고 말못할 고초를 겪으며
생활고에 시달렸는데..... 프랑스나 미국은 정부가 나서 베트남 정부와 교섭하여 자국민
핏줄들을 찾아 프랑스나 미국에 데려가 입양시켜 키웠는데, 한국 정부는 지금도 모른척 합니다.
나가사키항을 구경하다가 문득 동아일보에 인천항이 떠오르니.... 곡식 가마니를 짊어진
인부들이 잔교를 오르내린다. 소가 끄는 궤도차가 매립공사 현장으로 자재를 나른다.
월미도 군용철교 너머로 대불호텔과 58은행이 보인다. 117년 전 인천항의 모습 입니다.
인천시가 1908년 촬영된 개항기 인천 영상을 확보해 22일 공개했으니 인천 사진으로는 가장
오래된 자료다. 해당 영상은 프랑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보관된 것으로 전체
길이 106m, 6분31초 분량이며 한국영상자료원이 “해외 아카이브 조사 과정” 에서 발견했다.
인천시립 박물관과 한국영상 자료원이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 촬영 시기는 1908년 2~
4월로 분석된다.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과 개항장을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추정된다.
영상에는 월미도 군용철교, 세관 매립공사 현장, 대불호텔, 58은행, 영국영사관 등이 담겼다.
약 120년이 지났지만 건물 간판 텍스트 판독이 가능할 정도로 화질이 선명하다.
월미도 군용철교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건설한 목조 철교다. 1904년 착공, 1905년
준공됐다. 1911년 철거돼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1907년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던 임시 세관청사의 정확한 건립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도 포함됐다.
인천시는 AI 기술을 접목해 과거와 현재 도시 경관을 비교· 재현하는 콘텐츠를 제작할 계획이다.
국제도시 인천의 출발점을 조명하겠다는 구상으로 인천시장은 “개항기 인천의 원형을 담은
중요한 영상" 이라며 "역사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시민과 폭넓게 공유하겠다”고 말했다.
옛날 인천항 얘기가 나온 김에 역시 나가시키와 인천 처럼 항구도시인 옛날 부산항의 사진들을 몇장
소개하고 싶은데, 인천과 부산에 원산 세 항구는 1875년 운양호 침입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했으니.... 부산은 오늘날 한국 제2의 도시이지만 언제 인천항에 그 지위를 뺏길지 모르겠습니다.
1875년 대포 2문을 장착하고 65명이 탄 일본 운양호가 영종진에 포격한후 보트 2척에 육전대 22명을
상륙시키니, 험준한 성에서 대포 36문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450명 조선군은 35명 사망자가 나자
대포와 총 130정에 포로 16명을 버리고 달아나니, 일본군은 "경상자 한명 없이" 성을 점령했는데
대포를 가진 450명이 일본군을 단 한명도 죽이거나 부상조차 입히지 못했는지 당시 조선군의 수준입니다.
부산은 개화기에는 동래군 동평면에 속한 작은 어항인데, 이웃 고을인 초읍이나 동래는 평야지대지만
부산항은 산이 달려와 바다로 빠지는지라 평야가 거의 없으며, 운양호 침입후 1876년 강화도조약
에 의해 인천, 원산과 함께 개항되는데.... 미국이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것 처럼 일본에 의해 개항됩니다.
조선이 설치한 부산항 해관 (세관) 이 조선인에게만 관세를 거둠에도 일본인들은 시위를 벌여 폐지
시켰으며, 지석영은 부산의 일본인에게서 종두법을 배워서 조선인들에게 접종을 시작하니
‘마마’ 로 불리며 너무 끔찍해 천형이라고 여겨지던..... “천연두의 공포” 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1895년에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항이 개항되자 부산항 경무관이던 박기종 등이 발기인
들을 모아 서양인들의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도쿄 개성학교를 모방해서
이름도 똑 같이 개성학교 라고 붙였으니 일본을 통해 서구문명을 배우려는 것입니다.
커리큘럼과 교과서 일체를 도쿄 개성학교에서 가져왔고 교장과 선생도 습자 (한문) 선생 한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인이니 수업은 당연히 일본어로 하였는데, 훗날 부산상고로
고 노무현 대통령의 모교이며.... 십여년 전에는 다시 교명을 일본 처럼 "개성고" 로 변경했습니다.
부산 개성고의 원형인 일본의 카이세이 (開成 개성) 고는 일본 고교생 중에서 0.2% 만이 합격 한다는
도쿄대학 입시에서 2015년 기준으로 무려 34년 연속 최다 진학자를 기록했으니, 그해 185명
인데 비해 2위 츠쿠바대부속고 107명, 3위 나다(灘) 고 92명의 순인데... 개성고는 재학생중
도쿄대에 46% 합격율이니, 중고교가 연결된 개성중학교 입시는 도쿄대 입시 보다 살벌하다고 합니다?
개항후 옛 부산왜관 자리에 일본인 거류지가 설치되고 토지를 매입하던 일본인들은 한국
정부에 바다 매립을 권고하니..... 일본 돈과 일본인 기술자들에 의해 1902년
부산항 북빈을 매립했으며, 1904년에는 경부선 철도가 일본인들에 의해 완성이 됩니다.
하지만 역사를 지을 공간이 없자 일제는 다시 1907년에 북빈을 2차로 매립하여 그 땅에 부산역을
지었으며 영도 지역까지 매립하니.... 평야가 없어 인구가 적었던 부산포는 동평면에서 독립해
부산면이 되고 항구도시로 발전해 오히려 동래군을 흡수하게 되니 꼬리가 몸통을 삼켜버린 꼴입니다.
경부철도에 이어 부산역이 지어지자 부산~ 초량간 전화가 개통되었으며 1910년 성지곡
수원지 수도 개설후 일제는 1912년에 부산항 1부두 이어 1913년 부산진을 매립해
항만 도시가 그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2025년 12월 해양수산부가 들어선 자리입니다.
일본인에 의한 부산 바다 매립은 계속되어 중앙동과 영도 남항동이 생기자 일제는 런던 템즈강
의 타워브리지를 모방해 개폐교인 영도 다리를 만들었으며..... 영도 다리 위에 전차
레일도 깔았는데 1934년 준공식날 6만명 (부산 인구 16만) 이 몰리는등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 영도 다리는 6.25 전쟁이 발생한 이후에는 서로 헤어진 피란민들이 매월 초하루
"영도다리에서 만나자" 라며 약속장소가 되어 유명해졌으나 교통량이 많아지고
영도에 상수도를 놓기 위해서 1966년 중지했다가, 1980년에 새 다리를 놓았습니다.
부산은 해방 이후에도 대마도의 이즈하라와 긴밀하게 맺어지는데... 1960년을 전후한 10여년간
부산은 "밀수의 천국" 이었으니, 시계와 카메라에 가방등을 밀수한 더분에 부산의
국제시장은 글자 그대로 엄청 규모가 커졌는데 대부분은 대마도 이즈하라항에서 구입한 것입니다.
한국은 공장과 기업이라고는 방직공장과 제분 및 제당공장에 정미소 외에는 없었으니, 국세 수입중
가장 비중이 큰게 논에 부과하는 "농지세" 였으며.... 한해 거두는 세금으로는 공무원과 군인 및
경찰 월급 줄 돈도 되지 못했으니, 일본인들이 두고간 "적산가옥" 이라 불렸던 집과 공장이며
토지와 논을 몰수해서 판 돈과 미국이 원조해준 식량과 옷등을 시장에 팔아서 나라를 운영할때 입니다.
따라서 국내에는 공장이라곤 없었으니 물자가 귀한지라 자연히 밀수가 판을 쳤는데, 일본과
국교 수립도 안된 시절이니 당연히 여권이나 비자도 없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여수나
부산항에서 모터를 단 빠른 밀수선이 150척이나 이즈하라항에 왔고 역시 한국인들도
포함된 이즈하라 상인들로 부터 상품을 구입해 부산항으로 실어나르면 부산 국제시장에 풀렸습니다.
부산항 얘기가 나온김에,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배 이름까지 지어준 지남호는 부산항
에서 출항해 남태평양 사모아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처음 보는 고기라 이름을
몰랐다가 이승만 대통령에서 보고할 즈음에 진짜 고기라는 뜻으로 “참치” 라고 이름을
지었으니 10만불을 벌어들였는데... 규모로 보자면 사실상 "대한민국 최초의 수출" 이었습니다.
부산항에서 월남으로 가는 군인들이 배를 탔는데 베트남에 도착하니 총과 실탄이며 군화와 군복까지 100%
를 미군에게서 받았으니 "국산이라고는 몸뚱아리" 뿐이었는데.... 미군 옷이 맞지 않아 달러로 받아
부산에서 군복을 만드니 염색 기술이 형편없어 한번 옷을 빨면 물이 빠져 푸른 군복이 얼룩 군복이 됐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점차 부산에서는 옷만드는 기술이 발전해 의류를 수출하는 단계 까지 갔고, 월남에 간
국군은 매일 "전투 수당을 미군에게서 달러" 로 받으니... 한국 정부는 이걸 원화를 주고 거두어
들여 "경제 건설에 종자돈" 이 되었습니다. 물론 돈 받고 하는 전투라 용병 소리를 들었으니, 몇년
전에 베트남 여행시 후에 전쟁 박물관에 가니 한국군을 a Puppet Army (괴뢰군) 라고 적혀 있더라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