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적(妙寂)이 무슨 뜻입니까?“
경기도 남양주시 백봉산 자락에 있는 묘적사의 이름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묘할 묘(妙)에 고요할 적(寂)이라는 단어에 매력이 끌린 것이다.
그 무엇이 그렇게 묘하고 고요함을 자아낸다는 말인지 퍽이나 궁금해서다.
그래서 지나는 스님에게 불쑥 물었다.
“원래는 아른 아른 거린다는 의미의 묘를 썼지요. 女와 目 少 세 자로 구성된 묘입니다.
아른 아른 거리는 뭇 마음이 사라져 고요해진다는 뜻입니다. 그게 묘적입니다.“
젊은 스님이 풀어내는 묘적의 이야기는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기대 이상이었다.
그 묘 한자는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비슷한 아득할 묘(渺)는 찾았다.
“이 뭐꼬? (Who am I? )"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아나서는 게 불교의 수행과정이다.
스스로 깨우침을 찾는다. 잃어버린 나(牛)를 찾는(尋) 게 불교의 목표다.
지금까지 깨달음을 이룬 이는 오직 석가무니 뿐이다. 깨달음을 이룬 성자 석가무니다.
그는 아른거리는 잡념을 털어내고 끝내는 깨달음을 이룬다. 아마 깨달음의 순간 그 마음이 묘적이 아닐까.
"왜 이 절에는 일주문이 없나요?"
그 스님에게 또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큰 절에 일주문을 다 두었다고 해서 이 작은 절에 꼭 일주문을 두어야 하나요?"
거꾸로 묻는다. 사람들이 꾸며내 만든 문만이 일주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주문을 산문(山門)이라고 한다. 백봉산 입구에서 만난 그 계곡이 바로 일주문이라고 여기자.
"우리 절에는 문이 따로 없어요. 저 하늘의 구름이 이 절의 문(雲門)입니다.
아마 우리 절의 문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문일 거예요."
얼마전 운문사에 갔을 때 자랑삼아 하던 운문사 이야기가 생각난다.
빤히 보이는 저 하늘 구름을 문 삼는 절이기에 따로 문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천왕을 모신 사천왕문이다.
그 문루에 무영루(楙影樓) 현판이 걸려있다.
초서의 글을 가미한 번성할 무(楙) 그림자 영(影)이다.
북향을 등지고 동녁을 향한 사천왕문은
사실 중생이 사는것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니 우리네 인간의 업은 자연히 발생한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오행에서 동쪽은 발생을 의미한다.
동은 봄이고 춘몽을 의미하고 나무가 자라나는 모습을 반추했다.
이는 색계가 일어나는 형상이다.
이러한 업이 좋게 번성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 무영루다.
불교는 윤회를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다.
윤회는 인도 고대 종교의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는 윤회를 기본적으로 믿었다.
인도의 사성(四姓) 계급 캐스트제도는 윤회를 바탕으로 나타난다.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왕족 귀족) 바이샤(평민) 스드라(천민 노예)
불교는 윤회사상을 기본으로 하면서 사성계급을 부정한다.
깨달음에는 계급이 없다는 논리이다.
너와 내가 따로 없다고 했다.
진계와 속계도 구별하지 않는다.
평등사상이 불교의 또하나의 특징이다.
윤회를 주장하면서 사성평등 논리를 편다.
바로 하화중생(下化重生) 상구보리(上求菩提)이다.
평등이념이 힌두나 자이나의 윤회와 다른 점이다.
사찰 건축에서 스님의 평등 이념이 곳곳에서 보인다.
곧게 자란 나무만 골라서 쓰지 않는다. 경제 효용만을 따지는 않는다.
사성이 모두 평등하다고 했다. 굽은 놈은 굽은 대로 좋다.
나무도 있는 그대로 아니 생긴 그대로 요소 요소에 긴요하게 쓴다.
사찰 건물을 지을 때 스님은 바로 재목의 탕평(蕩平)을 취한다.
1300년 전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묘적사다.
원효대사가 중국의 당나라에 유학을 갈 때다.
어느 동굴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어둠 속에서 물을 달게 마셨다.
다음 날 깨어보니 자신이 마신 물 그릇이 시체가 썩어있는 사람의 해골이었다.
전날 밤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그 물이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나는
그런 물이었다는 사실을 그 이틑날 알게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원효사상의 큰 틀을 바로잡아 나간다.
조선왕조는 묘적사에 왕실산하 비밀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한 사찰을 짓고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켜 승려교육과 아울러 고도의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는 전설이 있다
묘적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집중공격으로 완전폐허가 된 것을 19세기에 중건하였으나
지난 1969년 대화재로 대웅전, 산신각 등이 소실되었다. 현재의 묘적사는 1971년 이후 중건된 것이다.
규모는 작은 절이다. 그래도 갖출 것은 다 갖춘 절이다. 절 경내에는 보기드물게 물이 흐르고 있었다.
서울 근교 사찰 가운데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비교적 활발한 묘적사로 알려졌다.
백봉산 묘적사 쪽으로는 흥선대원군의 흥원이 있다.
북쪽 남양주에 있는 홍유릉이 영원과 함께 백봉 묘적산을 주산으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