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龍仁) 등잔 박물관
소 재 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258-9
(능곡로56번길 8)
이곳 박물관 설립자가 뜻밖에도
산부인과 의사분 입니다.
설립 목적은
조상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등잔을 모아 전시하고,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등잔들을 모아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등잔박물관의 형태는
수원화성 성곽의
이미지를 따서 건축하였다.
성곽의 형태를 본뜬
회백색 건물은
마치 횃불이나 등대처럼 보인다.
매일 찾아오는 어두운 밤을 우리네 선조들은 어떻게
이겨내어을까? 현대에는 전기불이있어 쓰이는
용도가 매우 다양하지만 옛날 우리 선조들은......
~ 어둠을 이기는 문명의 씨앗 ~
불은 인류와 문명을
현재까지 끌고 온 원동력이다.
어둠을 밝혀주고, 몸을 데워주고,
음식을 익혀주고, 도구를 만들게 해준,
인간을 인간답게 해온 힘이자
자연이 베푼 최고의 혜택입니다.
선사시대인들은 죽어라 하고
나무를 비비고 돌을 부딪쳐 불을 얻었다.
이렇게 어렵사리 얻은 불을,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재를 덮고
애지중지 보관하는 일은
예전 우리나라 며느리들의
최대 과제 중 하나였다.
불 꺼뜨린다는 건
시어머니에게 결코
용남할 수 없는 중대한 사태였음을
두말 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이런 일상사(日常事)는
우리나라에서 100여년전까지
이어져 내려온 풍습 이였습니다.
김동휘 관장은
소실되어 가는 우리 고유의 등잔을
사재를 털어 수집,
전시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보존·관리 부문에서
대통령상을 수상(2004년 12월 8일)을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에게
두차레나 받으셨다.
"재봉틀과 등잔불"
이순선
거울을 본다.
육순의 주름진 얼굴
세월 따라 주름살이 늘어
마마자국인지 여드름자국인지
의미가 없는 자국이 되 버렸다.
어릴 적
나의 의지와 무관한 마마자국은
병마와 싸워 이긴 위대한 흔적인데
격려와 칭찬은 아닐지라도
놀림과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처녀시절
결혼을 포기하고
재봉틀과 수를 놓으며
혼자서 여생을 보내려 했건만
부모님께 거절당하고
어느 날
등잔불에서 본,
맛선이
결혼으로 성사되었다.
등잔불을 고마워해야 하나.
재봉틀은 고집했어야 하나.
그러면서
남들처럼 아웅다웅 살고 있다.
위의 시(詩)는
언제인가 남해안 여행길
어느섬에서 읽었던
등잔불과 인연이 되였던
시(詩)가 생각이나서 올려보았습니다.
각양각색의 촛대와
등잔대가 함께 전시돼 있다.
거북 등에 학이 서서
부리로 촛대꽂이를 받치고
선 철제촛대가 눈길을 끈다.
순라꾼들이 밤에 순찰 돌때 쓰던
조족등도 흥미롭습니다.
발쪽을 비춘다 해서 조족등인데,
도적을 잡을 때도 쓰므로
도적등이라고도 불렀다.
겉모습이 박처럼 생겼는데,
나무나 쇠로 틀을 하고
겉에 기름종이를 두껍게 발라 어둡게 하고
밑쪽은 터진 모습이다.
안에는 돌쩌귀가 있어
등을 어떤 방향으로 들어도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현시대로 말을하자면
후렛쉬 손전등 이라구 할까요.
조명이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상단부분만 이렇게 촬영하여 보았습니다.
어느집 안방 마님이 쓰시는 등잔대 라구 할까요.
너무 고급스럽고 화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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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등잔 박물관은 지나오면서도 방문하지 못하였는데....
덕분에 구경 잘 하였습니다.
김동휘관장님이 아직 살아계시나봅니다.
저랑 같이 박물관대학을 다녀서 답사도 같이 다녔고 ,
등을 구입할때도 옆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박물관이 완성된 뒤에는 못가봤습니다.
열심히도 등을 모으시더니 이런 결실을 맺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