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투르크 두 민족은 오랜 역사를 통해 종족적 원류, 삶의 방식, 관습, 민간신앙 같은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물질문명과 경제적 지표만이 중시되는 오늘날 글로벌 경제환경에서 이러한 본질적이고 소중한 가치는 잊혀지거나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습니다. 한국과 터키 두 나라 사이가 특히 그러했습니다. 1. 우선 두 민족은 종족갈래를 함께
합니다. 물론 일부 학계의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투르크족은 알타이족의
중심종족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민족과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중앙아시아 투르크족들은 알타이-사얀 산맥의 동남부 미누신스크(Minusinsk)
지역을 본거지로, 기원전 2000년경부터 아시아 대륙의 동북부 초원 지대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그들은 역사상 16개의 제국(帝國)과 100개가
넘는 소국가를 건설하여, 철과 말을 기본으로 한 수준 높은 스텝 문화를 이룩하였습니다. 19세기 이후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본격화된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새로운 고문서, 비문들, 특히 오르흔 지역의 돌궐비문(突厥碑文)의 발견과 해독으로 투르크 인들에 의한 역사실체와 문화수준이
새롭게 재평가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투르크족의 본류는 기원전 700년경까지 알타이 지역에 생활의 뿌리를 내렸던 반면, 또
다른 투르크 부류는 기원전 1100년경부터 대거 중국의 서북부에 있는 칸수나 오르도스 초원 지대로 이동해갔습니다. 그 결과 이 일대에는 스텝
투르크족의 요소가 강한 새로운 양사오 문화가 싹텄습니다. 양사오(仰韶:Yangshao) 문화에는 말 사육, 천신 사상, 정비된
군사조직, 동물 문양 예술 같은 투르크족 문화 요소가 특히 강조되었습니다. 오늘날 중국 문화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양사오 문화는 중국
주 왕조의 문화에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칸수와 오르도스에 거주하던 투르크족들이 바로 후일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흉노족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었습니다.
| ▲ 돌궐(터키)의 조강인 흉노의 활동무대
©
편집부 | | 이처럼 투르크 민족사는 흉노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흉노제국의 기층민들은 부족연합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으나, 상층 지배계층은 투르크 계통임이 분명합니다. 흉노가 쇠퇴한 후 그
잔존세력들이 서진하여 5세기경 유럽에서 훈족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학설이 점점 힘을 얻고 있습니다. 결국 흉노의 발전과 쇠퇴는 유럽 민족 대이동을
유발하여 유럽역사와 민족이 재편되는 역사적 계기를 만들어 준 셈입니다. 흉노의 이주와 쇠퇴 이후 중앙아시아를 제패한 새로운 세력이
돌궐이었습니다. 돌궐이란 ‘Turk’의 중국어 음역으로 오늘날 투르크란 명칭이 정립되고 보편화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돌궐을 위구르가 이어받고, 그의 일파인 오우즈족이 서진하여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이루게 됩니다. 7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이 동진하면서 중앙아시아
서부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여러 갈래의 오우즈계 투르크족들과 접촉하면서, 투르크족들은 9세기에 부분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합니다. 서쪽으로
이동해 간 민족이 후일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여 인류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2. 터키 민족사는 돌궐(6-8세기)에서 출발합니다.
현재 터키족의 직접적인 조상은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돌궐이다. 돌궐은 터키역사서에서는 "Gök-Türk(괵-투르크)“로 부른다.
‘하늘의 투르크’란 의미입니다. 돌궐은 흉노가 멸망한 이후 중앙아시아 초원의 주인이 된 유연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등극하며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돌궐은 세력확장을 꾀하는 수나라에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와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삼국 시대부터 우리 민족과 투르크 민족의 전통적인 우방의 관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572년에 돌궐의 왕 무칸(Mukhan, 木杆)이
사망하자 고구려가 돌궐에 조문 사절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오르혼 강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사방에 군대를 보내 모든 종족을
복속시키고, 머리를 가진 자는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릎을 가진 자는 무릎을 끊게 하셨도다. 앞(동)으로는 킨칸 산맥에, 뒤(서)로는
철문(鐵門, 발흐와 사마르칸트 사이의 통로)에 이르기까지 투르크 민족이 지배하는 투르크 국가가 되었다. 그는 현명한 군주였다. 용감한 군주였다.
신하들과 귀족, 백성들도 모두 현명하고 용감하였다. -외투켄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사방의 국가와 종족이 모두 슬퍼하며 조문 사절을 보냈다.
중국, 티베트, 비잔틴, 아바르, 거란, 그리고 고구려(Bokli Cholug) 등등-” 그의 장례식에 고구려로부터도 조문
사절이 당도함으로써, 돌궐과 고구려 사이의 접촉과 교류도 빈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돌궐이 지배했던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소재
아프라시압 궁전의 고분 벽화에도 고구려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에는 두 명의 고구려 사신이 발견되며 그 곳에 파견된 돌궐사신과 교류하고
있다. 이 시기(645년 이후)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집권하여, 고구려가 당을 견제하려는 외교적 노력이 집중되고 있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물론 642년경으로 추정되는 등장한다.
| ▲ 돈황벽화에도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들의 모습이
보인다. ©편집부
| | 특히 고구려의 전성기인 6~7세기경,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국가들과의 문화교류가 한층 활성화되면서 이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돌궐과의 교역이 늘어나고(605년경), 지연이 그 문화와
예술적 모티브들을 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607년에는 알려진 바와 같이 고구려가 사신을 오로도스 지방에 있던 돌궐 통치자 계민가간의 처소로
보내 수에 대항하려는 공동군사협력을 논의하다가 마침 그곳을 방문 중이던 수 양제에게 감지되어 경고된 일이 정도로 고구려-돌궐관계는 가까운
사이였다. 수나라의 양제는 중국을 통일하자 주변국들을 점령해 동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먼저 역사적으로 항상 중국의 북방을 괴롭혔던 흉노의 후손 돌궐을 정복해 실크로드를 완전 장악하고자 했지만 돌궐과 우호관계에 있던 고구려가 뒤에
버티고 있었다. 수양제는 돌궐보다 약한 고구려를 먼저 치기로 결심하고 612년에 군사를 일으켰지만 그 유명한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에서 패해
결국 수나라가 멸망하는 결과까지 낳았다.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도 전통적인 우방인 돌궐과 고구려의 관계에 항상 신경을
썼다. 당나라 최전성기를 이룩한 태종이 한반도의 정세를 교묘히 이용해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자 고구려의 유민들이 말갈족의
협력을 얻어 발해를 건국했다. 새로 독립한 발해는 중국의 당나라, 신라, 왜의 역학관계를 이용해 세력을 펼쳐나갔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큰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돌궐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돌궐은 비록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지만 역사상 최초로 중앙아시아의
스텝지역을 통일하며 대제국을 건설했고 오르혼 강 비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들의 문자를 소유하며 유목민족답지 않게 수준 높은 문화도 갖고
있었다. 돌궐이 멸망하자 같은 투르크 계 민족인 위구르족이 역사에 대신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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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터어키 조상은 돌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