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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런 경우가 있구나 싶습니다. 9월도 중순인데 열대야라니, 70평생 살아오며 경험해보지 못한 일입니다. 과연 여태 살아왔지만 이 땅이 자꾸 낯설어갑니다. 시작된 이 추석연휴 동안 내내 이어진다는 예보입니다. 거참! 연휴 동안 잠자기도 쉽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떠날 수는 없는 일, 그냥 살아야지요. 버티는 겁니다. 나아지겠지요. 설마가 사람 잡아도, 설마 이달 말까지 이어지겠습니까. 지도 지쳐서 물러갈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꼬리를 늘어뜨릴지 기대(?)가 됩니다. 반대로 갑자기 제자리로 돌아오면 어쩌지요? 하기는 독감 예방주사 맞을 때도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힘든 세상이 되어가는 듯합니다. 하기는 쉽게 살아온 인생도 아닙니다. ‘다 지나가리라’ 그렇게 사는 거죠.
덕에 산행도 다시 방학을 했습니다. 열대야를 지내며 아침 산행 역시 견디기 어려워서 쉽니다. 땀으로 범벅되어 내려오면 몸도 맘도 피곤해집니다. 그냥 쉬어가는 편이 낫겠다 싶은 것입니다. 이 맘때에는 만수무강 신경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 들기 전에 알아서 조심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긴 시간도 아닌데 아침이 좀 더 여유가 생깁니다. 대신 머리까지 쉬게 되는 것 같아 걱정됙기는 합니다. 아무래도 발바닥으로 땅 밟는 일이 머리 회전하는 데도 유용한 모양이지요. 어서 개학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연휴 끝나면 나아지리라 기대합니다. 모처럼의 명절 연휴입니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즐거운 시간을 빕니다. ^)^
2024년 9월 14일 김종우 목사 드림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전도서 7 : 10)
<트위스터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5년 만에 살아서 나타났습니다. 그 때는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다른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의 죽음으로 죄책감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멀정하게 살아서 나타났습니다. 기분이 어떨까요? 차라리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잊어가며 그런 대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 동안 마음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반가움, 기쁨보다는 화가 났을지도 모르지요. 갑자기 나타나서는 그 때의 일을 계속하자는 것입니다. 이제 당시의 아픔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서 적응해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선뜻 응할 수 있겠습니까? 착각이지요. 그대를 가지고 왔지만 거절을 당하고 돌아섭니다. 그렇게 ‘하비’는 동료이며 연인이었던 ‘케이트’를 떠납니다.
다시금 기억이 떠오릅니다. 사실 잊고 살려고 했던 기억들입니다. 하비가 나타나서 제의하는 바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일했던 때이고 하비를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대로 잘 진행이 되었더라면 아마도 장래 인생도 함께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붙잡아주고 자기는 회오리바람에 날아가버렸습니다. 다행히 이렇게 살아 돌아왔지만 진작 연락이라도 주었으면 이 아픈 죄책감을 짊어지고 그 시간을 지내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화가 나기도 하고 밉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타나서는 새삼 그 때 하던 일을 이어가자니. 아프고 억울한 마음이 쉽게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자꾸 생각이 납니다.
얼마 후 그 편안한 일자리를 떠나 하비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비와 같이 합류합니다. 일반 폭풍우도 아니고 그 무서운 토네이도입니다. 휩쓸리면 집도 자동차도 날아갑니다. 그런데 사람쯤이야 우습지요. 그렇게 함께 하던 동료들을 잃은 경험도 있습니다. 다시 그 자리에 온 것은 자기가 잘 아는 분야이고 목숨걸고 일했던 열정이 그립기도 했는지 모릅니다. 크게 확대하면 현장에서 힘없이 당하는 사람들, 그 지역 주민들을 돕고자 하는 사명감도 되살아났습니다. 무서운 토네이도, 감히 그 앞에 맞설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정면으로 달려들어 토네이도를 다스릴 수만 있다면 당하기만 하는 주민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하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경쟁하듯 따라붙는 또 다른 그룹이 있습니다. 스스로 ‘토네이도 카우보이’라고 부르며 유튜브로 현장 중계까지 하며 다닙니다. 물론 근방 지역주민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유튜브 방송으로 이름이 나있는 것이지요. 그들의 우두머리가 ‘타일러’라고 하는 젊은이인데 방송을 타는 만큼 쇼맨십을 충분히 지니고 있습니다. 요란을 떨며 다니는 것이지요. 하비의 팀에게는 좀 거추장스런 상대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로 자기네 일을 추진해갑니다. 뉴욕에서 온 케이트, 그들의 말로는 ‘도시 여자’와 농촌 토박이의 대결입니다. 학문과 지식의 소유자와 경험과 직관의 소유자와의 대결이기도 합니다.
현장을 찾아다니고 자료를 모으며 시간과 공을 들여 연구하고 발표하여 사회에 공헌을 하도록 나라에서 지원을 합니다. 때로는 기업이 후원을 하기도 하고 소위 사회 기여를 위해 재력이 있는 부자가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면 소위 기업 이미지가 좋아지고 개인으로서는 사회적인 명예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그 봉사를 통하여 자기 사업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연구자료가 사업에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목적을 가지고 후원하는 경우도 있고 또 서로 협조하는 의미에서 주고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연구를 계속하려면 재정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니까요.
토네이도를 쫓아가며 현장을 다니고 있다가 케이트는 하비가 특정 기업에 자료를 넘겨주는 것을 목격합니다. 한 마디로 돈을 목적으로 일한다고 보여진 것입니다. 자신은 순수하게 재난을 당하는 주민들을 돕기 위해 일하는 것인데 하비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하비를 떠납니다. 그리고 끈질기게 자신을 따라붙는 타일러와 동승합니다. 하비나 타일러 모두가 필요한 장비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케이트에게 있는 장점은 학교에서부터 많이 배우고 연구하여 남다른 지식과 경험 그리고 판단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비도 그것을 인정하여 다시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타일러가 함께 누리게 됩니다. 아무튼 서로 비슷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비는 당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나서 다시 그 일을 하려니 누구 지원해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도리 없이 기업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사람들을 위한 일임을 자부하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돈을 벌려는 모습일지 모르지만 일단 자금이 필요한 일이니 도리 없습니다. 아무튼 따로 일하게 되었지만 모두가 큰 위기를 당하여 함께 극복해냅니다. 그리고 케이트는 다시 도시로 돌아가려 합니다. 어마어마한 토네이도를 가까이 볼 수 있는 경험을 합니다. 그것을 정복하다니 역시 인간은 대단한 존재입니다. 볼거리도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 시간을 따라 연인의 감정이 변해가는 것도 흥미있는 이야기지요. 영화 ‘트위스터스’(Twisters)를 보았습니다.
잘 죽자고 믿는 겁니까?
오래 전 이런 말을 들은 적 기억이 납니다. 아마 우리 성도들도 들어봤으리라 생각합니다.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 흔히 노인을 가리켜 한물 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왕따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라 여겨집니다. 내가 나이 그냥 먹은 줄 아느냐? 하는 일침이지요. 늙도록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경력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한 평생을 산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는 이미 반백을 넘게 산 사람도 있고 아직 초반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백을 넘게 산 사람들은 아직도 초반에 있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그러면서도 걱정됩니다. 저들이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물론 젊은이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기대가 있지요. 앞으로 펼쳐질 인생의 파노라마에 대한 기대입니다.
누가 인생을 비유하여 바다라고 했듯이 찬란한 햇빛을 받으면서 잔잔한 바다 위를 항해하는 모습은 꽤 낭만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바다가 엄청난 파도를 만들며 순식간에 우리를 집어삼킬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느 때 어느 만치에서 돌변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담대히 나아갑니다. 배는 항구에 정박시키려 만든 것이 아닙니다. 바다 위를 항해하라고 만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가만 앉아 놀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서 창조되었고 이 세상에 보내졌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로 구속함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졌음을 믿습니다. 엡 2 :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려 오늘도 인생이라는 바다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들 삶 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잘 아는 대로 다윗의 인생 초반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습니다. 막내로 태어나 집에서 양떼를 돌보며 한가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비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간 형들을 위문 갑니다. 거기서 인생이 뒤바뀌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적진에서 웬 거인 장수가 하나 나타나더니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욕먹는 것을 도저히 참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왕에게 허락을 받고는 그 거인 장수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아무도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보다도 거의 반은 더 큰 장수였습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무장을 하였는지 보기만 해도 질려버릴 정도였습니다. 골리앗을 상대하다니 말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소년이 무기도 들지 않고 물매질 할 것만 들고는 당당히 나간 것입니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의 물맷돌 한방에 골리앗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온 이스라엘 군에서 함성이 일어나고 곧바로 적진으로의 돌격이 이루어졌습니다. 대승을 거두었지요. 누구 덕이었습니까? 다윗이었습니다.
그 후 어린 소년이었지만 장수가 되어 전장을 누볐습니다. 가는 곳마다 승리했습니다. 어느 날 개선하여 돌아오는데 백성들 가운데 여인들이 나와 노래합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 : 7) 이때부터 사울 왕이 다윗의 원수가 됩니다. 그리고 사울 왕이 죽을 때까지 10년 세월 다윗은 정말 험악한 인생을 삽니다. 시 69 : 2절 가운데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은 바로 그 때를 표현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그런 암담한 때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경험을 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과연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그릇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름답고 훌륭한 도자기가 되려면 일반 도자기보다 풀무불에 더 많이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믿음의 용사들도 그만한 연단을 받았기에 그만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 이제 깊은 수렁에 빠졌던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어떻게 영광을 받으셨는지 볼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들의 인생길에서 비슷한 수렁에 빠진다 해도 결코 낙심치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요셉입니다.
야곱 즉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들 가운데 열한 번째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첫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 가운데 유독 아비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그것이 형제들 눈에 가시가 되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요셉이 어느 날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합니다. 창 37 : 5 - 7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우리야 지금 아멘 하지만 형들이 과연 아멘 하겠습니까? 그러잖아도 미운데 그 꿈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그런데 9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아마 형들은 핏대가 올랐을 것입니다. 요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어디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형들이 양을 치느라 여러 날 아비를 떠나 있었습니다. 아비가 걱정이 되었지요. 창 37 : 12 - 13 “그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비의 양떼를 칠 때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 보내리라 요셉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그래서 요셉이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집을 나섭니다. 드디어 물어물어 도단까지 가서 형들 있는 곳에 이르자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런데 형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18 - 20절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큰형의 도움으로 죽음은 면했지만 결국 구덩이에 빠졌다가 더 큰 인생의 구덩이에 빠집니다. 28절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20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 당했습니다.
집에서 아비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직 20도 안된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어도 풍습도 전혀 다른 이방 땅으로, 그것도 노예가 되어서 끌려갔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고 실수하면 말보다는 주먹이나 채찍이 앞서는 노예가 되어서 이방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인생의 수렁도 이런 수렁이 있겠습니까? 누구 때문이에요? 형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피를 나눈 형제가 동생을 노예로 팔다니! 이런 인면수심의 인간들, 내 이 원수는 꼭 갚으리라.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처음에는 혹시 원망스러운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나중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롬 8 : 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요셉은 진작에 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있는 형들에게 무엇이라 말합니까? 창 45 :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이루어진 것이요 무시무시한 흉년에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환난과 고통이 견디기 어려워도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이 고통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이 아픔이 하나님의 목적하셨던 바가 아닙니다. 이 수렁이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렘 29 : 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그렇습니다. 지금의 아픔은 단지 과정일 뿐입니다. 이 수렁을 지나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요셉이 노예가 되었어도 변하지 않은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창 39 :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했는가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조만간 수렁은 메워질 것이요 파도는 잔잔해집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2.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을 때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유용한 인물로 비쳐 그들의 학문을 배우고 인재가 되었습니다. 포로 된 자로 그 왕국의 총리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니 본토 사람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습니다. 다리오 왕 때의 일입니다. 거대한 제국에 방백 120명을 두었고 총리 셋을 세웠습니다. 다니엘도 그 총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뛰어난 인물이므로 왕은 다니엘을 그들 위에 세웠습니다. 그들의 시기 질투가 대단하였겠지요. 하지만 어디 흠 잡을 곳이 없었습니다. 단 6 : 5 “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하고” 왕에게 찾아가서 한 금령을 반포하게 합니다. 7 - 8절에서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30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그런즉 왕이여 원컨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어인을 찍어서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왕이 무슨 의도인지도 모르고 도장을 꽝 하고 찍습니다. 쉽게 말하면 다니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것을 빌미로 다니엘을 잡아 사자굴에 넣어버리자는 것이지요.
다니엘이 어떻게 대처하는가 봅니다. 10절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지금 감사가 나옵니까? 그런데 감사하였습니다. 무엇이 감사하지요? 대부분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감사할 만한 것들입니다. 대학에 합격해서, 직장에 취직이 되어서, 병이 나아서, 일이 잘 돼서, 아들을 낳아서,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새 차를 구입해서, 장사가 잘 돼서 등등 모두 감사할 조건들입니다. 그런데 가령 도적을 맞았습니다. 감사합니까? 경험해본 사람은 압니다. 집에 들어서는데 집안이 엉망이 되어있습니다. 분명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있습니다. 그 순간 기분이 어떻지요? 섬뜩합니다. 전에 연립주택에 살 때 지하를 방으로 개조해서 서재로 사용할 때였습니다. 어느 날 들어가는데 방안이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보니까 닫아두었던 창문이 열려있었습니다. 정말 가슴이 섬뜩했습니다. ‘도 선생’이 다녀간 것이지요. 감사가 나옵니까? 이것이 훈련입니다.
다니엘이 감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계획대로 사자굴에 던져집니다. 왕도 자기가 저지른 일에 후회막급이었지만 도리가 없었습니다. 밤을 새다시피 하고 새벽녘에 사자굴로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입구에서 소리칩니다. 19 - 20절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는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사실 다리오 왕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하여 당신의 어떠하심을 똑똑히 보여주셨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사자굴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도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사자굴이라는 죽음의 수렁에 들어가는 것은 이방 왕에게 자기가 믿고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말이 아니라 눈으로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믿음대로 나타내 보이셨고 이방의 왕은 그 하나님을 찬송하며 온 나라에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26 - 27절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오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였더라” 아멘! 이방인 왕으로 이만한 신앙고백이 나올 수 있다는 것, 대단한 일 아닙니까? 눈에 보이지도 알 수도 없는 하나님을 확실하게 경험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십니다.
요셉도 다니엘도 살아서 수렁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는 죽어서 들어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죄의 삯이 사망”(롬 6 : 23)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당신 자신의 죄 값이 아니라 우리 죄 값을 치르기 위해 들어가셨습니다. 사 53 :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가 담당한다면 그대로 지옥의 수렁에 빠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사 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태초에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고(창3:15) 갈 4 :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우리 가운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가 오신 것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마 20 :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이 무엇입니까? 대신 죄 값을 치르는 제물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 올라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끝났다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무슨 소망이 있어서 하나님의 하신 일을 증거하겠습니까? 죽었다. 우리도 죽는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죽음의 수렁이 우리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죽는 것으로 끝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고전 15 :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렇습니다. 여기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면 무슨 소망이 있어서 예수 믿고 착하게 의롭게 선하게 살려고 발버둥 칩니까? 그냥 알아서 멋대로 즐겁게 신나게 살다 죽으면 되는 거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행 2 : 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아멘! 이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사망의 수렁에서 구원해내십니다.
우리가 모두 죽음과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모두가 아담의 후손이고 그 죄 가운데 태어나서 그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다름 아닌 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이 죽음의 수렁에 빠져서 멸망당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 죽자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히 2 :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렇지요. 우리 모두 죽기를 무서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죽음에 종노릇하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사람 모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태 배워서 알고 있는 바로는 예수 이름만 부르면 무조건 오케이였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6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오직 누구를 붙들어주신다고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죄송하지만 단군의 자손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냥 교회만 왔다리갔다리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사는 길이 있습니다. 땅에서는 자동차가 가는 길이 있고, 널따란 공간에도 비행기가 가는 길이 있고, 바다에 배가 다니는 길이 있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가 목표하는 하늘 가는 길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그 길을 알아야 하겠다, 몰라도 되겠다? 자기 멋대로 가는데 그 길이 하늘 가는 길이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이 왜 망한답니까?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왜 망한대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답니다. 그러니 알아야 하겠습니까, 모르는 채 무식하게 살랍니까? 율법 곧 하나님 말씀을 버리면 하나님은 우리 자식들을 잊어버리겠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알도록 합시다.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죽으라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아니다? 아닙니다.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살 길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누구를 보내주셨습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곧 유대인들이 받아요, 안 받아요? 살리러 오신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하나님이 포기하십니까? 우리 하나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아들 예수님을 다시 살려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다시 오마 약속하셨지요? 하나님도 아들 예수님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오십니다. 기다릴까요, 말까요? 오거나 말거나 그냥 살랍니까? 그러면 교회는 뭐하러 다닙니까? 잘 죽으려고, 죽어서 천국이나 가려고 나오셨습니까?
인생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수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두렵고 무서운 수렁은 바로 죽음의 수렁입니다. 나올 수 없습니다. 나오신 분이 딱 한 분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분을 따라가면 나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주신 길입니다. 바로 생명길이지요. 그 길을 알아야 하겠다, 몰라도 되겠다? 우리 모두 그 생명의 길, 영생의 길을 찾으려고 교회 온 줄 믿습니다. 그러니 배우자는 말입니다.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보십시오. 알아야 영생의 길을 찾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입니다. 그 분을 알아야 하고 그 분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 1 : 1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안으로 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읽을 수 있습니다. 배울 수 있습니다. 요일 1 : 1 -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이 생명의 말씀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려면 말씀을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다 안다고요? 교회를 몇 년 다녔는데 모르겠냐고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잠 16 : 18)
성경을 우리처럼 일일이 가지고 있지 않던 유대인들은 말씀을 머릿속에 가지고 신앙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백성에게 하나님이 탄식하시듯 말씀하셨습니다.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무슨 지식입니까? 세상 지식입니까? 아니지요. 율법 곧 하나님 말씀입니다. 외운다 한들 모르면 꽝입니다. 무엇을 몰라서 자기네 구원하려 오신 메시야까지 죽였답니까? 행 13 :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선지자들의 말’ 곧 예언(약속)의 말씀을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예언의 말씀 곧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고 신앙해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약의 대표적인 예언 ‘계시록’을 아십니까? 알려고 생각지도 않고 있다면 생명을 포기하고 신앙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찾아다니며 배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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