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숙"의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書評) 전체
글.김광한
<소설가 문학평론가>
난정 주영숙 작가가 이번에 펴낸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은 그 책의 방대함과 더불어 작가의 창작력과 함께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양반전이나 호질과, 허생전과 같은 단편적인 글을 벗어나 연암 박지원이살았던 조선조 영조와 정조 시대의 상황을 마치 역사책을 읽는 것처럼 작가의 해박한 지식이 총동원된 우리 출판계의 획기적인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던 그 시대에 양반적이고 유교적인 문체를 벗어나 나름대로의 자유분방한 필체를 구사, 유머 감각과 삶의 애환, 그리고 서민들의 생활상, 학자들의 위선과 허위로 가득찬 그 시대에 연암은 모든 그 시대를 비롯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위의 높낮이를 불구하고 친근한 친구로서, 선배로서의 연암의 인간적인 면모를 자세히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작가가 연암 박지원의 생각속에 틈입해서 영혼과의 교감을 이루지 않으면 이런 우량한 글이 나올수가 없다는데 기인한다. 요즘 같이 박사가 넘쳐나는 시대가 있는가하면 박사라는 서양식호칭이 없었던, 오직 양반과 선비가 지식인의 대명사로 불리워질때 연암 박지원은 요즘의 박사보다 지식과 학문이 더 뛰어난 인물이란 것이 이 글속에 나타나있다.그러나 스스로 지식인 테를 내지 않고 벼슬과 금전적인 것들을 가볍게 보고 오직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유려한 특유의 필체로 기술한 것은 조선조 5백년 역사에서 그 하나뿐이아닌가 생각이 든다.
작가의 권두언에서 작가는 연암의 작품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서인지 그의 작품과 그의 생애를 한권의 책에서 읽고자 하는 독자들이 많았다고 일언하면서 작가 자신도 이에 부응하기 위해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든 최근까지 박지원의 작품과 박지원의 일대기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고백한다.그리고 박지원의 소설작품을 문학의 향기로 갈무리 해놓고 또한 박지원의 일대기 역시 여러 마당으로 나뉘어서 글을 썼다.
맞는 말이다.인간의 나이가 60이 지나면 하던일도 신물이 나서 하는둥 마는둥 그리 열정적인 시각이 아니건만 죽자 사자 박지원의 모든 것에 매달린 것은 박지원이 대단한 천재라기 보다 시대를 뛰어넘는 그의 사람 냄새 풍기는 향취를 이 각박하고 메마른 현대인들에게 전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뜻이 강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글에 나타나는 문장의 탁월함과 예리한 비판의식, 그리고 위선과 형식에 가로막혀 진정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사는 그 시대의 사람들과 지금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흡사했기에 여기에 작가는 나름대로 사명의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박지원의 글도 일품이지만 그의 한평생 역시 소설 못지 않은 풍류와 멋이 넘치기에 작가는 아마도 여기에 매료가 됐을 것이다.양반전과 호질에 나타나는 해학과 풍자는 박지원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푼의 가치도 되지 않는 양반이란 호칭으로 인해 평생을 겹겹이 위선의 옷을 입고 구차하게 살아가는 양반이란 계층의 사람들, 그리고 호질, 즉 호랑이가 인간을 질책한다는 이야기에서 북곽선생이란 선비가 동리자란 과부의 집을 들락거리면서 정을 통하는 위선, 그리고 허생전에서 양반인 허생이 양반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좀더 뜻있는 일을하고자 변승업이란 부자를 찾아가서 돈을 꿔다가 매점매석을 해서 부자가 되고 이것을 사람의 도리가 아니란 생각에 다시 모든 재물을 훌훌 털고 야인으로 돌아가는 장쾌함 등등 요즘의 탐관오리나 벼슬이 좀 있다고 깝죽대는 졸부나 속물들이 반드시 한번쯤 보아야한다는 생각에서 작가는 그의 능란한 필치를 굴렸으리라.
그리고 허생에게 부담없이 돈을 융통해준 변승업의 인간적 신뢰가 요즘에는 신선의 세계에서나 있을법한 일이지만 그 시대에 그런 인물을 만난 것 역시 축복이고 글을 쓰는 동안의 행복이었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탐관오리를 인간적인 문제로 척결하는 선비다움과 그악스럽지 않은 성품, 그리고 중국의 장자와 같은 대자연의 기상으로서 한 시대를 누빈 철학가이자 작가이자 정치가이면서 도학자이었던 것이다.
작가 주영숙은 이글을 써가면서 항상 연암 박지원을 스승으로 또는 글 친구로서 영적인 교감을 갖고 대화하면서 비록 글을 쓰는 정신적 압박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이런 인물과 평생에 단 한번이라도 만난 것만해도 큰 축복이었을 것이다.
주영숙 작가의 소설로 읽는 연암 박지원을 읽노라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당시의 세태를 비롯해 선비들의 일상이 눈에 뜨인다. 그 가운데 연암 박지원이 쓴 글과 예전에 나온 글과의 비교가 되는데 연암이 즐겨 쓴 글을 연암체 또는 문체 반정이라고도 했다.
조선 후기 박지원을 비롯한 진보적 문인들이 정통적인 문체를 벗어나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를 구사해 글을 쓰자 정조 (正祖)를 비롯한 보수파가 이를 바로잡으려 한 것을 말한다. 박지원의 열하 일기가 당시 문단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읽히자, 이러한 패사소품체가 확산될 것을 염려한 정조는 명청(明淸) 소설의 수입을 금지하고 박지원에게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글을 지어 바치게 했다.조선 후기는 봉건사회가 해체되면서 여러 변화를 겪게 된다.
농촌사회가 분화되고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했으며 민중들의 의식도 변화했다. 이때 박지원을 비롯한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고금(古今)의 치세(治世)와 난세(亂世)의 원인, 제도개혁, 농공업의 진흥, 화식(貨殖) 등 사회경제적인 개혁방안을 토론했고, 중국여행 체험을 글로 써서 돌려보기도 했다. 홍대용·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정철조 등이 박지원의 집에 모여 밤을 새워 당시 현실문제를 논의하고 학문적·문학적 교류를 함께 했다. 그들이 특히 흥미를 가졌던 것은 청나라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읽는 것이었다.
그중 〈열하일기〉는 다채로운 표현양식과 독특한 문체를 구사해 당시의 화제작이었다. 박지원의 문체는 독특해 연암체(燕巖體)라고 불렸다. 연암체의 특징은 소설식 문체와 해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정통 고문에 구애되지 않고, 소위 패사소품체라고 불리던 소설식의 표현방법을 과감히 도입해 쓰고 현실의 생동하는 모습을 묘사했으며 시어(詩語)의 사용이나 고답적(高踏的)인 용사(用事)는 쓰지 않았다.
작가 주영숙은 영조의 손주인 정조가 자신을 얼마나 총애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비록 자신의 문체가 고풍스런 것과 달랐지만 이를 탓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맙게 여겼다. 그래서 정조가 승하했을때 가장 슬피 울었던 사람 가운데의 한명이었다. 주영숙은 당시의 일을 마치 현장에 잇었던 것처럼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문체로 표현했다.
연암은 60 이후에 약간의 벼슬을 했다. 인생 후반기에 호강을 한 셈이다. 그런데 그의 절친했던 친구들은 이미 세상에서 물러났다. 담헌 홍대용을 비롯한 많은 친구들,평균 수명이 얼마 되지 않았을 당시인지라 당연한 것같았지만 연암의 허무감과 세상사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미 범인과 확연히 다른 철학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주영숙 작가는 연암의 생각과 당시의 사회환경,주변 인물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으로 이 방대한 책을 시종일관했다.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작가 주영숙이 쓴 <소설로 읽는 연암 박지원>은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를 비롯해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을 우리말로 해석해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연암 박지원이란 한 시대의 인물에 대해 그가 쓴 글과 함께 인간적인 비중을 더 크게 다룬 것이 지금까지 나온 타 작가의 연암류의 글과는 확연하게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박지원이 연암이란 호를 갖게 된 저변의 이야기와 함께 그 당시의 심경과 연결이 되는 부분을 상세하게 다뤄서 그저 호가 연암인가보다 하는 상식적인 개념을 혁파하여 그 후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한편 인간적인 고뇌를 기술한 점은 여늬 작가가 감히 따를 수 없는 경지를 갖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연암의 절친했던 친구인 이희천이 영조에게 당시의 금서(禁書)인 청나라에서 유입된 <명기집략>을 소지했다는 죄로 참수형을 당하고부터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그해 박지원의 큰 누나도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사랑했던 가족도 주위에서 사라지고 친구들도 세상을 대부분 떴기에 인간적인 외로움을 느꼈던 박지원, 그해 강산유람을 할겸 협객 백동수와 함께 황해도 금천군,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연암 골짜기, 산은 깊고 길은 험해 하루 온종일 걸어도 사람하나 볼 수 없는 외진 곳,그곳 보봉산 화장사에 올라 동쪽으로 아침해를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하늘에 꽂힌듯 했다.박지원은 뭣에 홀린듯 시냇물을 올라가니 널찍한 땅이 눈에 밟혔고 평평한 언덕,수려한 산기슭, 하얀 바위,깨끗한 모래,깎아지른 듯한 검푸른 절벽,이때 뭐라고 종알대며 시냇물이 말을 걸어왔다.
백동수와 박지원은 마치 신선골에 온것같은 느낌이 들었고, 순간 박지원은 자신의 호를 연암이라고 부르겠다고 공포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영숙의 연암 이야기는 더 흥미롭게 전개 된다.횡적 종적인 인간관계와 연암의 재주를 시기한 권력자 홍국영과의 이야기가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작가 주영숙은 연암 박지원이 쓴 소설에 덧붙여서 새로운 문학세계를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는데 이 소설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정조 당시 홍국영이란 벼슬아치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연암 박지원을 심히 불편하게 생각했다.이 사람은 사관(史官)으로서 영조 당시 영조에게 매우 총애를 받았다. 영주가 죽자 그 손주 정조가 즉위하면서 부터 정조에게 사랑을 받고자 동덕회를 만들기도 했다.연암 박지원은 아무런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는데 정조의 반대편에 서있는 벽파로 몰려 홍국영의 눈에 난 것이었다.연암의 허물없는 친구 유언호가 하루는 연암을 찾아와서 궁궐에서 떠도는 소문을 알려주었다. 그에 의하면 홍국영이 연암을 해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이야기였다. 연암의 성격이 곧고 불의를 모르는 성격과 뛰어난 글재주가 홍국영의 비위를 상하게 만든 것이다.
작가 주영숙은 당시의 이야기를 넌픽션적인 입체감으로 박진감 넘치는 문장으로 표현했다.여기에 진장한 친구의 의리와 샇ㅁ의 올바른 방법론을 섞어서 글을 이어간 것은 작가의 필력이 이를 뒷바침한 것과 마찬가지이다.이렇게 되어 연암은 가족을 이끌고 멀리있는 연암골로 들어가 화도 피하고 모처럼만에 자유생활을 히기로 한 것이다. 연암 자신은 아무런 욕심 즉 벼슬에 대한 것과 물질에 대한 모든 것을 초월한 상태였다.연암이 연암골로 들어갔다가 개성 사람 양호맹의 별장으로 피신했는데 거기에 유언호가 와서 연암에게 화를 면하게 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원래 소인배들은 자신보다 학식이나 인격, 또는 벼슬이나 물질이 많으면 시기를하고 상대를 깎으려하는데 홍국영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유언호가 하는 말이 궐내에서 홍국영을 만나 연암의 현재 궁핍하고 재기 할 수 없는 입장을 이야기했더니 홍국영이 좋아하더란 이야기였다.홍국영의 눈치를 보니 다시는 연암을 해칠 기색이 보이지를 않더란 이야기였다.
작가 주영숙은 연암 박지원이 쓴 글 보다 연암 자신의 이야기를 좀더 리얼하게 밝혀서 읽는이들의 흥미를 더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흔하게 쓰는 말이 달인(達人)인데 작가 역시 달필(達筆)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소설로 쓰는 연암 박지원의 작가 주영숙은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 연암과 교유를 했던 친구와 인척관계 등등 웬만한 역사지식이 잇다면 알만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작가는 이들의 생몰연댈르 비롯해서 단편적인 삶의 모습을 정성껏 그려놓았다.그들은 대부분 요즘과 같은 다소 긴 수명의 나이가 아니라 50전후에 세상을 떴는데 그 시대에는 그 나이만해도 오래 산 축에 속했다.
그들은 대부분 요즘 흔히 말하는 좌익을 위장하기위한 명목만의 진보주의자들이 아니라 그 시대를 앞서가는 진정한 진보주의자들이었다.북학의를 쓴 박제가와 서유린, 이덕무 등등 이들과의 선비적인 교류를 자세히 밝혀놓아 그 시대의 풍류를 비롯해 멋스런 삶을 독자들과 공유를 하게 만든 점 역시 작가의 뛰어난 구상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백탑에 어린 푸른 그림자"란 항목에서 작가는 지금의 서울 종로 3가에 있는 원각사 10층 석탑과 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흩어져 살던 선비들의 모습을 상세히 기술해서 과거와 현재를 어우러지게 하는 영상적 효과까지 만들어냈다.
"여기를 중심으로 연암은 북쪽 재동과 계산동에 거(居)하였고 이덕무는 백탑 서쪽 대사동에,유득공은 동쪽 경행방에 살았다.그리고 홍대용은 남쪽 남산아래 저동에 살았고,박제가는 인근 묵동과 필동을 옮겨 다녔다."
서울 시내 특히 종로 3가를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틈에 과거에 살았던 이들 선비들의 숨소리를 느끼게 만든 점 역시 작가의 입체적인 필력이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그리고 작가는 한술 더 떠서 이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시적 용어를 발취해서 현대인들의 메마른 정서에 불을 지펴놓았다. 즉 이들이 당시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에 한 대화들이다.
주영숙 작가의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비롯한 여러편의 한문 소설도 당대에 빼어난 작품들이지만 그와 함께 그 시대를 살았던 친구들과 인척들, 그리고 그 시대를 이끌었던 정조 임금 역시 보통 수준의 인물들이 아니란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쓴 문장 표현이다.특히 정조 임금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통해했던 효자로서 자신의 슬픔을 생각해서인지 웬만해서는 살상을 하지 않은 문치의 군주였다. 문체반정(文體反政)의 두목이라고 연암을 지칭했지만 그 연암에게 글로인해 개인적으로 문책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글의 소재를 주어서 글을 짓게 만든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였다.그것은 아까운 인재를 곁에 두고 가끔씩 불러서 대화를 나누면서 군주와 신하를 벗어나 인간적 교감을 가져보자는 즐거움도 있었겠지만 쓸만한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과 마음을 주고 받은 사람들은 당대의 천재들이었다.요즘으로 치면 정관계의 높은 직을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는데 벼슬과 물질 보다도 자연과 친구, 그리고 술과 인정을 더 사랑했기에 욕심이 없던 사람들이었다.연암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그들은 박제가의 적형(嫡兄)(정실부인에게 낳은 아들)인 박제도, 서유린,이희정과 그 아우 이희명, 원유진과 이덕무 등과 당시 서울의 수표교(지금 장충단공원에 있음)에 달빛을 벗삼아서 술잔을 기울인 풍류를 엿볼 수 있는 글이 남아있다.
그것이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다>란 글이다.잠시 인용을 한다.
"다시 수표교에 당도한 우리는 다리위에 나란이 앉았다. 달은 바야흐로 서쪽으로 기울어 순한 붉은 빛을 띠고, 별빛은 더욱 흔들흔들하며둥글고 커지더니 마치 얼굴 위로 방울방울 떨어질듯 하였다.이슬이 짙게 내려 옷과 갓이 다 젖을 때쯤, 힌구름이 동쪽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살살 옆으로 뻗어가다 조용조용 북쪽으로 자리를 옮겼다.성 동쪽에 청록색이 더욱 짙어질때쯤, 맹꽁이는 눈 어둡고 귀먹은 원님 앞에 몰려온 난민들이 송사하는 소리를 냈고 , 매미는 일과를 엄히 지키는 서당에서 막상 시험일이 닥치자 소리를 크게 내어 글 외우는 소리를 냈으며 오로지 홀로 나서서 바른 말을 자기 소임삼은 한 선비처럼, 닭이 목청을 뽑았다."
연암의 문체는 섬세하면서도 빈틈이 없었고 웅장한 시상과 결코 쩨쩨하지 않은 마음씨, 그리고 인간사에 대한 부질없는 욕심을 생략한 그 기상, 그리고 여기에 들어간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형용사의 잔치는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의 생각을 침묵시키기에 이의가 없었다.
작가 주영숙의 센스있는 필치 역시 이에 버금가서 연암을 표현하는데 구태의연한 문체를 남발하고 그저 뛰어난 문인으로 비유한 다른 작가들과는 질을 달리한다.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그 시대나 이 시대나 인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존재하는 욕심과 위선같은 것을 연암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문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그것이 독자들에게 먹혀들어갈 것이다. 그저 연암을 당대의 천재이면서 글을 썼던 문인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세대들에게 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연암에게서 발견했다는 것은 큰 성과였을 것이다.
계곡(溪谷)에서 복닥거리면서 노는 사람들을 흔히 속인(俗人)이라고 부른다.높은 산에서 유유자적하는 사람들을 선인(仙人)의 경지에 다달었다고 한다.둘 모두 인간의 속성을 지칭한 비유이다.계곡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발도 담그고 물도 먹고 빨래도 하고 대소변도 함부로 한다.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에서는 계곡에서 노는 사람들을 지긋이 내려다보면서 그들의 행태를 관찰할뿐 속된 짓을 결코 하지 않는다. 주영숙 작가의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에서 그 주인공을 계곡에서 놀지 않고 산에서 유유자적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연암 자신도 스스로 신선이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산에서 내려다보니 하계에서 복닥거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치 개미떼 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실제로 호질(虎叱)에서 연암은 이런 속물적인 인간과 범을 내세워서 범이 인간의 조잡스런 행태를 질책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범은 초목을 먹지 않는다.벌레나 물고기도 먹지 않고 술따위를 좋아하지 않으며,새끼 기르는 조그만 짐승들을 건드리지도 않는다.산에 들어가면 노루나 사슴을 사냥하고 들로 나가면 말이나 소를 잡아먹되, 먹기 위해 비굴해진다거나 음식 따위를 놓고 다투는 일이 없다.범의 도야말로 어찌 공명정대하지 않다고 하겠는가.사람들은 범이 노루나 사슴을 잡아 먹을 때는 미워하지 않다가도말이나 소를 잡아먹을 때는 원수라고 떠들어 댄다.그게 다 노루나 사슴은 그다지 쓸모가 없고 소나 말은 쓸모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 하면서 범의 고고함을 인간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이번에는 인간의 야비하고 주접그런 행태를 범의 입장에서 이야기해준다.아니 연암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너희들은 소나 말들이 태워주고 일해주는 공로, 따르고 충성하는 정성을 다 버린다.날마다 푸줏간을 채우되 뿔하나 털하나 남기지 않는다." 하면서 욕심으로 인한 도적질,장수가 되기 위해 제 아내를 죽이는 일,메뚜기에게 먹이를 빼앗아먹고 누에에게 옷을 빼앗아 입고,벌을 가두어 꿀을 빼앗아 먹고, 심지어는 개미알을 젓갈을 담가 먹기도 한다고 질책을 한다.이글에서 보듯 연암의 철학은 세상만물에 대한 공평한 애정과 목숨의 경건함,그리고 인간 차원이 아니라 신선의 눈으로 인간세상을 내려다 보는 안목이 매우 엄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 그에게 인간이 만들어서 인간을 다스리기 위한 벼슬이란 물건(?)을 탐탁하게 여길리 없었던 것이다.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 연암은 관리들 가운데 부정한 방법으로 곡식을 횡령한 자들이 많은 것을 알고 그들을 직접 문책하지 않고 그들이 곡식을 배상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어 부하들과 그 가족들을 무사하게 지킬 수 있었다.그것은 웬만한 공명심이 잇는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낼일이었다.마침내 임기가 되어서 현감자리를 물러나고 그 몇년후 고을의 노인들이 연암에 대한 송덕비를 구리로 주물해서 세우려하지 노발대발, 절대 금지했다는 대목에서 그의 신선같은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신선에게 송덕비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침내 그의 생애에 마지막 벼슬인 양양 부사 시절,그곳 역시 아전들의 부정부패가 심해 고을의 곳간이 텅텅 비어있었다.연암은 아전들에게 자신의 녹봉을 주어서 그들에게 경각심을 안겨주었고 그들로 하여금 곳간을 채워놓게 한 사람이다.
연암이 나이들어 양양부사를 그만두고 집으로 온후 모임자리에서 그에게 양양부사로 있을 때 얼마나 재미있었느냐고 사람들이 물었다. 연암은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일만 이천냥을 받았다고 했다.사람들이 깜짝 놀라 다시 물었을 때 연암은"바다와 산의 빼어난 경치가 일만냥이고 녹봉이 2천냥이오"했다.
주영숙 작가는 연암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그의 자연주의적인 신선함을 그 시대의 현장으로 몰입해 잘 이끌어냈다.일반인들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연암에 대한 상식, 열하일기와 양반전 허생전과 같은 다소 해학적이면서 현실 비판적인 글을 전문적으로 쓴 작가가 아니라 그 시대와 그로부터의 과거, 그리고 훗날 우리들이 살고있는 이 시대에 진정 찾아야할 인간의 품성을 문장 하나하나에 각인(刻認)시키는데 성공을 한 것같다.
대저(大抵) 생각을 문자로 옮긴 것이 글이라고 한다. 글에는 문학을 비롯해 모든 인간 삶의 기본이 되는 것들이 함께 한다.문학 철학 신학 종교학 등등 많은 학문들이 글로부터 비롯이 된다.작가 주영숙이 쓴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은 우리보다 적어도 2백년정도 먼저 살다간 사람들과 함께 주인공인 박지원과의 종적 횡적인 관계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글이다.또한 그 시대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정치상황 등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해서는 되지 않는다.작가가 이번에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의 경우 여기 하나 덧붙이는 것이 있으니 요즘같이 주인공이 한글로 글을 썼다면 문제는 쉬운데 그 당시 박지원이 쓴 소설은 한자어로 되어 있었다.당시 한자어를 잘 해득할 줄 아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되었겠는가. 그후 사람들이 그가 쓴 한자를 우리 글로 표현하여 선보였는데 그것이 과연 박지원이 쓴 글의 올바른 해석이었는지는 그 글을 쓴 사람 자신만이 알고 있으리라.
또한 한자로 표기된 글에 무슨 해학(該謔)과 골계(滑稽)가 들어있어 이를 눈치챌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흔히 당시의 이름있는 사람들을 소설화 시킨답시고 자신의 주관적이고 속좁은 생각을 소설 여기저기에 꿰맞추어서 독자들을 어렵게 만들거나 하는 작가들이 더러있는데 비해 작가 주영숙의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은 처음부터 그 준비작업이 매우 탄탄했다고 볼 수 있다.
한문자를 해득할 대옥편(大玉編)과 용어를 알기 위한 대국어 사전, 그리고 각종 예화를 그 시대에 맞게 풀이할 사서오경 등등의 고전을 책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찾아 읽으면서 연암에 골몰했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독자들에 대한 의무가 매우 성실하다는 판단이 선다.작가는 연암을 읽어가면서 또는 해석해가면서 그의 천재적인 여러점들을 간파했고 이런 천재와 장시간 동안 무언의 대화를 나눌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고 했다.그런데 문제는 연암이 쓴 글과 연암 자신을 어떤 방법으로 묘사하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연암의 한문시를 사설시조(辭說時調)형식으로 하는데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사설 시조는 충분히 그가 쓴 글을 해학적으로 풀이할 수가 있고,읽는이들을 만족시킬 수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사설시조에는 음률이 있고 박자가 있고 장단을 맞추는 고수(鼓手)가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 주영숙의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은 그 문장에 흐름이 막히지 않고 유머와 멋이 깃들여져 있다. 연암 박지원이 69세에 세상을 떴을때까지의 생애를 비롯해 우리에게 알려져있지 않은 푸짐하고 서민스런 이야기를 주영숙은 마치 책비(책을 읽어주는 사람)처럼 이야기해주고 있다.
글이나 사건 같은 것이 시대를 달리해서 옮겨가는 것을 회자(膾炙)란 말로 표현한다면 이번 주영숙위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은 아마도 그런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생명이 긴 책이란 시대를 달리했어도 우리 시대의 올바른 생각을 전할 수 있는 책이다.연암이 쓴 글의 생명이 길어서 오늘날까지 유전이 되고 이를 받아서 작가 주영숙이 뒤를 바쳤으니 참으로 연암과 작가는 좋은 인연을 갖고 맺어졌는지 모른다.
참고로 작가 주영숙은 글에 대한 선천적인 재능도 월등하지만 후천적인 노력형이라고 할 수 있다.뒤늦게 학업에 전념해서 학사 석사 박사, 한국화의 명인으로서 시와 소설을 능란하게 지을 수 있는 우리 시대에 몇 안되는 재원(才媛)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글을 마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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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삼 감사드려요.